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A.D. 512) 흑룡(黑龍=壬辰)

 

六月 命伊宗 伐于山國 別洞之役 命于山獻其異材 不納 至是伊宗 以木偶師子 脅之 乃降

 

 

6월, <이종伊宗>에게 우산국(于山國)을 치도록 명하였다.

 

별동(別洞)의 부역으로 우산에 기이한 재료를 바치도록 명하였는데 바치지 않았다.

 

이때에 <이종伊宗>이 목우사자(木偶師子)로 위협하여 이에 항복하였다.

<지증대제기>

 

 


지증왕13년(512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

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중략) 또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順風)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의 羽陵)가 있다.

 

이 섬은 둘레 2만 6,730보(步)이다.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朝貢)을 바쳐 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아찬(伊飡)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때 이종은 나무로 사자(獅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이종>에게 상을 주어 주백(州伯)을 삼았다.

 

 

 

우산국을 찾으면, 아슬라주를 찾는 것과 연관되기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현재의 관념대로라면 동해에 울릉도 말고는 달리 섬이 없다.

 

현재의 울릉도(면적 72.6㎢, 인구 10,160명(2007년 현재))는

신라에 대항하기엔 면적도 좁고, 인구도 턱없이 모자라며, 인근에 의지할 지역도 없다.

 

도대체 어떤 토산물이었기에 신라가 좌장군 직위에 있는 박이종을 동원하였고,

우산국 주민들은 바치지 않으려고 대항하였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별동(別洞)의 선원(仙院)을 짓는데

다량의 옥(玉)과 금(金)이 소모되었음은 분명하다.

 

만약 신라가 우산국에 요구한 목록이 금(金이었다면

일본에 혼슈에 있는 사도(佐島)섬이 분명하다.

 

사도(佐島)섬은 한때 골드러시가 이루어졌던 지역으로,

인근 혼슈섬 지역인 니가타현 인근에 신라왕의 비문이 있다고 한다.

 

 

- 일본 니가타현에 있는 신라왕 비(碑)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자료에는

니가타(新潟) 데라도마리(寺泊) 다케하나(竹花) 촌에 신라(新羅) 왕의 무덤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다께하나 촌락의 뒷산에 있는 신라왕의 무덤은

신라(新羅)에서 이곳에 표착하여 살다가 죽은 신라왕의 무덤이라는 말과

다른 곳에 표착하여 살다가 후에 이곳에 옮겨 살다가 죽은

신라왕의 무덤이라는 말도 있다.

 

신라왕이 죽은 후 이곳 주민이 극진하게 묘지기를 하고 있고,

오월 보름에 이곳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을 쉬고 재물을 공출하여

제상(祭床)을 마련하여 신라왕의 무덤 앞에서 제(祭)를 지내는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이 신라왕의 비석이 니가타현 중앙에 위치하는

쓰바메시(燕市)·구마노(熊野) 3사 내에 있다고 한다.

 

이곳 주소는 쓰바메시(燕市) 나카지마(中島) 4389이다.

매년 6월 비석 앞에서 제례가 행해지고 있다

 

(後年この地に移り住んだものという??もある。

後も地元民が手厚く墓守りをしている。新羅王の碑は、熊野三社の?にある。

[住所]燕市中島4389).

 

 

<일본 니가타현에 있는 신라왕 비(碑)>

 

 

현재의 비석은, 메이지(明治)35년에 재건된 것인데,

 

비문의 대강 의미는

 

“이 비는 옛날부터 신라왕의 비석이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신라왕의 이름이나 사적은 불분명하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왕은 데라도마리(寺泊)에 표류하여 정박하고,

괴로운 마음을 품은채 쯔고의 땅에서 생애를 마쳤으므로 여기에 무덤을 만들었다.

 

봄이 되면 마을 사람이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 지냈다.

 

세월이 경과하여 비문도 결락이 되었기에,

재건해서 신라왕의 사념(思念)을 전하기로 했다.”이다.

 

(現在の碑は,明治三十五年に再建されたものである。

碑文の大意は「これは昔から新羅王の碑と言われているが,

その名前や事績は不明である。?聞によると,王は寺泊に漂泊し,

つらい思いを抱きつつ,つこの地で生涯を終えたのでここに墓を造った。

春になると里人は供え物をして祭った。年月が?って碑文も欠落したので,

再建して王の思念を?えることにした」というものである).

그렇다면 이 신라왕은 누구일까?

 

신라왕 비에 적혀 있듯이 이 신라왕의 이름과 사적은 전혀 알 수 없다.

 

혼슈(本州)에서 신라(新羅)라 부른 곳은

고대에 신라계 무리들이 이주한 혼슈의 출운(出雲), 단마(但馬), 복정(福井),

석천(石川), 부토(富土), 신석(新潟) 등 동해(東海)와 인접한 북륙지방이다.

 

이 신라(新羅)의 영역은 대화지방과 가까운 강산현(岡山縣) 전역, 광도현(廣島縣) 동부, 향천현(香川縣), 병고현(兵庫縣) 서부, 적수시(赤穗市)의 일부에 걸쳐 있었다.

 

이 곳에는 신라읍이라 불리우는 땅이 있었고,

광도(廣島:히로시마)에는 세라군, 세라정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었다.

일본서기에 혼슈(本州)의 동해(東海)와 인접한 북륙(北陸) 지방의 신라가

“新羅”로 적혀 있는 마지막 기사는

웅략천황 8년조(461년 또는 464년)에 나오는 신라이다.

 

이후 북륙지방의 신라는 길비국(吉備國)으로만 나온다.

 

참고로 길비국은 신라라는 뜻이다.

 

고대에 신라는 금이 많이 나는 나라라고 금국(金國)이라 부르고 “키미쿠니”로 읽었다.

 

이 “키미쿠니”와 같은 발음의 한자가 “길비국(吉備國)”이다.

 

즉 길비국은 신라라 부른 금국(金國:키미쿠니)를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다.

 

 


<아슬라와 우산국>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