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왕 17년은 수계(水鷄:癸酉433)의 해이다.

 

2월, <섬신蟾神>이 <도광道光>을 계부(繼夫)로 삼으니 곧 그 서제(庶弟)였다.

 

<도광道光>의 어머니인 <수로首老>란 자는 (눌기)왕의 서매(庶妹)였으니

<내류內留>태태궁(太太)의 소생이다.

 

<섬신蟾神>의 아버지 <사가舍訶>가 그를 아내로 맞아 <도광道光>을 낳았는데

<삼광三光>이 병몰(病沒)함에 이른 까닭에 그가 뒤를 이은 것이다. 




4월, <미해美海>公이 졸(卒)하니 나이 41세였다.

 

공(公)은 전아(典雅)하고 청수(淸秀)하였으며 사람들을 아끼고

선비(士)에게 몸을 굽힐 줄 알았다.

 

일찍이 <실성實聖>의 명으로 야인(野人)에게 사절로 가서는

십수년이 지나 비로소 돌아왔다.

 

그 왕녀 <보미宝美>가 공(公)을 사모하여 딸 <나해羅海>를 낳고서 도망쳐오자,

<제상堤上>公의 양녀로 삼아 침궁(枕宮)에 속하게 했는데,

공(公)은 감히 스스로 차지하지 않고 왕(王) 및 <복호卜好>에게 바쳤으니,

무릇 기쁨과 걱정이 있으면 그를 함께 하였다.

 

공(公)은 야인(野人)들의 배와 노(舟楫)의 이로움을 깊이 알아서

우리 함선(艦)을 보수함으로써 그를 대적케 하였다.

 

야인(野人)들이 허다히 투항해 왔는데

모두 공(公)의 신하에 소속시켜 쓸모 있게 함으로써 많은 공적을 세웠다.

 

이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니 왕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 하고 싶은 바를 묻자

 

공(公)이 가로되

 

“신제(臣弟)는 죽어서 나라를 위하는 영령으로 해상(海上)을 보호하리니

형왕(兄王)은 슬퍼하지 마소서.”

하였다.

 

왕이 마침내 그를 서불감(舒弗邯)으로 추증하고 태공(太公)의 예로 장사하니

중외(中外)가 모두 애석(哀惜)해 마지않았다.  


 

7월, <비유毗有>가 그 아우 <공가부孔嘉夫>를 보내어 미녀 7인을 바치고 말하기를

 

“어린 조카(小侄)가 새로 서서 상국(上國)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삼가 누이를 바침으로써 구궁(九宮)을 채울 수 있다면 심히 다행이겠습니다.

원컨대 묵은 감정을 풀고 서로가 돕고 보호하여

북쪽 오랑캐(北虜)를 막음이 어떠하신지요?”

하였다.

 

왕은 야인(野人)을 정벌하고자 한 까닭에 그 화친을 허락하였다.  

 

8월, 궁인(宮人) <선명仙明>을 공가부(孔嘉夫)의 처로 삼으니,

곧 실성(實聖)의 딸이었다. 


 

9월, 곡식이 대풍이었다. 


부여(扶余)의 의사(醫) <진아眞兒>에게 명하여 왕자 <보신宝臣>을 가르치도록 했다. 


천지(天地)와 사악(四岳)에 제사를 지냈다. 


<파호巴胡>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아 포(석)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10월, <공가부孔嘉夫>가 <선명仙明>과 더불어 (부여로) 돌아갔다. 


<등흔登欣>을 내궁사인(內宮舍人)으로 삼았다. 


전함(舟艦)을 대거 제조하도록 명하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