繼體 7년(서기 513)

 

추 8월 26일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

<일본서기>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조에 기록된 위의 백제태자 사망기사

그냥 흘러 넘길 없는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일본서기가 백제태자의 사망기사를 다룬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추고(推古) 5 (서기 597)

 

4 백제왕이 왕자 아좌(阿佐) 보내 조공하였다 기사는 있지만

다음 그가 야마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  

 

 

2007 부여 왕흥사적의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577 2 15 사거(死去)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명문이 발견되었다.

 

명문에 의하여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도 일본서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왜 백제 무령왕의 태자 순타의 죽음이 일본서기에 기록될 필요가 있었을까?

 

무령대왕과 함께 백제에 있던 순타태자가 <남대적>을 지원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와서 살다가 일본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순타태자가 바로 504년에 무령대왕이 야마토에 보낸 <사아斯我>君인 것이다.

 

 

일본서기 무열(武烈)천황 7년(505)조를 보면

 

<사아斯我>君이 일본에 건너온 경위와 함께

일본에서 <법사군法師君>이라는 자식을 두었는데,

그가 바로 왜군(倭君)의 선조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에서 (야마토)라는 표기가 로 바뀐 것은

일본학자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므로

百濟王氏는 7세기 중엽에 일본에 건너온 백제왕족 계통이라면, 

倭君氏는 6세기 초에 일본에 건너온 백제왕족 계통이다.

 

 

斯摩(462-523)斯我君(482-513){순타태자}→法師君→雄蘇利紀君→→和乙繼→

和新笠{高野新笠}→桓武(737-806)천황으로 이어진다.

 

 

칸무천황의 생모와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와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는

고야(高野)라는 성씨보다는 화(和=倭)라는 성씨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

 

 

칸무천황의 생모가 신분이 상승하면서 和씨가 高野씨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12월 23일,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앞두고

아키히토(明仁) 일본천황은 68세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황거(皇居)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는데,

기자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질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일본과 한국인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깊은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주하거나 초빙됐던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문화나 기술이 전해졌습니다.

 

궁내청(宮內廳) 악부(樂部)의 악사(樂師) 중에는 당시 이주자(移住者)의 자손으로

대대로 악사를 맡아 지금도 그때그때 아악(雅樂)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나 기술이 일본인의 열의와 한국인들의 우호적 태도에 의해

일본에 가져온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그 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연(緣)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의 관계가 깊고,

이때부터 일본에 5경박사(五經博士)가 대대로 일본에 초빙되어 오도록 되었습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聖明王)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갑스럽게도 한국과의 교류는 이러한 교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황실에는 백제 왕가의 피가 뿌리깊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