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AD534}<대장>4년,

 

춘정월, 갑오일 초하루, 수림(獣林) 온궁(溫宮)에서 조례를 받았다.

 

상은 <숙俶>공주 및 <옥릉玉陵>공주와 내기바둑을 하며 벌거숭이 춤을 추었으며,

손수 칼로 고기를 끊어다 두 공주를 먹였으며,

동궁에게 명하여 <초운椘雲>宮으로 가보게 하였다.  

 

상은 또 <하양河陽>宮으로 가더니 <魏>의 황궁이 복 받길 기원하고는,

 

노래하여 이르길;

 

“내 나이 쉰아홉이 되니, 오직 반가운 것은 봉새 무리가 찾아오는 것뿐이고,

봄이 되니 모란꽃도 가슴을 열고 놀란 개미도 문을 활짝 여는구나.”

라 하였다.
 

2월, <魏>의 영녕사(永寧寺)에 큰 불이 나서 백장탑(百丈塔)이 재가 되어

보는 이들이 모두 통곡하니 울음소리가 성궐을 흔들었다.

 

<胡>태후가 병신년에 세운 것인데, 18년을 있다가 사라진 것이었다.

 

9층 불탑으로 층마다 열 길이었고,

꼭대기엔 열 길 크기의 절과 여덟 길 크기의 금불상이 있었다.

 

상은 이 화재 소식을 듣더니,

<화양華陽>・<옥릉玉陵>・<태원太原>・<금양金陽>공주들과 함께,

<胡>태후를 기리는 7일 도장을 열고, 승려 천 명을 먹였다. 불교가 부흥하였다.

3월, 동궁이 <옥릉玉陵>을 데리고 <魏>에 갔다.

 

서족(叙族)인 <수脩>가 우리의 도움을 받고자 누차 만나길 부탁하였던 때문이었다.

 

동궁이 <수脩>를 만나서 친근하게도 아형(阿兄){또래끼리의 존칭}이라고 불렀더니, 정의(情意)가 한데 묶인 삼단처럼 친밀하였다.  

 

<우문태宇文泰>가 하주(夏州)에서 평량(平凉)으로 들어가

<하발악賀拔岳>의 무리를 통솔하게 되었더니,

<수脩>가 <태泰>를 대도독으로 삼아서 <이호李虎>를 낙양으로 보냈다.
 

4월, 계축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덕양德陽>을 데리고, <초운椘雲>宮으로 갔다.  

 

갑인일에 선제의 제2황후였던 <경鯨>공주가 춘추 70에 죽었다.

 

后는 <경鯨>후 소생인 수황(壽皇){長壽大帝}>의 딸이었으며,

태종{明治帝}>과 선제{安藏大帝}를 섬겼었으며, 몸을 삼가길 매우 바르게 하더니,

선제 말년부터는 머리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가 지금 죽은 것이었다.

 

상과는 같은 어머니 소생이어서 보살피고 아끼는 마음들이 도타웠었다.

 

상의 아들 <리鯉>와 <릉陵> 두 태자를 낳았다.

 

<경鯨>태후 무덤 옆에 장사하고, <리鯉>태자가 맡아 모시라 명하였다.
 

<우문태宇文泰>가 <후막진열矦莫陳悅>을 쳤더니,

<열悅>이 들판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태泰>가 이윽고 진(秦)과 롱(隴) 땅을 평정하고 관중(関中)으로 들어가 도읍하였다.

 

<고환高歡>이 <태泰>와 화친하고자 후하게 예를 갖추어 사신을 보냈지만,

<태泰>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 문서를 <수脩>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수脩>와 <태泰>는 서로 결친하고,

<고환高歡>과 <수脩>는 서로 멀어지게 되었다.

5월, <수脩>가 하남(河南)의 군병을 불러 모아 낙양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남으로는 락수(洛水)를 북쪽으로는 망산(邙山)을 경계로 하였다.

 

우리의 동궁을 진양왕(晋陽王)・좌표기대장군을 삼아서 함께 자신의 군대를 사열하고, 겉으로는 <梁>을 치겠다고 하였으나, 속으로는 실제 <환歡>을 토벌할 속셈이었다.
 

신라의 <철부哲夫>가 죽었다. 글과 글자에 능하였으며 웅장한 지략도 있었다고 한다.  

 

<연화淵華>가 동궁의 아들 <희喜>를 낳았다.
 

6월, <고환高歓>이 주군{<脩>} 곁의 악한들을 제거하겠다면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나갔더니,

그 군세를 감당할 수 없는 <수脩>의 신하들은

각자가 살아남기를 도모하며 관망할 뿐 감히 <환歡>을 적대하지 못하였다.

 

이에 <수脩>는 계략이 궁하여져서 <우문태宇文泰>에게로 달아나려 하였더니,

 

<배협裴俠>이 아뢰길;

 

“<환歡>을 도모하면 곧 죽으려 다가가는 것이 되고,

<우문태宇文泰>에게 도망하면 곧 걱정거리가 다가 올 것입니다.

<태泰>는 3군이 받드는 이가 되어 102곳의 땅에 의거하여

이미 창을 잡고 있는 것이니, 어찌 달래서 그 창의 손잡이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러다가는 끓는 물을 피하려다 불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될 것입니다.”

라 하였다.

7월, 형혹성이 남두성으로 들어갔다.

 

<수脩>는 하교(河橋)에 10여 만병을 둔치고 있었는데,

<고환高歓>이 수일동안에 900여 리를 행군하여

이미 <河>의 북변 10여 리에 다다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심은 흉흉해지고 군병들은 싸울 뜻을 잃었다.

 

<수脩>는 곧 낙양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할 생각에,

우리 동궁에게는 귀국하기를 권하였다.

 

동궁은 부득이 하여 공주를 데리고 말과 나란히 걸었으며,

<분장芬長>과 <화백華栢>을 시켜 미륵창을 세우고 길을 나섰다.

 

밤이 되자 이미 성중에선 북소리가 시작되었으며,

<수脩>는 서쪽으로 도망하였고, 죽은 이가 반을 넘었다 들었다.

 

종실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성난 백성들은 난리를 피우며 종실 부녀를 억지로 능욕하였더니,

곡성이 하늘을 울렸다.

 

종실들 중에 동궁에게로 찾아와 의지하려는 이들이 점차로 많아지니

먼 길을 떠날 수도 없어졌다.

 

그런데 <고환高歡>이 이 소식을 듣고는 변고가 생길까를 걱정하여,

병사를 보내서 우리 동궁을 호위하여 환국하게 하였다.

 

여러 공주들은 변고가 생겼음을 듣자 울부짖을 뿐, 누가 원흉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에 상이 여러 공주들과 그 아들 딸들에게 이르길;

 

“<수脩>가 <공恭>을 죽인 일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조종이 계신 이래로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삼았더니,

형제간에 서로 잔혹함이 없었다.

천하 만고 어느 곳에서나 법으로 삼을만한 것이다.

이런 법도가 끊겼었다면 어찌 <魏>와 다름이 있었겠느냐?

너희들은 망령되게 싸우거나 서로를 잔혹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 하였다.

8월, <수脩>는 장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여동생 <풍익馮翊>공주를 <우문태宇文泰>에게 처로 주었다.

 

<고환高歡>은 <수脩>를 추격하였으나 잡지 못하자,

동관(潼関)을 공격하여 빼앗고 전진하여 화음(華陰){華山 북쪽}>에 주둔하였으며,

<후경候景>을 보내서 형주(荊州)를 쳐서 빼앗았다.
 

10월, <환歡>이 <선견善見>을 帝로 삼았다{東魏 건국}.

 

<옥릉玉陵>의 조카였으며, 나이는 열 하나이었다.

 

<선견善見>의 아비 <단亶>은 (자신이)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들이 임금이 되자,

뒤이어서 마음의 병이 생겼다.

 

<단亶>은 <역懌>의 아들이고, <옥릉玉陵>의 이복 오빠였다.
 

<우문태宇文泰>가 동관(潼関)을 공격하여 되찾고

지키던 병사 7천과 <수脩>를 사로잡더니 <태泰>는 대승상이 되었다.

 

<환歡>은 낙양이 서쪽으로는 <태泰>에게 압박을 받고

남쪽으로는 <梁>과 가까이 있게 되어서 업(鄴)으로 천도하였다.

 

사흘 이내에 40여만 호를 옮겼더니,

어지러운 이리떼 같은 모습이 한도 끝도 없이 줄을 이었었다.

윤12월 <우문태宇文泰>가 <수脩>를 짐독으로 죽였다.

나이 스물다섯이었으며, 시신은 불사(佛寺)로 옮겨졌다.

 

이가 효무제(孝武帝)이다.

 

간의대부 <송구宋球>가 통곡하며 피를 토하기 수일이 되었어도,

<태泰>는 그가 유명한 유학이어서 감히 죄를 줄 수 없었다.

 

<수脩>의 종형인 <보거宝炬>를 임금 자리에 앉혔다{西魏 건국}.

 

이에 앞서서, <보거宝炬>의 여동생 <평원平原>이 미색이어

<수>가 후궁으로 들였는데 <태泰> 또한 몰래 통정하였더니,

<수>가 노하여 <태泰>를 죽이려고 이를 <보거宝炬>와 상의 하였었더니,

<보거宝炬>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한 나머지 <태泰>에게 알렸었다.

 

<태泰>는 <수脩>를, 종매 세 명과 간음하고

또한 자기 처 <풍익馮翊>을 간음하였기에,

제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불사에 가두었다가 끝내는 죽였다.

 

<수>는 재질은 미치지 못하면서도 기백은 남아돌아서,

<환歡>을 도모하려다가 도망하였었고, <태泰>를 도모하려다가 죽었으니,

자신의 목숨이 어찌 될지를 몰랐던 사람이었다.

세 자매를 간음했다는 얘기는 <태泰>가 떠든 말에 불과 한 것이었다.
 

<우문태宇文泰>는 <독고신獨孤信>과 <양충楊忠>을 시켜서 형주(荊州)를 공격하다가, <후경候景>에게 쫓겨 <梁>으로 도망하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