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AD538}大藏8년,
춘정월, 신유일 초하루, 일식이 있어 조례를 미루었다.
<고高>황후와 함께 다만 내전에서 <루婁>씨의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유연(柔然)의 <우고진宇古晋>이 와서 아뢰길;
“오는 도중에 공물로 가져오던 코끼리가 도망한 것은
<고환高歡>의 군대에게 털린 것이었습니다.”
라 하였는데,
상은 때마침 <고高>황후와 정을 나눴던지라 이간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그 정황을) 묻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선견善見>이 그 코끼리를 타고 다니고 있으며
연호도 원상(元象)으로 바꾸었다 하니,
마음이 상하여 이르길;
“그럴 줄 몰랐는데, <高>승상이 내 코끼리를 빼앗아갔소.”
라 하였다.
그러자, 后가 몰래 <루婁>씨에게 사람을 보내서 코끼리 세 마리를 바치게 하였다.
암컷 두 마리와 수컷 한 마리였다.
상은 황후와 함께 그 코끼리를 올라타고 달리면서 이름을 지어주길
`오처상(吾妻象){내 처의 코끼리}'이라 하였다.
<옥릉玉陵>비가 상의 딸 <홍릉紅陵>공주를 낳았다.
2월, 황산(黃山)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거란왕<호돈好頓>이 그의 개실(盖室){게르, 천막집}과 호피 300장 및
양 1,000필과 소 100필을 바쳐왔다.
대략 <고환高歡>이 딸을 보낸 것을 본 뜸이었다.
상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호돈好頓>을 우대장(右大将) 연산공(燕山公)으로 봉하였다.
3월, <우문태宇文泰>는, 사인 <원익元翌>의 딸을 <화정化政>공주로 삼아서
<두병頭兵>의 동생 <탑한塔寒>에게 처로 주었으며,
또한 <보거宝炬>로 하여금 <을불乙弗>씨를 폐하게 하여 비구니로 만들었고,
부풍(扶風)王 <부孚>를 시켜서 <두병頭兵>의 딸 <욱구려郁久閭>를 마중하게 하였다.
<두병頭兵>은 수레 700대와 말 만 필 및 낙타 2천 필을
흑염지(黑鹽池) 부근으로 보내서
<태泰>가 보낸 <로박의위鹵薄儀衛>를 만나게 하였다.
<부孚>가 <욱郁>에게 남쪽으로 향하길 청하였더니,
<욱郁>이 말하길;
“나는 아직 <魏>主를 본 적이 없으니, 이 아녀자는 유연(柔然)의 딸이오.”
라 말하고는 동쪽을 향하여 섰고, <魏>의 사신은 남쪽을 향하여 섰다.
17일에 <보거宝炬>는, <욱구려郁久閭>와 합근{合歓,合房}하였으나
음양이 맞질 않자 자못 <을불乙弗>을 그리워하였다.
<명농明穠>이 소부리(所夫里)로 도읍을 옮기고,
거룻배와 큰 배편으로 <소연蕭衍>과 내통하였다.
스스로 남부여(南夫餘)를 칭하였으며,
그들의 날카로운 무기를 얻어 불궤를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5월, <보거宝炬>가 또 글을 올려 말하길;
“신은 유연(柔然) <두병頭兵>가한(可汗)의 딸을 처로 들였습니다.
처의 어미는 <재치才治>后이며 선선(鄯善)공주 소생 <원동原同>가한의 딸입니다.
<원동原同>가한의 아비는 광개토황(廣開土皇)의 아들이신 <경鯨>태자입니다.
엎드려 듣잡건대, <경鯨>태자께서는 역시 폐하의 외증조이시었고,
신의 처는 <경鯨>태자님의 증손입니다.
신의 부처 모두가 폐하의 혈족이오니, 영원히 변방의 병풍이 되겠습니다.
지난 정월에 신과 함께 처의 아비 <두병頭兵>가한이 폐하께 코끼리를 바쳤었는데,
<고환高歡>이 탕산(碭山)에서 약탈하였기, 심경이 매우 편안치 않았습니다.
폐하, <환歡>이 딸을 바친 것으로 인하여 저에게 소원함을 보이지 마시길 원하옵니다.
신 또한 딸을 바치고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라는 등등이 쓰여 있었다.
상이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고, 이르길;
“자네의 주인은 외가의 후예이고, 내 처 또한 <魏>의 공주이오.
<선견善見>은 나의 종질이고, 그대의 주인 또한 내 종제가 되니,
누구의 말은 들어주고 누구에겐 야박할 수 있겠소?
서로들 봉하여진 땅을 지키고 침입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오.
스스로 공론하여 보면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이고,
형제들 간에 서로 잔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오.
코끼리가 내게 왔고 못 왔음에 이르러서는 내가 뜻한 바는 아니었으니,
(내가) 어찌 <고高>승상을 코끼리를 약탈한 놈이라고 할 수 있겠소.”
라 하였다.
7월, <환歡>이 <후경候景>과 <고오조高敖曹>를 시켜서
<독고신獨孤信>을 금용(金墉)에서 포위하였다.
<경景>이 낙양 안팎의 관사와 백성의 가옥에 불질렀더니,
타지 않고 남은 것은 열에 두셋 정도였다.
8월, <우문태宇文泰>가 <독고獨孤>를 구하려고 곡성(穀城)에 다다랐더니,
<환歡>의 장수인 <대문貸文>과 <도원道元>이
1천 기병으로 용맹함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가,
밤중에 <태泰>의 장수 <이필李弼>과 효수(孝水)에서 맞닥뜨렸다.
<필弼>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북을 두드려 소란하게 하고
섶을 끌어 먼지가 일게 하였더니 <대문貸文>은 도주하였고,
<필弼>이 쫓아가서 참하였다.
<도원道元> 또한 단기로 잡힘을 면하긴 하였으나, 1천의 기병은 모조리 잃었다.
<태泰>의 군대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더니
<후경候景>은 밤중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이에 <태泰>는 경기병으로 <경景>을 쫓아 <河>상에까지 다다랐다.
<경景>은 하교(河橋)와 망산(邙山) 아래에 진을 치고 <태泰>와 맞붙어 싸웠다.
<태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놀라 달아났더니 <태泰>는 말에서 떨어졌고,
<환歡>의 군병이 쫓아오니 좌우가 모두 흩어졌는데,
도독 <이목李穆>이 말에서 내려 <태泰>의 등줄기를 채찍으로 내리치며 이르길;
“패잔 군사야! 네 주인은 어디로 가고 너 혼자만 여기 남았느냐?"
라 하였다.
추적하여 온 자들은 그가 귀인인가를 의심해보지도 않고 내버려두고 지나쳤다.
<목穆>은 <태泰>에게 말을 주어 함께 달아났다.
<태泰>의 군병들이 다시 떨쳐 일어났다. 개략 대군이 답지하였음이었다.
<고오조高敖曹>가 <태泰>를 우습게 여기고 깃발을 세우자,
<태泰>의 군병이 날램을 다하여 그들을 공격하였더니,
일군이 모조리 무너지고 <오조敖曹>는 단기로
하양(河陽)>남성(南城)으로 달아났더니,
(그곳을) 지키던 <고영락高永樂>은 원한이 있었던지라 들이지 않았고,
<오조敖曹>가 칼을 뽑아 성문에 구멍을 내고 있었는데,
뚫리기도 전에 추병이 다가오자 <오조敖曹>는 다리 밑으로 숨었고,
추병들은 그의 하인이 금대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물어서 알아냈다.
<오조敖曹>는 목이 떨어짐을 면할 수 없음을 알았는지라,
머리를 불쑥 내밀며 말하길;
“와라! 너를 개국공으로 만들어 주겠다!”
라 하였더니,
추병이 그의 머리를 잘라서 돌아갔다.
<환歡>은 이것이 애통하였으나, <영락永樂>을 곤장 200대를 치고 죽이지는 않았다.
대략 자기 종조부 형님의 아들이었음이라.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이르길;
“<태泰>는 패잔군 신세를 감내하며 채찍을 맞고 죽음을 면하였소.
<오조敖曹>는 깃발을 세웠다가 진을 무너뜨려먹고서도,
놈은 허리띠를 차고 무적을 호언하며 내달았었소.
용맹하긴 하였으나 교만 방자하여 다른 이의 원한을 샀으니 명장은 아니었소.
죽어도 쌌었소.”
라 하였다.
이 시절, <태泰>의 군대가 또 <환歡>의 연주(兗州)자사를 죽이고
그의 정예군사 1만 5천을 사로잡아서 <河>수에 다다랐더니 죽은 이가 만 명을 넘었다.
망산(邙山)의 싸움에서 <고환高歡>의 여러 군대가 모두 하교(河橋)를 건넜지만,
유독 <만사락万俟洛>은 병졸들을 다잡아놓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하길;
“<만사락万俟洛>이 여기 있다! 올 수 있으면 와봐라!”
라 하였다.
<태泰>의 군대는 그 남은 군대가 두려워서 물러났다.
<고환高歡>은 일찍이 <락洛>의 아비를 존경하여
각별한 예로써 손수 말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었더니,
<락洛>은 그 은혜에 감복하여 죽기로 싸웠던 것이었고,
죽기로 싸우겠다는 표정이 밖으로 내비쳐졌었더니,
<태泰>의 군대가 두려워하였던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죽기로 싸우겠다는 의지가 굳세고 굳세지 않음에 달린 것이었다.
<태泰>가 적은 수의 군대로 매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이 죽기로 싸웠기 때문이었다.
<환歡>은 망산(邙山)의 싸움에서 <고오조高敖曹>를 잃고나서야
비로소 결사적으로 싸웠고, 그리하여 승리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이었다.
동이 틀 무렵부터 미시까지 싸우길 수십 합이 되었고,
날씨가 구름으로 사방이 가려져서 서로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환歡>의 군대가 물러나지 않은 것은 싸우고자 하였음이었고,
<태泰>의 군대가 자만하여 얻은 것이라고는
<태泰>가 자신의 강함만을 믿어 무리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었었다.
<태泰>는 장안으로 돌아갔다가,
잡혀 온 <환歡>군들이 장안을 거점으로 난리를 일으킨 바람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우시중 <양의신梁義臣>이 동궁의 아들 <하성夏成>을 낳았다.
상은 3품들의 딸을 택하지 않고 성골을 취하려 하였으나,
동궁이 <의신義臣>을 아끼기가 이러하였더니, 많은 종실들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10월, <태泰>는 <고오조高敖曹> 및 <두태竇泰>와 <대문貸文>의 머리를
<환歡>에게 보내 휴전하고자 하였으며,
옥벽성(玉壁城)을 쌓아서 경계로 하였다. 험한 요새였었다.
<고환高歡>이 절을 세우고 중이 되는 것을 금하였다.
대략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려 하였으며 비구승이 200만이 되고,
절의 수가 3만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 또한 불교를 금하지 않았었더니 백성이 비구승으로 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태안지세(太安之世)라면 나타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고징高澄>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자,
인물들을 거두어들여 그들과 함께 연회를 열고 즐기며 시부{詩賦}를 강론하였더니,
많은 문인들이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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