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4년{AD436}병자,

 

4월, 가 <풍홍馮弘>의 백랑성(白狼城)을 쳐서 빼앗았다.

 

이에 용성(龍城)은 큰 혼란에 빠졌고,

짐을 꾸려 지고서 동쪽으로 내빼는 이가 수십 리를 연이었다.

 

<양이陽伊>가 또 찾아와 구원을 구걸하였다.

 

<양이陽伊>의 선대가 우리나라의 사람이었던지라,

상은 <갈노葛盧>와 <맹광孟光>이 2만병을 이끌고 용성(龍城)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서, 낡은 옷을 벗겼으며,

그곳의 무기고를 접수하고 병장기를 다듬어서

군사들에게 병장기를 나누어 주었으며, 성 중을 대대적으로 초략하게 하였다.

 

 

5월, <풍홍馮弘>은 자신의 궁전에 불을 질렀는데

그 불은 열흘이 되어도 꺼지질 않았으며,

부인에게는 명령을 내려 갑옷을 입고 그 안에 있게 하였다.

 

<양이陽伊>는 정병을 거느리고 성 밖에 있었고,

<갈노葛盧>와 <맹광孟光>의 기병은 궁전 후방을 진압하여 안정시키며

길을 따라 전진하였는데 앞과 뒤의 거리가 80 리를 뻗쳤었다.

 

<풍홍馮弘>을 평곽(平郭)에 있게 하였다.

 

의 사자인 산기상시 <봉발封撥>이 찾아왔다.

 

<봉발封撥>은 <봉시封時>의 아들이었는데, <풍홍馮弘>을 내어달라고 요청하니,

 

상이 이르길;

 

“<풍홍馮弘>이 비록 에게는 죄를 지었다하여도,

나의 신민이 되어 있으니, 그를 죽게 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는 끝내 화평을 깨고는 롱우(隴右)의 기병으로 침입하려 하였다가

낙평왕(楽平王)<비>가 간하여 그만두었다 한다.

 

<유혈劉絜>이 롱(隴)땅의 백성들을 새로이 부용하게는 못하겠다고 하며

졸지에 <비>를 몰아내었다.

 

조국이 설사 둘로 갈라진다 하여도 힘껏 싸우기가 불가하였다 함은

농경과 잠사를 진작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고 풍족하여지기를 기다렸다가

연후에 다시 도모함이 마땅하였음이다. 

 

겨울에 <풍홍馮弘>을 북풍(北豊)으로 옮아가게 하였다.

<장수대제기>

 

 

 

(436년)2월 무자일(6일)에

 

燕王{북연왕 馮弘}이 사신을 파견하여 魏에 들여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시자(侍子){풍홍의 태자를 인질로 보내려고 함}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魏의 主君은 허락하지 않고

장차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임진일(10일)에 사자(使者) 10여명을 파견하여

동쪽에 있는 고구려 등 여러 나라에 가도록하여 이를 알리고 깨우쳤다.

{북위가 북연을 공격할 때 북연을 돕지 말라고 경고한 것임}

 

 

3월 신미일(20일)에

 

魏의 평동장군 <아청娥淸>,안서장군 <고필高弼>이

정예의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燕을 정벌하는데

평주자사 <탁발영>이 요서의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과 회합하였다.

 

 

여름 4월에

 

(북)위의 <아청娥淸>, <고필高弼>이 燕의 백랑성을 공격하여

그곳에서 승리하였다.

 

고구려가 장군 <갈로>, <맹광>을 파견하여 무리 수 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陽伊>를 따라와서 화룡{북연의 수도}에 도착하여 연왕을 영접하였다.

 

고구려는 임천에 주둔하였다.

 

燕의 상서령 <곽생>이 백성들이 옮겨가기를 꺼리는 것을 이용하여

성문을 열어서 (북)위의 군사를 받아들이려 하였지만,

魏人들이 그것을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마침내 군대를 챙겨서 연왕을 공격하였으나,

왕이 고구려의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는데,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갈로> <맹광>이 성에 들어오자,

군사들에게 해진 군복을 벗도록 명령하고,

燕의 무기고에 있는 날카로운 병장기를 가져다가 주고

성안에서 크게 약탈하였다.

 

 

5월 을묘일(5일)에

 

연왕이 용성에 있는 현재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우니, 불이 10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도 갑옷을 입고 안에서 거주하게 하고,

<양이陽伊> 등이 정예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행영 밖에 있었고,

<갈로> <맹광>이 기병을 거느리고 뒤쪽에 있었는데,

방진으로 나아가니 앞과 뒤 사이의 거리가 80여리나 되었다.

 

<고필>의 부장인 <고구자>가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였지만,

<고필>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서 그를 제지하니,

그러므로 연왕은 도망칠 수 있었다.

 

魏의 主君이 소식을 듣고 대노(大怒)하여

함거로 <고필高弼>과 <아청娥淸>을 불러들였고,

평성에 도착하자 모두 내쳐져서 문졸(門卒)로 삼았다.

 

 

무오일(8일)에 위의 주군이 산기상시 <봉발>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면서 연왕을 호송하게 하였다.

{연왕을 인도받아 데리고 가려고 한 것임}

<자치통감>

 

 

 

그 때 <풍문통馮文通>{풍홍, 북연의 마지막 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세조(世祖){태무제}가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파견하여

<련璉>{장수대제}에게 조서를 내려 <문통文通>을 보내라고 명령하자,

<련璉>은 상서(上書)하여 <문통>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들겠다고 하면서도

끝내 보내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어 그들을 토죄(討罪)하려하였으나,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훗날을 기다려 거병(擧兵)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므로,

세조는 그만 두었다.

<위서 열전 고구려전>

 

 

朝鮮縣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 斯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

<魏書>

 

조선현은 兩漢과 晉나라에서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폐지되었다.

 

延和 원년(432년)에 폐지되었던 조선현의 백성을 비여(肥如)로 옮겨 와

다시 조선현을 설치하고 북평군에 소속시켰다.

 

 

 

자치통감의 내용을 살펴보자.

 

2월에 연(북연)이 위나라(북위)에 속국이 되겠다는 뜻으로

태자를 인질로 바치겠다고 하였으나 위(북위)는 거절하고

아예 군대를 동원하여 북연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앞으로 북위가 북연을 칠 것이니

그때 북연을 돕지 말라고 미리 경고를 하였다.

 

3월에 북위의 장군 <아청>, <고필>이 정예의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드디어 북연 정벌에 나섰고 도중에 요서에서 여러 군사와 합하였다.

 

4월에 <아청> <고필>이 연(북연)의 백랑성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이때에 북연에서 전년도(435년) 11월에 고구려에 파견한

북연의 사신 <양이>를 따라 고구려 군대가 화룡(북연의 수도)에 도착하여

연왕을 영접하였다.

 

북위에서 미리 사신까지 파견하여 경고했음에도

고구려는 군대를 파견하여 북연을 도운 것이다.

 

고구려는 화룡(북연의 수도)의 북동쪽에 주둔하였고,

북위는 서쪽으로부터 왔으니 화룡의 서쪽에 주둔하였을 것이다.

 

그 다음이 이상하다.

 

북연의 상서령 <곽생>이 성문을 열어서 북위군을 받아들이려 했는데

북위군이 의심이 나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곽생>이 군대를 챙겨서 (북)연왕을 공격하였으나

(북)연 왕이 고구려의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는데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곽생>이 어떤 군대를 챙겨 북연 왕을 공격한 것일까?

 

북연의 군대 대부분은 북연 최후의 보루, 백랑성 전투에 투입되었을 것이고,

북연의 서울인 화룡에 남은 군대란

북연왕의 친위대(어림군) 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북연의 서울인 화룡의 북동쪽에는 고구려군이 있고,

서쪽에는 북위군이 있다.

 

그리고 그 화룡에 북연왕과 북연왕의 친위대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서령 <곽생>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란 어떤 군대일까?

 

북연왕이 있는 상황에서 북연왕의 신하가

북연왕의 친위대로 나아가서 북연왕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을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북연왕의 친위대가

북연왕의 신하인 <곽생>의 말을 따를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곽생>이 동원한 군대란 어떤 군대일까?

 

그것은 북위의 군대일 것이다.

 

곽생이 성문을 열었을 때 서쪽에 있는 북위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왔고,

곽생이 북위 군대를 이끌고 북연 왕을 공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북연왕이 북동쪽에 있는 고구려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의 군대와 궁궐에서 싸운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은

<곽생>의 군대가 패했음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곽생>이 이끈 북위 군대와 북연 왕이 이끌고 온 고구려 군대가

서로 화룡 성 안으로 들어와 궁궐에서 싸운 것이고,

그 결과 북연 왕이 이끌고 온 고구려 군대가 이긴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갈로> <맹광>이 성에 들어왔다는 말은

곧이어 고구려군의 본대(本隊)가 들어왔다는 말이다.

 

(북)연 왕과 <곽생>의 전투가 4월에 벌어졌는데

북연 왕이 용성을 떠난 때가 5월 5일이다.

 

그리고 자치통감에「정예의 병사들을 거느리고」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연 왕의 친위대이고

따라서 <곽생>이 동원한 군대가 북연 왕의 군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곽생>이 동원한 군대는 바로 <곽생>이 성문을 열어서 들어온

북위의 군대임을 또 한 번 알 수 있다.

 

결국 고구려 군대가 북위의 군대를 꺾었기 때문에

북연왕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울 수」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이며,

 

80리나 되는 기나긴 피난 행렬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고구려 군대를 뒤쪽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또한 북위의 군대가 패했기 때문에

<고필>의 부하장수인 <고구자>가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였지만 <고필>이 그를 제지한 것이고,

북위의 군사가 패했기 때문에

魏의 주군인 태무제(3대 세조)가 소식을 듣고 대노(大怒)하여

함거로 <고필高弼>과 <아청>을 불러들였고,

평성에 도착하자 모두 내쳐서 문졸(門卒)로 삼은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북연이 망할 때 고구려와 북위가 군사적 충돌이 있었고

그 결과 고구려 군대가 승리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직접적으로 고구려 군사가 승리한 기록이 없을까?

 

그것은 춘추사관의 전형적인 필법으로 자기들이 패한 것을 감춘 것,

즉 빼버린 것이다.

 

핵심적인 말을 빼버리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는 북위의 경고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군대를 동원했다는 사실과,

고구려군이 무력행사를 실행하여 용성을 점령한 사실,

고구려와 북위의 군사적 충돌에서 고구려가 승리했다는 사실,

{이렇게까지는 표현을 못하더라도,

고구려 군대가 북연왕과 백성을 데리고 가는데도

북위 군대가 눈 앞에서 보면서 고구려 군대에게 감히 범접도 못했다는 사실}

고구려군이 용성전투에서 승리한 사실,

고구려군이 북연왕과 북연 백성들을 데리고 개선한 사실,

개선하는 고구려군에게 북위군은 접근조차 못했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은 고구려가 북위보다 군사적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북위의 조공과 책봉을 받는 하위정권이라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종속정권,지방정권이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근거없고 터무니 없는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가 북위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북위의 종속정권이라면

북위의 경고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가?

 

북위 군대가 보는 앞에서 북연 왕을 도와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용성을 점령할 수 있는가?

 

고구려 군대가 북연 왕과 백성들의 후방인 북위 군대를 막고 보호하여

고구려로 데려올 수 있는가?

 

또, 북위의 1만 정예군과 합쳐진 많은 군대가

자기네 종속정권 군대에게 범접도 못하는가?

 

어림없는 얘기이다.

 

오히려 고구려가 북위의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 다음,

우리가 알수있는 중요한 사실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용성사건 3일 뒤인 무오일(8일)에

북위가 북연왕을 데리고 가겠다고 사신을 파견한다.

 

즉, 3일만에 북연왕이 고구려 땅에 도착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은 용성(북연의수도)에서 고구려 땅이 그만큼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날 중국 군대의 하루 행군 거리가 30리이다.

그런데 북연은 군대도 아닌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로 갔다.

 

그리고 3일만에 도착하였다.

 

그러면 용성에서 고구려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위에 나오는 80리가 정답일 것이다.

 

비교적 빠르게 움직이는 군대가 하루에 30리씩 3일을 움직이면 90리이다.

 

그런데 군대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백성들이 3일을 움직이면 얼마나 될까?

 

위에 나오는 80리일 것이다.

 

전쟁통이고 하니 평소보다는 급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그래서 3일만에 80리를 갔을 것이다.

 

다시말해서 고구려땅이 용성에서 북쪽으로 80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즉, 고구려 땅이 용성에서 매우 가깝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용성 근처까지 고구려 땅이라는 사실이다.

 

북연 왕 <풍홍>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북위 태무제는

고구려 장수대제(거련)에게 북연왕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대제는 거절하였다.

 

그런데도 북위가 한 일이라고는 자기들끼리의 말 장난 뿐이었다.

 

고구려에 대하여 어떠한 제재를 가하거나 군사적 보복을 못하였다.

 

장수대제가 <풍홍>과 함께 魏를 받들겠다고 한 것은 그들의 말이다. 

 

만약 고구려가 북위의 하위정권이었거나 종속정권이었다면

북연의 멸망 과정에서 보듯이 북위의 무차별적인 군사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북위보다 약했기만 했더라도

고구려는 북위의 무자비한 공격을 당했을 것이다.

 

이때는 북위가 가장 강성했던 태무제 때여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낙랑군 조선현의 백성들이

북연이 멸망하자 肥如로 옮겨 와 고구려로 이주하였다는 것이다.

 

魏書는 肥如가 북평군에 속하는 그들의 땅이라고 하지만

肥如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今 노룡)에 이웃한 땅으로 고구려에 속한 땅이다.

 

 

- 북연의 멸망 과정

 

 

文帝 元嘉 9년(432년)

 

8월

신사일(9일)에 魏의 主君이 <고소高紹>를 공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평동장군 <하다라賀多羅>가 대방(帶方)을 공격하고

무군 대장군인 영창왕 <탁발건>이 건덕을 공격하고

표기대장군인 낙평왕 <탁발비>가 가양을 공격하여 모두 뽑았다.

 

 

9월

을묘일(14일) 魏의 主君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

영구,성주,요동, 낙랑, 대방, 현도 여섯 군의 백성 3만가호를 유주로 이주시켰다.

 

燕의 상서인 <곽연>이 燕王에게 魏에 정성껏 딸을 바쳐 보내고

부용국이 될 것을 요청하라고 권하였다.

 

燕王이 말하였다.

 

“전에 틈새가 벌어져 있었고 분노를 맺게 된 것이 이미 깊은데

항복하여 귀부하는 것은 죽음을 가지러 가는 것이니

지킬 뜻으로 다시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

 

魏의 主君이 화룡{북연의 수도}을 포위하였을 때

숙위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전선에 있어서 행궁하는{주군을 따라온} 사람이 적었다.

 

운중의 진장 <주수지>가 남방 사람과 더불어 魏의 主君을 기습 살해하고

그 기회에 화룡으로 들어갔다가 배를 타고 남으로 돌아갈 것을 도모하였는데

이를 곤군장수 <모수지>에게 알렸으나 <모수지>가 따르지 않아 마침내 중지 하였다.

 

이미 이렇게 하고나서 일이 발각되어 <주수지>는 燕으로 달아났다.

 

魏人이 자주 燕을 정벌하자 燕王은 <주수지>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주수지>는 바다를 통하여 동래에 이르러 마침내 건강으로 돌아왔고

(남조 송나라의) 황문시랑을 제수 받았다.

 

 

겨울 11월 임자일(11일)

 

애초에 (북)연 왕의 적비 왕씨가 장락공(長樂公) <풍숭馮崇>을 낳았는데

<풍숭>이 형제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풍홍이) 즉위하게 되자, 모용씨를 세워 왕후로 삼으니 왕씨는 책립 받지 못하였고

또한 풍숭은 축출되어 비여(하북성 노룡현)를 진수하게 하였다.

 

<풍숭>과 같은 어머니를 둔 동생,

광평공 (廣平公) <풍랑馮朗>과 낙릉공(落陵公) <풍막馮邈>이 서로 말하였다.

 

“ 지금 국가가 장차 망하려고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우매하던 지혜롭던 간에 상관없이 모두 알고 있다.

왕이 다시 모용후의 참소를 받아들이면

우리 형제의 죽는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서로 더불어 요서로 도망쳐 달아나 <풍숭>에게 유세하여 魏에 항복하게 하니,

<풍숭>이 이를 따랐다.

 

마침 위의 주군은 급사랑 <왕덕>으로 하여금 <풍숭>을 부르게 하자

12월 기축일(19일)에 <풍숭>이 <풍막>으로 하여금

魏에 가서 군(郡)을 들어가지고 항복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연왕(북연왕 풍홍)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장수 <봉우>로 하여금

요서에서 <풍숭>을 포위하게 하였다.

 

 

 

文帝 元嘉10년(433년)

 

봄 정월

을묘일(15일)에 魏의 主君이 영창왕 <탁발건>을 파견하여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요서를 구원하게 하였다.

 

2월

경오일(1일)에 魏의 主君이 <풍숭>을 도독유평동이제군사

(유주 평주 동이의 모든 군사권자) 거기대장군 유평이주목(유주와 평주, 두주의 목사)으로 삼고 요서왕에 책봉하여 그 나라의 상서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요서의 10개 군을 식읍으로 하고 승제(承制)하여

상서, 자사,정로장군 이하 관원을 임시로 임명하게 하였다.

 

6월

魏의 영창왕 <탁발건>, 좌복야 <안원>이 모든 군사를 감독하여

화룡(북연의 수도)을 공격하였고

장군 <누발>이 별도로 5천 기병을 거느리고 범성을 포위하였다.

 

연(북연)의 수장 <봉우>가 범성을 바쳐 항복하자

그곳의 3천여 집을 거두어가지고 돌아왔다.

 

8월(가을)에

<풍숭>이 표문을 올려서 그의 아버지에게 항복하라고

설득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魏의 主君이 허락하지 않았다.

 

 

 

文帝 元嘉11년(434년)

 

봄 정월

무술일(4일)에 연왕(북연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위에 화의를 요청하였다.

위의 주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3월

신사일(18일)에 연왕(북연 왕)이 상서 <고옹>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면서

번국이라고 자칭하고 위에 죄를 받겠다고 하고

막내딸로 액정을 채우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魏의 主君이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그의 태자 <풍왕인>을 불러 들어와서 조현하게 하였다.

 

6월

갑진일(13일) 연왕이 태자를 파견하여 위에 인질로 보내지 않으니

산기상시 <유자>가 간하였다.

(태자를 보내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말함. 자세한 내용은 생략)

燕王이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신해일(20일)에 魏의 主君이 무군대장군인 영창왕 <탁발건> 등을 파견하여

燕을 치고 그들의 벼와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백성을 옮겨놓고 돌아왔다.

 

 

 

文帝 元嘉12년(435년)

 

봄 정월신미일(13일)

燕王이 자주 魏에게 공격을 받자 사자를 파견하여

건강(남경)에 가서 번국임을 자칭하고 공물을 받들어 올렸다.

 

계유일(15일)에 (남조 송나라에서) 조서를 내려서 燕王에 책봉하고

강남에서는 그들을 황룡국이라고 불렀다.

 

3월 계해일(6일)에

(북)연 왕이 대장 <탕촉>을 파견하여 魏에 들어가 공물을 바치고

태자 <풍왕인>에게 병이 있으므로 아직 보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여름 4월기사일(4월에는기사일이 없다고 함. 을사-19일의 잘못이라고 함)

(북)연 왕이 우위장군 <손덕>을 (남조 송나라에)파견하여 와서

군사를 보내달라고 빌었다.

 

6월 무신일(22일)에

(북)魏의 主君이 표기대장군 낙평왕 <탁발비>,

진동대장군인 도하 사람 <굴원> 등에게 명령하여

기병 4만명을 인솔하고 (북)燕을 치게 하였다.

 

7월(가을)기묘일(24일)에

(북)魏의 낙평왕 <탁발비> 등이 화룡(연의 수도)에 도착하였고

燕王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군사들을 위로하고 갑옷 3천벌을 바쳤다.

 

<굴원>은 그들이 시자{인질}를 보내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남녀 6천명을 약탈하여 돌아갔다.

 

8월 갑진일(20일)

魏人들이 자주 (북)燕을 치니 (북)燕은 매일 위태롭고 오그라들어서

위아래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태상 <양민>이 다시 (북)燕 王에게 속히 태자를 파견하여

입시하게 하라고 권고하였다.

 

燕王이 말하였다.

 

“내가 차마 아직 이런 짓을 못하겠다.

만약에 사태가 급해지면 또한 고구려에 의지하여

훗날에 일어날 것을 도모할 것이다.”

 

<양민>이 말하였다.

 

“(북)魏는 천하를 들어서 한 귀퉁이를 치는데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고구려는 신의가 없으니 처음에는 비록 서로 친하다고 하나

끝내는 변할까 두렵습니다.”

 

(북)燕 王이 듣지 아니하고 비밀리에 상서 <양이陽伊>를 파견하여

고구려에 영접해 주기를 청하였다.

 

 

 

文帝 元嘉13년(436년)

 

2월 무자일(6일)에

(북)燕 王이 사신을 파견하여 (북)魏에 들여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시자(인질)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魏의 主君은 허락하지 않고

장차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3월 신미일(20일)에

魏의 평동장군 <아청>, 안서장군 <고필>이 정예의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燕(북연)을 정벌하는 데 평주자사 <탁발영>이 요서의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과 회합하였다.

 

임진일(10일)에 사자(使者) 10여명을 파견하여 동쪽에 있는 고구려 등

여러 나라에 가도록하여 이를 알리고 깨우쳤다.

{북위가 북연을 공격할 때 북연을돕지 말라고 경고한 것임}

 

여름 4월에

(북)魏의 <아청娥淸>, <고필高弼>이 燕의 백랑성을 공격하여

그곳에서 승리하였다.

 

고구려가 장군 <갈로>, <맹광>을 파견하여 무리 수만명을 거느리고

<양이陽伊>를 따라와서 화룡(북연의 수도)에 도착하여 연왕을 영접하였다.

 

고구려)는 임천(화룡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燕의 상서령 <곽생>이 백성들이 옮겨가기를 꺼리는 것을 이용하여

성문을 열어서 (북)魏의 군사를 받아들이려 하였지만,

魏人들이 그것을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마침내 군대를 챙겨서 燕王을 공격하였으나,

燕王이 고구려의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는데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갈로> <맹광>이 성에 들어오자,

군사들에게 해진 군복을 벗도록 명령하고,

燕의 무기고에 있는 날카로운 병장기를 가져다가 주고

성안에서 크게 약탈하였다.

 

5월 을묘일(5일)에

燕王이 용성에 있는 현재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우니, 불이 10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도 갑옷을 입고 안에서 거주하게 하고,

<양이陽伊> 등이 정예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행영 밖에 있었고,

<갈로> <맹광>이 기병을 거느리고 뒤쪽에 있었는데,

방궤(방진)로 나아가니 앞과 뒤 사이의 거리가 80여리나 되었다.

 

<고필>의 부장인 <고구자>가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였지만,

<고필>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서 그를 제지하니,

그러므로 연왕은 도망칠 수 있었다.

 

魏의 主君이 소식을 듣고 대노(大怒)하여

함거로 <고필高弼>과 <아청>을 불러들였고,

평성에 도착하자 모두 내쳐져서 문졸(門卒)로 삼았다.

 

무오일(8일)에 魏의 主君이 산기상시 <봉발>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면서 燕王을 호송하게 하였다.

{연왕을 인도받아 데리고 가려고 한 것임}

<자치통감>

 

 

 

전에도 계속되는 공격이 있었지만 북위가 432년 8월에 북연을 공격하고

이어서 9월에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 여섯 군을 공격하여

백성 3만호를 유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되자 북연의 신하들은 북연왕에게 북위에 딸을 바치고

부용국이 될 것을 권하였지만 북연왕은 반대하였다.

 

계속되는 북위의 공격에 망할 지경이 되자 내부분열이 일어나

북연왕 풍홍의 아들 풍숭이 요서를 바치고 북위에 항복을 청하자,

북연에서 요서를 포위하고, 북위가 이를 구원하면서 풍숭을 요서왕에 책봉하였다.

 

이때가 433년 2월이다.

 

또 계속하여 433년 6월에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여 화룡과 범성을 침략하여

백성 3천여 집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위와같은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는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첫째로 낙랑군과 대방군이 중국 하북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던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고 있는데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연의 영토가 중국 하북성에 있었기 때문에

북연의 영토 안에 있었다고 하는 낙랑군 대방군도

하북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두번째는 요서의 위치이다.

 

<풍숭>이 요서를 바쳤으니 요서는 북위의 영토가 된 것이고(433년 2월),

그 뒤에(433년6월) 또 북연의 땅인 화룡(북위의 수도)과 범성을 공격하였는데,

그 범성과 용성{화룡}의 위치가 오늘날 하북성에 있다.

 

요서는 오늘날 조백하의 서쪽이다.

 

옛부터도 요서는 조백하 서쪽을 말하고 요동은 조백하의 동쪽이었다.

 

즉, 요동과 요서의 경계는 오늘날의 조백하였다.

 

그러던 것이 요나라가 건국하여 요하를 동쪽으로 옮겨(지명을 옮김)

지금의 요하로 옮겨 바꾸고 요동군을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옮겨 바꾸었다.

 

 

세번째는 북연과 고구려는 아주 가까운 거리인 80리안에 이웃하고 있었다.

 

용성의 연왕 <풍홍>이 436년 5월 5일에 용성을 떠나

3일만인 5월 8일에 평곽에 왔다는 것을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북위와 북연 및 고구려의 수도와 평곽>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