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AD527}<안장>9년,
춘정월, 을축일 초하루, 서도(西都)의 란대(鸞坮) 온전(溫殿)에서 조회를 받았다.
습(霫)・해(奚)・유연(柔然)・산호(山胡)・<두락주杜洛周>・<이주영爾朱榮>・<고환高歓> 등 모두가 비단과 말을 공물로 바치고 책력을 받아갔다.
보척보록(宝戚宝籙)이 완성되었다.
수첩된 자는 215인이며 왕으로 봉 받은 자가 30인이었다.
종친과 척족들의 땅을 두었으며,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1월, <소연蕭衍>{梁 太祖 武帝}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청혼하였으나,
상은 <소연蕭衍>은 불법은 좋아하나 변덕스러움이 많다고 들었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6세기초 동북아의 정세는 고구려와 북위 중 오로지 고구려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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