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년 왜찬왕이 서거하자 439년 <개로>왕자가 왜제왕(倭濟王)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개로蓋鹵(429-474)>왕자가 도착한 곳은 규슈 서해안인 구마모토,

왜찬왕의 영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로대왕은 규슈 동북해안의 중진시(中津市) 산국천(山國川, 야마쿠니가와)

새로운 야마퇴왜국 수도를 개척했다.

 

야마퇴(野馬堆)7세기까지 규슈 수도가 되었다.

 

산국천 동안에 중진시(中津市)가 있고 그 반대편 서안에 광진(廣津)이 있다.

 

산국천은 영언산(英彦山 1200m, 히코야마) 줄기에서 유래하는데,

영언산 동쪽에는 가리우산(苅又山, 960m)이 있다. <개로>왕의 이름이다.

 

개로왕 이름은 우리말 칼의 고어에서 유래된 카루다.

 

일본에서는 <가수리加須利>왕이라고하였다.

 

규슈 왜국 땅에서는 가리다(苅田, 가리우다, 간다로도 읽음)가 생겨났다.

 

평양의 가루지기 전설도 개로왕 이름에서 비롯된다.

 

개로왕자는 왜제왕(倭濟王)으로서 443년에 송나라에 사절을 보냈다.

 

왜제왕은 먼저 신라를 쳐서 고구려 윤공천황의 배후를 약화시키고 고립을 꾀하였다.

 

삼국사기에 이때 왜군의 신라 공격이 심했다.

 

440, 444년 계속 공격했다.

 

이때 왜제왕의 군사행동은 일본서기 웅략기에 나와있다.

 

일본서기에서 459년 대화조정에서 개로왕에게 항복하고 쫓겨난 뒤를 기록한

웅략왕의 대외기사는 사실 거의 모두가 개로왕 이야기다.

 

삼국유사에 소개된 개로왕과 도미부인 이야기가 웅략 7년에 들어있다.

 

웅략7년을 왜제왕7년이라 해석하면 445년경이 된다.

 

개로왕이 신하 전협(田狹)의 아내를 가로채려고

전협(田狹)을 대마도 임나국사로 보내고 그의 아내를 빼앗으니

전협은 고구려로 투항한다.

 

삼국유사에서 도미부인의 남편은 천성도(泉城島)로 간다.

 

삼국유사는 천성도를 알 수 없는 지명이라고 했지만

당시 일본의 고구려계 천황인 웅략왕의 궁터가 바로 천성도(泉城島)였다.

 

당시는 고구려왕자 고진왕인 윤공천황 시대지만

20대 후반의 웅략왕자도 지방왕으로서 오사카를 지키며

병약한 윤공천황을 대신하여 상당한 실권을 가졌을 것이다.

 

, 개로왕의 신하가 복수심으로 고구려에 투항한 내용이

삼국유사 도미부인 이야기로 전해내려온 것이다.

 

대마도 북도의 임나성에는 와타도미신사가 있어

당시에는 도미라는 여자 이름이 많았으리라고 추정된다.

 

당시 개로왕이 뺏은 도미부인은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의 아들인 옥전숙녜(玉田宿禰)의 딸이라고 했는데

뒤에 성천황자를 낳았다가 곤지왕인 청령천황에게 살해당한다.

 

옥전숙녜는 백제계로서 고구려의 대마북도를 떠나서

대마남도에 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다른 옥전숙녜인 갈성습진언의 손자의 딸은 한원(韓媛)이라 하여서

청령천황때 황태부인(皇太夫人)이 되었는데,

이는 전왕인 개로왕비라는 뜻이고, 백제 무녕왕의 모후였다.

 

당시 백제는 대마도 남도를 지배했으므로

전협은 본래 암원항(岩原港) 다지산 다사성(多沙城)에 있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임나국사 전협(田狹)의 일본 발음이 다사로서 다사성(多沙城)의 발음과 같다.

 

전협은 고구려로부터 다시 대마도 임나왕이 되었다.

 

그는 백제 임나(대마남도)에서 고구려 임나(대마북도)로 옮겨간 것이다.

 

그는 점차 신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웅략기에서 천황은 전협의 아들 제군(弟君)에게 신라를 치라고 했다.

 

이 기록의 천황은 절대 고구려계 윤공천황이 아니다.

 

윤공천황이 신라를 치는 것은 윤공천황이 자기 구명줄을 끊는 일이다.

 

즉 왜백제 개로왕이 신라를 치라고 한 것이다.

 

명령을 받은 대마남도의 제군은 차마 부친을 치지 못하고

대마 북도를 우회하여 백제에 들어갔다가 신라도 치지 못하고

백제 재기(才技)들만 데리고 대도(大島)에 머물며 시간을 끌다가 암살당했다.

 

이 해, 제군이 데려온 백제 재기(才技)들이 대도에 머물다가

왜국 광진(廣津)에 들어가는데, 광진의 광국(廣國)이 당시 왜제왕, 개로왕의 수도였다.

 

광국(廣國)이라는 이름은

청령천황, 안한천황, 선화천황, 흠명천황의 이름자에도 들어있다.

 

웅략8년 즉, 왜제왕8446년경에는 신라왕이 고구려 파견병 100인을 죽인다.

 

고구려 군대가 신라로 쳐들어가서 축족류성(築足流城)에 주둔한다.

 

다른 말로 쓰쿠사기성(都久斯岐城)이라 했다.

 

바로 큐슈의 축자성(筑紫城)이다.

 

[隋書]에서 축자를 죽사(竹沙)라고도 했으므로

축족류성은 큐슈 관문인 후쿠오카 축자성의 이표기(異表記).

 

따라서 한반도 신라가 아니라 큐슈의 신라가 큐슈 고구려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당시 아나호왕자(穴穗皇子) 김무(金武)로 대표되는 큐슈 신라 세력은

후쿠오카 서부 사와라 등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노쇠한 윤공천황의 큐슈 고구려 세력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윤공천황의 둘째아들인 조일풍성명(朝日豊盛命)이 구류미시 고량산성(高良山城)

지키다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축자 대야성(大野城)에 주둔한 것이다.

 

큐슈 신라왕 김무는 임나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일본부(日本府) 행군원수(行軍元帥)를 보내달라고 한다.

 

신라왕 김무가 구원을 청한 임나왕은 큐슈에 있는 백제 개로왕, 즉 왜제왕의 신하다.

 

대마도의 전협은 대마도에서 임나왕을 대리하는 임나국사였지 임나왕은 아니었다.

 

개로왕은 이미 대마남도 임나를 확보하여

스스로 임나국사도 임명하고 큐슈로 들어왔던 것이다.

 

큐슈 신라왕 김무가 고구려인을 죽여놓고

대마도에 있는 고구려 임나왕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윤공천황에게 도움을 천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당시 임나왕은 큐슈에 있었고, 일본부 행군원수가 큐슈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일본서기에 처음 기록된 임나 일본부(任那 日本府)

백제가 일본 큐슈를 정벌하러 온 개로왕 군대의 일본 행군지였다.

 

이들이 머물던 곳이 큐슈 동북부 경도군(京都郡)의 행교시(行橋市).

 

행교시의 중심 하천은 금천(今川), 즉 곰천이다.

 

행교시 주변의 경도군 가리다정(苅田町) 광국성(光國城)이 개로왕 도성 위치가 된다.

 

개로왕은 우리말로 칼을 위미하고 일본서기에서 가수리왕이라고 했는데

가리다(苅田)가 중심이다.

 

지금은 어소소곡(御所所谷) 신롱석(神籠石)으로 해서

당시 백제의 산성이 파악되고 있고, 어소산(御所山) 고분도 알려져 있다.

 

한편 영언산(英彦山, 1200m) 아래인 가루산(苅又山, 950m)에서

야마퇴(野馬堆)로 흐르는 야마쿠니강(山國川)이 발원한다.

 

구주의 임나 일본부 개로왕이 군대를 보내서

구주 축자(筑紫)의 고구려 보기병을 패퇴시켰다.

 

윤공천황의 2자인 조일풍성명(朝日豊盛命)은 구주를 버리고

일본 본주의 미에현(三重縣)으로 옮겨갔다.

 

구주(九州) 신라왕 김무는 언제인지 대마도 북도 고구려 땅으로 옮겨갔다.

 

개로왕은 큐슈에서 고구려군 축출에 만족하지 않고

대마도 북도(上縣)까지 빼앗으려고 하였다.

 

다음해 447년경,

개로왕은 큐슈 북구주 종상시(宗像市)에 있는 흉방신(胸方神)에 제사를 지내고나서

대마도 신라와 전쟁 선포 교지를 내렸다.

 

백제성을 삼키면서 대마도 외지까지 나온 신라를 없애라는 것이었다.”

 

고구려계 윤공천황이나 웅략천황은 신라가 백제성 삼킨 일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제왕 개로왕이기에 백제성 함락의 명분을 대마도 정벌에 세우는 것이다.

 

개로왕의 명을 받은 네 장군이

대마도 북도의 록국지에 있던 신라왕을 공략하였다.

 

신라왕은 다시 도망하였고,

깊이 추격하던 대장군 기소궁숙녜(己小宮宿禰)가 오히려 죽었다.

 

개로왕은 논공행상하면서 기소궁숙녜가 삼한(三韓)에서 죽었다고 애석해 하였다.

 

삼한은 삼가라로 읽으니 대마도의 별칭이다.

 

대마도의 좌호가라, 인위가라, 계지가라 합쳐서 삼가라이고 삼한으로 표기한다.

 

일본에서는 한()을 가라로 읽는다.

 

전투가 벌어진 대마도에 지금도 고려산이 있고 대구마산(구마=고려)도 있고

고류산(高留山), 흑외산(黑畏山)도 있는데 흑()도 구로로 읽으면 구려다.

 

대마도를 고구려가 점령했던 것이 확실하다.

 

고류산 아래 아나라산(安羅山)과 항만의 투신악(投身岳)

투신대마지외(投身對馬之外)와 관련된다.

 

그곳에는 육지어전신사(六ツ御前神社)가 있다.

 

로구지(六地)라고 읽는데 이전의 고구려 록국지인 것이다.

(이제까지 록국은 한일양국 학자들에 의해서 경상북도 경산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결론은 대마도 신라왕이 대마도 록국지 안라성에서 있다가

개로왕 군대의 공격으로 대마도 북쪽 끝 좌호가라 본래의 신라령으로 도망간 것이다.

 

록국지는 큐슈 신라왕 김무와 백제의 대마도 전투 지역이다.

 

큐슈 축자에서부터 신라에 의해 촉발된 고구려병사들의 참극은

한반도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450년 삼국사기에서 신라 강릉태수가 사냥 나온 고구려 변장을 감히 죽였다.

 

고구려가 정벌군을 일으켜 내려왔지만 신라가 고구려에 사죄하고 무마했다.

 

그러나 고구려, 신라 양국의 반목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대화조정의 윤공천황은 낙동강 오리알처럼 일본 땅에서 고립되었다.

 

개로왕자는 왜제왕으로서 451년에 송나라에 사절을 보냈다.

 

451년에 사지절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육국제군사

안동장군이라 했는데 451년에 규슈를 거의 다 탈환하고,

대마남도와 북도 일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제왕 개로왕의 영토인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 6국은

한반도와 전혀 관련이 없다.

 

왜왕이 통치하는 신라(新羅)는 큐슈의 사라(早良, 斯羅)이고,

임나(任那)는 대마도(對馬島)이고,

가라(加羅)는 큐슈의 가라로서 지금 사가현의 가라진(唐津)을 말하고,

진한(秦韓)은 중국에서 규슈로 온 도래인들을 말하는데,

응신천황 14년에 도래한 궁월군(弓月君) 등

127현민이 건설한 미야자키현(宮崎縣)과 그 남쪽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을 말한다.

 

모로총(諸塚), 모로현(諸縣)도 모한의 후신이다.

 

중국 월(越) 땅에서 온 이들로 해서 남구주(南九州)는

남만(南蠻) 또는 남방(南方)이라 하였다.

 

진한인은 인덕천황 때에 본토로 분산 배치되었다.

 

이는 당시 왜찬왕이 그렇게 주도했을 것이다.

 

오나라에서 축자로 가져온 거위(鵝鳥) 두 마리가 미마군의 개에 물려죽었는데,

미마군은 천황한테 기러기 열 마리를 받치고 사죄하였다.

 

규슈 왜백제의 축자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453년 1월 대화조정에서 윤공천황이 궁실 내분으로 독살되어 서거하자

신라왕자 김무는 문상을 빙자하여서 대마도의 신라땅에서부터 병선 80척을 이끌고

대화조정으로 들어가서 고구려 목리경태자를 축출하고 안강천황(安康天皇)이 되었다.

 

10개월이 걸린 이 싸움에서 목리경태자는 구리촉 화살을 사용하였고

안강천황은 철촉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목리경 태자가 고구려 철촉을 쓰다가 보급품이 모자라서

고대에 쓰던 구리촉 화살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3년뒤 456년에 김무왕자 안강천황도 암살되고

윤공천황의 아들인 웅략천황이 다시 일어나서 대화조정을 차지한다.

 

이때 규슈 구류미 고구려성의 고구려 장수들도 구주를 나와 대화조정으로 들어가서

고구려계 웅략천황의 부활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웅략천황은 윤공천황의 후비이자 개로왕의 딸인 지진원을 증(蒸)하려다가 살해되었다.

 

증(蒸)이란 부왕의 처첩을 후왕이 다시 취첩(取妾)하는

흉노족등 북방인들의 전통 풍습이다.

 

윤공천황의 아들 목리경태자가 윤공천황의 후비였던 의통랑희를 증(蒸)하기 위해서

윤공천황을 독살했다.

 

개로왕은 455년에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고

458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좌현왕 여곤을

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 餘昆)으로 책봉받게 하였다.

 

웅략천황의 개로왕 공주 살해는 선전포고나 같다.

 

웅략4년 봄,

459년에 대화조정 갈성산에 현인신(現人神)의 군대가 나타나서 웅략을 사로잡는다.

 

현인신은 아기즈신이라고 읽는데 일사주신(一事主神),

일언주지대신(一言主之大神)이라 기록하였고,

계체천황의 부왕이 바로 언주인왕(言主人王)이었으므로

계체천황은 개로왕의 서장자였다.

 

개로왕은 나라현(奈良縣) 갈성산(葛城山)으로 도망치던

웅략천황을 협곡에서 포위하였다.

 

웅략천황이 화살로 반격하였으나 15살의 어린 곤지왕자(餘昆)가 나서서 토벌하였다.

 

이 사실을

“등에(虻)가 천황의 팔을 물고, 잠자리(蜻蛉)가 날아와 등에를 잡았다”

고 시가(詩歌)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등에(虻 흡혈 쇠파리)는 개로왕의 딸을 살해한 웅략천황이고

잠자리(蜻蛉)는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왕(昆支王) 여곤으로서

뒤에 왜흥왕(倭興王)이 되었고, 청령천황(淸寧天皇)으로 기록되었다.

청령천황(淸寧天皇; 444~484)이 곤지왕 청령(=蜻蛉)인 것이다.

 

이때 고사기에서는 일사주신에게 웅략천황이 벌벌 떨면서

“우리왕이시여, 미처 진정한 대왕을 몰라뵈었습니다. 살려주십쇼.”

 

속죄하면서 어검과 활을 받치고,

그의 백관들에게 관복을 벗게하여 석고대죄를 시키고 봉물을 받쳤다.

 

또다른 시가(詩歌)에서 개로왕은 왜국이란 말이 오래되었으니

 “아기쓰시마”라는 청령도왜(蜻蛉島倭)라고 국호를 바꾼다고 선언하였다.

 

즉 대화조정의 왕이 이날부터 곤지왕 청령천황이 된 것이다.

 

웅략은 대화로부터 미에현(三重縣)으로 유배되었다.

 

웅략왕의 이름도 고무(高武)에서 치욕적인 이름인 유무(幼武)로 바뀌는데

이때 나이가 42세였다.

 

개로왕은 460년에 임신중이던 황부인(皇夫人)을 곤지왕에게 보냈는데

황부인은 규슈로 가는 도중에 일본 규슈 사가현의 각라도(加唐島-가카라도)에서

무녕왕(武寧王)을 낳았다.

 

이 황부인은 갈성 한원이라 하는데

대마도에 있던 갈성습진언의 손자 옥도숙녜의 딸이다.

 

갈성 한원(韓媛) 황태부인(皇太夫人)은 468년에 서거했다.

 

웅략부인의 황후로 기록된 갈성한원 황태부인이 사실은 개로왕의 황부인이었고,

그래서 곤지왕에게 황태부인이었던 것을 웅략왕의 황후라고 조작하고

개로왕의 업적을 웅략왕의 업적으로 조작해서

일본서기는 힘들게 왜 5왕(찬왕, 진왕, 제왕, 흥왕, 무왕)을 지워냈다.

 

곤지왕은 규슈 경도군(京都郡) 광국성(廣國城)으로 들어갔다.

 

지금의 경도군 가리다정(苅田町) 광국성(光國城)이 된다.

 

가리다에 어소소산(御所所山) 석성이 있었다.

 

곤지왕은 규슈에서 왜흥왕(倭興王)으로서 일본을 통치하고

대화조정의 왕은 비어 있었다.

 

473년경 곤지왕은 대화조정 동부에 있던 이세(伊勢)의 조일랑(朝日郞)을 쳐서 없앴다.

 

규슈 구류미시 고려성을 지키던

윤공천황의 둘째인 조일풍성(朝日豊盛)의 무리도 제거한 것이다.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평양 남쪽 한성의 개로왕이 참살당하였다.

 

곤지왕은 이제까지 살려두었던 웅략왕을 살해하고,

규슈왜국은 무녕왕에게 넘겨주었다.

 

곤지왕은 문주왕의 공주 백제로 잠시 돌아갔고

문주왕에게 상좌평을 받았지만 곧 사양했다.

 

무녕왕은 15세로 규슈 왜백제의 왜무왕이 되어서, 478년 송나라에 국서를 보냈다.

 

1)부왕인 왜제왕의 업적을 소개하여서, 몸소 전장에 나아가 동쪽 모인 55국,

서쪽 중이 66국, 해북 95국을 복속시켜 국가를 안정시켰다고 하고,

 

2)고구려가 무도하여 병탄을 노리고 약탈을 하고 송나라 조공길을 막고

 

3)돌아가신 부왕, 제왕은 조공길을 막은 구려에 크게 맞서다가

결국 부왕과 형왕들의 엄중한 상(奄喪父兄)을 입었는데,

 

4)송나라로 가는 사자가 고구려에 잡히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면

지금 상중이라 군사를 움직일 수는 없지면

병사를 훈련하여 부형의 원한(申父兄之志)을 갚고 싶다고 하였다.

 

왜무왕 국서에 나타난대로

478년에 고구려에 의해 부형의 엄상을 입은 일본천황은 없었다.

 

오로지 개로왕의 아들인 백제 무녕왕만이

왜무왕으로서 저와 같은 편지를 보낼 수 있다.

 

또한 저 편지에서 왜제왕은 개로왕,

왜흥왕은 곤지왕, 청령천황인 것이 확인되는 것이다.

 

개로왕은 왜제왕으로서, 동정(東征)을 통해 후쿠이현으로부터

일본 동북부의 모인국(毛人國) 55국을 정벌하고,

서정으로 중이(衆夷) 66국을 정벌하였다.

 

중이 66국은 구주 66국을 가리킨다.

 

중이(衆夷)란 중국인을 가리키는 당시 호칭인데 응신천황 때

백제의 중국 활동 결과로 중국 강좌에서 건너온 중국인들이 구주에 살고 있었다.

 

이들을 진인(秦人), 혹은 남만(南蠻)이라고도 불렀다.

 

해북의 95국은 일본 동부 지역을 의미한다.

 

왜제왕은 모인국 55국을 정벌할 때에 후쿠이현(福井縣)에 있었다.

 

계체천황기에 계체천황의 부왕이 그곳 후쿠이현 삼미국(三尾國) 별업(別業)에서

진부인(振夫人)의 미색을 전해 듣고 초대하여 계체천황을 낳았다.

 

그후 버림받은 진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계체천황을 길렀다.

 

진히메(振比賣;434~485)의 고분에 쓰인 석곽은 배 모양(舟形) 석곽으로서

매우 크고 특이한데 후쿠이현의 족우산(足羽山) 산정고분(山頂古墳)에 남아 있다.

 

대화에 있는 개로왕 고분은 계체천황의 부왕으로 밝혀진 인릉고분(忍陵古墳)이다.

 

규슈에도 개로왕 고분이 있을 것인데,

전천시(田川市) 세스도노(セスドノ古墳)으로 잠정 추정해본다.

 

세스도에 대한 유래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절두(切頭) 고분의 의미로 추정된다.

 

경도군에서 가깝고 주변 향춘악(香春岳)에

규슈 제일의 구리 광산에 현인신사(現人神社)가 있다.

 

개로왕이 일본서기 최초의 현인신이었다.

 

두 번째 현인신은 곤지왕이다.

 

향춘악 현인신사는 현재 신라인 천일창을 모시는 중인데

천일창이 이곳의 광산을 처음 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화 백발산에 곤지왕 청령천황의 121m 전방후원 고분이 남아있고,

그 아들들로 비롯되는 아스카베 신사(飛鳥部神社)가 남아있다.

 

또한 규슈의 곤지왕 왜흥왕 고분은 경도군 어소산고분(御所山古墳)으로 추정된다.

 

역시 전장 120m의 전방후원분이다.

 

먼저 서거한 황태부인, 갈성 한원(韓媛; 423~468)의 고분은

110m의 경도군 석총산고분(石塚山古墳)으로 추정된다. 무녕왕의 모후다.

 

일본서기에 웅략왕의 황후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는 개로왕의 황후였던 초향번사황녀(草香幡梭417~480)는

경도군 번총고분(番塚古墳)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전장 50m의 전방후원분이고 여러 금동 장신구 이외에

은으로 상감한 은상감대도가 출토되었다.

 

 

<왜 齊王 九州정벌도>

 

 

<가야와 구주>

 

 

<대마도와 일기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