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계림(雞林)으로 일컬어졌던 곳은

당연히 오늘날의 길림(吉林)으로 생각되는데 말이 그릇되어서 이렇게 된 것이요,

따라서 신라 · 백제 등 여러 나라들도 역시 모두 그 부근 지역에 있었다.

<滿洲源流考>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뜬금없이 만주에 있는 길림(吉林)이라는 지명은 

계림(鷄林)에서 기원한 것이며 따라서 신라나 백제가 바로 그 부근에 있었다는

매우 충격적인 기록이 실려 있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편찬토록 명한 건륭제는

생전에 몇 편의 논문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두 편 썼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다 실려 있다. 

 

만주원류고 보다 먼저 나온 성경통지(盛京通志)에 

건륭제의 다른 시문과 함께 실려 있었던 것으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편찬자들이 거기에 있는 내용을 만주원류고에 집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이 두 편의 논문의 제목은 하나는 어제부여국전정와(御製夫餘國傳正訛)이고,

다른 하나는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正謬)이다. 

 

이 논문들은 우리의 고조선의 후예인 부여(夫餘)와 삼한(三韓)에 관하여

그간에 역사책에 잘못 알려지거나 그릇 인식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논문이다.

 

계림(鷄林)에 관한 기록은

이 책 권9, 강역2, 신라구주조(新羅九州條)에 언급되어 있다.

 

이 조항은 신라구주(新羅九州)에 관한 사료를 하나하나 소개하고,

맨 나중에 소위 안어(按語)를 하였다. 

 

안어(按語)라 함은 우리에게 생소한데 중국사전에 의하면

작가 · 편자의 주해 · 설명 · 고증 · 주 따위의 말이라고 한다.

 

안어(按語)는 의레 근안(謹案: 삼가 생각건대)으로 시작한다. 

 

안어 가운데 계림에 관한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계림주(鷄林洲)라는 이름은 당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용삭 3년(663)에 그 나라를 계림주대독부(鷄林州都督府)로 삼아

국왕이 도독(都督)의 칭호를 세습하였다. 

 

음역(音譯) 및 지리(地理)를 근거로 계림주(鷄林州)를 상고한바,

허항종행정록(許亢宗行程錄)에는 함주(咸州)에서 동주(同州)로 가면서

동쪽으로 큰 산이 바라다 보이는데 신라산(新羅山)이라고 하였다. 

 

요나라의 함주(咸州)는 지금 함평부(咸平府)요,

동주(同州)는 오늘날의 동산현(銅山縣)이니

모두 오늘날의 철령(鐵嶺) · 개원(開原) 일대였다. 

 

동쪽으로 위원보문(威遠堡門)에 이르렀은즉 곧 길림(吉林)의 지경이요,

 

주의 이름은 바로 계림(鷄林)에서 취하였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계림(鷄林)은 신라의 한 때 신라의 국호였던 계림(鷄林)이나

경주(慶州)를 의미하는 계림이 아니라 계림주(鷄林州)를 설명하면서

계림주라는 근원은 당나라 때부터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계림주,

더 나아가서는 계림주도독부(鷄林州都督府)가 설치된 연혁의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연장선상에서 그것이 어떤 것이지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말하는 길림(吉林)이 계림(鷄林)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제시된

"신라산(新羅山)"은 과연 오늘날의 중국 어디에 있을까? 

 

성경통지(盛京通志) 권28, 산천조에서 신라산(新羅山)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일대에 백제(百濟)의 구국(舊國; 舊都)이 있었다고 한다.

 

길림(吉林)의 어원에 관해서는 청나라 도광 년간에

<살영액薩英額>이란 사람이 쓴 길림외기(吉林外紀) 권2 강역형승(疆域形勝) 조에

길림오랄(吉林烏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어로 길림(吉林)은 가장자리라는 뜻이요,

오랄(烏剌)은 강이란 뜻이니 군민들이 강 가까운 일대에서 산다는 말이다.

 

강희 24년 무렵의 유지(諭旨)에는 "기림오라(幾林烏喇)"라 하였고,

구지(舊志)에서는 또 "길림오라(吉臨烏喇)"라고 하였다. 

 

기(幾)와 길(吉), 임(臨)과 림(林)은 한자로 음이 똑 같고,

지금은 길림(吉林)으로 통칭된다. 

 

한어로 볼 때 글이 잘못 줄여진 것이다. 

 

그러나 국어로서는 서로 어떤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吉林外記, 9쪽>  

  

 

청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을 국어(國語)라고 하였고,

자기들의 글자를 국자(國字)라고 하였고,

자기들의 풍속을 국속(國俗)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국어(國語)라 함은 만주말이란 뜻이다.

 

따라서 어원상으로는 길림(吉林)과 계림(鷄林)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발음상으로는 보면 현재 중국어 발음으로 모두 "지린, jilin"으로

상당한 근거가 있어 보인다. 

 

 

신라산(新羅山):

 

「송허원종봉사행정록(宋許元宗奉使行程錄)」에 함주(咸州)로부터

북쪽으로 90리를 가서 동주(同州)에 이르러 동쪽으로 큰 산이 바라다 보였는데

바로 신라산(新羅山)이 깊숙히 처해 있었으며 고려(高麗)와 접계였다. 

 

생각건대, 요나라의 함주(咸州)는 바로 오늘날의 함평부(咸平府)요,

동주(同州)는 금나라의 동산군(銅山郡)으로서

모두 오늘날의 철령(鐵嶺)과 개원(開原) 일대에 있었다. 

 

동쪽으로 위원보(威遠堡)에 이르렀는데 바로 길림(吉林)의 지경이요, 

 

남쪽으로 봉천(奉天)에 이르렀는데 바로 당나라 때의 고려와의 경계지점이다. 

 

개원(開原)은 바로 한 나라 때 부여(夫餘)의 지경이요, 백제(百濟)의 구도(舊都)였다.

 

《통고(通考)》에 이르기를,

 

"신라의 서북쪽 경계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다"

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許元宗奉使行程錄》 自咸州北行九十與高麗接界。按遼咸州卽今咸平府,

同州今爲銅山郡, 俱在今鐵嶺開原之間。東至威遠堡, 卽吉林界。南至奉天卽唐時高麗界, 開原卽漢時夫餘界, 百濟之舊都也。

《通考》謂新羅西北界出高麗百濟之間者, 卽指此。

<요해출판사, 《성경통지(盛京通志)》, 상권, 1997년, 528쪽, 산천4, 附古山川考> 

 

위 기록은 그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송나라의 <허원종許元宗>이라는 사람이

어느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뒤 그간의 행정을 기록해서 남긴 사료이다.

 

<허원종許元宗>은 <허항종許亢宗>의 誤記이다.

 

남송 때 <서몽신徐夢莘>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이란

방대한 기록을 남겼는데(무려 1795쪽에 달함) 

이 책은 송 정화(政和) 7년(1117)부터 소흥(紹興) 32년까지(1162) 46년에 걸친

송나라와 금나라와의 전쟁 관련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남송과 북송 등

兩宋과 금나라와의 교섭관계나 내정 · 외교 등을 파악하기 위한 귀중한 사료이다. 

 

이 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선화 7년 정월 20일 朝命으로

봉의랑상서사봉원외랑(奉議郞尙書司封員外郞) <허항종許亢宗>을

대금황제가 보위에 오르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차견하는

국신사무의대부광남서로염방사자(國信史武議大夫廣南西路廉訪使者) 

<동서童緖>를 보좌해서 예물(禮物) · 관종방직(官鍾邦直)을 가지고 가게 했다. 

 

그 다음에 <허항종>의 선화을사행정록(宣和乙巳行程錄)을 싣고 있다. 

 

바로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허항종봉사행정록(許亢宗奉使行程錄)의 모체이다.

<徐夢莘 「三朝北盟會編」상해고적출판사, 영인본 제1책, 141쪽 상단>

 

 

단재 신채호 선생은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를 격파하여

지금의 양주 · 충주 · 전주 등 곧 지금의 경기 · 충청 · 전라도 안의 요지를 얻고

곧 고구려를 쳐서 동북으로 지금의 함경도 등지와

지금의 만주 길림 동북쪽을 차지하니

이에 신라 국토의 면적이 건국 이래 제일이었다고 하였으며

<신채호, 「朝鮮上古史」, 일신서적, 224쪽>

 

그 근거로 삼각산 봉우리에 있는 순수비를 백제를 쳐서 성공한 유적지요,

함흥 초방원에 순수비가 있으니 이는 고구려를 친 유적지라고 하였다.

 

또 선생께서는 「滿洲源流考」와 「吉林遺跡志)」라는 책에 나오는 기록 등을 

근거해서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길림 동북까지 진출하였고 하였다.

 

 

 <吉林外紀>

 

 

신채호 선생은「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계림주(鷄林州)를

길림 관내에 설치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신채호 선생이 보았다는 「吉林遺迹志」라는 책은

아마 「吉林外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의 영토가 길림 · 오랄 지경에 이르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료가 있으니

청나라 때 <임수도林壽圖>가 쓴 「계동록(啓東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데

작자가 중국의 각종 사서를 통해서 

고구려 · 백제 · 신라 3국의 강역을 나름대로 고찰한 기록으로

그 가운데 서북쪽으로 길림오랄지방까지 신라의 강역이 미쳤다고 하였다.

 

신라(新羅)의 고지를 상고해 보면 원래 백제 ·고구려와 이웃해 있다고 하였다.

 

「통고(通考)」에 이르기를,

 

'백제의 동남쪽에 있는데, 그 서북계는 고구려 · 백제 사이에 툭 튀어 나와 있다.'

라고 하였다.

 

 

 

「唐書」, 「唐會要」에서 말하기를 백제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新唐書 高麗傳」을 근거로 이를 고찰해 본바,

 

"고구려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와 격해 있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백제와 격해 있으며,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營州)에 접하고 북으로 말갈(靺鞨)과 접하고 있다.

 

러한즉 지금의 봉천(奉天) , 요양(遼洋)으로부터 남으로 봉황성(鳳凰城)에 이르고,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함경도 · 평안도 등이 고구려이다.

 

지금의 개원(開原)·, 광녕(廣寧), 금의(錦義), 영원(寧遠)으로부터

남쪽으로 개평(蓋平), 복주(復州), 영해(寧海)에 이르고,

또 동남으로 바다를 건너 조선의 전라 · 황해 · 충청도 끝까지가 백제이다.

 

그리고 신라의 지경으로 말하면,

동남으로 지금의 조선 경상 · 강원 2도를 겸유하고,

서북으로 지금의 길림(吉林), 오랄(烏剌)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개원(開原), 철령(鐵嶺)에 가까웠으니

고구려 · 백제 사이에 툭 튀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동북 동남은 모두 서로 가까이 접근해 있었고,

고구려가 그 중간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임수도,「啓東錄」,길림문사출판사, 이수전 주편 장백총서에 《송막기문(松漠紀聞)》 등과 합철되었음, 179쪽 참조) 

 

신라의 최치원은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으니

 

위에서 말한 봉천, 개원, 길림 등은 三韓이 한반도로 이동해 오기 전의

본래 삼한 고토임이 틀림없다 하겠다.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관할하는 기관으로

부여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다가 나중에 건안 고성으로 옮겼다.

 

고구려에도 마찬가지로 평양(今 노룡)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두었다가

당의봉 원년(676년)에 요동 고성으로 옮겼다.

 

당나라는 신라와 7년 동안의 전쟁을 통해서 당의 세력을 몰아내기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 당태종과 김춘추의 밀약내용이다.

 

신라가 고구려의 반당세력을 봉쇄한 일련의 조치를 당과의 맹약을 저버린 배신 행위로

당에 있던 신라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신라로 보낸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측으로부터 신라와의 밀약내용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삼국사기》에는 여과없이 사실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이라는 것은 신라의 김춘추가 정관 22년(648) 당에 입조,

당태종을 면봉(面奉)한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당시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너희 신라는 두 나라(백제 · 신라) 틈바구니에 끼어

매양 침릉(侵凌)을 당해 편안한 날이 없다는 점을 딱하게 여긴다.

 

명산대천이나 땅덩어리를 내가 욕심 내서도 아니요,

옥백(玉帛)과 자녀(子女)도 내 다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의 땅은 너희 신라에게 다 주어

길이길이 안일토록 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계회(計會)와 군기(軍期)를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주었던 계회(計會)와 군기(軍期)는 무엇인가.

 

나당이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평정지역의 영토를 어떻게 분할하겠다는 밀약(密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김춘추가 귀국할 때 김춘추의 손에 쥐어 준 책도 있었으니

그 책은 바로 당태종 자신이 주관하여 편찬했던 「진서(晉書)」였다.

 

오늘날 그 책을 읽어 보면 동이의 여러 나라들이 수도 없이 조공을 바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어쩌다가 고구려와 백제 관련기사가 나올 뿐이다.

 

청나라 때 <임수도>가 쓴 「계동록(啓東錄)」에 의하면 신라의 서북계가

길림 · 오랄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허항종봉사행정록」에는

길림 부근에서 신라산(新羅山)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 500리를 침공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진흥대제의 북벌로 인하여 지금의 길림까지 신라가 진출한 것을 말한다.

 

신라의 길림 진출은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정벌의 기초가 된 것이가.

 

아무리 나당연합군이라 하더라도 신라가 길림으로 진출하지 않고서는

평양(금 노룡)을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웅진도독부를 건안성(今 하북 당산시)으로 옮겼다는 것은

백제인들이 지금의 요동반도와 발해만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590년대 삼국의 형세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