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유{AD529}<안장>11년

 

9월, 상이 몸소 정예 기병 20만을 이끌어 황산(黃山)수곡성(水谷城)을 나가고,

<복福>태자에게도 1만의 군병을 이끌라 명을 하여 혈성(穴城)을 쳐서 빼앗았다.

 

이에 <명농明穠>은 <연모燕謨>와 3만군을 끌고 와서 오곡(五谷)에서 맞싸웠다.

 

패퇴시키고 남녀 2천여 명을 산채로 잡아 돌아왔다.

 

<명농明穠>은 금천(金川)에서 패한 이후에

밤낮으로 군병을 훈련하여 보복을 도모하였다.

 

<백苩>씨와의 일로 인하여 <사오謝烏>가 찾아와 항복하였다.

 

<연燕>씨와 <백苩>씨가 서로 다투기에, 상이 이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경술{AD530}<안장>12년,

 

3월, 오수전(五銖錢) 사용을 금하였다.

 

상이 안장원보(安藏元宝)를 주조하였으나,

구리로 만든 데다 크기도 하여 사용하기 불편하였더니,

백성들 모두는 오수전(五銖錢)으로 바꾸어서 사용하였으니 그 손해가 적지 않았다. 

 

 

 

- 무령왕의 독살과 고구려의 웅진성 공격 및 오수전

 

 

백제의 중흥을 꾀하던 무령왕은 부인들끼리 서로 투기하는 바람에

연씨부인에게 독살당했다.

 

재위 23년 만에 62세의 나이로 무령왕이 붕어하자

서자(庶子)인 명농(明穠=성왕)은 부왕의 죽음을 숨기고 즉위한다.

 

이렇게 죽어 공주 땅에 묻힌 사마(斯麻)왕이 바로 현 일본 왕실의 직계조상인

남동생 계체왕(繼體)에게 인물화상경을 하사했던 그 사마(斯痲)다.

 

만일 무령왕에게 적자가 없었다면 명농을 굳이 서자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자가 부왕의 죽음을 숨기고 즉위했다는 의미는

연씨부인과 명농이 서로 결탁해 정실왕후 소생의 적자들을 제거했다는 말로

결국 당시 백제 내부에 뭔가 권력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씨부인이 서자 명농의 친모(親母)였든가

아니면 두 사람이 서로 내통하는 애인(愛人)이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부왕이 붕어했음에도 아들 성왕이 국장을 치르지 않자 무령왕을 추종하던 신하들이

몰래 시신을 빼내 성왕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

그곳에 무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무령왕릉은 무령왕 붕어 2년 3개월 만에 조성된 무덤이다.

 

만일 국가에서 무덤을 조성했다면,

그 크기로 보아 그렇게 긴 세월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공주 무령왕릉이 고구리 광개토태왕의 신하인 덕흥리고분보다도 작고,

지석에 돈을 주고 땅을 샀다는 매지권에 관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오수전(五銖錢)은 땅을 사는데 사용된 돈이었다.

 

오수전은 한나라 때 처음 만들어져 중국에서 수나라 때까지 널리 통용되던 화폐였다.

 

무게의 단위인 수(銖)를 화폐이름에 그대로 사용한 오수전의 1수는

약 0.65g으로 추정하고 있어 오수전의 무게는 약 3.25g이 된다.

 

원형 모양에 가운데 네모난 구멍(方孔)이 있으며,

오른쪽에 ‘五(오)’자, 왼쪽에 ‘銖(수)’자가 새겨져 있다.

 

오수전에 대한 기록도 ‘고구리사초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에서도 이 오수전을 화폐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는

당시 고구려 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북위 효문제의 연호 태화가 새겨진 오수전과 무령왕릉 지석 위에 놓인 오수전>

 

 

무령왕릉이 있는 충남 공주는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백제 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런지 다음 기록을 보기로 한다.

 

부도덕한 성왕이 상국인 고구리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즉위하자

안장(安藏)제가 이를 응징하려 했다.

 

고구리사초략에 안장 5년(523년) 계묘 5월,

<고노>와 <복정>에게 죄를 물으라고 명을 내려

한수(漢水)를 건너 쌍현(雙峴)을 무너뜨렸다.

 

<지충(志忠)>을 금천(金川)에서 대파했으며 남녀 1만여 구를 사로잡았다.

 

명농이 <연회>를 보내 명마와 미녀를 바치며 신하된 도리를 저버렸다고 사죄하기에

명농에게 입조하라고 명했다.

 

6월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올렸으며, 죄를 묻는 전쟁을 그만두었다.

 

노획한 여자들은 군사들에게 나누어줘 첩을 삼게 했고,

남자포로들은 개마로 옮겨 여러 곳을 지키게 했다.”

는 기록에서 당시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인 웅진까지 진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농은 15년 후인 538년에 사비로 천도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