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42년{AD474}갑인,

 

2월, 황산(黃山)에서 크게 사열하고는,

양왕{梁王)<화덕華德>을 정남대장군으로 삼고,

<걸>{재증걸루}과 <만>{고이만년} 등을 향도로 삼아 선봉에 세웠다.  

 

7월, 상이, 주류궁(朱留宮)으로 갔다가 황산(黃山)으로 돌아와서는

 

영락대제를 지내고서 종실과 삼보들에게 이르길;

 

“선제{영락대제}께서는 국강(國罡){국강상왕=고국원제}의 치욕을 씻고자 하셨으나,

하늘이 목숨에 짬을 주시지 않았었소.

 

짐은 병력을 키워서 그 기회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소.

 

지금 때가 이미 무르익었소.

 

아이들 모두가 백제 해골들은 남쪽으로 물을 건너 도망가고,

신라 사람들은 몸 사리고 경계를 지킨다는 말을 하고들 있소.

 

인심은 암암리에 천심을 살피는 것이니,

이제는 <경慶>{부여경, 개로왕}> 그놈이 기필코 망할 때가 되었소.”

라 하였다.

 

모든 신하들도 이구동성으로 찬동하였다.

상은, <화덕華德>에게 명하여, 3만병을 이끌고 먼저 떠나라 하였다.

이때, 신라일모(一牟)사시(沙尸)광석(廣石)답달(沓達)구례(仇禮)

좌라(坐羅) 등의 성을 쌓아서 백제를 대비하고 있었다.

 

백제 백성들은 북쪽의 군병이 크게 몰려 온 줄로 알고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놀라서는 집을 버리고 토굴거처로 달려갔다.

 

양 편을 잘 알아 미리 감을 잡았던 것이었다.  

 

땅의 사람 <계稽冲> 등이 와서 알리길;

 

“<휴범休範>이 거병하여 건강(建康)으로 가서 <이욱李昱>{劉昱}을 토벌하려다가,

<소도성蕭道成>{太祖=高帝}>에게 피살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욱{彧}>은, <도아道兒>{소도성蕭道成}와는 남색하면서,

<진>비와 붙어서는 <욱{昱}>을 낳았고, 자신의 동생 열다섯을 죽였는데,

<휴범休範>이만은 홀로 어리석은 체하면서 <욱{彧}>의 처자를 받들어 모시면서

죽음을 면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조금을 더 참지 못하였다가 피살된 것이었다.

 

<도성道成>이는 무부(武夫)로서 황제를 자칭하였다.

 

황금 보기를 흙같이 하며 겉치레를 꺼려하는 자였으나,

속으로는 외로운 임금을 속였었으니,

역시 <마의馬懿>나 <유유劉裕>{高祖 武帝>}와 같은 부류이었다 할 것이다.

상이 이르길;

 

“<의懿>가 <유裕> 같은 이를 생기게 하고,

<유>가 <도성道成>이 같은 자가 생기게 한 것을 제대로 된 일이라면,

<여령>이 <>를 낳고 말을 바꾸어 탄 것과 <도성道成>이가 <욱>을 낳고

<유>씨로 (성을 바꿔) 칭한 것 역시 제대로 된 일이잖소?”

라 하였다.

 

<욱>은 (나이가) 열둘로 {어려서} 경솔하고 방자하였으며,

<진>는 음란하고 추접한 짓을 일삼았으니 임금을 기만할 호기를 준 것이었고,

<도성道成>이 보위를 찬탈한 것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 시절, 의 <풍>녀 또한 폐신 <이혁李奕>과 음란하고 추접하게 놀아났었고,

는 스스로는 문(文)을 세우고 도(道)를 좇는다고는 하였지만,

그들의 더러운 행실이 이와 같았더니,

 

상이 이르길;

 

“짐의 후궁들은 설사 100날을 홀로 두어도 원망함이 없소.

<진>후와 <풍>녀 무리들은 추접스런 짐승 중에서도 추접스런 짐승이오.”

라 하였다.

 

이에 <황>태자는

 

“상전이 예의를 따르면 아랫사람들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고 하니,

곧 폐하를 두고 하는 말입지요.

 

<풍>녀와 <진>녀가 설사 음란하지 않았다 하여도,

낳아놓기만 하면 그리 되었으니,

<준>과 <욱>이 그리 되도록 키워냈던 것입니다.”

라 아뢰었고,

 

상은

 

“두려운 일이로고! 너는 짐이 감히 삼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구나.

살펴야 할 모든 것들을 글로 써서 후세의 황제들이 조심하게 하여라.”

라고 일렀다.  

 

장사(長史) <어진箊真>을 으로, <을장乙荘>을 로 보냈다.

 

상은 <경慶>이 놈에게 곧 베풀 생각이 있어서, 이 두 나라를 살핀 것이었다.

8월, <화덕華德>이 연전연승하여 백제 도성을 포위하였고,

<경慶>이 놈은 오래도록 지켜낼 수 없음을 알았던지라,

먼저 처자들에게는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도망치게 하였는데,

장군 <풍옥風玉>이 이들을 잡아서 바쳤다.

 

<경>이 놈의 처인 <아오지阿吾知>와 <가마지加馬只>,

<문주文周>의 처 <오로지吾魯知>, <곤지昆支>의 처 <자마紫麻> 등은

곱게 차리고 술을 따랐는데, 슬프고 애통한 기색이 없었다.

 

상이 <아오지阿吾知>에게 이르길;

 

“<초고>와 <구수> 등이 앞 사람들의 본을 따랐던들 너희들이 이리 되었겠느냐?”

라 하였더니,

 

<아오지>가 아뢰길;

 

“첩 등은 오래도록 상국의 기풍을 따르고자 하여왔었고,

지금에 와서야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동명>성조의 높으심은 하늘의 해가 땅에 내려와 계심과 같습니다.

 

모시게 되어 그 기쁨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상은 중외대부에게 이르길;

 

“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기름진 고기를 내어 주시오.”

라 하고는, 깨끗이 하고서 성총받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더니,

모두가 춤사위를 밟고 노래를 불러 바쳤으며, 이윽고 모두가 승은을 입었다.

 

<가마加馬>와 <자마紫麻>가 더욱 귀여움을 받았다.

9월, 상이 북성(北城)이 함락되었다는 것을 듣고

<가마加馬>와 <자마紫麻>를 데리고 그 성에 들어가려고,
먼저 길을 깨끗이 해놓으라 명하였다.

 

백제의 백성들이 밤을 새워 먼지를 쓸고 물을 뿌렸는데, 
<곤득困得>이라는 흉악한 놈이 만취하여 들어와 똥을 쌌다.

 

순라(巡邏)를 돌던 군인 <거말巨末>이 발견하고 목을 베니 머리가 길 위에 떨어졌고,
순라를 도는 기병이 그를 체포하였다.

 

법대로 다스리고자하니 임금이 다닐 길을 더럽힌 자도 사형이니,
<곤득困得>과 <거말巨末>은 같은 죄를 지은 것이었다.
 
상이 명하여 <거말巨末>의 죄를 용서하라하며 말하기를

 

“<거말巨末>은 충성심에 격분하여 분별력을 잃고 직접 죽였으니 지나침은 있으나

죄는 아니로다.

 

<곤득困得>의 처자와 재산을 <거말巨末>에게 주거라.” 

 

<곤득困得>은 사실 호족이었는데,

나라가 망한 것이 분하여 취한 것을 핑계 삼아 임금이 다닐 길을 더럽혔기에

그 족당들이 모두 죄를 받았다.

 

<거말巨末>은 소졸이었는데 졸지에 부호가 되고 예쁜 처첩을 얻어 즐거워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부러워하였는데, 법을 어겼으나 풀려나니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거말巨末>이 말하기를

 

“만약 성상의 분명함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이미 흙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단을 쌓아 황제를 위해 기도하였다.

 

신하들이 임금이 다닐 길이 더럽혀졌다하여 상에게 북성에 들어가는 것을 말리니,
마침내 아단성(阿旦城)으로 가서 포로들을 받았다.

 

<자비慈悲>는 군병을 이끌고 국경으로 나와서, 관망할 뿐 가까이 오지를 못하였으니,

마음이 매우 아팠을 것이고, <문주文周> 등은 목줄매인 강아지 꼴이었다.  

 

9월 5일에 <걸루桀婁>{재증걸루}가 <경사慶司>를 함거에 싣고 도착하였고,

상은 <경사慶司>를 살려주고 싶었으나,

군신들은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국강릉(國罡陵)에 바치길 청하였다.

 

사로잡은 8천 명은 5부에 나누어 주어 노비로 삼았으며,

<경사慶司>의 처첩과 궁인들은

공경들과 공을 세운 모든 장수들에게 비첩으로 삼게 하사하였다.

<장수대제기>

 

 

 

九月 再曾桀婁追王 于漢山之下 得之
使下馬拜己 而向而三唾之曰 汝知汝罪乎
慶司曰 知之
 
桀婁乃数之曰 汝聽奸臣之言 而不恤百姓 奪我妻女 以養色慾罪 一也
奪萬年之妻 二也
惑信道琳 浪起土木 三也
不奉上朝 而自通中國 四也
與鷄林共謀 以侵邊城 五也
乃縛送于阿且城下 弑之 
 
9월, <재증걸루>가 왕을 추격하여 한산(漢山) 아래에서 잡았다.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절하게 한 후 다가가 세 번 침을 뱉고 말하기를

 

“네가 네죄를 알렸다.”

 

<경사>가 말하기를

 

“알고 있다.”
 
<재증걸루>가 그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간신의 말을 듣고 백성을 돌보지 않았으며

 

내처와 딸을 빼앗아 색욕을 즐긴 죄가 첫째요,

 

<만년>의 처를 빼앗은 것이 둘째요,

<도림>에게 미혹되어 함부로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이 셋째요,

 

상국{고구려}을 받들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중국과 통한 것이 넷째요,

계림과 공모하여 변방의 성을 침범한 것이 다섯째이니라."

 

이에 아단성(阿旦城) 아래로 압송하여 죽게 하였다.
<자비성왕기>

 

 

 

至是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尒萬年(再曾古尒 皆複姓) 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 已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桀婁萬年 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이때에 고구려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 안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고, 왕은 도망나가 버렸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보자 말에서 내려 절을 하더니,
임금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

죄를 헤아리고는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밑으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그 나라 사람인데,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피하였다.

<삼국사기>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백제의 신하였다.

 

삼국사기는 <재증걸루>가 개로왕을 보자 말에서 내려 절을 한 후 침을 뱉었다한다.

 

<재증걸루>는 말에서 내려 개로왕에게 절한 것이 아니라,
개로왕을 말에서 내리게 하여 자신에게 절하게 한 후,
그에게 다가가 침을 뱉은 것이다. 

 

<재증걸루>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괴롭히고,

자신의 가족을 해체시킨 개로왕을 사로잡고,
그 마음의 한을 풀기위해 개로왕을 말에서 내리게 한 후,
자신에게 잘못을 인정하라고 절을 시킨 것이고,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하는 대신 침을 뱉은 것이고,
그리고 그가 나라와 자신을 포함한 백성들에게 잘못한 점을 나열한 후,
장수대제가 기다리는 아단성 밑으로 압송한 것이다.

 

 

일모(一牟)사시(沙尸)광석(廣石)답달(沓達)구례(仇禮)좌라(坐羅)는

신라가 백제에 대비하여 충북지역에 쌓은 성이다.

 

 

 

※ 참고 <한성백제의 멸망과정>

 

 

- 백제의 전면으로 부상한 한성 해씨와 왕족 부여씨

 

 

전지왕 원년(서기 405)

 

14년에 아신왕이 죽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訓解)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막내 동생 첩례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국에서 부음을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병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했다.

 

국경에 이르자 한성(漢城) 사람 해충(解忠)이 와서 말하였다.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지가 왜인을 머물게 하여 자기를 호위하게 하고,

바다 가운데의 섬에 의지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전지왕 3년(서기 407)

 

봄 2월, 이복동생인 여신(餘信)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해구(解丘)를 병관좌평으로 삼으니 모두 임금의 친척이었다.
 

 

전지왕 4년(서기 408)

 

봄 정월, 여신을 상좌평(上佐平)으로 삼아 병사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이라는 관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다.


 

 

북부의 진씨는 광개토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아신왕이 죽었다.

 

아신왕이 죽자 왜국에 있던 전지왕이 돌아온다.

 

한성 해씨는 태자 전지를 옹립하는데 성공하고 권력을 차지한다.

 

이로써 근초고왕 부터 이어지던 북부 진씨의 시대가 마감된다.


 

 

- 구이신 시기에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선 충청도 세력


 

일본서기 응신기 25년

백제의 직지왕(전지왕)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405-470?)이 왕이 되었다.

 

왕은 16세로 나이가 어리므로 <목만치>가 국정을 집행하였는데

왕의 어머니{인덕천황의 딸 八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러들였다.

 

[백제기에 이르기를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에서 전횡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귀국(일본)에 갔다가 돌아와 천조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천조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군이 임진강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부 진씨는 물론

한성의 해씨의 세력도 기존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충청도의 귀족들은 점차 백제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반영하는 것이 일본서기의 기록인데 

구이신왕 시기에 목만치의 권세가 세상을 덮을 정도로 높다고 적혀있다.

 

목만치는 마한정벌을 수행하던 목라근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목라근자는 충청도의 귀족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백제의 중심이 한강에서 금강권으로 이동하고 있다.


 

- 광개토의 가야원정 이후 신라에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군

 

 

삼국유사 기이 실성왕

 

실성왕은 전 왕의 태자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 장차 죽이고자

고구려의 군사를 청해서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였다.

 

고구려 사람은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음을 보고

이에 창을 돌려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눌지 마립간 원년(서기 417)

 

내물왕 37년(서기 392)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임금이 되자 내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으려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와 몰래 이르기를

 

“눌지를 보거든 죽여라.”라고 하였다.

 

이어서 눌지에게 떠나도록 하여 도중에서 만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의 외모가 시원스럽고 정신이 고아하여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보고는 도리어 그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그대 나라의 임금이 나에게 그대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가 없다.”

그리고 바로 되돌아갔다.

눌지가 그것을 원망하여 오히려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 고구려군을 신라에서 철수시키는 장수왕


장수왕 12년(서기 424)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임금이 그를 후하게 예우하였다.


 

 

장수왕이 신라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

 

이는 고구려의 내부권력투쟁과 관련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평양으로 천도하는 장수왕


장수왕 15년(서기 427)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장수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금의 노룡인 평양으로 천도한다.


 

 

- 북연의 멸망, 고구려로 망명하는 풍홍


장수왕 24년(서기 436)

 

연나라왕이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위나라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사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침입하기 직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낭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임금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사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에 가서 연나라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나라의 성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고에 있는 정교한 의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나라왕이 용성(龍城)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북위가 북연을 공격하자 풍홍은 용성을 불태우고 고구려로 망명한다.

 

고구려가 북연을 흡수하게 된 것이다. 


 

 

- 나제 동맹의 형성


눌지 마립간 18년(서기 434)

봄 2월, 백제왕이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또 백제왕이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임금이 황금과 야광주를 백제에 예물로 보내 답례하였다.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는다.

 

- 고구려 장수를 죽이는 신라


장수왕 38년(서기 450)

 

신라인이 우리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임금이 노하여 병사를 출동시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와 용서를 빌었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


 

 

신라인이 고구려 장수를 죽였다.

 

고구려가 남쪽을 신경을 쓰지 못하는 동안

신라의 국력은 점차 신장하고 백제도 회복해 가고 있다.


 

 

- 영토를 확장하는 신라


자비 마립간 6년(서기 463)

봄 2월, 왜인이 삽량성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임금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자비 마립간 11년(서기 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자비 마립간 13년(서기 470)

삼년산성을 쌓았다.


 

자비 마립간 17년(서기 474)

 

일모(一牟)사시(沙尸)광석(廣石)답달(沓達)구례(仇禮)좌라(坐羅) 등의

성을 쌓아서 백제를 대비함

 

 

 

 

 

5세기 중반에는 신라의 영토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실직, 사벌, 삽량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시기의 신라는 삼년산(충북 보은)과 독산(경기도 오산)에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년산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고 백제를 무너뜨리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이다.


 

 

- 정변으로 사망하는 비유왕


비유왕 29년(서기 455)

 

봄 3월, 임금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깐 동안 짙은 구름과 안개가 몰려 어두워지자 날아갔다.

임금이 돌아가셨다. 


 

개로왕 18년

 

도림이 말하였다. "...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고 ..."


 

 

왕권강화를 추진하던 비유왕이 살해당한다.

 

비유왕의 뒤를 이은 개로왕은 모든 권력을 왕을 중심으로 편재시키는데 성공한다.


 

 

- 다시 신라에 주둔하는 100명의 고구려군, 신라에 있는 고구려 병사를 죽이는 신라


일본서기 웅략 8년 (서기 464년)

봄 2월에 <신협촌주정>과 <회외민사박덕>을 사신으로 삼아 오국(吳國)으로 보냈다.

 

천황이 즉위하고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이 속이고 배반하여

포저(예물을 의미)를 바치지 않은 지가 지금에 이르러 8년째였다. 

 

그러나 중국(中國)의 의도를 매우 두려워해서 고구려와 화의를 닦았다.

 

이로 인해 고구려 왕이 정예병사 1백 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군사 한 사람이 잠시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신라인을 전마(典馬, 말을 관리하는 사람)로 삼았다.

 

그가 돌아보며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 의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어떤 책에서는 "너희 나라가 마침내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전마는 이를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고 물러나서 뒤에 있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달아나 들은 바를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줄 알고,

사신을 보내 급히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명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곧 그 뜻을 알고 나라 안에 고구려인을 모두 죽였는데,

다만 고구려인 한 사람이 틈을 타서 벗어나 도망쳐 자기 나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고

구려왕(장수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筑足流城)에 모여서

[어떤 책에서는 도구사기성(都久斯岐城)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노래와 춤으로 즐거움을 돋우었다.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임나왕이 <선신반구(膳臣班鳩)>[반구(班鳩)는 이카루가라고 읽는다.],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하였다.

 

<선신> 등은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직접 힘써 군대를 위로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빨리 공격할 준비를 시켜 급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밤에 험한 곳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군대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운반하고 매복병을 배치하였다.

 

새벽에 고구려는 선신 등이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두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러자 매복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

 

관군이 구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하마터면 나라를 빼앗길 뻔하였다.

 

"지금부터는 어찌 천조(天朝)를 배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장수왕은 다시 고구려 병사 100명을 신라에 주둔시킨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 군사를 모두 죽인다.

 

신라가 고구려군을 살해하자 장수왕은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을 점령한다.

 


 

- 실직을 빼앗는 고구려


장수왕 56년(서기 468)

 

봄 2월, 임금이 말갈의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자비 마립간 11년(서기 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니하를 니천(泥川)이라고도 한다.]에 성을 쌓았다.

 

고구려는 실직을 빼앗아 신라를 공격한다.

 


 

- 실직을 공격하는 동안 청목령으로 진출하는 개로왕


 

개로왕 15년(서기 469)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겨울 10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장수와 병졸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백제는 광개토왕 시기에 도압성, 청목령, 쌍현성, 사구성까지 함락되었었다.

 

진사왕은 사구성을 수리했으며 한동안 백제의 최전방 성으로 존재했다.

 

왕권을 강화한 개로왕은 국력을 결집해 쌍현성을 수리하고 청목령에 목책을 쌓는다.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에 있는 고구려 성들은 군사만 주둔하는 성과 보루들로

일반 주민들은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 내란이 발생한 고구려


개로왕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임금이 표문을 올렸다.
(중략)

“지금 연(璉, 고구려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어육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끊임이 없습니다.

 

죄악은 넘쳐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


 

장수왕 59년(서기 471)

 

가을 9월, 민노구(民奴久) 등이 위나라에 도망가서 항복하였다.

위나라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주택을 주었다.

이 해가 위 고조(高祖) 연흥(延興) 원년이었다.


 

 

고구려에 내란이 발생하였다.

 

장수대제는 내란을 진압하였고 민노구 등은 북위로 망명한다.

 

백제는 이 혼란을 기회로 여기고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할 것을 건의 한다.


 

 

-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을 건의하는 개로왕


개로왕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임금이 표문을 올렸다.
(중략)

“지금 연(璉, 고구려 장수왕)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어육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끊임이 없습니다.

 

죄악은 넘쳐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써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馮族)의 병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싸움이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지만

힘을 다하여 우리 병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


 

장수왕 60년(서기 472)

 

가을 7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부터 공물의 수량이 종전에 비하여 배로 늘었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위나라에서 주는 물량도 다소 증가하였다.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건의하자

장수대제는 조공량을 증가시키고 외교 관계를 강화한다.

 

위기를 극복한 장수대제는 백제 정벌을 준비한다.

 

 

- 장수대제의 백제 정벌 전 사전조치

 

 

장수42년{AD474}갑인,

 

7월, 상이, 주류궁(朱留宮)으로 갔다가 황산(黃山)으로 돌아와서는

 

영락대제를 지내고서 종실과 삼보들에게 이르길;

 

“선제{영락대제}께서는 국강(國罡){국강상왕=고국원제}의 치욕을 씻고자 하셨으나, 하늘이 목숨에 짬을 주시지 않았었소.

 

짐은 병력을 키워서 그 기회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소.

 

지금 때가 이미 무르익었소.

 

아이들 모두가 백제 해골들은 남쪽으로 물을 건너 도망가고,

신라 사람들은 몸 사리고 경계를 지킨다는 말을 하고들 있소.

 

인심은 암암리에 천심을 살피는 것이니,

이제는 <경慶>{부여경, 개로왕}> 그놈이 기필코 망할 때가 되었소.”

라 하였다.

 

모든 신하들도 이구동성으로 찬동하였다.

상은, <화덕華德>에게 명하여, 3만병을 이끌고 먼저 떠나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일모(一牟)사시(沙尸)광석(廣石)답달(沓達)구례(仇禮)
좌라(坐羅)

등의 성을 쌓아서 백제를 대비하고 있었다.

 

백제 백성들은 북쪽의 군병이 크게 몰려 온 줄로 알고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놀라서는 집을 버리고 토굴거처로 달려갔다.

 

양 편을 잘 알아 미리 감을 잡았던 것이었다.  

 

땅의 사람 <계稽冲> 등이 와서 알리길;

 

“<휴범休範>이 거병하여 건강(建康)으로 가서 <이욱李昱>{劉昱}을 토벌하려다가,

<소도성蕭道成>{太祖=高帝}>에게 피살되었습니다.”라 하였다.

 

<욱{彧}>은, <도아道兒>{소도성蕭道成}와는 남색하면서,

<진>비와 붙어서는 <욱{昱}>을 낳았고, 자신의 동생 열다섯을 죽였는데,

<휴범休範>이만은 홀로 어리석은 체하면서 <욱{彧}>의 처자를 받들어 모시면서

죽음을 면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조금을 더 참지 못하였다가 피살된 것이었다.

 

<도성道成>이는 무부(武夫)로서 황제를 자칭하였다.

 

황금 보기를 흙같이 하며 겉치레를 꺼려하는 자였으나,

속으로는 외로운 임금을 속였었으니,

역시 <마의馬懿>나 <유유劉裕>{高祖 武帝>}와 같은 부류이었다 할 것이다.

상이 이르길;

 

“<의懿>가 <유裕> 같은 이를 생기게 하고,

<유>가 <도성道成>이 같은 자가 생기게 한 것을 제대로 된 일이라면,

<여령>이 <>를 낳고 말을 바꾸어 탄 것과 <도성道成>이가 <욱>을 낳고

<유>씨로 (성을 바꿔) 칭한 것 역시 제대로 된 일이잖소?”

라 하였다.

 

<욱>은 (나이가) 열둘로 {어려서} 경솔하고 방자하였으며,

<진>는 음란하고 추접한 짓을 일삼았으니 임금을 기만할 호기를 준 것이었고,

<도성道成>이 보위를 찬탈한 것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 시절, 의 <풍>녀 또한 폐신 <이혁李奕>과 음란하고 추접하게 놀아났었고,

는 스스로는 문(文)을 세우고 도(道)를 좇는다고는 하였지만,

그들의 더러운 행실이 이와 같았더니,

 

상이 이르길;

 

“짐의 후궁들은 설사 100날을 홀로 두어도 원망함이 없소.

<진>후와 <풍>녀 무리들은 추접스런 짐승 중에서도 추접스런 짐승이오.”

라 하였다.

 

이에 <황>태자는

 

“상전이 예의를 따르면 아랫사람들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고 하니,

곧 폐하를 두고 하는 말입지요.

 

<풍>녀와 <진>녀가 설사 음란하지 않았다 하여도,

낳아놓기만 하면 그리 되었으니,

<준>과 <욱>이 그리 되도록 키워냈던 것입니다.”

라 아뢰었고,

 

상은

 

“두려운 일이로고! 너는 짐이 감히 삼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구나.

살펴야 할 모든 것들을 글로 써서 후세의 황제들이 조심하게 하여라.”

라고 일렀다.  

 

장사(長史) <어진箊真>을 으로, <을장乙荘>을 로 보냈다.

 

상은 <경慶>이 놈에게 곧 베풀 생각이 있어서, 이 두 나라를 살핀 것이었다.


 

 

 - 한성을 함락시키는 장수대제


개로왕 21년(서기 475)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巨璉, 장수왕)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을 포위하였다.

 

임금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병사를 네 방면의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우니,

사람들이 두려워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임금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는데,

고구려 병사가 추격하여 임금을 살해하였다.


 

장수왕 63년(서기 475)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漢城)을 점령한 후,

백제의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장수왕은 3만의 병력으로 한성을 공격한다.

 

장수왕은 청목령, 쌍현성, 사구성, 북한산성, 아단성을 모두 무너뜨리고

한성을 공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한성 침공 경로>

 

<백제의 고구려 防禦城과 대방>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