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직공도(梁職貢圖) 중국 남북조시대 ()나라의 직공도(職貢圖)이다.

 

직공도(職貢圖) 중국에 조공하러 외국 사신의 형상, 복식 풍속 등을 그린 그림.

 

직공도의 () 직방(職方) 약자로 중국의 관직이고

직공(職貢) 직방공물(職方貢物) 말하는 것으로 직공(職貢) 그림으로,

조공품인 방물(方物) 목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국 왕조의 관례였다.

 

양직공도가 현재 전해지는 직공도 가장 오래된 것이고,

원나라 임백온(任伯溫)이 유목민족들이 말을 바치는 광경을 그린 직공도가 있고

{비단에 칼러, 36.2cm, 길이 220.4cm, 미국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소장} 

 

또 중국 청나라 건륭 16(1751년) 황제의 명으로 각 지역 관리들이

관할지역내의 이민족들과 청나라와 왕래가 있는 국가에 대해

각 민족의 의복과 형상을 그린 황청직공도(清職貢圖) 9권이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는 6세기의 직공도(職貢圖)는 아래와 같은 세 종류가 있다.

 

현재 중국 북경소재 국가박물관에 소장된 양() 원제(元帝) <소역蕭繹>이 그린

양직공도(梁職貢圖)의 송대(宋代) 모본(模本) 두루마리() 와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당나라 <엽립본閻立本(600-673)>이 그린

당엽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와

 

역시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 소장의 남당(南唐)의 <고덕겸>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南唐顧德謙摹梁元帝蕃客入朝圖).

 

이들 세 종류 중 나머지 2가지가 양직공도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참고로 대만 고궁박물관 소장의 당엽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

비단에 그린 그림으로 폭 28.1cm, 길이 238.1cm로

총 24개국 26명의 사신이 조공하는 모습이 그려져있고,

역시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번객입조도(蕃客入朝圖)는

종이에 그린 그림으로 폭 28Cm, 길이 530cm정도로 총 31개국의 사신이 그려저있다.

 

현존하는 양직공도와 비교하면

왕회도에는 활국을 제외한 12개국이 동일하게 그려저 있고,

양직공도에 없는 11개국,

판별이 불가능한 맨 처음의 한 나라가 더해서 전부 24개국이 기재되어 있고,

번객입조도는 말국을 제외한 12개국이 양직공도와 동일하고,

왕회도와 일치하는 10개국과 양직공도나 왕회도에 없는 9개국이 더해져서

총 31개국의 국명이 기재되어 있다.

 

또 이들 세 종류의 직공도 사본 모두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어

기회가 된다면 사본일지언정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2010년판 "국립공주박물관"이란 책에 세 종류의 사본이 나온다.  

 

소역(蕭繹)의 양직공도(梁職貢圖)는

양서(梁書) 원제기(元帝紀) 및 남사(南史) 원제기(元帝紀)에 의하면

양() 원제(元帝)가 된 <소역蕭繹(508-554), 재위: 552-554>이

형주(荊州) 자사(刺史)로 재임하던 기간

{<소역蕭繹>은 형주자사로 526- 539년과 547-552년간 사이에 2번 재임}

양()과 조공관계를 맺은 35개국의 사절(국사)과 나라에 대해 설명을 한 그림이다.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서는 소역(蕭繹)이 그렸다는 번객입조도(蕃客入朝圖)가 바로 이 직공도(職貢圖)라 설명하고 있으며,

현재 전해지는 북송(北宋) 희녕(熙寧) 년간(年間),

즉 1068-1077년 사이의 모사본(模寫本) 그림에는 12개국 사신 그림과

13개국의 나라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는 비단에 그린 그림으로,

중국 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폭 약 27cm, 길이 약 200cm.

소역직공도(蕭繹職貢圖), 번객입조도(蕃客入朝圖), 왕회도(王會圖)라고 부르기도 함.

 

이 양직공도의 전체 모양은 다음과 같다.

 

 

 

이 양직공도가 우리의 주목을 받는 것은 

백제 사람을 그린 그림 중 거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림에서 백제국 사신의 기품을 알 수 있으며,

의복, 신발, 머리 모양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양직공도에는 총 12개국의 사신(국사)에 대한 그림과

13개국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들 나라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양서(梁書)>의 제이(諸夷)전에 언급된 나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직공도에 제기가 있는 나라들은 밑 줄친 나라들임)

 

양서 권제54 열전 제 48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조에 언급된 나라들

 

총 32국: 임읍국(林邑)부남국(扶南国)반반국(盤盤国)단단국(丹丹国)

간타리국()낭아수국(狼牙)파리국(婆利国)중천축국(中天竺国)사자국(師子国)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

문신국(文身国)대한국(大漢国)부상국(扶桑国)하남왕국(河南王国)

고창국(高昌国)활국(滑国)주고가국(周古柯国)아발단국(呵跋檀国)

호밀단국(胡蜜丹国)백제국(白題国)구자국(茲國)우전국(于闐)

갈반타국(渴盤陀)말국(末国)파사국(波斯国)탕창국(宕昌国)

등지국(鄧至国)무흥국(武興国)예예국(芮芮)

 

 

양직공도에 국사 그림이 나타난 나라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활국(滑國) 현재 아프카니스탄 북쪽의 엽달(嚈噠).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에 “滑國者車師之別種也

 

파사국(波斯國, 페르시아)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波斯國,其先有波斯匿王者, 子孫以王父字為氏,因為國號

 

백제국(百濟國)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구자국(龜玆國) 중국 신장지구에 있던 나라

 

왜국(倭國)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왜국사 기술의 후반부는 탕창국의 내용임.

 

탕창국(宕昌國)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宕昌國在河南之東南益州之西北隴西之西羌種也”.

중국 5호16국시대에서 남북조시대에 걸처 강()족이 세운 국가.

수도는 탕창성(宕昌城)(현재의 省宕昌県의 서쪽) 564년 북주(北周)에게 멸망당함.

 

낭아수국(狼牙修國) 말레이반도에 위치한 힌두말레이

<의정義淨(635-713)>의 글에서도 이 나라에 대한 언급이 있음.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在南海中其界東西三十日行南北二十日行去廣州二萬四千里

 

등지국(鄧至國 430-554)

등지강(鄧至羌) 또는 백수강(白水羌)으로도 부름.

강족(羌族)이 남북조시기 백수강(白水江)유역에 세운 국가(정권).

서위 공제원년(554년) 망함.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居西涼州界羌別種也

 

주고가국(周古柯國)

활국 주위의 작은 나라.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滑旁小國也

 

가발단국(呵跋檀國)

활국 주위의 작은 나라.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亦滑旁小國也

 

호밀단국(胡密丹國)

활국 주위의 작은 나라.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亦滑旁小國也

 

백제국(白題國엽달족)

융노의 별종. 활국과 페르시아사이에 위치.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王姓支名史稽毅其先蓋匈奴之別種胡也漢灌嬰與匈奴戰斬白題騎一人

今在滑國東去滑六日行西極波斯土地出粟瓜果食物略與滑同

普通三年遣使獻方物

 

말국(末國, 且末).

양서 열전 제이(梁書卷第五十四 列傳第四十八 諸夷)

末國漢世且末國也勝兵萬餘戶北與丁零東與白題西與波斯接

서역 36국중 하나인 차말(且末)국

 

아마도 양직공도의 원본이 전해지지 못해 아쉬운 점의 하나는 

양직공도 원본에는 양서 오랑캐(諸夷)전에 나오는

32개국 전후의 나라에 대한 사신(국사)와 제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11세기 송나라 사본에는 오직 12개국의 사신(국사) 그림만 나와,

고구려와 신라의 복식 등에 대해 중요한 자료를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신라는 단독으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고,

백제를 통해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라국사는 그림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와 같이 무덤 벽화를 남기지 못한

백제나 신라인의 모습과 복식 등의 생활상에 대한 자료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또 왜 국사의 제기에 왜와 탕창국의 내용이 혼합되어 기록된 것으로부터는 

6세기에 그려진 그림을 11세기에 모사를 한 것이므로

그 중간의 500년의 기간동안 아마도 여러번 모사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6세기 원본도 비단에 채색으로 그려진 두르마리로 추측되기 때문에

그 기간동안 일부가 없어지거나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양직공도 백제국사(百濟國使)의 제기의 해석, 주해는 다음과 같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

백제(百濟)는 옛날의 래이(來夷)로 마한(馬韓)에 속한 나라 중 하나이다.

 

晉末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서진(西晉)(265년-317년) 말기에 구려(駒驪)가 요동(遼東)의 낙랑(樂浪)을 지배할 때, 요서(遼西)[와] 진평현(晉平縣)을 다스렸다.

 

自晋已來常修蕃貢:

진()나라 이래로 언제나 속국으로서의 조공을 했다.

 

義熙中其王餘腆:

동진(東晉) 의희 (義熙) 년간에 백제왕 여전(餘腆, 전지왕)

 

宋元嘉中其王餘毗:

남조 송()나라 원가 (元嘉) 년간에 백제왕 여비(餘毗, 비유왕)와

 

齊永明中其王餘太:

남조 제()나라 영명(永明) 년간에 백제왕 여태(餘太, 동성왕)가

 

皆受中國官爵:

중국으로부터 관작(책봉)을 받았다.

{‘중국’이란 단어가 는 BC 6세기경의 상서(尙書)에 최초로 기록됨}

 

梁初以太 爲征東將軍:

양()나라 초기에 백제왕 여태(餘太, 동성왕)를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삼았다.

 

尋爲高句驪所破:

수차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양()나라 보통 2년(521년) 백제왕 여륭(餘隆,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리길, 여러 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다.

 

所治城曰固麻:

백제는 도성을 고마(固麻)라고 불렀다.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읍()을 담로(檐魯)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에 해당한다.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22개의 담로(檐魯)가 있는데

왕의 아들이나 동생 또는 왕족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旁小國有 叛波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文 下枕羅 等附之:

주위에 작은 나라들이 있는데 반파(叛波), 탁(), 다라(多羅), 전라(前羅), 시라(斯羅), 지미(止迷), 마연(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 등이 백제에 부속되어 있다.

 

言語衣服略同高麗

말과 의복은 대체적으로 고구려와 같다

 

行不張拱拜不申足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고, 절을 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

 

以帽爲冠: 모자로 관을 삼고

 

襦曰複袗 袴曰褌: 저고리는 복진(複袗), 바지는 곤()이라 부르는데

 

其言參諸夏: 그 말에는 중국의 말이 섞여있으니

 

亦秦韓之遺俗: 그것은 진한(秦韓)의 습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일본이 감추고 싶은 그림 양직공도

 

 

지금 일본의 역사학계에서야 임나일본부설을 믿는 사람들이야 없겠지만,

고대사 팬 가운데에는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근거를 갖다 대더라도 그림 2장만 들이대면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한다. 바로 양직공도.(梁職貢圖)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 6세기는 일본의 왜5왕이

자주 중국남방의 여러 왕조에 사신을 보낸 시기와 겹친다.

 

왜5왕이란 진서(晋書)와 송서, 남제서 및 양서에 나오는

왜왕 찬(), 진(), 제(), 흥()과 무()의 다섯 왕을 말한다.  

 

5왕은 413년으로부터 502년까지 90년간

중국에 조공을 하며 책봉관계를 유지하고 칭호를 수여 받곤 했다.

 

478년 왜 5왕 중 무(武)가 조공의 대가로 송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칭호는 다음과 같다.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

 

6나라를 아우르는 대단히 거창한 칭호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의 한반도 남동부와 일본은 자기들이 다 먹었다는 이야기이다.

 

칭호대로라면 당시의 왜는 대단한 나라이다.

따라서 국가체제도 물론 제대로 정비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에는 관제의 정비와 복색의 마련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6나라를 아우를 정도의 대국이라면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의 옷차림 역시 세련되고 품격이 있었을 것이다. 

 

외국에 파견하는 사신의 의복에는 어느 나라나 신경을 쓰는 법이다.

 

일부러 비루하게 차려 입어 업신여김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위그림은 중국에 나타난 일본 사신의 모습이다.

 

헝겊조각을 머리에 두르고 각반을 차고 있다. 더구나 맨발이다.

 

하반신에도 천을 두르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나라의 사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차림이다.

 

수염이야 기를 수 있으니 그건 그렇다고 치자.

 

이러한 차림으로 나타나 지금의 일본과 한국을 다 자기들이 먹었다고 허풍을 쳐대니 중국으로서도 황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남조의 중국들은 주위나라를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신들의 주장을 그대로 들어주고 있던 시절이었다.

 

북방민족들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면 백제사신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관을 쓰고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다.

 

가죽으로만든 신도 신고 있다. 예복의 디자인도 뛰어나고 색깔 또한 일품이다.

 

하의의 색깔 또한 화려하기 짝이 없어 왜국 사신과 차이가 나도 너무나 차이가 난다.

 

이 양직공도를 처음 접한 일본 역사학계는 적지 않게 당황했던 모양이다.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이론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주장하던 학자들에게

이러한 사신들의 복장 차이는 어처구니없기까지 했었으리라.

 

사실 왜국 사신의 차림은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지배는 커녕

과연 국가로서의 기본이나 갖추고 있었는지조차 의심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럴듯한 설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학자들은 고심했던 모양이다.

 

가령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같은 저명한 역사학자는

이 그림은 사신을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상상해서 그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6세기의 한참 전인 야요이 시대 때의 왜인상을 상상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직공도에 그려진 왜국 사신의 모습은 위지 왜인전에 나타난 왜인상일 뿐

6세기의 왜국 사신의 모습은 이와는 전혀 달랐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알 수있지만

상상으로 그렸다기에는 너무 묘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더구나 중국이 왜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왜국사신만 상상으로 그려야 했을까?

 

양직공도에 나온 다른 나라 사신들 역시 격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우에다의 주장은 물론 다른 역사학자들도 비판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력한 주장으로는 이 사신은 야마토 조정이 아니라

지방정권이 마음대로 파견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 어느 지방정권의 사신이 중국에 와서

자기 주인이 왜를 다 먹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의 학자뿐 아니라 고대사 팬들도 이 문제는 별로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 야후에서 양직공도라고 검색해봐야

47개의 문서밖에 검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47개도 태반이 백제에 관한 이야기일 뿐

정작 왜국에 관한 문서는 몇개 되지도 않는다.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고대사 팬이 대단히 많은 일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 일본 역사학자들이 미리 발견했다면 아예 없앴거나,

왜국사신과 백제사신을 바꿔치기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한국사람이 보면 괜시리 뿌듯해지는 그림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