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48년{AD480}경신,

 

2월, <조다助多>태자의 시신이 에서 도착하였다.

 

태자가 <풍馮>후와 겹혼하여서 애를 낳음을 좋아니,

<이혁李奕>은 시새움이 적지 않아 자객을 보내 여러 번을 엿보았었다.

 

이때가 되어 괴이한 도둑놈의 화살을 맞아 독으로 죽은 것이었다.

 

이에 상이 소리 내어 울면서 이르길;

 

“아비는 동쪽의 황제이고 너는 서쪽의 황제이어 복이 이미 넘쳤었거늘,

너는 왜 조심하지 않았다가 이런 꼴이 되었느냐, 얄궂구나.”

라 하였다.

 

<조다助多>비가 울면서 아뢰길;

 

“황상이신 아버님의 설욕을 원합니다.

<풍홍馮弘>과 <풍>년이 죽인 것입니다.

어찌 알고서도 복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 하니,

 

상이 이르길;

 

“네가 지아비를 잃었다 하여 원망하며 창질을 하자는구나.

내가 어찌 발명(發明)할 수 있겠느냐!

다만 너는 아들이 이미 장성하였으니 개가는 아니 된다.”

라 하였다.

 

황손에게 명하여 어미를 데리고 가서 황산(黃山)에 묻어주게 하였다. 

 

 

4월,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를 지냈다. 

 

<도성道成>이 사신을 보내와서 능라와 금수 및 공작 등의 물건을 바쳤기에,

장사(長史) <왕진王晉>에게 명하여 답방 사신을 보내 만나보게 하였더니,

 

의 수군이 붙잡아 놓고는,

 

가 말하길;

 

“{<도성>이는} 임금을 죽인 도적놈인데, 숙황께서는 어찌 오가게 하십니까?”

라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오는 자는 막는 것이 아닌 까닭임이다.”

라 하였다. 

 

11월, 말갈에 명을 내려서 신라비열홀을 쳤다.

 

 

 

 

- 북위의 황후가 된 고구려 여인 문소황후 고조용(469-497)

 

 

<풍>태후가 475년 <정준程駿>을 국혼 사신으로 고구려에 파견하였으나

고구려에서 혼담을 끝내 거절한 상태에서

혼인 상대자 <탁발홍>을 <풍>태후가 476년 6월에 독살함으로써

국혼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풍>태후는 고구려와의 혼사를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고구려 장수대제가 혼담을 끝내 거절하자 <풍>태후는 북위로 들어온 고구려 사람,

<고양高颺>의 딸을 궁으로 데려감으로써 고구려와의 혼사를 기어코 성사시켰다.

 

481년 <고양高颺>의 딸의 나이가 13살 때이다.

 

이 <고양高颺>의 딸 <고조용高照容(469-497)>이 뒤에 문소황태후가 된다.

 

문소황태후의 묘지명을 발견했다는 신문기사에 의하면,

문소황태후가 469년생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풍>태후가 문소황태후를 후궁으로 데려가

고구려와 혼사를 성사시킨 해는 481년이다.

 

466년에 시작된 고구려와의 혼사를 무려 15년 만에 성사 시킨 것이다.

 

문소황태후는 <탁발굉托跋宏(467-499)>{高祖 孝文帝}의 후궁이 되어

486년 <탁발각托跋恪(486-515)>{世宗 宣武帝}을 낳는데 이때에 이미 태자가 있었다.

 

그러나 <탁발굉>은 태자를 폐위시키고

고구려 사람 문소황태후가 낳은 <탁발각>을 굳이 태자로 세워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로 만든다

 

이 북위 황제가 499년에 재위에 오르니 바로 제 7대 세종 선무제이다.

 

<풍>태후가 왜 이렇게 끝까지 고구려와 혼인을 맺으려 했을까?

 

고구려와의 인연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풍>태후의 태도와

굳이 고구려계의 후손을 태자로 만들어

자기의 뒤를 잇는 황제로 만든 <탁발굉>의 태도를 보면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있기는 있다.

 

최소한도 북위는 고구려를 엄청나게 존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고구려를 북위에게 조공이나 바치고

북위의 책봉을 받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