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축{AD533}<대장>3년,

 

춘정월, 경인일 초하루, 포진궁(抱真宮)에서 조례를 받았다.

 

종실 여인 10인이 저녁을 감당하였는데, 5인이 승은을 입었다.

 

<보군宝君>태자비<태원太原>공주(29세)・叔<평공平公>비<사완謝婉(21세)>・

<육>태자 비<>공주(19세)・<흥효興孝>태자비<평원平原>공주(35세)・

<평성平成>태자비< 숙>공주(17세)였다.

 

상이 <숙>공주에겐 밤새도록 잠자리 시중을 들라 명하였다.

 

상은 손수 변도 받아주면서, 옥구슬인양 그녀를 아껴주었다.
 

<각恪>태자가, 글을 올려 스스로 동궁 자리를 내어놓으며, 아뢰길;

 

“신은 성격이 나태하고 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니 마땅치도 않습니다.

뜻으로 삼을 것을 강호에서 찾았습니다.

신의 자식 <평성平成>은 학문을 좋아하고 예의를 알고 있습니다.

동궁자리를 그 아이에게 물려주게 하여주시길 청하옵니다.

그리되면 신은 마음 편히 살면서 병을 돌보며 구름 밖을 소요하고자 하옵니다.”

라 하였더니,

 

상은 그의 성품이 지나치게 맑고 차가움을 아는지라 힘들여 말릴 수도 없었다.

 

<평성平成>을 동궁으로 삼았으며,

<각恪>은 漢王으로 고쳐 봉하고 그 지위는 동궁보다 높게 하였으며,

<은>공주는 동궁정비로,

<경안慶安>공주는 漢王 정비로, <선완宣婉>은 漢王귀빈으로 삼았다.

<정양正陽>공주는, <왕서王胥>의 처로 삼고, 2품의 작위로 하였다.

2월, 동궁이 업()으로 가서 <옥릉玉陵>공주와 혼인하여 돌아왔다.

역시 <호胡>태후의 딸이다.

부친은 <담복談福>이었는데, 혹은 <역>의 소생이라 하기도 한다.
 

<고환高歓>이 년초에 <조>를 습격하여 적홍령(赤谼岺)에서 크게 이겼다.

 

<조>는 궁산(竆山)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가 독두나무에 목매어 죽었고,

<환>은 그가 죽는 것을 곁에서 확인하고 후하게 하여 묻어주었다.

 

<모용소종慕容紹宗>이 <이주영>의 처자와 <이주조>의 남은 무리를 데리고

<고환高歓>에게 찾아가 항복하였더니, 모두를 후하게 대하여 주었다.

 

<고환高歓>은 <이주영>의 딸인 <자유子攸>의 처가 미모임을 보더니만

장막으로 들여서 통정하고, 말하길;

 

“신은 황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응당 황후를 충심을 다하여 보살펴 드릴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后{<자유>의 처}가 말하길;

 

“따라죽지 못한 사람으로 떠돌다가 이 지경에까지 떨어졌습니다.

승상께서는 가련하게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라 하였으며,

 

이때부터 <환>의 총첩이 되어 아들 <유>를 낳았다.

이 여인이 <죽>비이며,

<공恭>의 처였던 <매>비와 함께 둘 다 <환>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3월, 중외대부 <양의신梁義臣>이 리부상서를 겸하게 되어

사람을 가려 뽑아 임용하는 일을 담당하더니,

항상 제의 침소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여우같은 여인들을 들여보냈더니,

권력이 내외함에 기울게 되었고,

그 시절에 사람들은 천하를 감당해 다스린다 말하였다.

상이, 미행하여 <봉희>장에 머무르며 즐기다가 돌아오는 길에,

<령산>을 지나게 되었다.

 

산수가 밝고 지초가 하늘거림을 보더니 풀밭에 앉았고,

저 앞마을의 큰 농막에 대해 물었더니, 행주(幸州)자사 <이의신李義臣>의 집이었다.

 

<의신>은 재주가 많아서 선제의 총희 <하선賀仙>을 처로 맞게 되었었다.

 

상 또한 일찍이 <선仙>을 애모하였으나,

자리를 함께 하기도 전에 헤어져서 이미 10여년이 지났던 터였다.

 

홀연 옛 일이 생각나자, <룡랑龍郞>에게 서찰을 지니고 가서 불러오라 명하였다.

 

이때, <하선賀仙>은 홀로되어 살면서 자신의 아들 <의경義卿>과 함께 喪廳을 지키고 있었다.

 

햇볕은 따듯하고 날씨도 좋아 춘심이 사방에 짙었는데,

갑자기 <룡랑龍郞>이 편지를 지니고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선賀仙>에게 주어지자, 4배 한 후 엎드려 읽었고, 쓰여 있길;

 

“우연히 이곳에 이르렀다가, 경이 홀로되어 있음을 들었소.

옛 정이 생각나니 서로 만나서 잠시 머물고 싶소.

얘기인즉 회포를 풀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오?”라 되었더니,

 

속옷을 가뿐히 하고 고운 옷차림으로, 싫은 기색 없이 따라 나섰다.

 

<하선賀仙>은 서찰을 보더니만 정신이 아뜩하여져서, 엎어지고 넘어지며 찾아왔고,

상은 부둥켜안고 숲 속에서 흥건하게 즐기고, 몹시 기뻐하며

 

“일어나보게나.”라 하였고,

 

{또} 이르길;

 

“내가 곧 자네에게 좋은 지아비를 골라주겠네.”라 하였더니,

 

<하선賀仙>이 아뢰길;

 

“첩의 아들 <의경義卿>은 나이가 열 셋이어서, 가히 아비를 대신할 만합니다.

첩이 어찌 다른 사람의 자식을 낳겠습니까?

첩의 지아비는 오로지 성상과 <의경義卿>뿐입니다.”

라 하였다.

 

이에 상이

 

“재물은 먹고 살만은 하였었나?”라 물었더니,

 

<선仙>이 아뢰길;

 

“무논에다 농사짓고 산에서 땔나무 하였더니, 배고픔과 추위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 부귀를 구하였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윽고 <의경義卿>은 적어랑(籍圉郞)으로 삼았고,

<선仙>은 잠실부인을 삼아서 동산 가운데에다 집과 마른 땅을 주고는

누차 오가면서 승은을 내렸다. <선仙>의 나이는 30으로, <하국賀國>의 딸이었다.

4월, 동궁이 <옥릉玉陵>과 함께 돌아와서 아뢰길;

 

“<수{北魏 孝武帝}>가 <고환高歓>을 제압하려고 멀리 있는 관중(関中)과 결연하였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의 잘못이 염려되어서,

<화양華陽>·<옥릉玉陵>·<평양平陽> 등{에서 出嫁하여 온 여인들임}과 함께,

천자의 집안이 잘 되길 신명에게 빌었다.
 

<양의신梁義臣>이 동궁대부를 겸하게 되었다.

동궁이 <의신義臣>을 좋아하여 대부로 삼아달라고 청을 하였고,

상은 동궁을 아끼어 허락하였다.

 

이윽고, <의신義臣>이 동궁과 통하게 되었다.

 

이 시절, 조정이 조용하고 평안한 나날이 오래도록 유지되었더니, 상하가 사치하였다.

 

단지 먹고 마시기를 밝히고, 음란하기를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앉아서 얘기를 나누면 헛된 것이었고,

게으른 풍조가 일어 널리 퍼져서 한 사람이 거둔 것을 열 사람이 먹어대는 격이었다.

 

태종{明治帝}의 다스림이 점차 쇠락하고 있었으니, 식자들은 이를 걱정하였다.

 <홍紅>황후가 <평성平成>의 딸 <계운桂雲>공주를 낳았더니,

<덕양德陽>황후가 <평성平成>과 함께 찾아가서 위안하였다.

 

<홍紅>후의 여동생 <금란金蘭>이 <평성平成>의 승은을 입기 시작하였다.

 

<견繭>공주가 상의 딸 <아蛾>를 임신하자,

상이 옷을 내려주고는 빈번히 잠자리로 불러들였다.
 

거란의 왕 <가시돌加尸突>이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먹혀 죽었다.

 

그의 처 <초언酢彦>이 자신의 아들 <오시돌娛尸突>을 세우려 하였더니,

<가시돌加尸突>의 동생 <호돈好頓>이,

북단(北丹){북거란}왕이 되어 습(霫)의 군병을 이끌고 기습하여,

<초언酢彦>을 사로잡아 처로 만들고, <오시돌娛尸突>은 아들로 삼았다.

 

이 시절, 거란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잦았는데,

세간에서는  “호랑이가 흥하여도, 나라는 흥할 뿐 갈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농경 <왕서王胥>가 양전(量田)을 기록한 장부 8,500권을 대부에 바쳤다.

 

상은, <덕양德陽>후와 함께, 이를 받고나서 군신들에게는 잔치를 베풀었으며,

양전시(量田寺)의 기공들 5천여 사람에게는 상을 내렸다.

 

장장 9년에 걸쳐서 이룩한 것이었다.

 

명을 내려 새로운 세법을 반포하고 고르게 세금을 매겼다.

 

이전에 비교하니 3배가 되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