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대제15년{AD428}무진,

 

3월, <비유毗有>가 나라를 순시하여 백성을 진휼하고,

왜의 사신 50명과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 왜의 딸을 맞이하였다 한다. 

<장수대제기>

 

 

비유2년 봄 2월에 왕이 4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왜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상좌평 <여신餘信>이 사망하자 <해수解須>를 상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十二年 三月扶余毗有迎野王女韋二娘至月奈
3월, 부여(扶余)의 비유(毗有)가 야왕(野王)의 딸 위이랑(韋二娘)을 마중하기 (위해) 월나(月奈)에 이르렀다.

<남당유고 눌지천왕기>  

 

 

 

백제의 <비유毗有(412-455)>왕이 427년에 즉위하자

야마토의 <이중履中(369-432)>천황은 그의 딸을 사신 50명과 함께 백제로 보낸다.

 

 

 

- 삼국사기가 기록한 백제와 왜의 관계 

 

 

신라왕실의 후예인 김부식이 12세기 중엽에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신라와 왜의 관계 기사가 신라본기에 50여 개,

열전에 3개(김유신, 석우로, 박제상)가 있는 반면,

광개토경 호태왕비가 발견되어 고구려와 왜의 관계가 밝혀졌지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왜의 관계 기사는 단 한 개도 없다.

 

 

삼국사기의 그러한 태도는 고구려와 왜의 접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록할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누락시킨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백제와 왜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진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 아신왕(阿莘王)

    

6년(397) 5월조: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11년(402) 5월조: "사신을 왜국에 보내어 큰 구슬[大珠]을 구하였다."

 

12년(403) 2월조: "왜국의 사자가 오자, 왕이 이를 맞아 위로함이 특히 후厚하였다."

 

 

 

☆ 전지왕(腆支王)

   

즉위전기前記 및 즉위년(405)조:

 

(선왕 재위)…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가 있다가,

14년에 왕이 돌아가니 아신왕의 바로 다음 동생인 <훈해訓解>가 섭정을 하며

태자의 환국還國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내 동생인 <설례>가 <훈해>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왜국에 있던 <전지>가 부왕의 부음(訃音)을 듣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며 귀국하기를 청하니, 왜왕이 병사 백명으로써 호위하여 보냈다.

 

국경에 이르렀을 때 한성(漢城)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고하기를 … …

전지는 왜인을 머물게 하여 자위(自衛)하며 해도(海島)에 의거하여 기다리니

국인國人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 즉위케 하였다.

   

5년(409)조: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夜明珠)를 보내니,

왕이 그 사신을 특별히 대우하였다.

   

14년(418)조:

 

 여름에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금(白錦) 10필을 보냈다.

 

 

☆ 비유왕毗有王

    

 2년(428) 2월조: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종자(從者)가 50명이나 되었다."

 

     

 

이후 약 220년간 왜국과의 관계 기사는 全無하다.

 

 

☆ 의자왕(義慈王)

     

13년(653) 8월조: "왕이 왜국과 우호를 통하였다."

    

후기後記 661년조:

 

무왕(武王)의 종자(從子){조카} <복신福信>이

일찌기 병사를 거느린 경력이 있는데,

이윽고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일찌기 왜국에 인질로 가 있던 예전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 …

    

후기 663년조:

 

<유인궤劉仁軌>와 별장(別將) <두상杜爽> 및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과 양선(糧船)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입구에서 왜인을 만나 4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배 4백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닷물도 빨개졌다.

 

왕 <부여풍扶餘豊>이 몸을 빼내어 달아나니 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

혹은 고구려로 갔다고도 한다. …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지수신遲受信>만이 홀로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한다면 백제는 태자를 왜에 인질로 보내면서

왜와의 통교를 시작하여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할 즈음까지

왕자를 왜에게 인질로 보낸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백제가 군사적인 면에서 왜에게 종속된 것처럼 기록하였다.

 

백제의 근구수왕 시절에 야마토의 무인들이 동원되어 고구려를 물리친 사실과

전지왕때 <왕인>이 야마토로 간 사실과 칠지도를 보낸 사실,

이후 성왕 시절에 야마토에 전한 백제의 문물과 불교 전래등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일체 기록하지 않고 있다.

 

백제에게 유리한 사실은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침묵이 임나일본부설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김부식의 원죄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