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AD538}<대장>8년,

 

<명농>이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거룻배와 군함으로 <소연蕭衍>과 내통하였다.

자칭 <남부여>라 하였으며, 그의 재능 있는 이를 얻어 반역하고자 하였다.

<안원대제기>

25년(AD. 538) 황마(黃馬=戊午)

三月 明襛南遷所夫里

<금천대제법흥진왕기>

 

 

성왕 16년(538년)에 수도를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삼국사기>

 

 

 

 

성왕 16년 ( 538년)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 所夫里)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가 충청도까지 진출하고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어 한강까지 밀고 올라오는 상황에서  전란이 계속되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백제는 도읍을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는 수도이전 비용을

안한(安閑)과 선화(宣化)가 열도에서 마련하기 위하여

전력투구하고 있는 모습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천도와 관련된 사업이라는 언질은 어디에도 없다.


공주 송산리 고분에서 무령왕릉이 출토되고 그 후 연구 결과

무령왕의 시신을 담은 관재가 일본에서 생산되는 금송(金松)이라고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 하였다.

 

옛날 먼 외국의 나무를 백제까지 가져 왔다는 것에 모두 놀랐다.

 

그 시대 일본에 질이 좋은 목재가 있다는 것을 한반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필요한 나무를 일본에서 한반도까지 가져 올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란 사람이며

한 때 일본의 왕이었다면 놀랄 일이 아니다.

 

일본은 백제의 외국이 아니라 백제 그 자체였다.

 

열도의 통치권을 서기 485년부터 531년까지 행사할 수 없게 된 세월이 있었지만

서기 531년 열도는 다시 백제의 품안에 들어 왔다.

 

사마왕(斯麻王)이 현 일본 천황가와 연결되는 일계(一系)의 선조이다.

 

무령왕의 특사들은 일본열도를 되찾아 백제의 사비 천도의 재원을 마련하였다.

 

안한(安閑)과 선화(宣化) 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백제 성왕의 사비천도를 지원한 것이다.

 

혈연적으로 안한(安閑)과 선화(宣化)는 백제 성왕의 숙부이며

나중 등장하는 斯貴王 흠명(欽明 510 – 571)은 明穠(聖明, 500? – 554)의 동생이다.

 

선화(宣化)시대의 하카타 항의 창고건설과 일본 전국에 걸친 운송 시스템의 확립은

안한(安閑)의 미야케 설치와 병행하여 동시에 추진되었을 것이다.

 

곡물의 수송과 적절한 관리를 위하여 큐우슈우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이 때부터 백제는 큐우슈우에 백제왕을 두었다.

 

그 후 구주백제왕이 대부분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겨 갔다.

 

따라서 안한(安閑)에서 황극(皇極)까지의 100년 동안

선왕의 장자가 왕위를 잇는 전통은 열도에 없었다.

 

선화(宣化)와 흠명(欽明)도 야마토의 왕위에 오르기 전 구주백제왕이었으며

이 시스템은 서기 645년의 을사의 변(乙巳之變)까지 약 1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열도의 미야케에서 생산된 곡물은 백제왕실 소유이므로

서기 645년 까지 후쿠오카에서 열도의 곡물이 가라의 다사진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