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AD539} 大藏9년,

 

 

춘정월, 을묘일 초하루, 상이 <高>황후와 함께 獸林溫宮에서 조례를 받았다.  

 

무진일, <홍紅>황후가 상의 아들 <갑>태자를 낳았더니,

명을 내려 동궁의 아들로 하였다.
 

 

2월, 상이 <경鯨>태후릉으로 갔다가 종실들에게 黃山의 별궁에서 연회를 베풀고,

<경>태자 양덕비를 능묘 옆에 세웠다.
 

종녀원(宗女院)을 세우고

<양의신梁義臣>을 제거(提擧)로 <곡신谷晨>을 제교(提敎)로 삼았다.

 

<신>은 <춘>의 딸이며, 이때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의신義臣>이 낳은 <■>의 동생이다.

 

<내한內翰>은 단지 <용>공주의 연고이어서 이를 별도로 세우고,

종실 여인들을 가르쳤다.
 

 

<우문태宇文泰>가 행대(行臺)를 두었다.

 

학생은 해가 뜨면 다스리는 관리로 일을 하고

해가 저물면 돌아와 강론에 참석하였다.

 

대략 우리의 무장(武藏) 제도를 취한 것이었다.

 

<태泰>는 사람됨이 세밀하여 다른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있기만 하면,

필히 그것을 본 땄다.

 

그의 사신이 오갔었으니 반드시 살피고 돌아간 것이 있었을 것이다.

 

3월, 상이 종녀원(宗女院)으로 가서 <곡신谷晨>에게 승은을 입혔다.

 

애초에 <의신義臣>은 <신>의 아비 <谷瑃>으로 인하여 등용되고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올랐기에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성의를 가지고 <>을 가르쳤다.

 

<>은 예쁘기도 하고 재주도 있었다.

 

<의신義臣>은 그녀를 아꼈으며, 다른 사람에게 출가하지 말라 하면서,

 

말하길;

 

“우리들은 성상의 아들 낳기를 담당하여야 한다.”

라 하였었다.

 

이번 봄 들어 성상을 깊이 사모하고 사랑하여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상이 이를 듣고는 이윽고 원전으로 가서 정을 통하였더니,

종녀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 경하하였고, 축하선물도 산같이 쌓였다.  

 

<숙>공주가 상의 딸 <언>공주를 낳았다.
 

 

5월, <선견善見>이 <환歡>의 딸을 처로 삼았다.

 

나이 스물이었고 <高>후의 언니였다.

 

애초에 <선견善見>은 11살에 보위에 섰었고,

<환歡>의 딸은 15살이었는데 하루는 좌우에 시립하였다가 상통하게 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선견善見>의 나이 16살이 되었고,

임신하게 되자 후로 세운 것이었다.

 

<선견善見>은 비록 <환歡>은 싫어하였었지만

자신의 처를 아끼더니 걱정하기도 싫어하였다.

 

상이 동궁을 <업>으로 보내서, 그들의 혼인을 축하하고,

꿩 깃으로 꾸민 수레를 그녀에게 선물하였다.

 

<高>후 역시 폐물을 보냈다.
 

<보거宝炬>의 사신이 와서 누런 낙타 20필 및

장안의 미녀 20명과 포도주 만 동이를 바치고,

<고환高歡>을 토벌하여 주십사 청하였더니 상이 위무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高>황후는 <태泰>의 사신을 물리치지 않음에 화를 내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상은 대의를 들어 끊어내기 어려움을 그녀에게 깨우쳐주었다.

6월, <환歡>이 장정 40만을 징발하여 鄴城으로 쌓았는데 40여 일이 걸렸다.

 

새로운 궁전 또한 완성되었더니 크게 사면하고 년호도 흥화(興和)로 고쳤으며,

<선견善見> 夫妻는 새로운 궁으로 들어가서 백료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소연蕭衍>은 선행을 잘하고 악한 이를 중용하지 않았지만,

악한 이를 제거하지는 않았었다.

 

이에, <주이朱异>는 아부하는 이를 정사에 등용하길 30년을 하였더니,

많은 이가 뇌물을 바치며 속이고 숨겼으며,

보고 듣는 것은 동산{정원}과 집 얘기뿐이고,

희롱하고 좋아하는 것은 음식과 성색뿐이었으니,

끝내는 잠시 동안의 흥청거림이거늘, 목욕하는 날엔 거마가 문전에 가득하였었다.
 

죽내령(竹內令) <음진陰震>을 포효대부(褒孝大夫)로 삼았다.

 

<진>은 죽내(竹內)의 수령으로서 한 불효자를 다스리기 위해,

불효하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답하길;

 

“자식의 불효는 아비의 자애롭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니,

내게 묻지 말고 먼저 아비를 따져봄이 옳을 것입니다.”

라 하였다.

 

이에 <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고,

아전이 그 자를 어찌 처결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진>은 노하여 이르길;

 

“저 놈의 불효는 모두 그대들의 죄요.

어찌 아비가 자애롭지 않았다하여 불효하였노라 말할 수 있소?

그대들은 이 자가 무죄라 여기는가?

아비가 자애롭지 못함을 말하는 것은 도적 중의 도적인 것이다.

도적놈을 길러내는 마을은 없애버리지 않을 수 없겠소.”

라 하였다.

 

이윽고, 그 마을 사람들과 죄를 묻는 아전들도 모조리 잡아들였더니,

아전들은 굴복하기도 하였지만 두렵기도 하여

그 불효한 이를 끌어내어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이때부터 죽내(竹內)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깨우쳐주어 효도하게 되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이르길;

 

“<진>은 효를 다스리는데 귀재요.

이 사람을 포효대부(褒孝大夫)로 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포효대부(褒孝大夫)를 할 만하겠소.”

라 하고는, 그를 대부자리에 발탁하였다.

8월, 상이 비로소 <연화淵華>의 딸 <선병善屛>에게 승은을 내렸다.

 

나이는 열 하나였다.

 

공주의 호칭을 내려서 수양딸로 삼았는데, 재색이 당대의 제일이었다.
 

양로연을 열고 국로인 <풍신馮信> 등에게 옷과 술을 내렸으며,

재능을 시험하여 출사할 이를 골랐다.

 

이 일은 포효대부(褒孝大夫) <음진陰震>이 주관하게 하였다.  

 

동궁의 사인 <음창陰昌>이 또 음란하고 추잡하게 동궁을 섬겼으며,

또다시 민간의 딸 셋을 동궁으로 천거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경부(瓊府)로 하옥되어 죄를 받게 되었다.

 

상은 지친인지라 죄를 면하여 주고 진주릉(真珠陵)을 지키게 하였다.

 

<창昌>은 황상의 동생인 <음陰>태자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어미 <녕양寧陽>은 <덕양德陽>后의 동복 여동생이었다.

 

사람들은 <음陰>가 제일인 것으론,

<진>은 선하기로, <창昌>은 악하기로 그렇다 하였다.

 

 

 

참고  북경시 삼합장묘에서 출토된 한현도(韓顯度)의 묘 

 

 

 

 

북경시문물국(北京市文物局)의 고고학 관련인원이 북경시 대흥구(大興區)

황촌진(黃村鎮)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견된 대규모 묘분군에 대한

발굴사업을 하였다.

 

두 번에 걸친 행한 발굴사업의 대상은 모두 129좌의 고분군이다.

 

현재 54좌의 분묘는 아직 발굴하지 않았다.

 

북경시문물국은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발굴작업을 끝낼 계획이고

동시에 문물보호사업도 함께 할 계획이다.

 

현재 묘분군에 대해 24시간 순찰을 돌며 감시하고 있는 중이며

적외선촬영기와 첨단과학기기를 동원하여 보호하고 있다.

 

아직 원래의 유적지를 그대로 유지보존할 것인지의 여부와

고고학적인 평가는 아직 내리기 전이다.


문물국의 설명에 의하면 새로 발견된 묘분군은

북경시 대흥구 황촌진 삼합장촌에 위치해 있으며

삼합장촌은 대흥구 중심지에서 북변으로 연결된 곳이다.


북경시문물국의 책임자가 설명하기를 2010년 북경시 대흥구 황촌진 삼합장촌에

주거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A, B, C 세 구역으로 나누어 토지정리를 할 때

고고학적 탐사를 함께 시작했다고 했다.

 

정지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단지 국부적인 조사만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2013년 말에서 2014년 상반기까지 7개월 동안 시행한 탐사작업의 결과

고대 묘분군 129좌를 찾아냈다고 했다.

 

2014년 10월 10일 북경시 문물연구소가 진행한 고분군에 대한 발굴작업은

불순한 일기 탓으로 계속 진행시키지 못하고

2014년 12월 31일 발굴작업을 일단은 중지하고 동절기 동안 쉬어야했다.

 

다시 2달 반 동안 75좌의 발굴작업을 완료한 바

그 중 7좌는 東漢, 2좌는 北朝, 33좌는 唐朝,

또 33좌는 遼朝 때의 것으로 밝혀졌다.

 

묘지는 매우 긴 세월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각 묘분군이 조성된 연대도 크게 차이가 나고

또한 묘분의 숫자도 매우 많았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

 

이런 묘분군은 북경지구에서 극히 보기 힘든 경우였다고 했다.

 

7기의 한나라 묘분은 전부 작은 벽돌방에 한 사람씩 부장한 형태로

관 또한 벽돌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런 형태의 관을 벽돌덧널묘[磚槨墓(전곽묘)]라고 칭한다.

 

묘분은 모두 평민들 것으로 도기와 동전 등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해당 묘분군의 특징은 벽돌관에 사다리꼴 형이다.

 

하단부분은 넓고 높으며 상단은 좁으며 낮다.

 

그리고 장례용구는 현재의 것들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취하고 있다.

 

고고학 관계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와 같은 모습의 관들은 모두 호인(胡人) 들의 장례문화에 속한다고 했다.

 

북조시대의 묘분 2기의 분묘 안에서 명문이 있는 벽돌이 출토되었다.

 

그 명문을 통해 묘의 주인 이름이 한현도(韓顯度)임을 알게 되었다.

 

선조의 호적은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고

동위(東魏) 원상(元象) 2년인 539년에 묻혔음이 확인되었다.

 

원상(元象)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원선견(元善見)이 사용한 연호이다.

 

북위 태무제(太武帝) 척발도(拓跋燾)가 북방을 통일하던 과정(439년 북위의 북방통일)에서 연화(延和) 원년(432年),

조선의 백성들을 비여(肥如)로 옮겨 살게 하고 그곳에 조선현을 설치했다.

 

비여(肥如)는 지금의 북경시 동남쪽 랑방시 인근이며, 창려와 극성이 이 곳에 있었다.

 

2014년 출토된 한현도의 묘는 중국인들은 한현도가 귀화한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하지만, 북경시 일대가 고구려에 속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