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제迎帝>天后가 꿈에 큰 백마를 보고서 낳았다.

 

임금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관대하고 후덕하여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았고

 

천문,지리,음양오행,진서,원경(元經),활쏘기,말타기와 같은

여러 기술이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나라를 경영하는데 큰 법도가 있었으니

어진이를 임명하고 재주있는자를 선발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중흥시키고 대업을 이루는 위엄에 이르렀다.

 

 

임금은 신장이 칠척이고 훌륭하고 준수한 얼굴에 용맹이 있어

 

<소명炤明>천후가 지극히 그를 사랑하여 말하기를

 

"내 아우는 마땅히 우리나라를 일으킬 것이다."

라고 하였다.

 

 

<분종芬宗>태자에게 명하여 함께 천하를 다스리게 하였고

<지증>帝에 이르러 <분종芬宗>에게 선위를 받았으며

 

帝에게서 (왕의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사양하였다.

 

 

4년 겨울 나라를 다스림에 <이종伊宗>이 뛰어나서 으뜸으로 천거하여

군사의 일을 맡겼고 <아진종阿珍宗>에게 정사를 물으니

나라사람들이 성군으로 평가하지 않음이 없었다.

 

9년 여름 태자를 불러 오로지 대정(大政)을 명령하였으나

거듭 임금의 부름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4년 3월 구요궁(九曜宮)에서 선위를 받았으며

아버지를 높이어 태상노제지증천왕(太上老帝智證天王)이라 하였다.

 

선도(仙徒)들이 이에 팔백전(八白殿) 위에서 임금을 부르기를

금천대제법흥진왕(金天大帝法興眞王)이라 하였다.

 

<영제迎帝>天后에게서 나라의 옥새를 전해 받으니

여러 신하들이 산호(山呼) 만세를 외쳤으며 임금의 나이 34세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신통(神統)이며, 나의 神國은 석가세존의 신성한 나라이다.

지금 내 어머니와  뛰어난 천성을 지니신 성상(聖上)께서는 나라를 키우시고

절(山)을 창건하셨으며 짐의 몸을 보육해주셨다. 

옛날에도 수렴정치가 있었으니 짐이 대권을 잡음에 이르러

우선 어머님과 황제폐하를  받들 것이니 

너희 군신들은 마땅히 짐의 효성을 본받아 나의 이성(二聖)을 섬겨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옥좌에서 천후를 받들고 신천대제법흥묘왕의 호칭을 올렸으며

임금에게서 나라의 장보(璋宝)를 전해 받으니 여러 신하들이 또한 만세를 외쳤고

대서랑(大書郞) 호지(好知) 아찬(阿飡)에게 명하여

 

두 성스러운 분의 나라를 다스리는 절목(節目)들을 모아서 그것을 받들었다.

 

다음해 7월 늙으신 임금이 붕어하시니

<영제迎帝>天后가 양궁(凉宮)에서 의식을 행하고 진궁(眞宮)에서 즉위하였다.

 

원년 7월 帝가 조서에서 말하기를

 

<분종芬宗>전군(殿君)은 크나큰 어짐이 있어 짐에게 나라를 사양하였다.

 

이에 마땅히 정사를 돌봄에 마음대로 명할 수 있는 임무를 맡기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분종芬宗>으로써 품주(稟主)를 삼고 <보인普仁>으로써 조주(祖主)를 삼고

<철부哲夫>로써 호성장군(護城將軍)으로 삼고

<아시阿時>를 금하신(衿荷臣)으로 삼았다.

 

 

8월 <벽화碧花>를 좌황후를 삼고 <보도保道>를 우황후를 삼았으며

<삼부三夫>殿君으로써 태자를 삼았으며 <魏花郞>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9월 <분종芬宗>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자질이 허세를 부리고 난잡하여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며

신의 아내가 또한 임신 중이라 공무를 행할 수 없으니

원컨대 중요한 직책에서 풀어 주십시오."라 하니

 

이에 <철부哲夫>와 <준치俊治>로써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10월 여러 신하들이 <철부哲夫>가 병권을 관장하여

중요한 정치를 마음대로 함은 잘못된 것이다하여

옛법을 들어 그것을 논의하자 <철부哲夫>가 이에 (임금의 임명을)면해줄 것을 청하여 <수지守知>와 <보현普賢>으로써 그를 대신하였다.

 

 

11월 묘왕(妙王)과 위화(魏花)가 해궁(海宮)에 들어갔다.

 

 

12월 임금이 두 后와 함께 해궁(海宮)에 들어갔다.

 

상선(上仙)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따뜻한 가죽옷과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하사하였다.
<금천대제법흥진왕기>

 

 

 

지증왕 15년(514년)

 

봄 정월, 아시촌{今 함안}에 소경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하여,

이 곳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법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원종.[[책부원귀]에는 성이 '모'이며, 이름은 '태'라고 되어 있다.]이며,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연제부인이다.

 

그의 왕비는 박씨이며 보도부인이다.

 

왕은 키가 7척이고, 성품이 관대하여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삼국사기>

 

 

 

<모진慕珍(480-540)><원종原宗>은 법흥대제의 이름이다.

 

금천대제 법흥진왕(金天大帝法興眞王)이 남왕 <모진慕珍>이고,

<모진>의 어머니인 여왕이 곤천대제 법흥묘왕(坤天大帝法興妙王) <영제迎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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