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44년{AD476}병진,
6월, <풍馮>녀는 <홍弘>이 <혁奕>을 죽인 것이 한이 되어
짐독으로 <홍弘>을 죽이고 나서 조정에 나아가 자신이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풍馮>녀는 魏를 망하게 하는 악귀이오.
어찌 음란함을 즐기다 자식을 죽였단 말이오.
사악한 소나 말은 오히려 죽일 수 없으면서도 자식은 죽일 수 있었단 말인가?”
라 하였다.
7월, <풍馮>녀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서 <홍弘>이 병으로 죽었다고 알렸다.
이에 상이 무슨 병이었냐고 물었더니
더위를 먹었었다 하기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음기가 성하면 양기가 막히는 일은 없는 법이오.
그대의 나라는 음기가 크게 번성하였잖소?”라 하였다.
<조다助多>태자를 魏로 보내 <홍弘>을 문상하게 명을 내리며, 이르길;
“연단(鍊丹)과 황로(黃老)를 통틀어보면
결국 진리는 우마(牛馬)라 할지라도 살생을 금하는 것이거늘,
아무리 제멋대로였어도 티끌 하나만큼은 어질지 않았겠는가?”라 하였다.
누군가가 <풍馮>녀에게 고하길;
“우마(牛馬)라 함은 <풍馮>씨 집안의 암컷을 말함이다.”라 하였다.
<풍>녀는 감히 무슨 말인지 묻지 않고 <조다>를 후하게 대접하면서
“숙황(叔皇)께서는 춘추가 높아지시더니 글로 써서 하시는 말씀도
이렇게도 멋있어지셨습니다.”라 하였으며,
<조다助多>는
“부황(父皇)께서는 언니이신 후와 월해(月海)에서 만나길 바라셨었습니다.
<풍馮>녀께서 나이 드신 몸으로 손수 속옷을 풀어헤치는 욕정이 없으셨다면
그리고 <하란賀蘭>이 아무런 힘도 기울이지 않았었다면,
어찌 능히 광한전(廣寒殿)에 다다를 수 있었겠습니까?”라 하였다.
그랬더니만, 늙은이가 오히려 욕정을 불태워서 <조다助多>와 상통하였다 한다.
<조다助多>는 바야흐로 나이가 서른셋이었고 <가란嘉蘭>의 소생이었는데
<풍馮>녀와 정이 깊어졌다.
<풍馮>녀가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정식 후사로 삼아주길 청하였던 바,
그리하여 동궁부와 그에 속한 관료가 생기게 되었다.
그랬더니 <조다助多>는 <풍馮>녀를 일탈하게 하면서 魏에 눌러앉아 돌아오지 않았다.
동궁의 인장과 책서를 魏로 보내주었다.
魏도 별도로 책봉의 례를 행하여 주었다 한다.
※ 참고
연단(鍊丹) : 道家에서 不老不死하는 薬을 만드는 재주
황로(黃老) : 仙家의 記述
북위의 <풍馮>태후가 그녀의 아들 <탁발홍>을 독살하자
장수대제의 아들인 <조다>태자가 조문사절로 북위에 가서
<풍>태후와 눈이 맞아 북위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다.
<조다>태자는 文咨明治大帝(羅雲)(462-519)의 아버지이다.
- 北魏의 여걸 <풍馮>태후{문명태후}
북위의 인물 가운데 우리역사와 관계있는 인물이
바로 <풍馮>(442-490)태후이다.
<풍馮>태후의 할아버지가 바로 <풍홍馮弘>이기 때문이다.
<풍홍馮弘>은 北燕의 마지막 왕으로서
모든 백성을 데리고 고구려에 망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고구려에 들어와서도 황제를 칭하고 정치를 하며
형벌과 포상을 하는 등 제멋대로 해서 장수대제는 그를 죽였다.
북연의 마지막 황제 <풍홍>의 둘째 아들이 <풍>태후의 아버지 <풍랑>이다.
<풍랑>은 아버지 <풍홍>이 후처 모용황후가 낳은 <풍왕인>을 태자에 책봉하자
(풍랑은) 어머니 왕씨, 큰 형 <풍숭>, 동생 <풍막>과 함께 북위로 귀순한다.
그뒤 <풍랑>은 북위에서 진옹이주자사(진주와 옹주 두 개주의 자사)를 지냈는데
동생인 <풍막>이 유연에 투항하자, 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풍>태후는 적몰(籍沒: 모두 몰수됨)되어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다.
이때 궁에는 <풍>태후의 고모가 <탁발도托跋燾(408-452)>{世祖 太武帝}의
제1서열 후궁인 좌소의(左昭儀)로 있었는데,
고모가 정성들여 길러 귀인(후궁)에 선택되었고
그 뒤에 <탁발준托跋浚(440-465>{高宗 文成帝}의 황후가 되었다.
<탁발준>의 정실부인인 문명태후 <풍馮>태후는
<탁발준>이 26세로 일찍 죽고
466년 <탁발홍托跋弘(453-476)>{顯祖 獻文帝}이 14살에 즉위하자
<풍馮>태후가 섭정을 하여 모든 대신을 죽이고
권력을 한손에 움켜쥔 <을혼>을 체포하여 죽였다.
그리고 <풍馮>태후 자신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였다.
<탁발굉托跋宏(467-499)>{高祖 孝文帝}이 태어나자 양육을 계기로
<탁발홍>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
<탁발홍>이 총명하고 예지가 있으며 일찍 성숙했고 강직하고 굳세며
결단성이 있는 훌륭한 군주가 되자 <풍>태후는 헌문제를 쫓아내고
5살짜리 <탁발굉>으로 하여금 황제 노릇을 하게 하였다.
(훌륭한 황제는 자기에게 불리하기 때문)
上皇이 된 <탁발홍>이 계속해서 북쪽의 유연을 토벌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고 훌륭한 인재를 임명하며,
정부(情夫) <이혁지>까지 죽이니
풍태후는 476년에 드디어 아들 <탁발홍>을 독살하여 죽였다.
태황태후가 된 <풍>태후는 다시 국가를 직접 통치하였다.
<풍>태후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하였으며 권모술수도 많았다
여러 아랫사람들이 말하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워하거나 꺼릴 것이 있으면 번번이 그를 죽였다.
총애하는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작은 과실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태장이나 채찍을 가하였다.
<탁발굉>이 영민한 것을 꺼렸고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황제를 또다시 폐위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추울 때 황제{탁발굉}를 빈방에 가두고 3일간 먹을 것을 끊었다.
참소에 의해 황제를 수십 대 때렸다.
풍태후는 그런 사람이었다.
승부욕이 강하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잔인하고, 아랫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죽이며
작은 과실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벌을 가하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죽이고,
황제도 마음대로 폐위시키고,
한참 추울 때 황제도 빈방에 가두고 먹을 것을 끊어버리며
황제도 마음대로 수십 대씩 때리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풍>태후의 국혼 요청을 장수대제는 정면으로 거절하였다.
그것도 몇 번 씩이나...
공주를 보내달라.그것은 안된다(시집갔다) 조카를 보내겠다.
그럼 조카를 보내달라. 그것도 안된다(죽었다)
그럼 종친(宗親)의 딸이라도 보내 달라. 안된다.
장수왕이 <풍>태후의 요청을 이 정도로 철저히 거절했다.
잔인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무자비하며 황제도 멋대로 폐위하고
심지어 자기 아들인 황제를 죽이는 풍태후가 이런 일을 고구려에게 당했다.
그러면 <풍>태후는 어떻게 했을까?
<풍>태후의 성질대로라면 당장 고구려를 요절냈을 것이다.
당장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침략을 가하고
장수대제를 죽여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자기의 분풀이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풍>태후는 아무것도 못했다.
군사력 동원은 커녕 말 한마디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고구려의 군사력이 강대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그런 관계였다.
고구려의 왕이 북위의 최고 권력자의 요청을 완전히 짓밟아도
군사적 보복은 커녕 말 한마디도 못하는 관계였다.
식민사관과 사대주의에 물든 일부 유학자들의 철처한 참회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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