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AD531}<안장>13년,

 

춘정월, 임신일 초하루, 우두전(牛頭殿)에서 조례를 받았다.

 

황태자에게 명하여 10만병을 이끌고 나가서 개마(盖馬)에 진을 치고

요동(遼東)을 대비하여 멀리에서 <고환高歓>을 돕게 하였다.  

 

 

2월 29일에 <세륭世隆>이, <엽>{北魏 孝敬帝}을 폐위하고 <공恭>을 세웠다.

 

이 이가 절민제(節閔帝)이다.

 

<이주조爾朱兆>는 (이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세륭世隆>을 치려하였고,

이에 두 사람은 아주 먼 사이가 되었다.  

 

<공>이 파사국(波斯國)의 사자(獅子)와 사신을 풀어주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더니 사신은 그 길이 멀어 힘이 들자

중도에서 그 사자(獅子)를 죽였다.

 

이것은 <추노醜奴>가 년호를 고쳐 신수(神獣)라 하였던 그 사자(獅子)이었다.

 

<추노醜奴>에겐 득이었고, <공>에겐 실이었다.

3월, 상이 황산(黃山){황산은 요동에 있음}으로 가서 복병 상황을 점검하였다.  

 

<고환高歓>이 상주(相州)의 군량을 약탈하고 신도(信都)로 들어가서,

<륭>의 등한문(等閒門)을 봉인하여 거두었더니,

<공>은 <환>을 발해왕(渤海王)을 봉하고 입조하라 명하였다.  

 

4월,<소연蕭衍>의 아들 <통>이,

자신의 어미 무덤에 거위를 묻은 일을 걱정하다가 자살하였다.

 

대략 <연>이 아들을 구박하였음이었다.
 

5월, 상이 황산(黃山)의 행궁에서 춘추 55세에 죽었다.

 

우산(牛山) 장옥원(葬玉原)에 장사하고 안장릉(安藏陵)이라 이름 지었으며,

안종화황제(安宗和皇帝)로 추존하였다.



 

제는 휘가 <보연宝延>이고 자는 <흥수興壽>이었으며,

<명치제>의 둘째 아들로서, 모친은 <경>태후이다.

 

용모와 예의범절이 아름다웠고 기사도 잘하였다.

신장은 7척 5촌이었다.

 

크게 헤아렸고 무술에 통달하였으며, 또한 능히 상의 뜻을 받들어 모실 줄도 알았다.

 

<명치>는 평소에 제와 대행에게

 

“너희는 형제간에 전위하라. 한 마음이면 몸이 나뉘었어도 두 사람이 아닌 것이다.”

라 일렀다.

 

그랬다.

 

대행은 항상 제와 함께 기거하고,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의복도 하나같이 입었었다.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대행이 앓거나 괴로울 땐

제가 항상 곁을 극진하게 지켰으며 함께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죽음이 임박하자 <초운椘雲>황후에게 꿇어앉아 새보를 바치라 명하였고,

이에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대장(大藏)으로 년호를 바꿨다. 후에 세종경황제(世宗景皇帝)로 존호되었다.
 

 

신해{AD531} 大藏 원년,

 

5월 7일, 상은 <초운椘雲>황후와 함께 황산 행궁의 빈전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3세였다.

 

상이 <초운椘雲>을 다시금 황후로 삼으려 하자,

<초운椘雲>이 나이가 들었음을 들어 고사하였다.

 

그리하여 <덕양德陽>공주를 황후로 삼았다.

 

<초운椘雲>이 낳은 대행의 딸이며 춘추 32세였다.

 

<초운椘雲>은 태후로 삼았다. 춘추 61세였다.

 

황상의 조카 <각恪>태자를 동궁으로 삼았다.

 

<초운楚雲>이 낳은 대행의 아들에 <덕양德陽>의 동복 오빠이며, 보령 35세였다.

 

<은銀>공주를 동궁정비로 삼았다.

 

보령 32살이었으며 <욱勗>태후 소생 상의 딸이었다.

 

<경안慶安>공주를 동궁차비로 삼았다.

 

보령 23살이고 <안양安陽>공주 소생인 상의 딸이었다.

 

<정양正陽>공주를 동궁보비로 삼았다.

 

보령 24살로 <초운椘雲> 소생 대행의 딸이며 <리鯉>태자의 정비였다. 

 

<인양寅陽>공주가 상의 아들 <의성義成>태자를 낳았다.

 

 

<양의신梁義臣>을 중외대부로, <연학淵学>을 사농경으로, <양박梁博>을 민부상서로,

<주금령朱金鈴>을 우시중으로, <계춘량桂春娘>을 좌시중으로,

<선정宣蜓>을 여승상(女丞相)으로 삼았다.

 

<순>태자비인 <화양華陽>공주를 부황후로 삼았는데,

춘추 21이었으며, 魏 主 <각>의 딸 <호>태후 태생이다.

 

평양궁(平陽宮){굉녀43)}과 홍원궁(紅院宮){씨31}을 별궁 황후로 삼고,

금원(錦院)의 <진>귀비를 소후로 삼고는, 두루 돌아 승은을 내리고 위무하였다.

 

상이 젊은 시절엔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분 바르고 눈썹 그리는 이들을 찾아가 함께 하였던 이들이 여럿이었으나,

장성한 이후론 점차로 안으로 들이더니만,

즉위 초엔 종실의 딸들에게 저녁을 감당하라 명을 하였으며,
아울러서 공경들의 집으로 몰래 찾아가서 예쁜 처나 딸들이 있음을 알기만 하면

즉각 불러들여 승은을 입혔더니,

찾아와 저녁을 감당할 여자들이 남아나지 않음이 점차 심하여 졌고,

<초운椘雲>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초운궁(椘雲宮)도 여러 번 드나들더니 수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6월, <魏>主 <공>이 사신을 보내 부의를 바쳐왔더니,

상이 <화양華陽>후를 데리고 서쪽의 전각에서 그 사신을 만나보았으며
<이주세륭爾朱世隆>이 정사를 틀어쥐었고, <중원仲遠>은 서주에 진을 쳤으며,

<조>는 병주(幷州)와 분주(汾州)에 머무르고 있고,

<천광天光>은 장안에 자리를 잡더니,

각자가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약탈하고 있어 정령이 통하지 않고

조세가 걷히질 않으니 천하가 난리를 생각하고 있다.

 

<이주爾朱>가 세인의 마음을 잃었음을 알 만하다.

 

<고환高歓>은 <조兆>에게서 군병을 빌어 신도(信都)를 나가서

<원랑元朗>을 임금으로 세우고 <이주爾朱>를 토벌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만,

10월엔 <조兆>를 광아(廣阿)에서 크게 깨뜨리고 업(鄴)의 땅으로 진격하였으며,
그 세력이 크게 떨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농경 <연학淵学>을 형부상서로, 시어사·부마도위인 <왕서王胥>를 사농경으로,

<진관晋冠>을 예부상서로, <진덕晋德>을 경조윤으로, <안양安陽>공주를 림총대부로,

<우건충于建忠>을 대부경으로 삼았다.

 

11월, 황후가 <평성平成>태자와 룡산의 행궁으로 갔다.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과 통정하거나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과 통정함이 날로 심하여져도 상은 이를 금하지 않았다.

 

상 또한 <초>태후와 온궁으로 가더니 <평성平成>이 모아놓은 여인들을 탐하였고,

이르지 못할 곳이 없었다. 

 

상은 주목(朱木)으로 별도의 새 궁전을 웅장하게 지으려고,

내외의 장인을 불러 모았다.

<안원대제기>

 

 

 

18년(AD. 531) 백해(白亥=辛亥)

 

五月 麗君興安病殂 寵弟宝延立 初宝延之母與興安私通 而擁立興安

故興安以宝延爲太子 至是宝延母色衰 而興安得高峻女寵之 欲廢宝延

宝延乃和通于高峻女 曰 “吾少兄老 何不立我 高峻女許 乃立宝延 而幽興安 遂殂云

<금천대제법흥진왕기>

 

 

 

계체천왕 25년 겨울 12월 람야릉(藍野陵)에 장사재냈다.

 

[或本에 천황이 28년 세차 갑인에 崩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을 여기에 25년 歲次 辛亥에 崩하였다고 한 것은

百濟書記의 글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글에 말하기를 太歲 辛亥 3월에

군사가 안라(安羅)에 가서 걸둔성(乞屯城)에 주둔하였다.

 

이달에 고구려가 그 왕  安을 죽였다. 

 

또 들으니 일본의 天皇 및 太子, 皇子가 모두 다 죽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말하면 신해년은 25년에 해당한다. 후에 감교(勘校)하는 자는 알 것이다.

<일본서기>

 

 

 

안장대제 <흥안(477-531)>이 이복동생인 <보연(479-545)>의 母 <경鲸(447- )>

태후와 사통하여 <보연>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경鲸>태후가 노쇠해지자

<흥안>은 태자를 폐하려고하니 <보연>은 정변을 일으켜

이복형인 <흥안>을 황산 행궁에 유폐시킨다.

 

531년 5월에 <흥안>이 행궁에서 죽자 <보연>이 즉위한다.

 

 

 

서기 531년 백제군은 진주를 돌파하고 아라국에 진출하여

걸둔성(乞屯城)을 쌓고 아라국의 궁성이 있던 현 함안군 가야읍을 위협한다.

 

걸둔성의 위치는 아직 확인된 바 없으나 함안군 방어산(532m)이 유력한 후보지이다.

 

방어산이 시작되는 남강가에 가덕마을이 있다.

 

백제군이 가야읍으로 진군하는 길목이다.


일본서기는 계체(繼體)기에서 백제가 임나 4현에서 시작하여

기문, 타사 그리고 가라의 다사진으로 진출하는 것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마지막 기록이 531년 3월 아라의 걸둔성으로 진출하여 성을 쌓았다.

(大歳辛亥三月。師進至于安羅営乞屯城),

 

그리고 일본의 천황 황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는 기사이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는 수수께끼같은 언사와 함께...

 

 

곧이 곧대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대반대련 <금촌金村>은 열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계체천황은 실권이 없었다.

 

 

백제는 열도를 다시 서기 479년 이전의 왜왕 무의 나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고 <금촌>은 믿었다.

 

무령왕의 특사들이 504년 부터 야마토에 들어 와 열도를 왜왕 무에게 돌려 달라고

압박하지만 계체를 황위에 세우고 버틴 것은

백제가 열도를 위협할 수준의 국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는 임나 4현을 회복하고

기문과 타사를 빼앗고 가라의 다사진으로 진출하였다.

 

아라의 걸둔성에서 아라를 위협하는 싯점까지 백제의 진출을 기록하던 일본서기는

서기 531년 천황 황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시대가 바뀐다.

 

새로 등장하는 안한(安閑), 선화(宣化) 그리고 흠명(欽明)천황은

계체(繼體)의 아들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따져 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서기 531년 <금촌>은 백제의 힘을 확인하고 백제의 특사들에게 굴복하였다.

 

무령왕이 보낸 특사들이 열도의 권력을 승계한다.

 

그리고 열도에 혁명적인 변혁의 바람이 분다.

 

그 동안 백제의 허락없이 취득한 모든 재산이 몰수된다.

 

안한(安閑)과 선화(宣化)는 8년 간 과도기의 일본열도를 통치하면서

열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산몰수를 단행한다. 

 

<안한安閑(466-535)>과 <선화宣化(467-539)>는

<사마斯摩(462-523)>의 동생 사아왕(斯我王)과  사비왕(斯比王)으로

<사마>가 특사로 야마토에 보낸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