눌지왕 9년은 청우(靑牛:을축425)의 해이다.

 

형산(兄山) 사람이 암 호랑이를 처로 삼아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둘은 대략 사람과 비슷하였다.

 

밤이면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와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고

낮이면 암굴 속에 몸을 숨겼는데,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공(虎公)이라하며 그에게 제사를 올렸다.

 

하루는 호공(虎公)이 암호랑이를 타고 가량촌(加良村)에 이르러서는

호랑이에게 명하여 촌주(村主)의 가축을 잡게 하였다.

 

촌주의 딸이 측간에 가려하다가 그것을 보고 도망쳐 들어갔는데

호공(虎公)이 뒤쫓아 들어가 그 딸을 간음하니 촌주(村主)는 막을 수가 없었다.

 

호공(虎公)이 이에 촌주(村主)에게 명하여 딸의 방문을 닫지 못하게 하고

매일 밤 와서 간음하였다.

 

몇 달이 지나서 임신을 했는데 감히 외부에 말하지 못했다.

 

촌주가 근심하며 마음을 쓰자 그 노(奴)가 알고는

호공(虎公)이 딸의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호공(虎公)의 모습으로 꾸미고 나가서 암호랑이를 탔다.

 

호랑이가 보고 그를 이상히 여기더니 등에 업고는

산 비탈아래에 이르자 마치 취(取)하자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다.

 

노(奴)가 마침내 호랑이와 교합하니 호랑이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애호했다.

 

등에 태우고서 굴(穴)에 돌아오자 세 아들이 그를 잡아먹으려 하므로,

호랑이가 곧 업고서 되돌아가 다른 굴에 그를 두었다.

 

호랑이가 떠나려고 하는데 노(奴)가 그를 만류하니 호랑이는 나갈 수가 없었다.

 

호공(虎公)은 암호랑이가 이미 돌아간 것을 보고는 다시 여자에게 들어가 묵고

사위(女婿)가 될 것을 청하였는데 딸도 역시 그를 원하였다.

 

이튿날 밤에 노(奴)가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와 말했다.

 

“내가 이미 호공(虎公)이 됐으니 옛(舊) 호공(虎公)은 잡아 죽여야 할 것이다.”

 

촌주의 딸이 이 말을 듣고는 호공(虎公)과 더불어 산위로 도망쳐서 떠나버렸다.

 

이로부터 가량촌(加良村)에는 호랑이의 우환(虎患)이 없어졌다.

 

몇 년후에 촌주가 죄(罪)를 짓고는 산으로 들어갔는데

밤에 한 인가에 불빛이 있어 들어가 본즉

사람의 자식과 호랑이 새끼가 뒤섞여 그곳에 살고 있었다.

 

놀라서 물러나오려고 하자 한 여자가 앞을 막아서는데 곧 그 딸이었다.

 

딸이 말하기를 호공(虎公)과 동거한지 삼년에 하루는 암호랑이의 거처로부터

암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세 아들이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반쯤 사람 비슷한 것이 커감에 따라 이미 정(情)을 알고는

딸을 핍박하여 상합(相合)하였는데 호공(虎公)은 그를 금할 수 없었다.

 

작은 놈도 몇 년이 되자 또한 그와 같이하여 자식을 낳으니

사람과 호랑이가 서로 반반이었다.

 

호공(虎公)의 아들로 사람과 닮지 않은 것은 옛 굴에서 홀로 살았다.

 

암호랑이가 때때로 노(奴)를 버리고 와서 서로 교합하자

노(奴) 역시 그 자식 호랑이들과 동거(同居)하며 살았는데

큰 산의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촌주가 말하였다.

 

“나는 죄를 짓고 도망쳐왔는데 네 두 호랑이 남편으로 하여금

내 가족을 업어올 수 있게 하여 같이 살면 어떤가?”

 

딸이 기뻐하며 그 새끼로 하여금 나가서 울부짖게 하자

좀 있다가 두 호랑이가 호공(虎公)을 업고 당도했다.

 

딸이 이에 두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가더니

한참 지나서 촌주의 처와 자녀들을 업고 왔다.

 

벌목을 하고 집을 세웠다.

 

촌주(村主)가 두 호랑이를 타고 산을 내려가 촌(村)안의 미녀들을 약취해 갔다.

 

모두 첩을 삼아 자녀를 낳으니 두 호랑이 역시 그를 범하여 호아(虎兒)들을 낳았다.

 

잡혀온 여자가 38명이었고,

촌(村)의 남자 또한 잡혀가서 노역을 행하는 자가 7명이 있었다.

 

산 아래 사람들이 호촌(虎村)이라 불렀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우림군(羽林軍)에 명을 내려 그를 토벌케 하자

 

총덕(寵德)이 말했다.

 

“호괴(虎怪)는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큰 우환이 안 된다면 가히 양생함으로써 그 개꼬리처럼 변함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니,

 군사라면 오히려 쓸 수 있게 됩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호촌(虎村)을 차단하여 들어가지 않도록 경계시켰다. 

 

 

 

 

 

5월에 <졸지卒知>가 졸(卒)하자 <복수福壽>가 <취희吹希>의 서형(庶兄)인

<탕배湯倍>를 계부(繼夫)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탕배湯倍>라는 자는 <복수福壽>의 침비(枕卑)인 <탕아湯兒>의 소생이었다.

 

<취희吹希>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으니 나이가 18세였고 <복수>는 나이가 35세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으려하자 <하기河期>가 말하기를

 

“그 하고자하는 바에 따라줘야 될 것입니다.”

하므로 마침내 그를 허락하였다.

 

 

 

10월에 왕녀 <오사지烏士只>를 <다감多甘>의 처로 하였다.

 

금관(金官)사람 <호수好樹>등이 <좌지坐知>의 종제 <남南>을 세우고자하여

난을 일으켰다.

 

왕이 <총덕寵德>을 파견하여 그를 토평(討平)하였다.

 

애초에 <남南>은 <졸지卒知>와 함께 모두 <복수福壽>와 통정하였다.

 

<좌지坐知>의 생시(生時)에 (복수가) <남南>의 아들 <돌희乭希>를 낳았는데,

<남南>은 자신이 부군(夫君)이 될 수 있다고

여겨 음으로 <좌지坐知>를 해치려고 하자 <복수福壽>가 그를 제지하였다.

 

그리고는 <졸지卒知>가 온화하고 공손하므로 그를 계부로 삼았다.

 

<남南>이 불평을 품고 그 도당(徒)으로 하여금 <졸지>에게 독(毒)을 올리게 하자

<복수>가 알고는 그를 물리치도록 명했다.

 

이에 <남南>을 불러 그를 위로하며

 

“내가 너를 세우고자하나 <졸지卒知>는 곧 망부(亡夫)의 포제(胞弟)이니 어찌하랴.

<졸지>는 (몸이) 약하여 오래갈 수 없으니 네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하고는 명을 내려 <졸지卒知>와 함께 서로 번갈아 총애를 받도록(受寵) 하였다.

 

<남南>이 이로써 교오(驕傲)해져서 정사를 제멋대로 하자

<복수>가 마침내 장군 <산아山兒>를 끌어들여 심복을 삼고는

<남南>을 사로잡아 유배를 시켰다.

 

이에 앞서 <호수好樹> 또한 내위(內衛)로써 <복수福壽>를 증(烝)하고는 무례하므로

<복수>가 노하여 그를 유배를 시켰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무리를 끌어 모아 변(變)을 기다리다가 이에 이르러

<탕배湯陪>가 난(亂)을 일으켰다고 소리 높여 선동하며 밤을 틈타 그를 습격했다.

 

당시 <복수福壽>는 <탕배湯陪>와 함께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인덕(仁德)이 힘을 내어 <취희吹希>를 업고 이르러서 그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다.

 

<인덕>이 곧장 들어가서 그를 (깨워) 일으키자

<복수福壽>가 알몸으로 <탕배湯陪>를 업고서 달아났다.

 

<탕배湯陪>의 어미인 <탕아湯兒>가

그 사부(私夫)와 함께 기병(騎)을 이끌고 들어오자

 

<복수>가 곧 <탕아>의 옷을 취하여 입으며 말하기를

 

“나는 비록 알몸이나 남편아이가 별 탈이 없으니 좋구나!”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웃었다.

 

<산아山兒>가 <남南>을 맞이해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복수福壽>등이 (도성을) 빠져나와 국경에 이르렀다.

 

<총덕寵德>이 이에 <호수好樹>를 쳐부수고 <남南>을 잡아와 헌상하자

(왕이) <복수福壽>등에게 도성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복수>가 군대의 주둔(留軍)을 청하자 그를 허락하였다.

 

 

 

<좌지坐知>는 금관가야 제6대 왕으로 재위 407-420이다.

<취희吹希>는 금관가야 제7대 왕으로 재위 421-450이다.

<복수福壽>는 신라女로 408년에 <좌지坐知>의 妃가 되고 

<인덕仁德>은 신라女로 422년에 <취희吹希>의 妃가 되었다.

 

고구려의 영락대제가 금관가야를 정벌한 후 금관가야는 그 세가 급속히 약화되어

신라의 왕녀를 받아들이고 거의 신라의 부마국으로 떨어지게 된다.

 

425년 <호수好樹>와 <남南>이 내란을 일으키자 신라의 <총덕寵德>이 난을 평정하고

신라군이 금관가야에 주둔하게 된다.

 

이 시기 가야 소국들은 금관가야보다는 대가야와 연합하게 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