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AD536}大藏6년,

 

춘정월, 임인일 초하루, 용산(龍山)온궁(溫宮)에서 조회를 받았다.

 

<>왕 <>이 입조하여 자신의 종제{4촌동생}인

<류이승劉蠡升>의 원통함을 털어놓자,

 

상이 이르길;

 

“<이>는 망령되게도 스스로를 존대하려 하였다가{稱帝하였다가} 멸망한 것이오.

그대는 의당 삼가 봉역을 지키고, 신중히 처신하여 허튼 움직임을 하지 마시오.”

라 하였다.
 

상이 <화양華陽>과 <옥릉玉陵>을 데리고 하양궁(河陽宮)으로 가서 연회를 열고

오래 사시라고 술을 올렸다.

 

后는 고국{친정 나라 魏}의 어려움을 들어 사양하였었으나,

 

상이 이르길;

 

“아녀자는 응당 지아비 집안을 좇아 향락하는 것인데,

어찌 친정집을 걱정하십니까?”

라 하였다.

 

<하양河陽(477- )>은 나이 열다섯에 태종{明治帝}에게로 와서 5남 7녀를 낳았으며,

<魏>의 공주 출신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이때, 환갑을 맞이하였더니,

내외의 사람들이 축하하는 때인지라 빛나게끔 준비를 하였었고,

이날 밤엔 상이 친히 등희(燈戱)를 거행하였다.
 

<소연蕭衍>이 자신의 아비를 위해 황기사(皇基寺)를 지었다.

 

<홍>씨를 무고하여 겁박하고 죽였으며,

그녀 집의 거대한 목재를 몰수하여 절을 지은 것이었다.  

 

<소연蕭衍>은 그것을 효행이라 여겼단 말인가!

2월, <고환高歓>이 자신의 아들 <징>을 병주(幷州)자사로 삼았다.

나이 열다섯이었으며, 좀 있다가 상서령영군・경기(京畿)대도독을 얹어주었다.

 

사람의 임용과 법을 집행함에 엄준하고, 일을 처리함에 엉거주춤함이 없었더니,

안팎이 놀라서 움직임이 빨라졌다.

 

병주(幷州) 별가(別駕)<최섬崔暹>이 좌승이 되었다.  

 

병자일에 <홍>황후가 <계음桂陰>공주를 낳았다.
 

3월 8일, <齊>땅의 <도홍경陶弘景>{梁 武帝 蕭衍의 신하}

단양(丹陽)땅의 모산(茅山){三茅山,句曲山}에서 죽었다.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이보夷甫>는 사람 쓰기가 흩어져 산만하고,

<평숙平叔>은 앉아서 말만하니 공허하다.

세월이 지나면 소양전(昭陽殿)선우궁(単于宮)이 되는 것을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齊>의 사람들은 무사(武事)는 익히지 않고 다투어 도리(道理)만을 이야기하였다.

 

<왕연王衍>과 <하안何晏> 등이 그러하였었다.

 

소양전(昭陽殿)은 이후 <후경后景>의 거처가 되었다.

 

5월, 상은 봄・여름이 내내 가물었더니 기우제를 올리고,

 

이르길;

 

“짐이 덕이 없어, 지난해엔 물난리가 났고, 올해엔 가뭄이 들었다.”

라 하더니,

 

황태자에게 명하여 감국 하게하고,

밖으로 나가 행궁에 머물면서 감선(减饍)하고 자책하였다.

 

동궁은 나이가 비록 열아홉이었으나 큰 정사를 능히 처결하였고,

아울러서 <의신義臣>의 보좌함이 있었더니 낭패 된 일이 없었다.

 

이에 상은, 동궁과 <의신義臣>에게 정사를 맡기고는,

날마다 후비들과 더불어서 시나 읊고 술 마시며,

山宮 및 수루(水樓)와 온수(溫水) 및 무림(茂林) 간을 오가며 스스로 즐거이 지냈다.

 

<의신義臣>은 음란하고 거친 여인이긴 하였으나,

능히 현명한 이에게 일을 주어, 시시때때로 생기는 정사에 잘못됨이 없었으니,

백료들이 그녀를 좋아하였다.

8월, 황충이 크게 일자,

동궁은 <의신義臣>과 함께 교외로 나가서 황충을 잡아서 먹었으며,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였고,

관청의 소를 풀어서 먹을 것이 없는 백성에게 하사하였다.  

 

<고환高歓>이 둘째 아들 <양洋>을 시켜서 옥기・법주・준마・명주 등을 바쳐왔으며,

딸을 바치겠다고 청하였다.

 

<양洋>은 당시 나이 아홉이었으나 조숙하여 성인 같아보였다.

 

상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숙>공주가 동궁의 딸 <준>공주를 낳았고,

<견>공주가 상의 딸 <호>씨를 낳았다.

9월, <두병頭兵>{柔然 王}의 사신 <우고진宇古晋>이 와서

불로주와 누런 낙타 30필을 바쳤다.

 

와서 아뢰길;

 

천산(天山) 북쪽에 선인이 있는데, 겨울을 춥지 않게 여름을 덥지 않게 할 수 있으며, 신병들이 그를 호위하고 있어서 돌궐(突厥)의 창으로도 그를 관통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원종原宗>이 제를 참칭하고 년호를 건원(建元)이라 고쳤다.

 

이에 상이 화가 나서 <원종原宗>을 정벌하고자 하며,

 

이르길;

 

태종(太宗){명치제} 이래로 글을 중시하였던 폐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

정벌하지 않으면 징계할 수 없을 것이오.”

라 하였더니,

 

<의신義臣>이 간하여 아뢰길;

 

“지금 그를 정벌한다면 필시 대비하고 있어 그의 술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니,

잠시 그의 뜻이 교만하게 놓아두어서

하늘이 벌하기를 기다림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라 하였다.

 

이때, <명농>은 역시 함부로 제를 칭하긴 하였었으나,

사신을 보내와서 신하를 칭하며 바치기가 지난날과 같아서 정벌하지 않았다.
 

<하발승賀拔勝> 등이 <梁>에서 장안으로 돌아갔다.

 

<소연蕭衍>이 남쪽 동산에서 연회를 열어 전송하였더니,

<승>은 은혜가 고마워서,

도중에 금수를 만났어도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은 쏘지 않았다.

 

<후경候景>이 <승>을 협박하자 <승>은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였으며,

얼고 굶주려 길에서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살아 돌아간 자가 또한 말하길;

 

“얼은 이미 빠졌고, 몸뚱이만 돌아오는 것도 가하구나.”

라 하였다.
 

관중(関中)에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를 뜯어먹었더니

죽은 이가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탄식하며 이르길;

 

“기근이 심하기가 그 같은 지경에 다다랐단 말이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서로를 뜯어먹는 변란은 없었소.

<추모>의 덕이 어찌 크지 않았겠소?”

 

<고환高歡>이 기근으로 인하여 <태泰>를 치고자, <梁>과는 화친을 약조하여 놓고,

동관(潼関)으로 진격하였다.  

 

<선견善見>{東魏 孝靜帝}의 아비 <단>의 부음이 다다랐다.

 

상은 <옥릉玉陵>과 함께 단궁(檀宮)에서 애도하고,

<륭>태자에게 명하여 업()으로 가서 조상하고 법식에 맞게 부의하라 하였다.

<안원대제기>

 

 

 

23년(A.D. 536) 적룡(赤龍=丙辰)

 

 

命苔宗肜吹比助夫等 爲三路將軍 以餮舟楫收 伐野國 守知諫之 不聽

 

<태종苔宗>, <동취彤吹>, <비조부比助夫> 등을 삼로(三路)장군으로 명하고

배를 수습하여 야국(野國)을 정벌코자 하니 <수지守知>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群臣上帝號曰 神國金天大帝 始改元曰 建元 元年 大赦國中

賜八十以上衣酒 加耶福優 爵馬有次

 

신하들이 제의 칭호를 높이어 신국금천대제(神國金天大帝)라 하고

처음으로 연호를 고쳐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다.

 

나라 안에 대사면을 하고 80세 이상 자에게 옷과 술을 내리고

가야는 복업으로 대우하여 작위와 말을 차별있게 내렸다.

<금천대제 법흥진왕기>

 

 

 

서기 536년 10월 신라가 임나(任那){미마나, 대마도}를 공격하였으므로

<대반금촌>에게 명을 내려 그의 아들 반(磐)과

협수언(狭手彦)을 보내 임나(任那)를 돕게 하였다.

 

그 때 반(磐)은 축자(筑紫)에 남아 관련된 행정업무를 맡고

협수언(狭手彦)은 임나(任那)와 백제를 구원하러 갔다. 

 

남가라(南加羅)와 훼기탄(喙己呑)이 서기 532년 까지 신라에게 합병되고

서기 536 탁순(卓淳)이 합병되었다.

 

신라는 대마도(對馬島) 북부에 있는

임나국(任那國), 남가라(南加羅), 훼기탄(喙己呑), 반파국(伴跛國)의 8성,

탁순국(卓淳國) 등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대마도(對馬島)를 평정하여

백제(百濟)와 대화왜(大和倭) 간의 해상통로을 차단하려 하였고,

백제와 대화왜(大和倭)는 이를 막으려 하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