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AD530}<안장>12년,

 

춘정월, 무인일 초하루,

상이 <초>후와 황태자 및 <홍>황후를 데리고 황극전(皇極殿)에서 조례를 받았다.
 

2월, <만사추노万俟醜奴>가 <관중関中>에 들어가 의지하였다.

 

이에 <하발악賀拔岳>은 연거푸 싸워서 이기더니 <추노醜奴>를 산채로 사로잡고

<소보인蕭宝寅>도 붙잡았다.

 

낙양에 다다르자 <추노醜奴>를 참하였으며,

<보인宝寅>에게는 용서하고 집을 주려하였다.

 

이에 <왕도습王道習>이 그럴 수는 없다하여,  

(소보인蕭宝寅) 타우서(駝牛署)에서 죽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상이 이르길;

 

“<보인宝寅>은 두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처의 몸도 더럽혔으니 죽어 마땅하였다.

<하발악賀拔岳>의 전술은 기록을 남겨서 우리의 군대를 가르쳐야 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9월, <이주영爾朱榮>이 낙으로 와서 그의 딸이 낳은 아들을 보고자 하였다.

 

<자유子攸>는 거짓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서

<이주영爾朱榮>에게 들어오게 청하였고,

25일에는 명광전(明光殿)에 복병을 깔아 두고,

<영>을 안내하여 들어와서 <자유>를 만나보게 하였더니,

손에 칼을 든 종자들이 <영>을 어지러이 찔러서 죽였다.

 

<영>의 처는 <고환高歓>에게로 도주하였으며,

<자유子攸>가 그렇게 하라고 권하였다고도 한다.
 

10월, 계묘일 초하루, <이주영爾朱榮>의 종제 <세륭世隆>은

<불률佛律>을 시켜 <이주영爾朱榮>의 시신을 찾게 하고 복수를 칭하였다.

 

<자유子攸>가 <이숙인李叔仁>에게 <세륭世隆>을 토벌하게 하였더니,

<이묘李苗>는 싸우다 패하여 죽었고,

<세륭世隆>은 또한 패하고 도망하여 큰 아들에게로 가서,

<이주조爾朱兆>{이주영爾朱榮의 조카}> 등과 함께

<엽>을 제위에 세우고는 <자유子攸>를 토벌하였다.

12월, 임인일 초하루에

 

<이주영爾朱榮>의 조카 <이주조爾朱兆>가 단곡(丹谷)을 빼앗았으며,

갑진일에는 <河>를 건너 도읍으로 들어가서 <자유子攸>를 붙잡아

영녕사(永寧寺)의 루대의 꼭대기에 가두고는,

<자유子攸>의 아들과 <이주영爾朱榮>의 외손을 죽였으며,

비빈들을 더럽히고 능욕하였다.

 

갑인일엔 <자유子攸>를 진양(晋陽)으로 옮겼다.

 

갑자일에 <자유子攸>를 죽였다. 나이 24살이었다.

 

<고환高歓>은 <이주조爾朱兆>와 함께 석고산(石皷山)에서 보병 초병을 죽이고는

형제가 되기로 하고 여섯 진을 다스렸으나,

<조>가 변심할까 두려워서 군병을 나누어 산동(山東)으로 나가서,

취식하길 청하였더니 <조>가 들어주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