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AD540}大藏10년,
춘정월, 을묘일 초하루, 포진궁(抱真宮)에서 조례를 받았다.
상은 주목(朱木)으로 궁을 짓는 일이 거창하였기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장인과 감독하는 이 다섯을 내쳤다.
2월, <보거宝炬>가 <을불乙弗>이 그리워서
은밀히 령을 내려 머리를 기르고 돌아오라 하였더니,
<욱구려郁久閭>는 이를 듣고 노하여 <두병頭兵>에게 일러바쳤다.
<두병頭兵>은 화가 나서 이르길;
“거짓으로 멈칫 한 것을 보니 시커먼 족제비였구나.”
라 하고는 군병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보거宝炬>는 탄식하여 말하길;
“어찌 딸 하나를 위하여 백만 군병을 일으킨단 말인가?”
라 하였다.
<태泰>는 <보거宝炬>에게 <을불乙弗>을 죽이라고 재촉하였고,
<보거宝炬>는 하는 수 없이 울면서 죽으라 하였다.
<을불乙弗>은 울면서 말하길;
“첩은 이 일이 폐하의 뜻이 아님을 알기에, 비록 죽더라도 여한은 없습니다.
원컨대 지존께서는 천만세하시고 천하는 강녕하길 바랍니다.”
라 하고는 스스로 목매 죽었다.
맥적애(麥積崖)에 굴을 뚫어 장사하여 주고 적릉(寂陵)이라 하였다.
혹자는 <보거宝炬>가 <을불乙弗>과 바깥의 전각에서 몰래 정을 통하자
<욱구려郁久閭>가 밀고 들어가서 죽였다 한다.
<보거宝炬>가 (죽은) <을불乙弗>을 껴안고 통곡하자,
<욱구려郁久閭>는 그 시신을 탈취하려다가
독 기운이 묻어서 넘어지더니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양 처가 둘 다 일시에 죽었다.
몸은 만승지존이 이었으나, 처와는 몰래 정을 나눠야 하였었으니,
처량하였다 할만 했다.
<을乙>의 시호는 <문후文后>로, <욱郁>의 시호는 <도후悼后>로 하였다.
<두병頭兵>은 <을불乙弗>이 죽었다는 소리에 회군하였으니,
자기의 딸이 죽은 것은 알지 못하였다.
<고환高歡>은 이 일로 다시금 <두병頭兵>과 화친을 약속하였다.
<두병頭兵>의 변덕스럽기가 이러하였다.
윤5월, 정축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상은 차를 마시고 몸을 정결히 하면서 사흘간 성색을 접하지 않더니,
명을 내려 적자촌(賊子村)의 사람으로 갇혀있는 이들을 풀어주라 하였다.
이 시절 불효한 도적놈은 얼굴을 지졌으며,
그 도적놈이 아울러서 그 마을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원망하는 소리가 상에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동궁이 진양궁(晉陽宮)으로 가 <高>황후를 을러서 정을 통하였다.
<高>후는 피하려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고, 그리하여 울면서 상에게 고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그는 천자가 될 것이야.
그대는 장차 그를 어쩌려고, 함께 즐기지 않겠다는 것인가?”
라 하였다.
이에 <高>후는 상의 속뜻을 알게 되었고, 이후 동궁과 함께 흠뻑 좋아지냈다.
유연(柔然)이 사자 두 마리를 바쳐왔는데, 암컷은 크고 수컷은 작았다.
악관에게 명하여 노래를 짓게 하고 춤을 추었으니,
자모곡(子母曲)과 월면곡(月面曲)이었다.
7월, <원종原宗>이 죽었다.
딸 <지소只召>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녀의 아들 <심맥深麥>은 나이 일곱이었는데도
<지소只召>는 스스로 보위에 서지 않고,
<심맥深麥>을 세워서 품에 안고 정사를 처결하였다.
<원종原宗>은 불도를 좋아하였고 <지소只召>는 선도를 좋아하였다.
<지소只召>에게는 지아비가 셋이 있었다.
<입종立宗> 및 <태종笞宗>과 <황종黃宗>이 그들이며, 달마다 번갈아서 입시하였다.
<심맥深麥>은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혹자는 <원종原宗>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상은 그가 왕을 참칭하여도 불문에 붙였다.
9월, <연회燕會>가 우산성주(牛山城主)와 경계를 다투더니,
일 만병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이에 우산성주(牛山城主) <왕식王息>이 5천의 기마병으로 맞닥뜨려 쳐서 대파하였다.
<명농明穠>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연회燕會>를 차꼬를 채워서 돌려보냈다.
11월, 상이 사신을 업(鄴)으로 보내서,
청하(淸河)의 문의왕(文宜王)<단亶>을 제사하였다.
<단亶>은 <高>황후의 양아비로 <옥릉玉陵>의 오빠다.
<高>황후가 어미가 보고 싶어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화양華陽>이 상의 딸 <백릉白陵>공주를 낳았다.
12월, <태泰>가 토곡혼(吐谷渾)과 상통하더니,
유연(柔然)을 조정하여서 그들이 <환歡>을 토벌하게 하고자 하였으니.
그 계책이라는 것이 가위 궁색한 것이었다.
상이 <선병善屛>을 맞이하여 3품 다의로 삼았다.
이때 나이는 열둘이었다.
총애는 후궁으로 기울었다.
<高>황후가 딸 <분양汾陽>공주를 낳았더니,
<환歡>의 사신이 와서 축하하고 공물을 바쳤다.
동궁이 초운궁(椘雲宮)을 들렀고, 또 진양궁(晋陽宮)도 들렀다.
유연(柔然)이 토곡혼(吐谷渾)과 사이가 나빠졌다.
토(吐)왕 <과려夸呂>는 청하(淸河)의 서쪽인 복사성(伏俟城)에 있었으며,
그의 관리 복야(僕射)와 상서(尙書) 등은 <漢>의 제도와 같았다.
<토곡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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