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40년{AD472}임자,

 

정월, 유연(柔然)이 사람을 보내 토산물을 바쳐왔다. 

 

4월, 황산(黃山)에 갔다가 의 <욱>이 죽고 그가 아끼던 신하인

<이도아李道兒>의 아들 <욱>이 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 사신이 와서 약재를 바치며

<경사慶司>가 사신을 무고하여 죽여서 물에 버린 일을 얘기하면서,

 

이간하며 도움을 청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길;

 

“그 놈은 곧 저절로 지칠 것이다.”

라 하였는데,

 

과연 <경사慶司>는 가 그의 참언을 들어주지 않음에 노하여, 와 절연하였다.

 

이즈음 <도림道琳>은 이미 <경사慶司>와 서로 친하여져서 함께 말을 맞추었었다.

 

帝가 안일함을 반기고 정벌을 수긍하지 없았더니 천하는 점차 편안하여졌다.

 

궁실과 성곽 및 능묘를 널리 고치게 하였으며,

그간 모아놓은 재물을 쓰도록 하였다.

<장수대제기>

 

 

 

개로왕 18년(472년),

 

魏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장사 <여례>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이를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馮>씨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리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馮族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魏風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환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劉씨{宋}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을 벌 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 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초 장왕이 맨발로 다녔으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위 나라 현조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 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5복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魏 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 월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 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왕 <연>에게 조서를 보내 <소안>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소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魏 나라에서는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소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하여

魏 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 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장수왕 60년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 때부터 공물의 수량이 종전에 비하여 배로 늘었으며,

보답으로 위 나라에서 주는 물량도 다소 증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개로왕이 요서에 단독으로 백제의 郡縣을 설치하자 宋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이를 틈타 장수대제는 북쪽의 유연(柔然), 서쪽의 위(魏), 남쪽의 송(宋)과 화친하여

백제의 요서분국을 압박한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개로왕은 北魏와 관계를 개선코자 표를 올렸으나

魏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백제는 중원에서 고립무원이 된다.

 

 

- 확가다기로 대왕

 

 

 

 

 

 

일본 규수 다마나라는 곳에 에다후나야마라는 고분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온 칼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칼에 있는 한자를 일본학자가 잘 못 읽고 해석했다.

 

비슷한 임금이름이 적힌 다른 칼1968년 동경(이나리야마 고분)에서도 발견된다.

그 칼에도 마찬가지 같은 임금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도 잘못 읽었을 수도 있겠다 해서 추적을 시작한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일본에서는 이 두 칼에 나오는 임금 이름을

류랴꾸라는 일본천왕의 이름으로 잘못 해석하고는

"이 두 칼이야말로 일본의 나라지방에 아주 옛날부터 왕실이 있어 가지고

그 왕실이 5세기에 벌써 동경지방과 큐슈지방까지 다스린

움직일 수 없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라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으로 칼에 적힌 글을 보자. 

 

'이나리야마'라는 고분이 교다라는 동에네 있었는데

동경에서 북쪽으로 6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그 동네에 무덤 떼가 있다.

 

이나리야마 고분이라고 하는데 이나리야마신사가 있어서 도굴을 면했다.

 

1968년경에 일본각처에서 고분을 관광자원화 하는데

자기 동네도 파보니 유물이 수두룩 나와서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가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115자 도금된 한자가 발견이 되었다.

 

471년에 마든 칼이다. 

 

 

국보로 지정되고 역사학자들이 연구해서 해석한다.

 

75cm되는 칼인데 앞뒤에 글자가 빼곡히 있다 

 


 

* 이나리 야마 칼 글

 

<신해년 칠월에 적었다.

 

의 후왕(태수, 관리) 옛날 조상이름이 큰 어르신(오호비꼬, 295)이다.

 

그 아들이름은 머리가 되시는 마을의 어른이다.

 

그 이름은 고령가야의 우두머리였다.

 

가사비리(새로 생긴 동네)의 아들이

고확고(확고는 벼슬이름. 후왕, 태수, 마을을 다스리는 왕)였다.

 

세세로 장도인(근위병)으로서 섬겨왔다.

 

크신 우두머리로서 섬겨왔는데 확가다기로{개로}대왕이시다.

 

그 대왕이 관청이 사기궁에 있을 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백번 달군 칼에다가 이 근본을 적어 놓노라.>

 

 

* 에다후나 야마 칼 글 (규슈 다마나 지방에서 발굴된 칼)

 

<하늘아래 천하를 다스리는 000(확가다기로=개로대왕)때에

섬기던 벼슬이름이 기리(칼 만든 사람).

 

8월에 큰 가마솥으로부터 만들어 4자 되는 칼을 80번 후리치고 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칼인데 이 칼을 지닌 자는

자손이 은혜를 입을 것이고 칼을 잃지 말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