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永元) 2년(500)

 

齊의 황실이 어지러워지자 <소연蕭衍(464-549)>은

동혼후(東昏侯)에 대한 타도군을 일으켜 도읍인 건강(建康)을 함락시킨 뒤

정권을 장악하면서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중흥(中興)2년 (502)

 

제나라 화제(和帝)를 폐위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양(梁)이라 했다.

 

 

 

 

- 전설의 불패장군 진경지(陳慶之 484-539)

 

 

자(字)는 자운(子雲). 의흥국산(현재의 강소성 의흥 서남)사람.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걸출한 군사가.

 

<진경지>는 어려서부터 <소연蕭衍>의 시종이었다.

 

 

당시는 바둑이 인기였는데 <소연>은 밤새워 바둑을 두곤 했다.

 

 

나머지 시종들은 모두 쉬는데 오로지 <진경지>만이 잠을 자지 않고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왔다.

 

그래서 <소연>은 그를 더욱 좋아했다.

 

 

남제(南齊) 말년에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卷>이 잔혹하여

<진현달>, <배숙업>, <최혜경>등의 명장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남제 양원2년(기원500년) 11월,

 

<소연>{당시 옹주자사}도 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진경지>는 <소연>을 따라 제나라의 수도 건강(建康, 남경)을 공격했다.

 

 

천감원년(502년)에 <소연>은 제나라를 대체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양(梁)으로 하였다.

 

그가 바로 양무제이다.

 

 

<진경지>는 주서(主書)로 임명되었는데,

재직기간중에 재산을 풀어서 사람들을 모아서 항상 쓸 수있게 준비하였다.

 

 

보통6년(525년) 정월,

 

북위의 서주자사 <원법승>의 반란이 실패하고 팽성에서 양나라에 항복하고,

양무제에게 병사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양무제는 <진경지>를 무위장군으로 봉하여 <호룡아>, <성경준>과 함께

양나라 군대를 이끌고 지원갔다.

 

회군후에 <진경지>는 선맹장군, 문덕주수에 임명된다.

 

그리고 2000명을 이끌고 예장왕 <소종>을 서주로 호송한다.

 

 

5월, 위나라는 안풍왕 <원연명>, 임회왕등 2만명을 보내어 척구에서 막는다.

 

<원연명>은 먼저 장군 <구대천>을 보내어 보루를 쌓게 하고,

양나라군대의 진군노선을 잘라버린다.

 

<진경지>는 그 보루를 공격하여 위나라 군대는 궤멸한다.

 

 

6월, <소종>은 밤을 틈타 양나라군대를 버리고 위나라에 투항한다.

 

날이 밝은 후 양나라 군대는 <소종>을 찾으나 보이지 않는다.

 

이때 바깥의 위나라군대에서는

 

"너희 예장왕이 어제 저녁에 이미 건나왔다.

우리 군으로 넘어왔는데, 너희가 더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양나라 군대는 궤멸되었다.

 

위나라 군대가 팽성에 들어왔고, 승세를 틈타 양나라병사를 추격했고,

다시 여러 성을 되찾았다.

 

양나라군대는 10중 7.8을 잃었고, <진경지>만이 부대를 온전히 보존하여 돌아왔다.

 

보통7년(526년), 안서장군 <원수<는 수춘으로 출정한다.

 

<진경지>는 총지군사가 된다.

 

위나라의 예주자사 <이헌>이 아들 이장균을 보내어 성을 쌓고 막는다.

 

<진경지>는 두 성을 공격한다.

 

 

11월, <이헌>이 항복하고, <진경지>는 그 성에 들어간다.

 

이번 작전에서 양나라는 모두 52개성을 함락시키고 75,000명을 얻었다.

 

<진경지>는 동국직각으로 오르고, 관중후(關中侯)의 작위를 얻는다.

 

 

대통원년(527년),

 

<진경지>는 영군장군 <조중종>과 연합하여

북위의 와양(현재의 안휘성 몽성)을 공격한다.

 

동시에 양무제 <소연>은 심양태수 <위방>을 불러 병사를 이끌고

<조중종>등과 회하하도록 한다.

 

<위방>의 군대가 아직 보루를 쌓지 못했는데,

북위의 산기상시 <비목>이 군사를 이끌고 돌연 쳐들어온다.

 

<위방>은 겨우 200명으로 죽기를 다하여 싸우고

일당백으로 결국 <비목>의 군대를 물리친다.

 

북위의 효명제 <원후>는 다시 <원소>로 하여금 5만을 증원하여 와양으로 보낸다.

 

선봉대가 성에서 40리 떨어진 타간(현재의 안휘성 몽성 서북)에 이르렀다.

 

<진경지>는 나가서 싸우고자 하나,

<위방>은 적의 선봉은 반드시 경무장의 정예부대일 것이고,

민첩할 것이므로 싸우면 불리하다.

 

그러므로 병법에서 말하는

이일대로(편안히 앉아서 오느라 피곤한 적을 상대한다)의 방법이 좋겠다고 한다.

 

그러나 <진경지>는

 

"위나라는 먼데서 왔으니 모두 피곤할 것이고,

그들이 아직 제대로 모이지 않았을 때 기를 꺽어놓아야 한다.

그러자면 그들이 생각지 못한 방식을 취하여야 한다.

정보에 의하면 그들이 주둔한 곳은 나무가 무성한 곳이니 밤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의혹을 가지고 있다면, <경지>는 단독으로라도 치겠다"고 한다.

 

그래서 <진경지>는 휘하의 경기병 200명을 이끌고

<원소>의 군대를 급습하여 전군을 격파하자, 위나라 군대는 깜짝 놀란다.

 

<진경지>는 다시 승세를 틈타 군대를 연파하고

와양을 등에 지고 위나라 군대와 대치한다.

 

梁軍은 봄부터 겨울까지 백번이상 교전을 하여 병사들이 모두 피로하였다.

 

이 때 위나라 군대가 양나라군대의 진지 뒤쪽에 보루를 축성한다는 소식이 들여왔고, 양나라군대의 군심이 동요하였다.

 

<조중종>등은 등에 적을 두는 것을 겁내고 군대를 빼고자 하였다.

 

<진경지>는 이를 들은 후,

절장을 군문에 세우고 강개한 목소리로 죽기를 다해서 싸워야 살 수 있다고 역설했다.

 

<조중종>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위나라 군대는 13성을 의지하여 양나라군대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진경지>는 밤에 암흑을 틈타 기병을 출동시켜 위나라군대를 기습하였고,

연속하여 4개의 성을 격파했다.

 

와양성주인 <왕위>는 이 소식을 듣고 양나라에 투항한다.

 

나머지 9성은 병사가 많았다.

 

<위방>은 투항한 위나라 군대에서 30여명을 석방하여 돌아가게 해주었다.

 

위나라 군대에 돌아가자 바로 와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번져갔다.

 

동시에 <진경지>는 군대를 이끌고 석방해준 위나라군사들의 뒤를 쫓아가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공격했다.

 

양나라 군대의 위맹한 기세앞에 위나라 군대는 남은 9개성을 모두 궤멸당했다.

 

양나라 군대는 기세를 틈타 추격하여 위나라 군대를 대파했고,

성중의 3만여명이 항복했다.

 

와양의 일전에서 위나라군대는 전군이 몰살했다.

 

이로부터 북위는 점점 쇠락하게 된다.

 

양무제는 와양에 서서주(西徐州)를 설치한다.

 

양나라군대는 다시 기세를 몰아 성보까지 진격한다.

 

양무제는 <진경지>를 크게 칭찬하며 친히 조서를 써서 그를 격려했다.

 

북위의 후기에 조정이 부패하고 민족간 모순과 계급간 모순이 격화되었다.

 

 

대통2년(528년),

 

북위에 내란이 발생한다.

 

반란을 진압한 이주영(爾朱榮)이 북위의 황실을 도살하자,

위나라 북해왕 <원호>는 양나라에 투항한다.

 

그리고 양나라에서 출병하여 그가 황제위에 오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양나라는 전략적인 고려에 의하여 <원호>를 魏王으로 하고

<진경지>에게 병사 7000명을 이끌고 <원호>를 북으로 모셔가게 한다.

 

 

중통원년(529년) 4월,

 

<진경지>는 병사를 이끌고 북위의 형고의 반란을 진압할 때,

헛점을 노리고 형성(滎城, 현재의 하남성 상구의 동쪽)을 점령하고,

양국(하남성 상구)를 핍박한다.

 

위나라 장수 <구대천>은 7만을 이끌고 9개의 성을 쌓아 양나라 군대에 대항한다.

 

<진경지>가 군대를 이끌고 먼저 진공하여 하루에 3개성을 함락시키고,

<구대천>으로 투항하게 한다.

 

<원호>는 수양(지금의 하남 상구 남쪽)성의 남쪽에서 황제를 칭한다.

 

그리고 <진경지>에게 지절을 내리고, 진북장군, 호군, 전군대도독에 임명한다.

 

이때 위나라의 제양왕 <원휘업>은 우림군 2만을 이끌고

둔고성(하남 민권 동북)에 주둔한다.

 

고성은 사면이 물이어서 수비하기 좋았다.

 

<진경지>는 부하에게 수면에 성을 쌓도록 하여 그 성을 공격하여 2만을 섬멸하고,

<원휘>를 포로로 잡고 차량 7800량을 획득한다.

 

양나라 군대는 직접 낙양으로 향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위나라 군대들이 그저 바라만 보고 항복할 뿐이었다.

 

 

5월, 위나라 황제인 <원자유>는 부대를 보내어

형양, 호뢰(지금의 영양서북의 사수진)등지를 지키게 함으로써 낙양을 지키게 한다.

 

<원호>는 양국을 점령한 후 <진경지>를 위장군, 서주자사, 무도공에 임명하고

그에게 계속하여 형양을 공격하게 한다.

 

위나라 좌복야 <양욱>, 서아왕 <원경>, 무군장군 <원현공>등이

우림군 7만을 데리고 형양을 지킨다.

 

위나라 군대는 매우 강했고,

게다가 형양성은 아주 견고해서 <진경지>가 계속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 위나라의 장수인 상당왕 <원천목> 대장군이 왔다.

 

먼저 표기장군 <얼주투모얼>에게 기병 5천을 이끌게 하고,

기병장군 <노안>으로 하여금 하주의 보병기병 9천을 <양욱>에 증원해주었다.

 

그리고 우복야 <이주세룡>, 서형주자사 <왕바>로 하여금 기병 1만을 이끌고 가서

호뢰를 방어하게 한다.

 

양나라 군대는 모두 30만으로 위나라 군대를 포위하였다.

 

<원호>는 사람을 보내어 <양욱>에게 투항하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한다.

 

오래지 않아 <원천목>과 <얼주투무얼>이 계속 도착하여 위나라군대가 크게 늘어났다.

 

당시 형양성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양나라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다.

 

<진경지>는 친히 북을 울리면서 성을 공격했다.

 

북을 한번치면 양나라 군대는 성으로 올랐다.

 

용사 <송경휴>, <어천민>이 먼저 성벽에 오르면

양나라군대가 이어서 성을 올라서 형양을 함락시키고 <양욱>을 포로로 잡았다.

 

오래지 않아 <원천목>이 군대를 이끌고 성을 포위했다.

 

<진경지>는 3천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싸워 크게 이겼으며, <노안>은 투항하였다.

 

<원천목>, <얼주투모얼>은 단기로 도망쳤다.

 

<진경지>는 형양의 군수물자를 획득하고

소,말,곡식,비단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경지>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호뢰를 공격한다.

 

<이주세룡>은 감히 싸우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양나라군대는 위나라 동중랑장 <신찬>을 포로로 잡는다.

 

魏 효장제 <원자유>는 <진경지>의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장자(長子, 지금의 산서성 장사의 서쪽)로 물러난다.

 

<원호>는 낙양으로 진입하고, 위나라의 회원왕, 안풍왕 <원연명>등은 백관을 이끌고 <원호>를 궁중으로 맞이한다.

 

<원호>는 연호를 바꾸고 사면령을 내린다.

 

<진경지>를 시중, 차기대장군, 좌광록대부로 하고 식읍을 만호 늘여준다.

 

오래지 않아,

상당왕 <원천목>, <왕노생>, <이숙인>이 다시 병사 4만을 이끌고 대량을 공격한다.

 

그리고 <왕노생>, <비목>을 보내어 호뢰를 지키게 한다.

 

<조선>, <조쌍>은 양, 송으로 들어온다.

 

<진경지>가 이 소식을 들은 후 병사를 이끌고 습격하여 위나라군대가 모두 투항한다.

 

<원천목>은 십여기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도망친다.

 

<비목>은 호뢰를 공격하여 거의 함락시켰을 때,

<원천목>이 북으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보고

<진경지>에게 항복한다.

 

<진경지>는 다시 대량, 양국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킨다.

 

양무제는 소식을 들은 후, 다시 친히 조서를 써서 격려한다.

 

<진경지>와 부하들은 모두 흰 옷을 입고 공격하니 무너지지 않은 성이 없었다.

 

<진경지>는 7000여명을 이끌고 낙양까지 47차에 걸쳐 전투를 벌여

32개의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진양(현재의 산서성 태원의 서남)을 지키던 위나라의 천주장군 <이주영>은

魏 황제 <원자유>가 북으로 장자까지 도망쳐왔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간다.

 

魏 황제는 즉시 남하하며 <이주영>이 선봉이 되어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이주영>과 <이주세륭>, <원천목>, <이주토몰아>, <고환>은

선비, 유연등 대군을 이끌고 계속 도착하니 백만대군이라 불렀다.

 

당초, 위나라 황제가 단기로 북쪽으로 도망칠 때,

궁내의 시위와 비빈들은 데려가지 못했었다.

 

<원호>는 황제에 오른 후 주색에 빠져 조정을 돌보지 않았다.

 

 

윤6월, <원호>는 암중으로 임회왕, 안풍왕 <원연명>과 결탁하여

양나라에 배반할 것을 준비한다.

 

시기가 성숙되지 않았고 <진경지>의 힘을 빌려야 했으므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경지>도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었고 암중으로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원호>에 군사를 추가로 달라고 요구했으며,

<원호>는 <진경지>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당시 낙양성내에 양나라 군대는 1만이 되지 않고, 위나라군대는 10만이 넘었다.

 

<마불념>은 <진경지>에게 스스로 독립하라고 권한다.

 

그의 공이 너무 커서 주군이 의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경지>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원호>는 <진경지>를 서주자사에 임명하고,

<진경지>는 서주로 가서 부임하겠다고 하나 <원호>는 허락하지 않는다.

 

<원호>가 낙양에 들어온 지 65일째 되는때

<이주영>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말을 듣는다.

 

<이주영>은 군대를 이끌고 <원호>의 군대와 황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된다.

 

<진경지>는 북중성(하남성 맹현 부근)을 지킨다.

 

<원호>는 하교 남안을 지킨다.

 

<진경지>와 위나라 군대는 31일간 싸우며 서로 많이 죽는다.

 

<이주영>은 철군을 준비한다.

 

<이주영>은 그후 부하의 계책을 들어 <원호>의 부대를 공격하여 궤멸시킨다.

 

<원호>는 수백의 기병을 이끌고 도망친다.

 

임영(하남성 임영 서북)에 이르러 그의 부하들이 모두 흩어지고

<원호>는 포로로 잡힌다.

 

낙양은 다시 <이주영>이 점령한다.

 

<이주영>은 군대를 이끌고 남진한다.

 

<진경지>는 보병 수천을 이끌고 동쪽으로 철수한다.

 

<이주영>군이 추격하여 숭고(하남성 등봉)에 이르렀을 때,

물이 불고, 산사태가 폭발했으며, 양나라군대들은 죽거나 흩어졌다.

 

<진경지>는 할 수 없이 머리를 깍고 승려로 변장을 해서 예주로 도망친다.

 

예주에서 <정도옹>의 도움을 받아 건강으로 돌아간다.

 

<진경지>의 위나라 공격작전은 비록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가서,

뒤를 받쳐주지 못하여 최종적으로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진경지>의 군사적인 재능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진경지>는 겨우 7천의 병력을 이끌고 북벌을 시행하여,

위나라군대를 연속으로 격파하고,

소수의 병사로 다수를 이겼으며 낙양등 30여개의 성을 점령한 것이다.

 

이런 전공은 자고이래로 없었다.

 

그래서, 양무제는 <진경지>가 귀국한 후 여전히 그에게 우위장군, 영흥후,

1천5백호의 식읍을 내렸던 것이다.

 

이 전투이후, 북위의 국력을 크게 쇠퇴하였고, 대권은 <이주>씨의 수중에 들어간다.

 

 

중대통4년(532년),

 

<고환>이 <이주>씨를 죽이고 북위의 대권을 장악한다. 

 

 

중대통6년(534년)과 중대통7년(535년)에

<고환>과 <우문태>는 선후로 <원선견元善見(524- )>과

<원보거 元寶炬>를 황제로 옹립한다.

 

이를 역사상 東魏와 西魏로 불리운다. 北魏는 이로써 멸망하게 된다.

 

 

12월, 양무제는 <진경지>에게 지절을 주고, 비무장군, 북연주자사로 임명한다.

 

이 때 요승 <승강>이 스스로 천자를 칭하며,

토호 <채백룡>도 반란을 일으켜 3만에 이르렀고, 북서주를 함락시켰다.

 

제음태수 <양기문>은 성을 버리고 도망쳤고, 종리태수 <단희보>는 살해당했다.

 

양무제는 <진경지>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며, 친히 성아래까지 나가 배웅한다.

 

<진경지>는 명을 받은지 12일이 되지 않아,

<채백룡>, <승강>의 목을 베고 건강으로 수급을 보낸다.

 

 

대동원년(535년) 2월 진경지는 동위를 공격한다. 동위의 예주자사 사요웅과 교전하나, 불리하여 돌아온다.

 

 

대동2년(536년) 10월,

 

동위의 정주자사 <후경>이 7만을 이끌고 초주를 공격한다.

 

초주자사 <환화>를 포로로 삼고, <후경>은 승세를 틈타 회상으로 진군하고,

<진경지>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낸다.

 

양무제는 <후퇴>, <후연>등을 보내어 지원한다.

 

군대가 여장에 이르렀을 때, <진경지>는 이미 <후경>을 격파한 후였다.

 

이때는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후경>은 군수물자를 다 버리고 도망쳤고,

<진경지>는 군수물자를 모두 획득한 후 돌아왔다.

 

같은 해 예주에 기황이 들었는데, <진경지>가 창고를 열어 재민들을 구조했다.

 

대부분의 재민들이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승>을 위시한 800여명의 예주백성들이

<진경지>의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청하였고, 양무제도 승인한다.

 

 

대동5년(539년) 10월,

 

<진경지>가 사망한다. 향년 56세이다.

 

<진경지>는 성격이 신중하고, 매번 명을 받을 때마사 먼저 목욕재계한 후 받았다.

 

생활은 검박하고, 그저 흰 옷을 입었을 뿐이며,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장이었으나 활을 잘 쏘지도 못했고, 말을 잘 타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병사들을 잘 위로했으며,

부하들로 하여금 그에게 목숨을 바치도록 할 줄 알았다.

 

더욱 특이한 점은 진경지는 출신이 빈한하다는 점이다.

 

문벌을 중시했던 남조 양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출신으로 고관에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양나라 역사상 그와 같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진경지>와 <유약>{관직이 운기장군, 안주자사에 이름}의 둘 뿐이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