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AD532}<대장>2년,

 

 

<원종原宗>이 <구형仇衡>을 폐하고 <구형仇衡>의 동생 <구해仇亥>를 세우더니만,

종당에는 그 나라를 빼앗아 자기 나라의 군과 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가야의 제 족속들이 불복하여 화가 그칠 날이 없었다.
<안원대제기> 

 

 

 

19년(A.D. 532) 수서(水鼠=壬子)

 

三月 仇衡請 以國獻 許之 授位上等 以其國爲食邑 祿其三子 皆有差 賜奴婢田宅

 

3월 <구형仇衡>이 나라를 바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상등(上等)의 자리를 내리고 그 나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 세 아들에게는 녹봉을 줌에 모두 차등이 있었다. 노비와 논밭과 저택을 내렸다.

<금천대제법흥진왕기>

 

 

 


※ 금관가야 왕계도

 

 

正見(100? -158} = 夷毗訶(比只)

                      |

                  1. 靑裔(142-199) = 黃玉(146-189)

                   재위 156-198     |

                                   2, 居登(162-253) = 慕貞

                                      재위 199-252  |

                                                    3. 馬品( -291) = 好仇

                                                     재위 253-288 |

                                                                4. 居叱彌(今勿)( -346) = 阿志

                                                                        재위 289-344    |

                                                                            貞信 =   5. 伊品( -407)

                                                                                   |   재위 345-406

                                             庸女            福壽  =   6. 坐知( -421)

                                                         (신라道寧女) |   재위 407-420

                                                          仁德 = 7. 吹希(叱嘉)(408-451) 

                                                 (신라進思女)|              재위 421-450

                                         邦媛( -501) 8. 銍知(428-492) 

                                       (신라金相 女) |     재위 451-491 

                                              = 9. 鉗知 ( -521) 

                                   (신라出忠女)|   재위 492-520

                                   桂花 10. 仇衡          - 11. 仇亥

                                신라女) |    재위 521-531    재위 532  

                                        武力(524- )

 

 

   

      

※ 駕洛國記

 

 

[고려 문종조 대강 연간에 금관지주사 문인이 지은 것이니 그 대략을 여기에 싣는다]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아홉 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로서 7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18년 임인[42]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백성 2,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은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殷나라 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漢나라 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로 채색이 나는 것은 唐나라 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虞나라 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이라고도 했다.

 

 

[수릉은 죽은 후의 시호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이라 하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43]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

 

하고는

 

이내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에 나가

 

 

[이는 옛날부터 묵은 밭인데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신답평이라 했다. 답자(沓字)는 속자(俗字)]

 

 

사방의 산악(山嶽)을 바라보다가 좌우 사람을 돌아보고 말한다.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이 살 만한 곳이다.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7聖이 살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

 

여기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여기에 1,500()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당(殿堂)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

 

곡식 창고를 지을 터를 마련한 뒤에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공장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과 옥사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틈을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년[44]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을 가려서 새 궁으로 거동하여

 

모든 정사를 다스리고 여러 일도 부지런히 보살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아기를 배어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좇아서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요 머리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 우리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술법(術法)으로 겨뤄 보려는가?"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동안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는데

 

그 변하는 것이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 모양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이에 탈해가 엎드려 항복한다.

 

 

"내가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 있어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성인께서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문득 왕께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대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의 땅 안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건무24년 무신[48]727일에 구간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와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더니

 

[망산도는 서울남쪽 섬이요, 승점은 輦下에 있는 나라다]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등을 보내어

 

목연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한 잉신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와 의상필단 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媵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를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10석과 베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에 두어서 왕후의 四時비용으로 쓰게 했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여러 관리의 어른인데,

 

지위와 명칭이 모두 소인(小人)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이것은 벼슬 높은 사람의 명칭이 못된다.

 

만일 외국사람들이 듣는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아도(我刀)를 고쳐서 아궁(我躬)이라 하고,

 

여도(汝刀)를 고쳐서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방(五方)을 오상(五常)이라 하고,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이름은 위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유덕(留德)이라 하고

 

신천(神天)을 고쳐서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고쳐서 오능(五能)이라 했다.

 

신귀(神鬼)의 음은 바꾸지 않고 그 훈만 신귀(臣貴)라고 고쳤다.

 

 

또 계림의 직제를 취해서 각간 ·아질간 ·급간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의 관리는 주나라 법과 한나라 제도를 가지고 나누어 정하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서 새것을 취하고, 관직을 나누어 설치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정돈하며,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니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에게 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 공은 도산塗山이 하()를 돕고, 당원唐煖이 교씨(嬌氏)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영제 중평6년 기사[189]31일에 왕후가 죽으니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귀지봉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여 처음 배에서 내리던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잉신 천부경(泉府卿)<신보申輔>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등은

 

이 나라에 온지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내외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의 무리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8년이 되는데도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모두 죽었으므로,

 

그들이 거처하던 빈관은 텅 비고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죽자 왕은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난

 

헌제 입안4년 기묘[199]323일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듯 슬퍼하여 왕후가 죽던 때보다 더했다.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이며 둘레가 300()인데 거기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 라고 했다.

 

 

그의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인 구형왕까지 이 사당에 배향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 55일과 8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 용삭 원년 신유[661]3월에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의 9대손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잡간의 딸

 

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리라."

 

 

이에 그 옛 터에 사자를 보내서 사당에 가까운 상전 30()을

 

공영供營의 자()로 하여 왕위전王位田이라 부르고 본토에 소속시키니,

 

수로왕의 17대손 <갱세賡世> 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해마다 명절이면 술과 단술을 마련하고

 

떡과 밥··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내어, 해마다 끊이지 않게 하고,

 

그 제삿날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年中) 5일을 변동하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그 정성어린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199]에 편방을 설치한 뒤로부터

 

구형왕 말년에 이르는 330년 동안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는 길이 변함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용삭 원년 신유[661]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빠뜨리기도 했다.

 

 

아름답도다, 문무왕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신라 말년에 <충지忠至> 잡간이란 자가 있었는데

 

높은 금관성을 쳐서 빼앗아 성주장군이 되었다.

 

 

이에 <영규英規> 아간이 장군의 위엄을 빌어

 

묘향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더니,

 

단오를 맞아 고사하는데 공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전세(前世)의 인연으로 해서

 

외람되이 성왕이 계시던 국성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그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고

 

향과 등을 바쳐 신하된 은혜를 갚아야겠다."하고,

 

 

삼척(三尺) 교견(鮫絹)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손히 받들더니,

 

겨우 3일 만에 진영(眞影)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서

 

땅 위에 괴어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군은 몹시 두려워하여 그 진영(眞影)을 모시고

 

사당으로 나가서 불태워 없애고

 

곧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했다.

 

 

"어제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해서 이런 일들이 거듭 생기는 것일까?

 

이는 필시 사당의 위령이

 

내가 진영(眞影)을 그려서 모시는 것을 불손하게 여겨 크게 노하신 것 인가보다.

 

<영규英規>가 이미 죽었으므로 나는 몹시 두려워하여,

 

화상도 이미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베임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진손이니 전에 하던 대로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다."

 

 

<규림圭林>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내 오다가

 

나이 88세에 죽으니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단오날 알묘제때 <영규英規>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발광하여,

 

사당으로 와서 <간원間元>이 차려 놓은 제물을 치우고

 

자기가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데 삼헌(三獻)이 끝나지 못해서

 

갑자기 병이 생겨서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

 

 

옛 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음사(淫祀)는 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먼저는 <영규英規>가 있고 이번에는 <준필俊必>이 있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한 말인가.

 

 

또 도둑의 무리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이 있다고 해서

 

와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에 왔을 때는,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당긴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오더니

 

사면을 향해서 비오듯이 화살을 쏘아서 7,8명이 맞아 죽으니,

 

나머지 도둑의 무리들은 달아나 버렸다.

 

 

며칠 후에 다시 오자 길이 30여 척이나 되는 큰 구렁이가

 

눈빛이 번개와 같은데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이니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자빠지면서 도망해 흩어졌다.

 

 

그리하여 능원안에는 반드시 신물이 있어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건안4년 기묘[199]에 처음 이 사당을 세운 때부터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신지 31년 만인 대강2년 병진[1076]까지

 

도합 878년이 되었으나 층계를 쌓아 올린 아름다운 흙이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심어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으며,

 

더구나 거기에 벌여 놓은 수많은 옥조각들도 부서진 것이 없다.

 

 

이것으로 본다면 <신체부辛替否>가 말한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괴되지 않은 무덤이 있겠느냐."고 한 말은,

 

오직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그 말이 맞았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辛替否>의 말을 믿을 수 없다 하겠다.

 

 

이 중에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29일엔 이 지방 사람들과 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이 동서쪽으로 서로 눈짓을 하면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뉘어서

 

망산도에서 말발굽을 급히 육지를 향해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해서 다투어 달리니,

 

이것은 대개 옛날에 유천간(留天干)과 신귀간(神鬼干)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한 개요 원년 신사[681]에는

 

금관경이라 이름하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925년에 우리 고려 태조가 통합한 뒤로는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두어 48년을 계속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 혹은 김해부 라고 하고 도호부를 두어 27년을 계속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 동안 계속했다.

 

 

순화2(991)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조사해서 보고했다.

 

"수로왕의 능묘(陵廟)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15()을 가지고 전대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부()의 역정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일을 맡은 관청에서 그 장계를 가지고 가서 보고하자,

 

그때 조정에서는 명령을 내렸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해서 성군이 되었고

 

이내 왕위에 올라 나이 158세나 되셨으니 삼황이후로 이에 견줄 만한 분이 드물다.

 

수로왕께서 붕()한 뒤 선대부터 능묘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量田使)가 또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이를 옳게 여겨

 

그 반은 능묘에서 옮기지 않고, 반은 그곳의 역정(役丁)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절사 [양전사量田使])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이에 그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의 부역하는 호정에게 주었다.

 

 

이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양전사(量田使)가 몹시 피곤하더니

 

어느날 밤에 꿈을 꾸니 7,8명의 귀신이 보이는데

 

밧줄을 가지고 칼을 쥐고 와서 말한다.

 

"너에게 큰 죄가 있어 목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서 깨어 이내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해 가다가

 

그 병이 낫지 않아서 관문을 지나자 죽었다.

 

이 때문에 양전도장에는 그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뒤에 사신이 와서 그 밭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 12() 9()뿐이며

 

3() 87() 1()이 모자랐다.

 

이에 모자라는 밭을 어찌했는가를 조사해서 내외궁에 보고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그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게 했는데

 

이 때문에 고금(古今)의 일을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수로왕의 8대손 김질왕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매우 숭상하여

 

許皇后시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그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29년 임진[452]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하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절 근처에 있는 평전10()을 측량해서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剛> 왕후사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지역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세조이하 9대손의 역수를 아래에 자세히 기록하니 그 명()은 이러하다.

 

처음에 천지가 열리니, 이안(利眼)이 비로소 밝았네.

 

비록 인륜은 생겼지만, 임금의 지위는 아직 이루지 않았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국은 서울이 갈렸네.

 

계림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이 뒤에 경영(經營)되었네.

 

스스로 맡아 다스릴 사람 없으면, 누가 백성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을 돌봐 주었네.

 

여기 부명(符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精靈)을 보내셨네.

 

산 속에 알을 내려 보내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속은 오히려 아득하고, 겉도 역시 컴컴했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듯하나 들으니 여기 소리가 나네.

 

무리들은 노래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치네.

 

7일이 지난 후에, 한때 안정되었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이 텅 비었네.

 

여섯 개 둥근 알이 내려오니, 한 오리 자줏빛 끈이 드리웠네.

 

낯선 이상한 땅에, 집과 집이 연이었네.

 

구경하는 사람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 우글거리네.

 

다섯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城에 있었네.

 

같은 때 같은 자취는, 아우와 같고 형과 같았네.

 

실로 하늘이 덕을 낳아서,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온 세상은 맑아지려 했네.

 

궁전구조는 옛 법을 따랐고, 토계는 오히려 평평했네.

 

만기를 비로소 힘쓰고, 모든 정치를 시행했네.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하나이고 오직 정밀했네.

 

길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고, 농사짓는 자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백성은 태평을 맞이했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大椿)의 나이를 보전하지 못했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모두 슬퍼했네.

 

금과 같은 그의 발자취요, 옥과 같이 떨친 그 이름일세.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사당의 제사가 오직 향기로웠네.

 

세월을 비록 흘러갔지만, 규범(規範)은 기울어지지 않았네.

 

 

 

 

금관가야 건국년도 42년은라의 건국년도를 끌어올리다보니 맞춘 것이다.

 

실제 건국년도는 156년이고 수로왕비 <황옥>과 수로왕의 사망년도는 일치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