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AD535}을묘 大藏5년,

 

춘정월, 무신일 초하루,

상이 동궁・<초운椘雲>・<덕양德陽>・<숙>・<옥릉玉陵>을 데리고

대궁{大宮){平壤大宮}에서 조례를 받았으며, 번국의 사신 일곱을 접대하였다.
 

<고환高歓>{東魏丞相}계호(稽胡){山戎 奚族}>인 <류이승劉蠡升>을 쳐서

깨뜨리고는 자기 아들 <징>을 되찾아왔다.

 

<징>은 당시 나이 열 넷이었는데, 끄떡하면 제 어미 <루>씨를 치붙었고,

아비가 밖으로 나가 있었던 보름동안엔 밤마다 아비의 첩인 <정>씨를 범하였다.

 

<정>은 <환>에게서 죄를 받을까 무서워서 애걸하였었지만,

<징>은 짐승 같은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그녀를 통음하였고,

연거푸 여러 날을 즐겼다.

 

<정>은 일찍이 자신의 여종들을 꾸짖었던지라,

마음에 독기를 품은 이가 이 음탕한 일을 알고는 <정>을 죽이려고

<환>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일러바쳤다.

 

<환>은 세인들이 조롱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징>을 곤장 100대를 쳐서 가두었으며 <루>씨와도 끊고 살았다.

 

<사마자여司馬子如>가 들어와 <환>을 찾아보고 말하길;

 

“제 아들도 제 첩을 통음하였습니다.

아들이 커서 어미를 범하고 딸이 커서 아비를 범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일들은 덮어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찌 간악한 비첩의 말을 믿어 대본(大本){보위의 후계}을 위험하게 하십니까?

<징>은 바로 큰 기둥{보위의 후계}입니다.”

라 하였더니,

 

<환>도 그렇다고 여겨서 고변한 여종을 죽이고

<루>와 <징>을 이전과 같이 아끼게 되었으며,

 

이르길;

 

“<자여子如>가 내 처자를온전하게 하였다.”

라 하면서, 금 서른 근을 하사하였다.

 

<징>이 <정鄭>과 <루婁>를 자행하여도 내버려두었고,

미워하거나 화내지도 않았다.

 

모두들 <환>이 <징澄>에게 곤장 친 것은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었으며,

다만 사람들의 이목 때문이었다고 여겼다.  

 

<환>이 <자여子如>{東魏 大行台·尚書}를 시켜 동관(潼関)을 공격하였고,

화주(華州)를 습격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자사 <왕웅王熊>이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더니 몽둥이로 이들을 물리쳤다.  

 

<보거宝炬>{西魏 景文帝}는 <을불乙弗>씨를 처로 삼았다.

2월, <소연蕭衍>{梁 武帝}이 <진관晋冠>의 사신(私臣)을 통하여

금불상, 단향, 용봉차,귤당 등을 바쳤다.

 

이 시절 <진관晋冠>은 <梁>과 토산물 및 재화를 교역하였고,

왕래하는 선박이 끊이지 않았었다.
 

 

3월, <고환高歓>이, <이승蠡升>이에게 화친을 약속하고 딸을 처로 주기로 하였더니,

그가 방비를 하지 않기에 그를 습격하였더니,

그의 北部이 <이蠡升>의 목을 베어 투항하였다.

 

남은 무리들이 <이蠡升>의 아들 南海을 다시금 세우기에,

<환>이가 진격하여 南海王을 사로잡았더니,

그의 황후 및 여러 왕과 공경들 이하 400여명과

화족(族) 및 이족(夷族) 5만여호가 <환>에게 귀부하였다.
 

26일, <환>이 <수>의 처를 팽성왕(彭城王) <소>에게 처로 주었다.

 

<소>는 <자유子攸>의 형인 <소>의 아들이었으며,

<수>와는 재종{6촌} 형제간이었다.

 

<소>는 용모가 예쁘고 부녀자 같이 여렸기에,

<수>의 처가 그에게 오가면서 상통한지 오래였으나,

<수>가 피살되었단 소리를 듣더니 <소>의 처가 되기에 이르렀다.

 

<환>의 장녀이다.
 

<우문태宇文泰>가 <소작蘇綽>을 좌승으로 삼았다.

 

<작>은 <宋>에서 묵형(墨刑){刺字刑}을 받고 쫓겨나자,

<태泰>의 휘하로 들어갔었으며 새 이름도 얻었다.

 

<태泰>는 창지(倉池)로 물고기 잡이를 나가서 함께 얘기를 나누다가,

그물을 잊어버리고 돌아갔다.

4월, <고환高歓>이 <고오조高敖曹>와 <후경候景> 등을 시켜서

<梁>을 토벌하며 일진일퇴하였다.

 

<우문태宇文泰>가 <환>의 죄 20가지를 주워섬겼더니,

<환>{東魏}> 또한 <태泰>{西魏}>를 역도라 하면서

100만 군병을 일으켜서 서쪽{西魏}을 토벌하겠다고 기약하였다.
 

 

5월, 안평(安平)장무(章武) 모두 큰 비가 내리자 홍수가 크게 일어

매우 많은 백성들의 집이 물에 뜨고 무너졌으며, 죽은 이들이 200여 사람이나 되었다.

 

명을 내려 진휼하게 하였다.  

 

 

7월, <의신義臣>이 동궁의 아들 <춘성春成>을 낳았다.

 

그녀의 어미가 한미한지라 태자가 되지는 못하였으며,

다만 소공(小公)이라고 부르게 하였고, 옷은 태자의 예와 같이 하여 하사하였다.
 

 

8월, <고환高歓>이 봄부터 백성 10만 명을 징발하여 낙의 궁전을 헐어서

그 자재를 업()으로 실어 들였으며,

또한 7만 6천명을 징발하여 업()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우문태宇文泰>가 <조강趙剛>을 시켜서,

<고환高歓>의 신하인 <이민李愍>을 유혹하길

동형주(東荊州)를 가지고 <태泰>에게 투항하라.’하였고,

또한 <소연蕭衍>에게로 가서 설득하여 부추기길

<하발승賀拔勝>과 <독고신獨孤信> 등을 보내라고 령을 내리라 하였다.  

 

<태泰> 어미의 조카인 <왕초세王超世>가 진주(秦州)자사가 되더니

교만하여져서 재물을 상으로 나누어주었다.

 

<태泰>가 법령을 가중하여 그를 죽였더니,

사람들은 차가운 독기가 내종형{외4촌}에게 미쳤음이라고 하였다.
 

 

10월, 동도(東都){初都}>에 지진이 일었다.

 

상은 역대의 제와 후들의 산릉을 수리하고 엄히 수호하라 명하였다.

 

마침 꿈에 조짐을 보았었고, 땅 또한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11월, <고환高歓>이 둘째 아들 <양洋(528- )>을 표기대장으로 삼았고,

의전은 태원공(太原公)과 같게 하였다.

 

이 때 나이는 여덟 살이었으니 그 속뜻이야 알 만하였다.

 

일찍이 <양>은 헝클어진 실을 다스림에 칼로 잘라놓고, 말하길;

 

“헝클어진 실은 잘라버리는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환>은 <양>을 현명하다 추켜 칭찬하며 이르길;

 

“나보다 낫구나.”라 하였다.

 

<환歡>이는 잘라버림으로 다스리겠단 말인가?

 

<양洋>의 포악함은 모두 <환歡>이가 그리 만들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걸桀>과 <주紂>의 죄 또한 살펴보면 그 아비가 아들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임금 된 자의 아들 교육은

<환歡>이 <양洋>을 내버려 둔 것 같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양음楊愔>이 <양洋>의 사마가 되었다.

12월, 우레가 일었고,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상은 의원과 약재를 백성들에게 보내라 명하였으며,

색사에 조심하고 음식을 줄였으며 신명에게 빌었다.

 

급히 질병을 멎게 하여 백성을 구하고자, 도장을 열었다.  

 

<옥릉玉陵>이 딸 <청릉靑陵>공주를 낳았다.

 

상이 <옥릉玉陵>을 위무하고 아끼는 것이 지나쳤더니,

<옥릉玉陵>이 날마다 제의 침소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내는 것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보거宝炬>{西魏 景文帝} 사신을 보내 준마와 옥 및 비단을 바치며,

 

아뢰길;

 

“신은 폐하의 외가 자손이오며, 신의 처 <을불乙弗>은 <토곡吐谷>을 잇고 있으며

또한 을불대제(乙弗大帝)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러한즉 신의 부처 둘은 폐하의 집안사람인 것입니다.

 

(지난번) 서로 만나 뵈었을 땐 쉴 겨를도 없었고,

<고환高歡>에게 핍박을 당하느라 동쪽으로 찾아 뵐 수도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청을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주시길 바라옵니다.

 

팔 한 쪽의 힘을 빌려주신다면 7묘(七廟){北魏 7대조의 사당}를 회복하고

 

영원토록 구생(舅甥){외삼촌과 생질}간의 예의를 지키겠습니다.”

라 하였다.

 

상은 후하게 음식을 먹여서 돌려보냈다.

 

 

이 시절, <환歡>과 <태泰>는 여색외교(女色外交)로 노를 저어 다가왔으나,

상은 든든히 지키면서 어느 쪽을 편들지도 않아서 그 와류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유연(柔然)왕 <두병頭兵>이 <고환高歡>에게 청혼하였고,

<환歡>은 상산왕(常山王)의 여동생을 <란릉蘭陵>공주로 삼아서

<두병頭兵>에게 처로 주고는 <두병頭兵>을 시켜서 <태泰>를 치라고 하였다.

 

이에 <태泰> 또한 유연(柔然)과 혼인하였으니,

그 추한 작태는 막심하였고, 천박하다 할 만하였다.

<안원대제기>

 

 

534년 北魏는 西魏와 東魏로 분렬된다.

西魏는 장안을 수도로 景文帝 <元寶炬>가 다스리나 실권은 <宇文泰>에게 있었고

東魏는 낙양을 수도로 孝靜帝 <元善見(524- )>이 다스리나 실세는 <高歡>이었다. 


 

 

 

 

<534년경 동북아의 정세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