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43년{AD475}을묘,

 

정월, <자비慈悲>가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명활성(明活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화덕華德> 부처(夫妻)에게 온수궁(溫水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화덕華德>의 나이 86살이었고, <호산好山>의 나이는 90살이었는데,

둘 다 건장하여 능히 일을 맡아볼 수 있었다.

 

<호산好山>은 상의 동복 여동생으로 일찍이 보비가 되어 <람산藍山>공주를 낳았었다.

 

<람산藍山>공주 역시 <화덕華德>의 처가 되었다.

<화덕華德>의 아들 <호덕好德> 또한 나이가 67살인데도 뛰어나게 용맹하여

군진의 머리에 능히 설 수 있었으며, 역시 상의 딸을 취하였다.

 

<직>공주가 <호덕好德>의 아들 <양덕陽德>을 낳았는데,

그 또한 도량이 큰 장부의 기풍이 있었다.

 

한 집안 3대 모두가 남쪽을 정벌하는 일에 참여하였었다.

 

상이 <호현好贤>공주를 또 <양덕陽德>에게 처로 주고는

평생토록 부마로 있으라고 명하였다.

 

 

3월, <초楚>태자가 魏에서 돌아와 고하길;

 

“<이혁李奕>이 <풍馮>태후와 함부로 놀아남이 날로 심하여지더니,

<홍弘>이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고 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홍弘>이는 꾀가 없어서 필시 <풍馮>이에게 잡힐 것이다.”

라 하였다.

 

 

5월, <호덕好德>이 <백제>의 50여 성을 떨어뜨렸더니,

<문주文周>는 <자비慈悲>에게로 도망쳤다.

 

이에 상이 <자비慈悲>가 하늘을 거역함에 노하여 정벌하려 하다가,

 

<황晃>태자가

 

“멈출 줄 아는 것도 귀중한 것입니다. 두 마리의 사슴을 쫓아서는 아니 됩니다.”

라 간하였더니, 그만두었다.

 

6월, <풍옥風玉>태자를 <자비>에게 보내서

백제 땅을 나누는 문제를 의논케 하였더니,

<자비>가 자신의 딸 두 명을 태자에게 바쳐서 태자를 시침하게 하였다.

 

태자는 <자비>가 조서를 봉행하지 않기에 책망하였는데도,

<자비>는 의심하면서 단안을 내리지 못하였다. 

 

10월, <자비>가 웅진땅을 <문주>에게 주어 남은 무리를 수습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유비>가 형주를 빌리더니 吳와 서로 다투었소.
<자비>는 필시 <문주>에게 잠식당할 것이오.”

라 하였다.

<장수대제기>

 

 

 

 

자비18년(AD475)년은 청토(靑兎=乙卯)의 해이다.

 

正月 王移居 明活城

二月 扶余解仇等 收復漢山 斬桀婁 于熊津市

扶余使燕信 修葺大豆城 移漢北民戶

<자비성왕기>

 

자비왕18년(475년)

 

봄 정월, 왕이 명활성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거주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이 점령되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당하자 문주왕(文周王)은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개로왕21년(475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하자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 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중 <도림>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왕 근개루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오,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어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

隋書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저자의 견해] 

 

초 나라 소왕이 운 땅으로 도망갔을 때,

운공인 <신>의 아우 <회>가 소왕을 죽이려 하면서 말했다.

 

"평왕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신>이 말했다.

 

"임금이 신하를 치는 것을 누가 감히 원수로 생각하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 같은 것이니,

 

하늘의 명령으로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라 하겠는가?"

 

<걸루> 등은 자신의 죄 때문에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았는데,

도리어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자기 임금을 묶어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정도가 심하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오 자서가 초 나라 서울 영에 들어가,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한 것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라고 말할 것이다.

 

양자 [법언]에는 이를 평하여

"덕에 기반을 둔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인'과 '의'가 있을 뿐이니,

오 자서의 잔인함이 운공의 어진 행위만 못하다.

 

이렇게 평한다면 <걸루> 등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문주왕['文周'를 '汶州'로도 쓴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어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저자의 견해에서

<재증걸루>의 행동을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기술하였다.

 

<재증걸루>가 개로왕에게 절하게 하고 침을 뱉은 것을

<재증걸루>가 개로왕에게 절 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과연 자신의 가족을 죽인 왕에게 복수하는 것을 불의(不義)라고만 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는 474년 9월에 개로왕이 죽은 것을

개로왕 21년 475년 9월에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개로왕 21년은 존재하지 않는 해이다.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따라도 475년이 문주왕 원년이 된다.

 

유월칭원법(踰月稱元法)을 따르면 474년이 문주왕 원년이 된다.

 

그러나 474년 9월에 개로왕이 죽고 475년10월까지는 空位로 있었으므로

475년이 문주왕 원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는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무령왕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다.

 

 

문주왕은 비유왕과 신라女 周씨 사이에서 431년에 태어난 개로왕의 이복동생이고

무령왕은 개로왕과 飯豊皇女(440-483)사이에서 태어난 개로왕의 아들이다.

 

 

문주왕은 신라의 원병 1만을 얻어 475년 2월에

<해구解仇> 등으로 하여금 한산(漢山)을 수복하게 하고

<재증걸루>를 사로잡아 웅진에서 참하고 10월에 웅진에서 즉위하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