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서기 534년 4월 

 

선신대마려(膳臣大麻呂)가 왕명으로 진주(眞珠)를 구하기 위하여

이심(伊甚, 現 千葉県 夷隅郡)에 사자를 파견하였다.

 

이심국조(伊甚国造)등이 밤 늦게 상경하였으므로 제 시간에 물품을 바치지 못 하였다.

 

선신대마려(膳臣大麻呂)가 대노(大怒)하여 국조(国造)들을 포박하고

연유를 물었더니 국조(國造) 치자(稚子) 등이 겁에 질려 후궁의 침실로 도망쳐 숨었다.

 

춘일(春日)황후가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 왔다가 침입자를 보고 경악하였다.

 

치자(稚子)등은 후궁 난입죄까지 더해져 죄가 무거워졌으므로

이심둔창(伊甚屯倉)을 황후에게 바치고 용서를 빌었다.


동년 7월

 

"황후는 비록 몸은 천자(天子)와 같다 하나 그 이름은 곧 잊혀지고 만다.

그러니 황후를 위한 둔창(屯倉)용 토지를 선정하여 정비하면

후대까지 자취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천황의 이 명령은 대하내직(大河内直) 미장(味張)에게 하달되었다.

 

왕의 사자가 말했다.

 

“ 자치전(雌雉田)의 비옥한 토지를 넘겨야 될거야!”

 

미장(味張)은 내키지 않아 사자에게 거짓을 고하였다.

 

“이 땅은 가뭄에 물을 대기 어렵고 비가 오면 범람합니다.

일 하는 만큼 소출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자는 돌아가 들은대로 아뢰었다.


동년 10월 천황이 대반대련(大伴大連) <금촌金村>에게 명하였다.

 

“짐에게 처가 넷 있지만 후사를 보지 못 했으니

세월이 지나면 짐의 이름도 사라지겠지.

짐에겐 이것이 항상 맘에 걸리는데 그대의 의견을 말 해 보라.”

 

“소신도 그걸 걱정하고 있나이다.

후사가 있던 없던 제왕은 가시적인 것을 이름으로 남기도록 해야 됩니다.

황후와 후비들을 위한 둔창(屯倉)을 설치하여

그 이름이 영원히 남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요.”

 

“소간전둔창(小墾田屯倉)을 경작민과 함께 사수원(紗手緩)에게,

앵정둔창(櫻井屯倉)을 경작민과 함께 향향유원(香香有媛)에게,

난파둔창(難波屯倉)을 경작민과 함께 택원(宅媛)에게 바치겠나이다.”


동년 윤12월 천황이 삼도(三嶋, 大阪府)를 방문하였다.

<금촌金村>이 수행하였다.

천황은 <금촌金村>을 현주(県主) 반립(飯粒)에게 보내 좋은 땅을 내놓도록 청하였다. 

 

반립(飯粒)은 한 없는 존경과 기쁨을 표시하며

상어야(上御野, 岡山市), 하어야(下御野), 상상원(上桑原, 奈良県吉野郡),

하상원(下桑原)과 죽촌(竹村)의 땅 40정(町)을  바쳤다…(이하 생략)


<금촌金村>은 미장(味張)에게 일렀다. 

 

“미장(味張)! 왕의 땅 위에 사는 어리석고 우매한 백성아!

너는 왕의 땅을 내 놓는 것을 원망하며 왕명을 저버렸다.

너를 군사(郡司)에서 파면한다.” 

 

미장(味張)은 두려움에 떨며 후회하였다.

 

땅에 엎드린 채 땀을 뻘뻘 흘리며 <금촌金村>에게 애원하였다.

 

“어리석은 농삿군이 지은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바라옵건데 군(郡)마다 봄에 5백, 가을에 5백의 농삿꾼을 천황에게 바치겠읍니다.

저의 자손대대로 이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그는 따로 협정전(狭井田)의 땅 6정을

<금촌金村>에게 뇌물로 바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같은 달 려성부연(廬城部連) 지거유(枳莒喻)의 딸 번원(幡媛)이 물부대연(物部大連)

미여(尾輿)의 영락(瓔珞, 머리장식)을 훔쳐 춘일(春日)황후에게 선물로 바쳤다.

 

일이 발각되자 지거유(枳莒喻)는 번원(幡媛)을 황후의 시녀로 바치고

안예국(安芸国, 현 히로시마) 과호려성부둔창(過戸廬城部屯倉)을 헌상하여

딸의 죄를 빌었다.

 

물부대연(物部大連) 미여(尾輿)도 이 일에 연관될까 두려워 십시부(十市部),

이세국(伊勢国)의 래협협(来狭狭), 등이(登伊)의 지토사부(贄土師部)

그리고 축자국(筑紫国)의 단협산부(胆狭山部)를 헌상하였다. 

 

무장(武藏) 국조(國造) 입원직사주(笠原直使主)가

동족의 소저(小杵)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는데 몇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소저(小杵)는 꽉 막히고 대들기 쉬우며 자존심은 강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는 은밀히 상모야군(上毛野君) 소웅(小熊)과 짜고 사주(使主)를 죽이려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입원직사주(笠原直使主)가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조정이 결단을 내려 소저(小杵)를 죽이고 입원직사주(笠原直使主)를 國造로 하였다.

 

입원직사주(笠原直使主)는 감사한 나머지 가만 있을 수 없어

횡정(橫渟), 귤화(橘花), 다빙(多冰), 창소(倉樔)의 둔창(屯倉)을 헌상하였다.

 

 

 

때는 서기 534년이었다.

 

계체 천황이 죽자 <사마>가 파견한 특사인 <사아斯我(466-535)>가

안한천황으로 즉위하여 백제 중흥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도내의 미야케(屯倉)을 거두어 들인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