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23년(501년)

 

 

봄 정월,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졌다.

 

남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웠는데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으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책부 원구]에는

 

"남제 건원 2년(480년),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 공납을 바쳤다.

 

이 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하늘의 명령을 새로 받드니 은택이 먼 곳까지 미치고 있다.

<모도>는 대대로 동방의 번신으로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의 직무를 다하고 있으므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을 제수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영명 8년(490년),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자

알자 복야 <손부>를 보내 <모대>에게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관작을 계승케 하고

 

백제왕으로 삼는 책명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계승하였으니 그 정성이 멀리까지 드러나 보였다.

해로가 고요하고 조공이 변함 없기를 바라며, 법식과 법전을 따를 것이며,

천명을 돌아보며 행동을 삼가하라.

국가의 위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으로 임명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한 고기]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또한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의 아들로서,

그의 할아버지가 <모도>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지증대제 2년(AD. 501) (白蛇=辛巳)

十二月 牟大爲其臣所弑 斯摩繼之

<지증대제기>

 

 

<비황翡凰>이 부여에서 돌아와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모대牟大>의 처 연씨(燕氏)는 <사마斯摩>의 어머니로,

연씨의 여동생이 <백가苩加>에게 속해 있습니다.

 

<백가苩加>는 <모대牟大>에게 아첨하기에 능숙하여,

아내를 <모대>에게 바치고(천거하고), 또한 딸도 <모대>에게 바쳤습니다.

 

그런 연유로 초월하여(분수에 넘치게) 좌평(佐平)의 직위를 받았으며,

군신들이 재목이 아니라하며 따르지 않는 이가 많았는데,

사사로이 미녀를 모으고 있다고 고하였습니다.

 

<모대>가 사실을 묻자, <백가>가 감히 숨기지 못하였습니다.

 

돌아와 그 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왕이 장차 너에게 행차하려 한다. 왕의 양기에 병이 들었으나 이에 피할 수 없다'

라고 하자,

 

딸이 말하기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라고 하고,

 

이에 <백가>가 말하기를

 

'네가 마땅히 진흙투성이 얼굴에,

냄새가 나게 하여 왕으로 하여금 포기하게 하여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 왕이 마침내 도착하여,

진흙투성이 얼굴에 냄새나는 입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어 말하기를

‘이 미녀인가.’

라고 묻자,

 

(백)가가 말하기를

 

‘신을 헐뜯는 이들이 우리의 임금님을 속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왕이 의심하며 딸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며, 그 비첩을 끌어안고 농탕질을 하였다.

 

딸이 시새움하여 팔뚝이 드러나자 그 눈처럼 하얀 피부가 보였습니다.

 

왕이 <백가>가 딸과 함께 속인 것을 알고, 행하려 하였습니다.

 

총애가 크게 더해졌는데, <백가>가 딸을 원망하여 딸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딸이 <모대>에게 하소연하여 <백가>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

가림(加林)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백가>가 이에 모대를 원망하였습니다.

 

마포에서 눈에 막혀 있는 틈에, 역적을 보내어 찔렀습니다.

 

일이 발생하자 <백가>를 불렀는데, <백가>가 두려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사마>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우두의 병사를 출병하고,

<해명解明>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심히 급하게 되자 <백가>의 아들 <율栗>이 말하기를

 

‘지금의 왕과 저는 종형제가 됩니다. 아들이 마땅히 왕에게 설득하여 보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백가>가 허락하였습니다.

 

<백율>이 이에 도착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신의 아버지는 죄가 없나이다. 형제가 어찌 서로 얽매임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사마가 말하기를

 

‘만약 죄가 없다면 어찌 일찍 항복하지 않느냐.

짐이 숙모로 하여금 사면하게 해 주겠다.’

라고 하자,

 

<백가>가 그 말을 믿고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씨에게 돌아왔는데,

연씨가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보답함이 없느냐.

어찌 지하로 돌아가 뵐 수 있겠느냐 라고 하자,

사마가 이에 그 사실을 조사하여, 백가를 베어 백강(白江)에 던졌습니다.

 

<백가>의 자녀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백가>의 처는 <백가>의 동생 <여如>에게 시집보내고,

<백가>의 자식은 <백여>의 자녀로 하였는데,

<백여>는 질박하여, <백가>의 처와 상통하게 되자, 괴로움(또는 병)이 커졌습니다.

 

그런 연유로 모두 <사마>를 명군이라 하였습니다.

 

<백여>를 원망하지 않았고,

또 <백율>이 공이 있다 하여 작위를 더하여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백율>의 처는 이에 <백여>의 딸입니다.

 

<사마>가 허락하였는데, 사람들이 아버지를 판 작위라고 하였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백가>와 <백여>는 모두 미모로 모대를 섬겼으며(미녀를 바친 일),

<백가>는 <모대>가 저녁 먹은 일까지 알고 있었는데, 스스로 역적이 되었습니다.

 

<백여>는 이로써 존귀함을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태자를 불러 타이르며 말하기를

 

“네가 호색함은 <모대>와 같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뺏음이 없어야 한다.

 

<해該>가 말하기를

 

‘아비를 죽인 자는 말처럼 수레를 끌게 하고,

어미를 죽인 자는 젓갈로 만들어 먹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네가 빼앗으려는 것은 오직 부모이기 때문에 가능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하다.

빼앗은 것을 알면 스스로 도적인 것보다 못하여, 존귀함을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당시 태자가 연제를 증(烝)하였음을 왕이 알고 있었으나 태자에게 캐묻지 않았다.

 

이에 태자가 울면서 밖으로 나갔다.

<지증대제기>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등은 삼한고기(三韓古記)와 책부원구(冊府元龜) 

중국사서 등을 보고 삼국사기를 재단(裁斷)하였다.

 

책부원구(冊府元龜)는 태평광기(太平廣記), 태평어람(太平御覽), 문원영(文苑英華)와 함께 송 사대서(宋 四大書)로 불리고 있는 유서(類書 : 분류별 백과사전류)의

하나로 원래의 명칭은 역대군신사적(歷代君臣事蹟)이었다.

 

북송(北宋) 진종(真宗) 경덕(景德) 2년(1005년) 9월 조서에 의거하여

왕흠약(王欽若), 양억(楊億)이 8년 여간 상고(上古) 시대부터 오대(五代)에 이르는

역대(歷代) 군신(君臣) 및 정치에 관한 사적을

정사(正史), 실록(實錄) 등에서 채집 정리하여

1,000권으로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년)에 완성하였다.

 

책부원구는 제왕(帝王), 윤위(閏位), 열국군(列國君), 종실(宗室), 외척(外戚),

장수(將帥), 헌관(憲官), 국사(國史), 학교(學校), 형법(刑法), 궁신(宮臣), 막부(幕府), 외신(外臣) 등 31부 1,000권으로 편집된 송대(宋代) 최대의 저작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책부원구에서 480년에 <모도>가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모도>를 진동대장군으로 책봉하고 또 <모도>가 <모대>의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아마도 <모도>{문주왕}가 477년에 <해구解仇>에게 시해된 사실을 몰랐거나

480년은 남제의 <소도성蕭道成>이 구데타로 宋을 멸한 다음 해 이므로

<해구解仇>가 남제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속인 것으로 보인다.

 

480년은 <모대>가 즉위한 다음 해이다.

 

<모도>는 <모대>의 백부(白父)이지 할아버지가 아니다.

 

삼국사기는 <곤지>를 <개로>의 아들로, <모대>는 <곤지>의 아들로,

<사마>는 <모대>의 아들이라 하였다.

 

즉, 개로 → 곤지 → 모대 →  사마이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발굴로 위의 기록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사마>의 가계(家系)는 백제서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었다.

 

개로(429-479) → 사마(461-523)

문주(431-477) → 삼근(465-479)

곤지(440-476) → 모대(466-501)

 

<모대>는 <사마>의 사촌동생인 것이다.

 

개로왕(429-475)이 475년에 장수대제에게 패하여 참살되자

문주왕인 <모도>가 신라의 힘을 빌려 웅진으로 천도하여 476년 11월에 즉위한다.

 

그러나 백제의 귀족세력인 <해구>가 477년에 <모도>와 <곤지>를 시해하고

<모도>의 아들인 <삼근>을 세우고 <해구>가 권력을 독점한다.

 

곤지의 아들인 <모대>는 일본열도에 있는 사촌형인 <사마>를 제치고

신라와 백제의 귀족세력인 진씨와 손잡고 <해구>를 제거하고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동성대왕이다. 

 

501년 11월 일본열도에서 왜 武王으로 있던 <사마>의 묵인하에

<백가>는 <모대>를 시해한다.

 

이 정변으로 <모대>가 죽고 <사마>는 사촌동생에게 빼앗긴 왕위를 되찾는다. 

 

동성왕계(東城王系)인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지방 출신들은 몰락하게 된다.

 

이에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에 귀복함으로써 백제는 요서와 중국동해안지방의 지배권을 상실한다.

 

 

 

동성대왕이 <백가>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사마>는 백제에 있었다.

 

그는 이 때, 우두성 성주 한솔 <해명>을 시켜 백가를 공격하게 했는데,

이 사실은 <사마>가 동성대왕 시절부터

병력을 통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사마>는 동성대왕 재위 당시에도

조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권력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마>는 동성대왕이 살해되기 오래 전부터

백제 조정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마>의 공격을 받은 <백가>는 스스로 나와서 항복하였는데,

<사마>는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백가>가 동성대왕을 살해한 것은 그의 학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가 우두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했을 때,

크게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것은 항전할 마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사마>는 <백가>를 살려두지 않고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버렸다.

 

<사마>의 이런 행동은 역적을 처단했다는 명분을 얻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며,

한편으론 민심을 얻고 권력을 장악하여 왕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쨌든 <사마>는 동성대왕이 재위 만년에 학정을 일삼다가

<백가>에게 살해된 상황에서, 우두성의 병력을 동원하여 <백가>를 제거하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스스로 왕좌를 획득한 셈이 되었다.

 

 

무령(武寧)대왕은 개로대왕의 아들이며, 곤지의 양자이다.

 

461년 왜로 가는 도상인 각라도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융>이며, 생시에는 주로 사마(斯麻)왕이라고 불렸다.

 

 

무령대왕은 재위 초기부터 대륙백제는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힘 싸움을 전개했다.

 

즉위년 11월에 달솔 <우영>에게 군사 5천을 안겨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토록 했다.

 

고구려가 동성대왕의 죽음을 알고 습격해올 것에 대비해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고,

이듬해엔 봄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자,

무령대왕은 다시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했다.

   

이에 고구려는 503년 3월에 말갈을 시켜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우영>의 병력 5천에 막혀 말갈군은 성과 없이 퇴각했다.

   

506년에 백제 땅에는 전염병이 돌고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봄 가뭄이 극심해지자, 백성들이 몹시 굶주려 국고로써 구제해야 하는 지경에 처했다.

 

고구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7월에 말갈을 사주하여 공격을 감행해왔다.

 

말갈의 거센 공격에 고목성이 무너지고,

6백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 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4개월 뒤인 11월에 다시 공격을 감행해왔다.

 

하지만 이 때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제대로 공격도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무령대왕은 507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쌓아 말갈{고구려 지방군}의 재침에 대비했다.

 

백제의 예상대로 고구려는 말갈과 연합전선을 평치며 그해 10월에 공격을 감행해왔다.

 

고구려는 한성을 치기 위해 횡악 아래에 진을 쳤는데,

무령대왕이 강력하게 저지하는 바람에 퇴각해야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512년 9월에 고구려의 급습에 밀려 가불성을 빼앗기고, 다시 원산성도 격파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끼던 무령대왕은 기병 3천을 직접 거느리고 나가

위천 북쪽에서 고구려 군을 대패시켜 전세를 역전시켰다.

 

위천 싸움에서의 승리로 백제군의 사기는 되살아났고,

고구려 군은 전쟁을 자제하고 한동안 침입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령대왕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위상을 높이는 표문을 올렸다.

 

이에 양나라는 무령대왕에게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의 봉함을 내리고

백제의 국제적인 위상을 인정해 주었다.

   

이후, 무령대왕은 523년에 한성에 직접 거동하여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로 하여금

15세 이상의 한수 이북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입에 만전을 기한다.

   

무령대왕 대에 와서 백제와 고구려가 이처럼 첨예한 대립을 한 것은

동성대왕 이후 지속적으로 백제가 영토 확장을 감행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제적 영향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다사(多沙){今 하동}가 백제에 병합되었다,

 

백제가 다사를 차지하자, 가장 크게 반발한 쪽은 가아였다.

 

가야는 다사가 자신들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며,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편으론 고구려, 위, 양, 신라, 왜 등의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백제는 다사 지역에서 물러날 뜻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다사가 예로부터 백제 땅이었다고 주장했다.

 

백제는 군사적 압력을 가해오는 고구려에 대해서는

군사적 대응으로 맞불을 놓으며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고,

왜와 양나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다사 지역의 영유권 싸움은 국가의 이익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문제였다.

 

그런 까닭에 왜는 다사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 파벌이 갈려 치열한 언쟁을 벌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백제 측에서는 유력한 대신들에게 뇌물을 먹이기도 했다.

   

다사 문제와 관련하여 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백제는 왜에 선진 문물을 전해주는 유일한 통로였고,

 

서로 왕족과 신하를 교환할 정도로 친밀한 형제 국가였다.

 

 

거기에다 왜 조정에서 활동하고 있던 백제인들의 힘 또한 막강했다.

 

 

그에 비해 가야는 여러 분국으로 갈라져 있는 형편이었고,

국제사회에서도 백제와는 뒤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왜가 백제의 손을 들어준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거기에다 당시 왜의 국왕 계체천황(남대적)은 무령왕과는 사촌 사이였다.

 

 

왜의 무열천황이 학정을 일삼으며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

무령대왕은 사촌동생인 남대적에게 구리거울(인물화상경)을 보내 지지하였고

그런 무령대왕의 지지에 힘입어 남대적은 천황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듯 다사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한창이던 513년에

무령대왕은 장군 <조미문귀>와 <주리즉미>를 왜에 파견하고,

그들과 함께 오경박사 <은양미>를 보내 계체천황과 왜 조정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섬진강 유역의 무역 중심지인 다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백제가 다사를 차지하자 가야는 왜에 등을 돌리고 신라에 손을 내밀었다.

 

오래 동안 유지하던 왜, 가야, 백제의 공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다사를 빼앗긴 가야 분국들은 힘을 합쳐 백제에 대항하였고,

신라는 은근히 가야를 지원하며 이익을 챙겼다.

 

 

이 때문에 다사 문제는 무령대왕이 죽고 가야가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신라와 백제가 영토 싸움을 벌이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어쨌든 무령대왕은 다사를 장악하고 한수 이북 영토의 안정을 되찾음으로써,

내적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이끌어냈고,

외적으론 영토를 확장하여 백제의 국제 위상을 크게 높였다.

 

 

그러나 523년 5월, 그는 62세의 나이로 의욕에 가득 찼던 생을 접어야 했다.

 

 

백제의 대국화에 열정을 쏟던 그였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령대왕의 능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곳에는 무령대왕과 그의 왕비가 합장되어 있다.

 

 

왕릉에서는 두 개의 지석(묘소로 쓸 땅을 매입했다는 내용을 돌에 새겨 넣은 것)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무령대왕의 것이요, 다른 하나는 왕비의 것이다.

 

두 매지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령대왕 매지권 :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62세가 되던

계묘년(523년) 5월 임진일 7일에 붕어하셨다.

을사년(525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대묘에 올라 안장되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비 매지권 : 병오년(526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돌아가시자

정서방 땅에서 상을 치르고, 기유년(529년) 2월 갑자일인 12일에 개장하여

대묘로 돌아왔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내용에서 특별한 것은 무령대왕의 죽음을 ‘붕(崩)’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원래 ‘붕’은 황제의 죽음을 가리키고, ‘훙(薨)’은 왕의 죽음을 가리켰다.

 

따라서 무령대왕에게 ‘붕’이란 표현을 썼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자국의 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일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령대왕 묘지석에는 연호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육십갑자만 보이는데,

이는 백제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령대왕은 죽은 지 2년 3개월 만에, 왕비는 2년 2개월 만에 대묘에 안장되는데,

이는 당시 백제인들이 삼년상을 치렀음을 알려주고 있다.

 

 

무령대왕의 자식으로는 장남 순타와 성왕,

 

왜로 건너간 사아, 계체천황의 황후가 된 수백향 등이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