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 解仇의 쿠데타

고대사 2014. 10. 22. 11:11

 

장수45년{AD477}정사,

 

정월, <문주文周>가 궁실을 중수하였다.

 

그의 처 <해>씨가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상통하고 정사를 함부로 주물렀다.

 

<문주文周>는 자신의 세력이 외톨임을 알고는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삼근三斤(465-479)>을 적윤으로 삼아서 <해解>씨를 위안하였다.

 

<해解>씨가 <해구解仇>와 상통한 것은 혼인하기 전부터였던지라

<해구解仇>를 졸지에 적대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종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혹간엔 이복형라고도 한다.

 

7월, <곤지昆支>가 갑자기 죽었다. <해解>씨가 짐독으로 죽였다고도 한다.

 

 

9월, <문주文周>가 서원(西原)으로 사냥을 나가자,

<해구解仇>가 자신의 심복 신하를 시켜서 몰래 엿보아 죽였으나,

자신은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삼근三斤>을 세웠다.

 

삼근의 나이는 겨우 열 셋이었으나

남을 으르는 힘이 있고 능히 복속시킬 수도 있었다.

 

<해구解仇>의 딸이 그의 처가 되었다.

 

<해구解仇>의 처는 <해구解仇>가 <해解>씨와 서로 놀아나는 것이 싫어서

 

<삼근三斤>에게 고하길;

 

“모후와 첩의 지아비가 상통하여 폐하를 위협하려 하오.

폐하께서는 응당 첩의 오빠인 <진남真男>과 함께 계획을 세워

그들을 쳐야 할 것이오.”

라 하였더니,

 

<삼근三斤>은 그래야 하겠다고 여기어 <진남真男>을 위사좌평으로 삼고

위졸 2천여 명을 늘려 모아서 훈련시켰다.

 

<해구解仇>가 <해解>씨에게 명하여 <삼근三斤>을 죽이라 하였으나

자신이 낳은 아이인지라 죽일 수 없었고,

<진>씨 모녀 또한 등용되어 출사하고 있는지라 보호하기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황손에게 가르쳐 이르길;

 

“<문주文周>는 얌전하고 유약하여 반드시 자신을 죽게 한 것이었고,

<해구解仇>가 임금을 죽이는 것 또한 필경 호랑이가 노루 잡듯이 쉬울 것이다.

사람을 등용하여 권한을 주고 세력을 옮기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훗날 네가 임금이 되거든 꼭 이 말을 세 번을 떠올려라.”

라고 하였다.

 

상이 아끼는 <경>공주를 황손 비로 삼아 준 것은 나라를 물려 줄 뜻이 있었음이고, 그렇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장수대제기>

 

 

 

적사(赤蛇=丁巳)년 (A.D. 477)
九月 文洲出獵 奴士只之原 解仇使其黨 作盜狀 而弑之

牟大等 乃告于我 請救 王命一牟城主孝山 引兵 入熊津

<자비성왕기>

 

 

 

문주왕 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 좌평 곤지가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문주왕의 처 해씨는 혼인하기 이전부터 문주왕의 종형인 <해구>라는 자와 상통해왔고

정사를 함부로 주물렀다.

 

자신이 외톨이임을 알게 된 문주왕은 동생인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아들인 <삼근三斤>을 적윤으로 삼는다.

 

477년 7월 해씨는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를 독살한다.

 

9월 문주왕이 사냥을 나가자 <해구>가 자신의 심복들을 시켜서 문주왕을 죽이나

자신이 보위에 오르지는 못하고 13살이던 삼근태자를 왕으로 세운다.

 

<해구>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직접 왕이 되는 대신에

자신의 딸을 삼근왕의 왕비로 보내고 모든 정사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해구>가 쿠데타를 일으켜 <문주>를 죽이고 <삼근>을 보위에 올리자

<모대>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신라 일모성주 <효산>이 병력을 인솔하여 웅진으로 입성한다.

 

<진남>이 위졸 2,500을 이끌고 신라 병력과 함께 <해구>를 쳤다. 

 

<진남>의 조카인 <진로眞老>가 날쌘 자 5인을 골라 수로(水路)로 성을 깨고 돌입하여

<해구>를 사로잡아 베어 죽였고,

<연신燕信>의 처자를 저잣거리에서 찢어 죽였고

<해구>의 처는 내응해서 공을 세웠다하여 국대부인을 삼았다.

 

삼근왕은 <곤지>의 처 <진선眞鲜>을 첩으로 삼고,

<곤지>의 아들로 한살 아래인 <모대>{동성대왕}를 아들로 삼았다.

 

479년 11월 동성대왕은 즉위하고 나서 삼근왕이 죽었음을 세상에 알린다.

 

<해구>의 처와 딸 모두는 삼근왕이 언제 죽었는지를 몰랐다.

 

동성왕은 삼근왕을 섬겼던 <해구>의 딸을 처로 맞아들인다고 기록함으로서

당시 뭔가 정변(쿠데타)이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475년 <곤지(444-477)>는 <사마斯摩(461-523)>를 왜의 무왕으로 세우고

백제에 나가 공주 천도를 돕는다.

 

<사마斯摩>는 왜의 무왕은 나이 15세로 구주의 왕이 되었고

고사기의 웅략기에 소꼽장난하는 사춘기 천황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서기 477년 송서는 왜(倭)에서 사신이 와서 흥(興)이 죽고

동생 무(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무(武)는 스스로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였다.

여기에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은 일본열도 구주의 신라계와 고구려계및

가야계를 정벌하고 구주를 왜 무왕 <사마>가 통일하였음을 말한다.

 

<사마斯摩>는 백제 개로왕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왕자이다. 

 

이 무렵 그가 미와강에서 적저자(赤猪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미와강의 적저자(赤猪子)는 윤공천황의 4대 손으로 고구려의 피를 이은 공주이다.

 

사춘기를 맞은 백제왕자와 고구려의 공주가

나라현의 미와강 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한백수랑(韓白水郎)의 전(畑)이란 바로 왜무왕 즉 훗날의 무령왕이다.

 

현종천황기는 적저자(赤猪子)를 난파소야(難波小野)라 하고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의 설화는

난파(難波)의 즐어녀(鮒魚女)라 하였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라는 말을 남기고

무령왕이 열도를 떠난 것은 서기 479년이다.

 

그들의 나이 열 아홉 살 때 일이다.

 

그 때 이미 난파(難波)의 즉어녀(鮒魚女)는 임신 중이었다. 

 

떠나면서 무령왕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 평군유신(平群鮪臣)에게

난파소야(難波小野)의 신변을 부탁하였다.

 

서기 485년 반풍황녀의 동생 현종이 즉위한다.

 

반풍황녀가 사망하고 현종이가 즉위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쿠데타의 가능성이 많다.

 

현종은 대반금촌연(大伴金村連)를 시켜 평군유신(平群鮪臣)을 죽이고

난파소야(難波小野)를 자기 여자로 만든다.

 

조카의 여자를 빼앗은 것이다.

 

적저자(赤猪子)는 무령왕과의 언약을 지킬 힘이 없었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하고 떠난 무령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대반금촌연(大伴金村連)은 윤공천황 시절의 대반옥실(大伴室屋)의 손자이다.

 

대반옥실(大伴室屋)은 윤공천황과 함께 고구려에서 온 사람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