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황해도 평산(平山) 다지홀(多知忽)의 다지왕(多知王)을 왜국에 파견하여

근구수왕 이래 경영해온 일본 영토를 고구려로부터 다시 회복하려고 하였다.

 

다지홀은 한홀이라고도 불렀고 아신왕때에 세워진 한성이다.

 

일본서기에서 전지왕의 누이로서 일본에 시집간 신제도원(新濟都媛)이란 공주는

당시 백제의 새수도인 신제도(新濟都) 다지홀(多知忽)에서 출가한 것이다.

 

황해도 평산의 태백산성은 부여의 부소산성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규슈의 구류미 고구려성이 강력하여서 다지왕은 구마모토에 상륙하여

안라국 고구려와 대치하였다.

 

오랜 전쟁으로 야마토국은 병력과 물자의 손실이 많았지만,

고구려도 규슈는 워낙 본국과 거리가 먼 곳이라

소수정예만으로서 장기전이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때 침류왕의 아들 <다지多知(380-438)>왕은

410년 왜찬왕(倭贊王) 즉위를 선언하여 송나라와 교류하고 외교적 지원을 받고,

야마토의 인덕천황과 <이중履中>의 지원을 받는다.

 

411년 제작된 다지로대왕(多支鹵大王) 명문(銘文)이 새겨진 대왕검(大王劍)이

일본 동경 북부 기옥(奇玉)현 도하(稻荷)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다지로대왕이 천하를 통치하도록 돕기 위해

대대로 검을 만드는 장인이 만든 백련검이었고,

검신에는 금(金)으로 상감(象嵌)하여 글씨를 새겨놓았다.

 

다지로대왕의 지배 시기를 금석문으로 확실하게 가르쳐준다.

 

규슈의 구마모토 북쪽 강전 선산고분(江田船山古墳)에서도

은(銀)으로 글씨를 상감한 명문 다지로대왕검이 또 출토되었다.

 

금으로 만든 백제식 금관, 관대, 허리대, 그리고 금동 신발,

금동 거울, 금동 마구에 더하여 금으로 용무늬를 상감한 대왕검,

은도금 대도도 같이 나왔으니 백제왕급의 유물이다.

 

규슈 왜국과 대화조정이 서로 대왕을 칭하더라도

411년에 중국과 교류했던 왜찬왕은 이 규슈의 다지로대왕일 수밖에 없다.

 

 

 

<강전산 고분 출토품 : 다지로 대왕검을 알려주는 은상감 명문검>

 

 

인덕천황이나 이중천황의 천황이라는 호칭 자체는

8세기에 생겨나서 그때 추존된 것이고

그들 생전에는 그저 왕의 의미인 명존(命尊), 즉 미코토로 통칭되었다.

 

다지로대왕은 키가 9척에 이빨이 1촌이 넘었고,

일본서기에는 반정천황(反正天皇)으로 기록되었다.

 

왜찬왕이 고구려 고우라성을 압박하는 가운데,

신라가 고구려를 지원하고 윤공천황의 지병을 치료하여 주었다.

 

신라왕자 김무(金武)가 후쿠오카시에 조랑(早良)를 건설하여 김무(金武) 성을 세웠다.

 

뒤에 김무를 아나호왕자(穴穗部皇子)라고도 했다.

 

아나호부는 아래가 아니라 안(內, 穴)을 의미한다.

 

<고진>왕자는 둘째아들 조일풍성(朝日豊盛)을 고우라성에 남기고

<목리경木梨輕>태자와 동진한 것이다.

 

419년 큐슈의 <고진>왕이 담로도에서 대화조정의 인덕왕(仁德王)과 싸워

인덕왕을 전사시킨다.

 

고진왕의 중왕자가 본주 난파성으로 들어가서 불을 지르고,

대화에서 인덕왕의 태자인 이중왕(履中王)은 중왕자에게 쫓겨가는데,

왜찬왕이 중왕자(仲皇子)를 죽이고 <이중>왕을 대화조정의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후로 이중왕이 고구려 고진왕과 결맹하여서 구로히메(黑媛),

즉 고구려여인을 왕비로 삼았다.

 

구로히메는 이중왕비가 되기 전에 고구려 중왕자와 결혼했던 여자였다.

 

다지로대왕이 중왕자를 죽인 댓가로

중왕자의 고구려비를 이중왕이 정식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424년 왜찬왕은 이중왕을 축출하여 담로도로 보내고,

대화조정의 천황을 겸하여서 반정(反正) 천황이 되었다.

 

그러자 고구려 목리경태자가 이중왕비 구로히메를 도로 뺏어가 버렸다.

 

432년에 마침내 고진왕자가 대화로 들어가서 윤공천황(允恭天皇)이 되었다.

 

반정천황은 후퇴하여 규슈 구마모토(熊本)로 돌아갔다.

 

윤공천황이 대화 조정에 들어가자 나라현에 고안산(高安山)이 생긴다.

 

고안(高安)은 광개토대왕의 이름이다.

 

이후 고안씨(高安氏), 고안촌주(高安村主)도 생기는데

신찬성씨록 등을 통해서 고구려계로 알려져 있다.

 

윤공천황 <고진>이 광개토대왕 <고안>의 아들이기에 고안산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생구군(生駒郡)도 생겼는데 고구려인이 사는 곳이 된다.

 

이 생구군 고안정(高安町)에 고안산이 남아 있다.

 

윤공천황이 도읍했던 난파에 난파련(難波連)이라는 고구려성씨도 생겨나서

광개토왕 후손이라고 하였다.

 

윤공천황의 궁터였던 법륭사에 고구려 화가 담징이 소나무 벽화를 그려넣기도 했다.

 

윤공천황은 단군좌신사(甘樫坐神社)를 세우고,

신사에 대신들을 불러들여서 뜨거운 물로 고문하는 맹신탐탕(盟神探湯)을 하여서

귀족들의 씨(氏)와 성(姓)을 다시 세웠는데

고구려계 도래인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다.

 

438년 왜찬왕 다지로대왕이 규슈 구마모토에서 죽는다.

 

윤공천황은 즉위 5년에 반정천황의 빈소를 차린다.

 

무려 5년간 상을 치른 것이 아니라 반정천황을 규슈로 밀어내고

5년이 지나서야 반정천황이 서거한 것이다.

 

반정천황 서거는 고분 묘비에서 438년 7월이니,

윤공천황은 433년에 즉위한 것이다.

 

그해 윤공천황은 송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왜진왕(倭珍王)을 자처하고,

더하여 백제등 7국제군사 호칭을 청한다.

 

그러나 백제는 비유왕이 따로 대장군 백제왕으로서 송나라 책봉을 받았으므로

윤공천황, 왜진왕은 백제를 제외한 왜등 6국제군사 안동장군만 받는다.

 

그때 송나라 사절로 갔던 고구려계 수하 13인이 송나라의 장군 책봉을 받았다.

 

왜찬왕은 규슈 강전 선산고분(江田船山古墳)에 묻혔다.

 

이 고분에서 출토된 명문검은 은(銀)으로 글씨를 상감(象嵌)하였고

내용은 다지로 대왕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외 금은으로 상감하여 용문양을 새긴 환두대도, 은으로 꾸민 환두대도도 있었다.

 

그리고 백제식 금관, 금동 신발, 금도장 철경 등등이

여러 가지 금장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반정천황 고분은 대화 오사카에도 남아 있다.

 

한 사람의 고분이 양쪽에 생겨나는 이유는, 그곳의 통치를 시작할 때에,

일찍이 고분이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규슈와 대화는 경쟁적으로 더 크게 고분을 만들어서

서로 지역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반정천황은 담로궁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백제 분국왕 호칭인 담로왕 출신이라 고려되고,

그의 아들 재왕이 담로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다지로대왕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금동관은 백제와 가야,

규슈의 백제왕 고분에서 보이는 한국형 갑옷과 금동관이라 할 수 있다.

 

 

구마모토 아래 구마군(球磨郡)에는 재원고분(才園古墳)이 있다.

 

현재 고분을 사이존(才尊)이라고 읽는다.

 

뒤에 존(尊)은 당시 왕를 뜻하는데,

우리말로 재왕(齋王)이며, 미혼으로서 신을 모시는 왕의 딸이다.

 

반정천황 딸인 도부랑랑녀존(都夫良郎女命)이 신을 모시는 재왕(齋王)이었다.

 

재원 고분 출토품 사진에 칼이 많은데,

여성 유골이 나와서 비미호 고분으로 추정되어 온 우사시(宇佐) 축산(築山)고분에서도 11자루의 철검이 나왔으므로 칼의 부장(副葬)으로는 남녀를 구분할 수는 없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산도고분(産島古墳)에서 금관과 거울, 검등이 출토되었다.

 

반정천황의 아들 재왕(財材)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재산(財産)이라는 말에서 재왕(財)의 산(産)도(島) 고분이 된다.

 

이 무렵에 금은과 주옥으로 상감한 동경이나, 금도금한 철경,

금상감 도검 등을 보면 감탄스럽다.

 

 

<구마모토 재원고분. 왜찬왕의 후예 재왕의 고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