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후 <고조영高照容(469-497)>은 497년 7월,

평성에서 낙양으로 오다가  공현(하남성 위현시)에서 <馮>后에 의하여 암살을 당한다.

 

그리고 499년 4월 12일 <고조용>의 아들 <탁발각>이 즉위한다.

 

그가 선무제 세종이다.

 

그후 3년 동안 6輔의 시대를 마감하고 

선무제는 16세가 되는 해인 501년 1월 15일 친정을 선언한다.

 

 

 

- 고조(高肇)의 집정(執政)

 

 

1. 고조(高肇)의 가문

 

 

<고조高肇>는 고구려 사람으로서

문소황태후{북위 7대 선무제 세종 <탁발각托跋恪(486-515)>의 어머니}의 오빠이다.

 

<고조高肇>의 5대조인 <고고高顧>가 진(晉)나라 영가(永嘉) 연간(307년 ~ 312년)에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로 들어갔다.

 

그 후, <고조高肇>의 아버지인 <고양高颺>은 북위의 고조(高祖) 초(471년~473년)에 일가를 거느리고 북위에 들어가 여위장군(厲威將軍)이되었다.

 

<고양高颺>의 딸을 황실(皇室)로 들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문소황후로, <탁발각>{세종, 선무제)을 낳았다.

 

<고조高肇>의 형제들으로서는 <고곤高琨>,<고언高偃>,<고조高肇>,<고현高顯>이며

여형제는 3명인데 그중의 하나가 문소황후이다.

 

큰 형 <고곤高琨>의 아들은 <고맹>인데,

<고맹>은 세종의 친여동생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고,

권력의 핵심인 상서령을 역임하였으며, 그 뒤로는 옹주자사, 전중상서가 된 사람이다.

 

둘째 형 <고언高偃>의 딸이 세종의 황후가 된 선무황후이고,

<고조高肇>의 아들은 <고식高植>인데,

<고식高植>은 선무제(세종)가 중서시랑(中書侍郞)에서 승진시켜

제주자사(濟州刺史)로 삼았으며

뒤이어 청、상、삭、항, 사주자사四洲刺史)를 역임한 후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고조高肇>가 집권하게 된 배경에는 황제의 외척(외삼촌)이라는 것외에

육보(六輔)의 등장과 전횡, 반란 그리고 몰락과 함께

후궁으로 물러난 <풍윤>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 <풍>씨의 몰락이 있었다.

 

<고조高肇>가 죽고 <고조高肇> 일가가 몰락한 것은

세종 선무제의 죽음과 일치한다.

 

 

2. 육보(六輔)의 등장

 

 

북위 6대 효문제 고조 <탁발굉托跋宏(467-499) >은 죽기 직전인 499년 3월 24일에

어린 아들이 걱정되어 6명의 권력 핵심자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이른바 6보(六輔)이다.  

 

그 사람들의 면면과 직책을 보면

 

시중이며 호군장군인 북해왕 <원상>을 사공으로 삼고,

진남장군 <왕숙>을 상서령으로 삼고,

진남대장군인 광양왕 <원가>를 좌복야로 삼고,

상서 <송변>을 이부상서로 삼으며

시중인 태위 <원희>{함양왕},

상서 우복야 <원징>과 더불어 6명이 정사를 보좌하게 하였다.

{북위는 나중에 탁발씨를 원씨로 고쳤음.}

{이중에서 함양왕 <원희>와 북해왕 <원상>이 실세중의 실세임}

 

직책으로는 사공,상서령, 상서 좌복야, 이부상서, 태위, 상서 우복야가

6개의 핵심 권력기관임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 상서령이 핵심중의 핵심 직위임}

 

같은 날 효문제는 자기가 죽거든 후궁으로 물러난

<풍윤>{풍태후의 조카}도 죽이라고 명령한다.

 

 

 

3. 풍후의 죽음

 

 

499년 4월 초하루, 효문제가 죽고 4월 정사일(12일)에 선무제(7대 세종)이 즉위하자,

바로 그날 <원협>등은 고조(6대 효문제)의 유조(遺詔)를 가지고서

<풍>后{풍윤}에게 죽음을 내렸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풍씨 일가는 북위에서 막을 내렸다.

 

 

 

4. 고조(高肇)의 등장

 

 

선무제가 즉위한 후 2개월이 지난 499년 6월 무진일(24일)에

선무제는 자기 어머니를 문소황후로 추존하고

외할아버지 <고양高颺>을 발해공(渤海公)으로 추사(追賜)하고

그것을 고양의 손자 <고맹高猛>에게 세습하게 하며,

외삼촌 <고조高肇>를 평원공(平原公)에 책봉하고

고조의 동생 <고현高顯>을 징성공(澄城公)으로 책봉하여

세사람을 같은 날에 책봉하였다.

 

이때에 처음 <고조高肇>가 등장하며,

선무제(7대, 세종)도 외가 사람들을 처음 본 것이다.

 

 

5. 육보(六輔)의 전횡

 

 

육보(六輔)란 말이 정사의 보좌관이지

실제는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고 국가를 통치한 것이다.

 

그 6명 중에서도 어린 선무제(즉위 당시 13살)의 숙부,

즉 가장 가까운 황족(皇族) 친왕인 함양왕 <원희>, 북해왕 <원상>,

이 둘이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북위를 위임통치 하였다.

 

이 둘 중에서도 함양왕 <원희>{탁발희}가 가장 전횡이 심하였는데,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북위에서는 함양왕 <원희>를 상상(上相)으로 삼았다.

원희는 노복(늙은 종)을 시켜 우림 호분을 요구하고

들고 날 때 의장대를 데리고 다녔다.』

< 501년 정월(봄) 을사일(10일) 기사 >

 

즉, 모든 재상들의 윗재상이며 아예 황제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말이다.

 

함양왕 <원희>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것에는 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 두 기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애초에 태후(풍태후)는 황제(효문제)가 영민한 것을 꺼렸고

자기에게 불리할까 두려워하여서 그를 폐위시키려고 하였으며

한참 추울때  빈방에 가두고서 3일간 먹을 것을 끊었고

함양왕 <탁발희>를 불러서 그를 (황제에) 세우려고 하였다.』

<490년 10월 경진일(16일) 기사>

 

또한 효문제(6대고조)는 죽기 전에

 

『일찍이 함양왕 <원희>등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자손들 가운데 불초할 사람을 만나면 너희들은 관망하다가

보좌할 만하면 그들을 보좌하고 보좌할 수 없으면 그것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게 하라.”』 이렇게 말했다.

< 499년 4월초하루 병오일 기사 >

 

이렇게 함양왕 <원희>는 원래 황제가 될 위치에 있었고,

어린 선무제가 빌빌거리면 니가 황제를 하라고 효무제에게 직접 명령을 받았다.

 

이렇기 때문에 함양왕 <원희>는 사실상 황제노릇을 하고 다닌것이다.

 

이때에 <원희>의 전횡에 맞선 사람이 <우열>인데

<원희>는 <우열>을 그 직책인 영군(황제 경호책임 장군)에서 쫒아내고

항주 자사로 삼았다.

그러나 <우열>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501년 정월 을사일(10일) 기사 요약 > 

 

「이렇게 함양왕 <원희>의 전횡이 심해지자,

보다 못한 선무제를 모시는 측근 충신인 <우열>이

그의 아들 <우충>으로 하여금 선무제에게 주청하게 하고,

북해왕 <원상>도 비밀리에 <원희>의 허물과 악행을 황제에게 말함과 동시에

팽성왕 <원협>도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어서 오랫동안 정치를 보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자,

선무제(7대 세종)는 숙부들의 명목상 지위를 올리고

선무제를 보좌할 신하들을 임명한 다음에친정(親政)을 선언한다.」

< 501년 정월 을사일(10일)에서부터 경술일(15일)까지의 기사 요약>

 

그리고,

「선무제는 즉위 당시 나이가 16세여서 스스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할 수 없어서

이를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임하였다.

여기에 임명된 사람이 <여호>,<왕중흥>,<구맹>,<조수>,<조옹>과

외척 <고조高肇>등」이다.

<501년 정월 경술일(15일) 기사 >

 

<고조高肇>가 처음으로 등용되는 순간이다.

 

이와 동시에 <우열>을 다시 영군으로 삼고 이어서 거기대장군을 더하여 주면서

<우열>은 이때부터 오랫동안 궁중 안에서 근무를 하면서

군대와 나라의 큰 일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501년 정월 경술일(15일) 기사 >

 

 

 

6. 육보(六輔)의 반란과 몰락

 

 

이보다 먼저, 선무제가 친정을 시작하기 전 해에 자기 아버지 효무제가 죽을 때

정성을 다했던 팽성왕 <원협>을 등용했다.

 

「유조(유언장)에 반하여 대사마로 삼고 사도의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500년 6월 병자일(8일) 기사 >

 

그런데 선무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원협(팽성왕)을 왕으로서 집에 돌아가도록 하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희>(함양왕)를 태보로 자리를 올리고,

<원상>(북해왕)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삼는」 모양새를 갖춘다.

< 501년 정월경술일(15일) 기사 >

 

이런 식으로 선무제의 친정이 시작되자 선무제의 좌우의 사람들이

<원희>(함양왕)를 주살 하여야 한다고 하자, <원희>가 반란을 도모하였다.

< 501년 5월임자일(19일) 기사 요약>

 

501년 5월 19일 이후 어느날 선무제가 북망산으로 사냥을 나가자

함양왕 <원희>와 그 무리들이 선무제를 습격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뜻이 하나로 결집되지않자 누설하지 않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누설되어 선무제에게 알려졌는데

이때 선무제의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짐승을 쫒아가

당직 시위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무제는 갑자기 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이때에 <우충>이 자기 아버지 <우열>이 계책이 준비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선무제가 <우충>을 파견하여 살펴보도록 한 결과,

<우열>이 이미 병사를나누어 삼엄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선무제는 무사히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무제가 궁에 돌아오게되자 <우열>은 부하를 시켜 <원희>를 체포하였고

선무제는 함양왕 <원희>를 죽였다.

(자살케 함, 501년 5월 29일)

 

여기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우열>은 최측근이 되어

선무제는 <우열>의 동생인 <우경>의 딸을 첫 황후로 삼는다.

{이 사람이 우황후이며, 황후로 세운 때는 4개월 뒤인 501년 9월 6일}

 

 

 

7. <고조高肇>의 권력쟁취와 집권 후의 행적

 

 

선무제는 육보(六補)를 내치고 함양왕 <원희>를 주살하고 나자

정사는 오로지 <고조高肇>에게 맡겼다.

 

그러나 <고조高肇>는 기존의 여러 세력과 부딪치게 된다.

 

 

1) 북위 황제의 친족(친왕)들과 부딪친다.

 

 

① 함양왕 <원희> 다음에 권력가로 나타난 사람이 북해왕 <원상>이다.

 

<고조高肇>는 북해왕 <원상>이 자기보다 위에 있으므로

504년 5월에 죄를 씌워 죽이고 황제에게 유세하여

여러 친왕을 거의 유폐시켜 가두었다.

 

② 그 후에 팽성왕 <원협>은 <고조高>의 조카가 황후{선무황후}에 오르는데

반대했기 때문에 고조가 508년 9월 18일에 참살(譖殺)한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있는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 기가 꺾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508년 9월 18일 기사>

 

<고조高>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③ 경조왕 <원유>도 사실은 선무제가 우황후의 누이동생을 받아들이라는 사건 때문에 기주에 나가 황제를 칭하는 반역을 하였으나

<고조高>가 <원유>의 형제들을 자주 참소하고

‘<고조高>가 황제를 죽이고 반역하였다.’ 는 유언비어도 반역의 핑계 거리가 되었다.

 

결국 경조왕 <원유>가 사로잡혀서 낙양으로 호송하게 되는데

이 도중에 <원유>를 죽인 사람이 바로 <고조高>이다.

{경조왕 <원유>가 기주에서 황제를 칭한 때가 508년 7월 12일이고

경조왕 <원유>가 죽은 것은 508년 9월 계묘일 23일 임}

 

 

2) 선무제의 최측근,우씨들과 부딪친다.

 

 

507년 윤10월 정묘일(12일)에 선무제의 황후인 우씨가 갑자기 죽었다.

 

그 다음 508년 3월 무자일(5일)에 우황후가 낳은 아들 <원창>이 죽었다.

 

이 두 사건 모두 <고조高>의 세력이 안팎을 기울어뜨릴 때 일어났으므로

<고조高>와 관련되었다고 우씨들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3) 고귀빈(高貴賓){<고조高>의 조카}이 황후(선무황후)가 되자

    <고조高>는 더욱 세도를 부렸다.

 

 

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에 魏에서는 고귀빈(高貴賓)을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상서령 <고조高肇>는 더욱 귀하게 되고 중용되어 용사(세도를 부림)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여러신하들과 종실에서는 모두 몸을 낮추어 그의 밑에 있었다.

< 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 기사 >

 

이 무렵에 <고조高肇>의 아들 <고식高植>중서시랑(中書侍郞)에서 승진하여

제주자사(濟州刺史)가 되어 경조왕 <원유>를 토벌, 격파하는 공을 세웠고,

뒤이어 청、상、삭、항, 사주(四洲) 자사를 역임하고 죽었다.

< 고조(高) 열전 >

 

또하나, 이때 볼수있는 현상은 북위의 황족인 친왕들이나 권문세가들이

너나없이 <고조高> 가문과 넓게는 고구려 여인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는모습이 보인다.

 

 

이는 대략 다음 다섯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① <고조高>의 조카가 현재 황후이고, 고조의 여동생이 황태후로 추존되었다.

    {황후 및 황태후 가문} 

② 고조가 그 당시 황제의 숙부도 죽이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세도 가문}

③ 고조는 고구려 사람이라 붕당을 결성하려고 했는데

    혼맥을 이용하여 세력 강화를 꾀하려는 <고조高>의 생각이 있었다.

④ 실력자 <고조高>와 손을 잡으려는 황제의 친족들(친왕)과 권문세가 등

    구세력의 생각이 있었다.{신 세력인 고조가문과 구세력의 결합}

⑤ 고조 가문의 여인들이나 고구려 여인들이 아름다웠다.

 

수많은 아름다운 궁녀를 보았을 풍태후가 문소황태후를 13살 때 보았을 때

빼어났다고 할 만큼, 그래서 후궁으로 들여 보냈을 만큼

<고조高> 가문의 여인들과 고구려 여인들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수많은 친왕들과 한다하는 권문세가의 구 세력들이 너도나도

고조 가문의 여인들 내지 고구려 여인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4) 공신들과 부딪친다.

 

 

<고조高>가 정권을 잡게되자 <고조高肇>는

「이전 조정의 옛 제도를 많이 바꾸고

봉지와 녹질을 줄이며 공신들을 억누르고 쫒아내니,

이로 말미암아서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찼다.」

< 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 기사>

 

이렇게 황제의 친족(친왕)들을 죽이고 핍박하니

살아있는 친왕들에게 미움과 반감을 사고

황제의 최측근 인사들과도 적을 지며, 공신들도 적대세력이 되어버리니

천하의 세력가,<고조高>라고는 하지만 배겨낼 방법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512년 봄 정월 병진일(25일)에 선무제는 <고조高>를 사도(司徒)로 삼고

청하왕 <원역>을 사공으로 삼으며 광평왕 <원희>를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제의 친족인 친왕들과 동일한 대우를 하며 승진시켜 준 것이지만

사실은 권력의 핵심인 상서령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이로부터 고조는 권력의 핵심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이후부터 고조는 모함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선무제는 죽을때까지 <고조高>를 해치지 않았다.

 

이러는 와중에 510년 3월 병술일(14일)에 선무제의 아들 <원후>가 태어났다.

<원후>의 어머니는 <호충화>인데 후에 영태후가 되는 사람이다.

 

그해 겨울 10월 을해일(18일)에 선무제는 아들 <원후>를 세워서 태지로 삼았는데

북위 역사상 처음으로그 생모(호충화)를 죽이지 않았다.

{북위는 후궁에서 태어난 자식이 황태자가 되면 생모를 죽임, 母死子貴 제도}

 

이것이 고조 일가가 기울게 되는 원인이 된다.

 

생모를 죽이면 황후였던 선무황후가 황태자의 어머니가 되어,

어린 황태자가 황제가 될 때 황제를 대신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였을 것이고,

이게 북위의 법이었기 때문에 고조 일가는 당연히 대를 이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모를 죽이지않았기 때문에 생모인 호충화가 황제의 어머니,

태후(영태후)가 되어 국가 권력을 잡고 선무황후를 죽임으로써

<고조高> 일가는 막을 내린다.

 

생모인 <호충화>를 죽이지 않은 단 하나의 예외가 생긴 것은

<고조高> 일가에 대한 반감 때문이며 견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조高>에 대한 선무제의 신뢰는 지속되어

514년 10월 신해일에 선무제는 익주를 차지할 좋은 기회가 생기자

<고조高>를 대장군 평촉대도독(大將軍 平蜀大都督)으로 삼아서

보병과 기병 15만명을 거느리고 익주를 정벌하게 한다.

 

 

 

8. 고조(高肇)의 몰락

 

 

515년 봄 정월 갑신일(10일)에 선무제(세종)가 병이 나서

정사일(13일)에 식건전에서 죽었다. 즉시 태자가 즉위한다.

 

이때에 선무황후(고조의 조카)는 태자의 생모인 호귀빈(영태후)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우충>이 호귀빈을 다른 곳에 빼돌려서 살았다.

 

고씨 일가가 두 번째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러한 일이 생긴 원인은

선무황후가 우황후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충>이 우황후의 원수를 갚고, <고조> 가문에 대한 반감으로 선무황후의 집권을 가로막고자

호귀빈(영태후)을 빼돌린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우충과 우황후는 사촌지간임}

 

을해일(26일)에 호귀빈을 높여서 황태비로 삼았다.

호태후 즉 영태후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있는 순간이다.

 

2월 경진일(7일)에 북위의 효명제(8대 숙종)는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써서 <고조>에게 애사를 알리고 또 그에게 돌아오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신사일(8일)에 <고조高肇>가 궁궐에 들어오자

고양왕 <원옹>과 <우충>이 중심이 되어 <고조高肇>를 죽였다.

 

다시말해서 선무제의 친족세력인 친왕세력과

최측근 세력인 우씨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조高肇> 일가는 몰락한다.

 

515년 8월 병자일(6일)에 황태후가 된 호태후{영태후}는

518년 9월 무신일(26일)에 선무황후(고조의 조카)를 죽임으로써

<고조高肇> 일가는 파란만장한 막을 내린다.

 

 

 

- 북위의 맹장 양대안(楊大眼)

 

 

<양대안>은 무도(武都){지금의 감숙성}의 저족(底族)의 수령이었던

<양난당楊難當>의 자손이다.

 

어릴적부터 굉장한 기백을 갖고 있는 인물로써

운동신경이 뛰어나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달리기를 잘했다.

 

그러나 그는 장자가 아니고, 측실의 아이였기에

친족에게 보살핌을 받지못해 배고픔과 추위을 피하는게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태화(太和)년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북위에 종수(従随)했다.

 

이때 고조(高祖){탁발굉拓跋宏, 孝文帝}는 대군(代郡)에서

남정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상서(尙書) <이충李衝>에게 효과(驍果){출정할 장교}의 선발을 위임했다.

 

<양대안>은 그 얘기를 듣고 현지로 가서

<이충>에게 출정하고 싶다고 자신을 추천했다.

 

그러나 <이충>은 그의 재능을 알수 없어 처음엔 비웃으며 거절하였다.

 

기회를 놓치기 아쉬운 <양대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서께서는 제가 한가지 재주에 뛰어나다는것을 알지 못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그 재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양대안>의 요청에 <이충>은 재주를 보여줄것을 승낙하였다.

 

<양대안>은 약 3장 길이의 노끈을 투구의 상투에 묶고는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르게 달려나가는지 바닥에 늘어져 있던 노끈이

화살과 같이 팽팽하게 늘어나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고,

그 속도는 말(馬)도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것을 보고 모두가 경탄하였다.

 

이충도 또한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옛날부터 천년동안 그대같은 일재(逸材)는 보지 못했다"

라고 말하고 흔쾌히 채용을 결정하여 군주(軍主)로 임명했다.

 

<양대안>은 기뻐하며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 말하자면 교룡이 물을 만난 때라고 할 수 있네.

이제부터 그대들과는 같은 대열에는 서지 않을것이네!"

라고 말하고 곧이어 통군(統軍)이 되었다.  

 

여기서 교룡득수(蛟龍得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나게 되었다.

 

고조의 정벌에 따라나서 완(宛), 엽(葉), 양(穰), 등(鄧), 구강(九江), 종리(鍾離)등을

전전(轉戰)하였다.

 

전투에 있어서 그 용맹함이 육군(六軍)에 버금간다고 이야기 되었고,

섣불리 맞설자가 없었다고 한다.

 

세종(世宗){탁발각 선무제}의 치세 초

<배숙업裵叔業>이 수춘(壽春)을 가지고 귀순하자

<양대안>은 <계강생奚康生>과 함께 병사을 이끌고 먼저 달려가

수춘에 들어 반역이 없는지 확인하였다. 

 

<양대안>은 그간의 공적으로 안성현(安成縣) 개국자(開國子)에 봉해지고

식읍 300호을 하사받았다.

 

또한 직합장군(直閤將軍)을 제수 받았고,

얼마안가 보국장군(輔國將軍), 유격장군(遊擊將軍)을 더하였다.

 

출정에 나서 정로장군(征虜將軍), 동형주자사(東荊州刺史)가 되었다.

 

그 시기 만족(蠻族)의 족장인 <번수안樊秀安>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대안>은 칙서을 받고 별장(別將)이 되어

도독(都督) <이숭李崇>을 따라 반란을 평정했다.  

 

<양대안>의 아내 <반보주潘寶珠>는 기사(騎射)에 뛰어나 

양대안을 만나러 군영에까지 왔다. 

 

출진이나 사냥할 때에는

<양대안>은 <반>씨을 완전무장을 시키고 함께 전장을 누비었고,

또 말을 함께 타고 자연속을 거닐기도 했다. 

 

군영에 돌아와서는 함께 막하(幕下)에 앉아 다른 무장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양대안>은 아내를 사람들에게 소개할때 이 사람이 반장군이다라고 말하였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무제(武帝) <소연蕭衍>은 

강주자사(江州刺史) <왕무선王茂先>에게 수만의 병력을 주어

번(樊), 옹(雍)에 주둔시켜 만족(蠻族)을 회유해 완주(宛州)에 신군을 설립했고,

한편 완주자사 <뇌표랑雷豹狼>과 군주(軍主) <조중종曹仲宗>에게

병사 2만을 주어 하남성(河南城)을 점거하게 하였다.

 

세종은 이에 대해 <양대안>을

무위장군(武衛將軍) 겸 평남장군(平南將軍), 지절(持節)로 삼았다.

 

<양대안>은 도독통군(都督統軍) <조경曹敬>, <번로樊魯>들과 함께

<왕무선>의 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고 <소연>의 보국장군 <왕화王花>,

용양장군(龍양將軍) <신천화申天化>를 베어버리고 포로 7천을 얻어 위명을 떨쳤다.

 

양 무제는 다시 장인 <장혜소張惠紹>에게 군을 이끌게 하여 파견시켜 

숙예(宿豫)에 점거 하였으나  북위 조정은 양대안을 다시 평동장군 별장에 임명해,

도독 <형변邢變>과 함께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고,

2명의 명장은 이 임무를 충실히 이루어 냈다. 

 

<양대안>은 승기를 타고 그대로 진군을 계속해 양나라 영내에 들어가

중산왕(中山王) <원영元英>과 더불어 종리을 포위했다.

 

<양대안>은 성의 동쪽에 주둔해 준하(准河)의 흐름을 동서에서 감시했다. 

 

그런데, 일거에 강물이 불어나 넘쳐나고,

수전에 대한 경험이 없는 북위군은 사분오열해 

<양대안> 휘하의 장수 <유신부劉神符>와 >공손지公孫祉>의 군대가 

밤중에 퇴각하는 일이 빈발했고, <양대안>이라고 해도 이를 금지하는 것은 어려웠다.

 

거기에 속출하는 도망자를 <양대안>은 막지 않아

그 죄를 받기위해 영주(營州)의 병사가 되었다.

 

패전 후, <양대안>은 일개 병졸로 좌천되었다.

 

영평(永平) 연간,

세종은 과거의 공적을 생각해 

<양대안>을 다시 중산내사(中山内史)에 재발탁했으나, 

당시 북위에서는 <고조高肇>가 촉(蜀)을 정벌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세종은 이 기회를 틈타 <소연>이

서주(徐州)나 양주(揚州)을 침공하지는 않을까 우려하여 

<양대안>을 중산내사에서 대위장사(大尉長史) 지절을 제수하였고, 

다시 평남장군, 동정별장(東征別将)으로써 도독 <원요元遥>에 예속되어 

회수와 비수 일대를 방어했다.

 

임무를 마치고 경사(京師)에 돌아 왔을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용장용감(勇壮勇敢)을 사모했고, 

기뻐함이 매우 지나쳐 귀족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위를 우러러봐,

그를 관람하기 위해 시장통을 꽉 채우는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양대안>이 초(譙)의 남쪽에 주둔할 시기에 세종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양 무제는 무장 <강순康絢>에게 부산(浮山)에 주둔시켜,

회수을 넘보며 이곳을 교두보로 삼아 수춘에 침공을 기도했으나,

숙종(粛宗)은 조칙을 내려 양대안을 광록대부(光禄大夫)로써 병력을 받아 

형산(荊山)을 수비하며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시키게 하였다. 

 

후에 <소보인蕭宝寅>과 함께 원정을 일으켜 회수의 보(堰)를 공격했으나

맹렬한 공략에도 불구하고, 제압하려던 보를 끊지 못해 병사를 되돌렸다. 

 

이후 평동장군이 되었다.

 

<양대안>은 말에 오른것만으로도 용장(勇壯)했고,

동시에 적을 쏘아보아 꼼짝못하게 만드는 박력이 있어,

갑옷을 걸친 것만으로도 당세의 명장이라고 칭송받았다.

 

병졸을 매우 많이 위문하고, 자신의 아들처럼 여기고,

병쫄이 상처을 입으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런고로 당세 효장(驍將)의 1인이라고 불렸다.  

 

전장에 임하면 스스로 선두에 서서 병사보다 먼저 돌격하고, 

견고한 진을 뚫기 위해 들어갈때 그 동작에 주저함이 없어,

적이 감히 그의  예봉을 저지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남조에서는 전후로 장군을 파견하여 북벌을 감행했지만

<양대안>을 두려워 해 장강 이북으로 발을 내딛는 것을 주저했다. 

 

그 당시 회수와 파수(泗水), 형주(荊州)와 과양(沔州)에서는

아이들이 울고 있을때 "양대안이 왔다!" 라고 말하면

곧바로 울음을 그쳤다고 할 정도였다.

 

<왕숙王粛>의 제자인 <왕겸王秉>이 처음 북위에 귀순했을때 <양대안>에게 말하였다.

 

" 남조에서 그대의 위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눈동자 속에 수레바퀴 모양의 눈동자가 1개 더 있는것은 알지 못했다.

이것은 보통사람과는 다르지 않는가? " 

 

이에 대해  <양대안>이 대답하여 말했다.

 

" 서로의 깃발과 북이 보이게 되면,

눈동자에 노기(怒氣)를 띄우게 되어 영기(英氣)가 피어올라와 

그대가 말한 대로 수레바퀴가 띄어 오르게 되었다. "           

 

세상 사람들은 그의 용맹함과 웅대함에 관련해서 

<관우>와 <장비>가 되살아 난다고 해도

<양대안>의 무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수의 보를 끊던 전투 이후 그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이유도 없이 채찍질을 가하는 경우가 빈번했기에

병졸들 중에는 <양대안>을 매우 두려워했고, 증오하게 되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양대안>의 성격이 변한 것을 매우 의아해 했다.

 

형주자사가 되었을 때, 

평소에 잡초로 묶은 인형을 만들어 푸른옷을 입히고 활로 쏘아 맞추는 것이 일과였다.

 

만족의 수령을 초청하였을 때 인형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만약 반역을 일으킨다면 나는 저 인형처럼 그대들을 살해할 것이오!" 

 

북육군(北淯郡)에서  커다란 호랑이로 인한 피해에 괴로워하자

<양대안>이 나서서 그 호랑이를 잡아 머리을 잘라 버리고, 양의 시장에 팔아버렸다.

 

후에 형주의 만족은 입을 모아 말했다.

 

" <양대안>은 악인이다. 언제나 우리들 만족의 인형을 쏘아맞이고 있다.

거기에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호랑이마저 그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임지에 있을 때에는 반란이나 도적떼가 일어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형주에 부임한지 2년 후에 죽었다.

 

<양대안>은 학문은 배우지 못했으나 항상 사람을 시켜 책을 읽게 하고

자리에 앉아 그것을 경청하여 들었던 것은 모두 기억하였고 잊지 않았다고 한다. 

 

명령문이나 상주문에 관해서도 구두로 전하면

부하에게 필기를 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결국 문자는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식이 3명이 있었는데, 장남은 병생(瓶生; 다른 곳에서는 양화(楊華)),

차남은 영군(領軍), 삼남은 정남(征南)으로 모두 반씨가 낳았다. 

 

자식 모두 기백과 재간은 아버지을 빼닮아 용감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 <양대안>이 궁주로 좌천되어 갔었을때 반씨는 낙양에 있었다. 

 

반씨는 미인이며 총명했고, 남자 못지않는 담력도 지녔다.

 

양대안은 아내를 무척이나 신뢰하였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반씨는 남몰래 부정을 저질렀다.

 

중산내사에 있을때,

<양대안>의 측실이 낳은 딸의 남편인 <조연보>가 이 사실을 알렸다.

 

<양대안>은 노여워하여 반씨을 유폐하고는 자살을 명하였고, 반씨는 자살하고 말았다.

 

후처로써 원씨을 맞이하였다.

 

<양대안>이 죽고나자 장남  <양화>는 집안의 인수(印壽)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그때 원씨는 임신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양화>에게 말했다.

 

"개국공과 나의 아이가 후계자다! 당신들 첩의 아이들에게 물려줄 가계는 없다! "

라고 말해 <양화>는 깊이 이를 원망했다.

 

<양대안>의 시신이 경사에 당도하자

성에서 동쪽 7리까지 나와서 차에서 휴식하게 되었다.

 

밤 10시쯤 <양화>는 <양대안>의 관을 열었다.

 

<조연보>가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 아직 성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관을 여는 이유가 무엇이오? "

 

그동안 분노를 숨겨왔던 <정남>은 이때 <조연보>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원씨는 놀래서 걸어서 강을 건넜다.

 

<정남>은 활을 쏘아 사살하려고 하였다.  

 

<양화>가 제지하며 말했다.

 

"누가 자신들의 어머니을 살해하는 자가 있었는가?! " 

 

그리고 <양대안>의 시신을 엎어 말에 태우고는 좌우에서 지탱하여 돌아왔다.

 

형주의 사람들은 일행의 용맹함을 두려워하여 추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양양으로 도망쳤고, 남조의 양 무제에게 귀순하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