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北齊에 대하여 

 

北齊는 <고환高歡>이 사실상 세운 東魏를 이어받은 나라이다.

 

北齊는 건국한 해가 550년이고 망한 해가 577년이니 27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東魏가 건국한 해가 534년이므로 북제까지 합해서

실절적으로는 43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북제서에는 외국전이 없다.

따라서 북제서(北齊書) 본기와 北史를 직접 참조해야 한다.}

 

 

1) 고구려는 안원대제 4년(534년),

즉 北魏가 東魏와 西魏로 갈라지기 시작할 때부터 東魏 및 北齊와 교류관계를 갖는다.

 

2) 반면에 西魏 및 北周와는 北齊가 망할 때까지 교류가 거의 없었다.

{西魏 시절인 대통 12년 즉, 546년에 단한번 교류가 있었음}

 

3) 고구려와 東魏 및 北齊와는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동아시아의 외교정책은 대대로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가까운 나라끼리 교분을 두터히하는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하겠다.

 

4) 이것은 東魏가 高씨의 나라로 고구려의 왕가와 같은 성씨이어서

東魏는 고구려의 일파 즉, 같은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고환高歡>이 고구려 후손이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齊高祖神武皇帝,姓高名歡,字賀六渾,渤海蓚人也。六世祖隱,晉玄菟太守。

隱生慶,慶生泰,泰生湖,三世仕慕容氏。及慕容寶敗,國亂,湖率衆歸魏,右將軍。

湖生四子,第三子謐,仕魏,位至侍御史,坐法徙居懷朔

謐生皇考樹,性通率,不事家業。

住居白道南,數有赤光紫氣之異,鄰人以怪,勸徙居以避之。

皇考曰:「安知非吉?」居之自若。及神武生而皇妣韓氏殂,

養於同產姊婿獄隊尉景家。

神武旣累世北邊,故習其俗,遂同鮮卑

 

 

北齊의 고조(高祖) 신무(神武)황제는 성이 高씨이며 이름이 <환歡>인데

자(字)가 <하육혼賀六渾>이고 발해 수(蓚)縣 사람이다.

 

6대 조상 <고은高隱>은 晉나라 현도태수이다.

 

<고은高隱>은 <고경高慶>을 낳고, <고경高慶>은 <고태高泰>를 낳았으며

<고태高泰>는 <고호高湖>를 낳았는데 삼대(고은, 고경, 고태)는 모용씨를 섬겼다.

 

(후연의)<모용보>가 패하고 국란이 일어나자 <高湖>는 무리를 인솔하고

北魏에 귀의하여 우장군(右將軍)이 되었다.

 

<고호高湖>는 네 아들을 낳았는데 3째 아들 <고밀高謐>이 북위의 벼슬을 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는데 법에 연좌되어 회삭진(懷朔鎮)으로 유배 가서 살았다.

 

<고밀高謐>은 황제의 아버지 <고수高樹>를 낳았는데

성격이 거칠어 가업에 힘쓰지 않았다.

 

백도(白道) 남쪽에 살았는데 몇차례 붉은 빛과 자주색의 이상한 기운이 있어,

이웃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피하여 옮겨 살 것을 권하였다.

 

황제 아버지가

 

“어째서 길하지 않다고 아는 거요?”

라고 하면서 태연하게 살았다.

 

신무황제{고환高歡}를 낳고 황제의 어머니 韓씨가 죽었다.

 

(죽은 모후의) 한배 소생인 매부인 회삭진의 감옥관리 <위경尉景>집에서 길렀다.

 

신무황제{고환高歡}는 여러 세대에 걸쳐 북쪽 변방에서 살아 습속을 익혀서

드디어 선비족과 같았다.

 

 

위 기록중,

 

첫째,

<고환>을 ‘발해 수(현) 사람이다’라고 한 것은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상투적인 수법이다.

 

북위 세종 선무제 때의 권력자 <고조高肇>를 보더라도

그 열전에 「자기 스스로 발해 수(현) 사람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자치통감을 보면 고구려 사람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환>을 ‘발해 수(현) 사람이다’라고 한 것은

<고환>이 고구려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둘째,

<고환>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북쪽 변방에서 살아 습속을 익혀서

드디어 선비족과 같았다는 기록으로 <고환>은 본래 선비족이 아님을 알수 있다.

 

셋째,

6대 조상 <고은>은 진나라 현도태수라고 하였으니

고환의 조상들은 고구려 쪽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현도군은 고구려 영토내에 있음}

 

넷째,

중국의 예법에 황제는 9대조를 모시게 되어 있는데

북제 초대 황제인 문선제는 고환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고환>의 6대조 <고은>은 초대 황제 문선제의 7대조 밖에 안된다.

 

그러면 그 2대조는 왜 숨겼는가?

 

고구려에 살았던 고구려 사람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다섯째,

後燕의 <모용보>가 패하고 국란이 일어나자

<고호>는 무리를 인솔하고 북위에 귀의하여 우장군이 되었다는 기록은

자치통감에 의하면 안제 융안3년 12월 갑오일(12일), 즉 399년 12월 12일이다.

 

또한, <고호>의 윗 삼대는 ‘모용씨를 섬겼다’고 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342년 11월 모용황이 고구려에 침략해와

남녀 5만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즉, <고호>가 北魏에 귀의하기 전 57년 전이다.

 

따라서 <고환>의 6대조 <고은>은 모용황이 고구려에 침략해와

남녀 5만을 사로잡아 돌아 갔을때 모용씨에게 잡혀 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호>의 윗 삼대 <고은>, <고경>, <고태>가 모용씨를 섬긴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예는 後燕의 두 번째 군주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後燕의 마지막 군주가 된 <고운>{모용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운>이라는 사람도 <모용황>이 고구려에 침략해와

남녀 5만을 사로 잡아갔을때 잡혀간 사람이다.

 

<고환>의 6대조 <고은>이 晉나라 현도태수라고 한 것은

황제의 조상이니 신분을 치켜 올린 것으로 생각된다.

 

<고환>이 이렇게 고구려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東魏 및 北齊가 평화로운 교류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반면에,

東魏의 적대 세력인 西魏와는 교류관계가 없다시피하였고

北周와는 관계가 없다가 北齊가 망하고 나서야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에 고구려와 東魏 및 北齊는 싸움한번 없었다.

 

중국에서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을 했기 때문에

국경을 맞댄 나라와는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던 것에 비하여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고구려와 국경을 맞댄 隋나라가 4차례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전쟁을 벌인 것과

唐나라는 고구려가 망하기 전 6차례 대규모 군사를 투입하여 전쟁을 벌인 것과

확연히 다른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와 北齊의 교류관계 기록을 보면

평화스러운 외교 및 교역(조공으로 표현되어 있음)이 전부이다.

 

그런데 북사 고려 열전에 전혀 뜻밖의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天保三年,文宣至營州,使博陵崔柳使于高麗,求魏末流人。敕柳曰:

「若不從者,以便宜從事。」

及至,不見許。柳張目叱之,拳擊成墜於牀下,成左右雀息不敢動,乃謝服,

柳以五千戶反命

 

 

천보(天保) 3년(552년)에 문선제(文宣帝))는 영주(營州)에 이르러,

<박릉搏陵> <최유崔柳>를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보내어 위(魏)나라 말(末)에

고구려(高句麗)로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케 하였다.

 

<최유崔柳>에게 명하기를,

 

“만약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고 하였다.

 

고구려(高句麗)에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자,

<최유崔柳>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성成>을 쳐 용상(龍床) 아래로 떨어뜨렸다.

 

<성成>의 좌우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며 사죄하고 복종하여

<최유崔柳>는 5천호(戶)를 돌려받아 복명(復命)하였다.

 

 

지금 이 기사의 문장으로 보아 北齊의 문선제{高洋}가 한 일인데

 

그렇다면 북제서 권4 제기 제4, 문선제 천보 3년(552년) 기록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아니 북제서 어디에도 없다.

 

이 당시 북제는 딸을 고구려에 바치고 고구려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이다.

 

고구려는 북제를 고구려의 번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북제의 사신이 양원대제 <평성平成>을 주먹으로 쳐

용상아래로 떨어뜨리고 5천호를 돌려 받아 갔다한다.

 

남당유고 양원대제기가 없어 그 전말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북제서의 저자 <이백약>이 북제서를 저술했을 때는 50권이었으나,

북송 즈음에는 흩어지고 빠져 없어짐이 심해져

북사(北史)와 고씨소사(高氏小史) 등

당나라 사람의 사초(史鈔)에 의해 보충된 부분이 많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후 후세에 누가 소설을 써서 北史에 끼워넣었음이 분명하다.

 

 

 

2. 北齊 본기 요약

 

 

550년 (북제 문선제) 천보원년 여름 5월 무오일,

 

이에 황제가 남쪽 교외에서 즉위하여

단에 올라 섶을 태워 제를 지내 하늘에 알리며 말하였다.

 

기미일, 조서로 東魏 황제를 봉하여 중산왕으로 하고 식읍 1만호로 하며,

글을 올릴때 신하를 칭하지 않고 답을 조라고 칭하지 않으며

천자의 정기를 꾸미고 (북)위의 정삭을 사용하며,

수레를 5개로 할때 부속 수레를 쓰고,

왕의 여러 아들을 봉하여 현공(縣公)으로 삼아 식읍 각 1천호로 하며

비단 3만필 돈 1천만전 곡식 2만석, 노비 3백명,

물래방아 1개, 밭 백경, 정원 1개소를 바쳤다.

 

조서로 황제의 할아버지 문목왕을 문목황제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문목황후로,   

황제의 아버지 헌무왕을 헌무황제로, 황제의 형 문양왕을 문양황제로 하고,

조상의 칭호는 외부에서 신속히 의논하여 듣기를 청하였다.

 

신유일,왕태후를 높여 황태후로 하였다.

 

가을 7월 신해일, 조서로 문양(왕)비 원씨를 높여 문양황후로 하며,

궁의 이름을 정덕(궁)이라 하였다.

 

또 조서로 문양황제의 아들 <고효완>을 하간왕으로 <고효유>를 하남왕으로 삼았다.

 

을묘일 상서령、평원왕 <고륭지>를 녹상서사,상서좌복야로,

평양왕 <고엄>을 상서령으로 삼았다.

 

11월 北周의 문제가 무리를 거느리고 섬성에 이르고

갈라진 기병은 북쪽으로 강을 건너 건주에 이르렀다.

 

병인일,황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성 동쪽으로 나아갔다.

 

北周의 문제가 군대의 진용이 매우 성대하다는 것을 듣고 탄식하여 가로되

“<고환>이 죽지않았구나” 하고 마침내 군사를 퇴각시켰다.

 

 

 

551년 5월

 

<후경>이 양나라 간문제(簡文帝){梁 2대 황제 蕭綱}를 폐하고

<소동棟>{3대 황제}을 세워 군주로 삼았다.

 

11월 <후경>이 梁나라 군주를 폐하고 참람하게 건업에서 즉위하여

자칭 한(漢)나라 라고 하였다.

 

 

 

552년 천보 3년 2월,

 

유연의 주군 <아나괴阿那瓌>가 돌궐 오랑캐에게 격파되어

<아나괴阿那瓌>가 자살하고 그 태자 <암라진菴羅辰>과

<아나괴阿那瓌>의 사촌동생 <등주사리발登注俟利發>、

사촌동생의 아들 <고제庫提> 모두 무리가 호위하여 (北齊로) 도망쳐왔다.

 

유연의 나머지 무리는 사촌동생의 둘째 아들 <철벌鐵伐>을 주군으로 삼았다.

 

11월 신사일 梁왕 <소역蕭繹>(梁나라 4대 황제)이 강릉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이가 바로 원제(元帝)이며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53년 2월

 

유연 군주 <철벌>의 아버지 <등주登注>와 아들 <고제庫提>를 북으로 돌려보냈다.   

 

<철벌鐵伐>이 잇달아 거란에게 살해되자

나라 사람들이 다시 <등주登注>를 세워 군주로 삼았는데

거듭 그 대인 <아부제阿富提> 등에게 살해되니

나라 사람들이 다시 <고제庫提>를 세워 군주로 삼았다.

 

 

9월 거란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임오일,황제가 북으로 기주(州)、정주(州)、유주(州)、안주(安州)를 돌아

이에 북쪽 거란을 토벌 하였다.

 

겨울 10월 정유일,

황제가 평주(平州)에 도착하여 마침내 서쪽길을 쫓아 긴 구덩이에 다다랐다.

 

조서로 사도(司徒) <반상낙潘相樂>으로 하여금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동쪽 길로 청산(靑山)으로 달려가도록 명하였다.

 

신축일,백랑성(白狼城)에 도착하였고 임인일에 창려성(昌黎城)을 경과하여,

다시 조서로 안덕왕 <한궤>로 하여금 정예 기병 4천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려

거란의 도주로를 차단하도록 명하였다.

 

계묘일에 양사수(陽師水)에 이르러 길을 배나 빨리 쉬지 않고 달려,

거란을 엄습하였다.

 

갑진일,황제가 친히 산고개를 넘어,지도자가 졸병에게 솔선수범을 보여,

용기를 내어 적을 치도록 지휘하여 대파하고,

오랑캐 10만여 명과 여러 종류의 가축 수십만 두를 획득하였다。

 

<반상낙>은 또 청산(靑山)에서 거란별부를 대파하였다.

 

이에따라 오랑캐 포로를 모두 여러 주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이번 길에,

황제는 투구를 쓰지않고 간단한 옷차림으로 밤낮을 쉬지않고 천여리를 달리며,

오직 고기를 먹고 물을 마시며,기상이 씩씩하며 사나움이 극에 달했다.

 

정미일,영주(營州)에 이르렀고 정사일에 갈석산에 올라 창해(滄海)를 내려다 보았다.

 

11월 기미일, 황제가 평주(平州)로부터 마침내 진양(晉陽)에 이르렀다.

 

12월 기미일, 돌궐이 또 유연을 공격하여 유연은 나라전체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이에 그 군주 <고제>를 폐하고 <아나괴>의 아들 <암라진>을 군주로 삼아,

마읍천(馬邑川)에 두고,그 식량과 옷감을 주었다.

 

(황제가) 친히 돌궐을 삭주(朔州)에서 추격하니

돌궐이 항복을 청하므로 허락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공물헌납이 서로 계속 이어졌다.

 

 

 

554년 천보5년 봄 정월

 

이달에 北周의 문제가 西魏 군주를 폐하고 제왕(齊王)으로 세우니

이것이 바로 공제(恭帝)이다.

 

3월,유연의 <암라진>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친히 토벌하여 대파하니 <암라진> 부자는 북으로 달아났다.

 

여름 4월,유연이 사주(肆州)를 침구하였다.

 

정사일,황제가 진양(晉陽){현 산서성 태원시}으로부터 토벌에 나서,

항주(恒州) 황과퇴(黃瓜堆)에 이르니,오랑캐가 말을 타고 달아났다.

 

그때 대군은 이미 돌아갔으므로,황제가 휘하 천여기를 거느리고,

유연의 별부 수만을 만나게 되니,(유연이) 사면으로 포위하고 핍박하였다.

 

황제가 정신과 얼굴빛이 태연자약하여,형세를 가리켜 구분하니,

오랑캐 무리가 굴복하여,마침내 병사들이 느슨해져 포위가 무너져 탈출하였다.

 

오랑캐가 이에 물러나 달아나서 추격하니,시체가 이십리에 깔려 있었고,

<암라진> 처와 아들 그리고 삼만여 명을 잡았다.

 

5 정미일, 북쪽으로 유연을 토벌하여 대파하였다

 

6월 유연이 부락의 무리를 인솔하여 동쪽으로 이사하여 장차 남침하려 하였다.

 

황제가 가볍게 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아래에서 맞이하여 친다고 하니,

유연은 듣고 멀리 달아났다.

 

겨울 10월 西魏가 梁나라 원제(元帝)를 강릉에서 정벌하였다.

 

조서로 청하왕 <고악高>、하동왕 <반상악潘相樂>、평원왕 <단소段韶> 등으로

하여금 무리를 인솔하고 구하도록 명하였으나,도착하기 전에 강릉이 함락되어,

梁나라 원제(元帝)가 西魏 장수 <우근于謹>에게 살해되었다.

 

梁나라 장수 <왕승변王僧辯>이 건강{현 남경}있었는데,

함께 진안왕 <소방지蕭方智>{양나라 5대 황제}를 추대하여

태재、도독중외제군으로 삼고,제도를 계승하여 백관을 설치하였다.

 

 

 

555년 천보6년 봄 정월 임인일,

 

청하왕 <고악>이 많은 군사로 강을 건너 <하수夏首>를 쳐서 이겼다.

 

梁나라 영주(郢州)자사 <육법화陸法和>를 보냈다.

 

조서로 梁나라 산기상시、정양후 <소명蕭明>을 양나라 주군으로 삼고,

상서 좌복야、상당왕 <고환高>을 보내 무리를 인솔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2월 갑자일. <육법화>를 사지절、도독 형옹강파량익상만교광 10주 제군사、태위공、대도독、서남도 대행대로 삼고,

양나라 진북장군、시중、형주(荊州)자사 <송채宋茝>를

사지절、표기대장군、영주(郢州)자사로 삼았다.

 

갑술일,상당왕(上黨王) <고환高渙>이 초군(譙郡)을 쳐서 이겼다

 

6월 갑술일,여러 군사가 기련지(祁連池)에서 크게 회합하였다.

 

을해일,국경을 나가,사적곡(厙狄谷)에 이르렀는데 ,

백여리 내에 물과 샘물이 없어,모든 군대가 목말라 고달팠는데,갑자기 큰 비가 왔다.

 

가을 7월 기묘일,황제가 백도(白道)에 머물러,치중을 놓아두고,

친히 가볍게 무장한 기병 오천을 거느리고 유연을 추격하였다.

 

임오일에 회삭진(懷朔鎮)에 이르렀다.

 

황제가 친히 화살과 돌에 맞서 여러번 대파하여,마침내 옥야진(沃野鎭)에 도착해,

그 사리(俟利) <애언력루아제藹焉力婁阿帝>、

토두발(吐頭發) <욱구려상연郁久閭狀延> 등과 아울러

포로 이만여 명,소 양 수십만두를 포획하였다.

 

유연의 사리(俟利) <욱구려이가제郁久閭李家提>는

부락 사람 수백명을 인솔하고 항복하였다.

 

임진일,황제가 진양으로 돌아왔다.

 

 

겨울 시월,梁나라 장수 <진패선陳霸先>이 <왕승변王僧辯>을 습격하여 죽이고,

<소명蕭明>{정양후 소연명-왕승변이 황제로 세운 사람}을 폐하며,

다시 <소방지蕭方智>(양나라 5대 황제)를 군주로 세웠다.

 

이 해에,인부 180만을 선발하여 장성을 축조하였는데 ,

유주(幽州) 북쪽 하구(夏口)로부터 항주(恒州)에 이르기까지 9백여리이다.

 

 

556년 천보7년

 

서하(西河) 총진수(總秦戍)로부터 장성을 쌓아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는데 ,

앞뒤로 쌓은 것이 동서 모두 3천여리 이고,십리를 1수(戍)가 통솔하였으며,

그 요해처에 주(州)와 진(鎭)을 설치한 것이,모두 25곳이었다.

 

 

 

557년 천보8년 겨울 10월 을해일,

 

<진패선>이 그 주군 <소방지>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니,

이것이 바로 陳武帝인데 ,사신을 보내 번(藩)이라 칭하고 조공하였다

 

이 해에,장성 안에 이중으로 성을 쌓았는데,

고락발이(庫洛拔而)로부터 동쪽으로 오흘수(塢紇戍)에 이르는데,

모두 4백여리이다.

 

 

 

558년 천보9년 11월 정사일,

 

梁나라 상주(湘州)자사 <왕림王琳>이 사신을 보내 <소장蕭莊>을 세워

梁나라 군주로 삼아줄것을 청하며,이에 강주(江州)를 들어 내속하니,

사유지로 삼아 살도록 명하였다.

 

12월 계유일,조서로 梁왕 <소장蕭莊>을 양나라 군주로 삼고,

나아가 구파(九派)거주하게 하였다

 

 

 

559년 천보10년 3월

 

이달에 ,梁나라 군주 <소장蕭莊>이 영주(郢州)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월,陳무제가 죽어,형의 아들 <진천陳>이 즉위하였는데,이가 바로 陳文帝이다.

 

 

 

 

560년 황건원년 겨울 11월

 

이달에 ,황제가 친히 북쪽으로 고막해(庫莫奚)를 토벌하여,장성을 나가니,

오랑캐가 달아나 숨었다.

 

병사를 나누어 토벌하러 보내니,소와 말을 대량 포획하여

모두 묶어 진양궁으로 들어왔다.

 

 

 

568년 천통4년 11월

 

이달에,陳나라 안성왕 <진욱陳>이 그 나라 주군 <진백종陳伯宗>을 폐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570년 무평원년 2월 계해일,

 

 

백제왕 <여창餘昌>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대방군공으로 삼고,

왕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576년 무평7년 겨울 10월 병진일,

 

 

 

황제가 기련지(祁連池)에서 크게 사냥하였다.

 

北周 군대가 진주(晉州)를 공격하였다.

 

계해일,황제가 진양(晉陽){산서성 태원시}으로 돌아왔다.

 

갑자일,출병하여,진양(晉陽)의 사당에 성대히 집합하였다.

 

경오일,황제가 진양(晉陽)을 출발하였다.

 

계유일,황제의 행렬과 진이 나아가,계서원(雞棲原)위에서 ,

北周 齊왕 <우문헌宇文>과 서로 대치하여,밤에 이르기까지 싸우지 않다가 ,

北周의 군대가 진을 거두어 물러났다.

 

 

11월,周 무제가 물러나 장안으로 돌아갔으나,한편의 군사는 머물러 진주를 지켰다.

 

<고아나굉高阿那肱> 등이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무인일,황제가 포위한 곳에 도착하였다.

 

 

12월 무신일(4일),北周의 무제가 진주를 구하러 왔다.

 

경술일(6일),성 남쪽에서 싸웠으나 아군이 대패하였다.

 

황제가 군을 버리고 먼저 돌아왔다.

 

경신일(16일),황제가 업(성)에 들어왔다.

 

신유일(17일),<연종延宗>이 北周 군대와 진양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여,

北周 군대에게 포로가 되었다.

 

황제가 모집하는 사람을 보내 나라의 상을 많이 베푼다고 하였다.

 

비록 이 말이 있었으나 끝내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광녕왕(廣寧王) <고효형高孝珩>이 주청하여 궁인을 내 보내고

진귀한 보물을 장수와 사졸에게 나누어 주니,황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곡률효경斛律孝卿>이 가운데서 위임을 받아,

(물건들을) 처분함으로써 갑옷을 입은 장졸들을 황제가 친히 위로하기를 청하고,

황제를 위해 글을 지으며,

 

또 말하기를

 

“의당 슬픔이 차오르고 눈물을 흘리도록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격시켜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미 무리에 임하여,장차 영을 내리려는데 ,

다시 받은 말을 기억하지 못하여 마침내 크게 웃으니,

좌우가 역시 모두 웃어,장수와 사졸들은 몸이 풀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이에 대승상 이하 태재로부터、삼사、대사마、대장군、삼공 등

관리 모두 인원을 늘려 벼슬을 주니,혹은 셋 혹은 넷이어서,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갑자일(20일),황태후가 북쪽 길을 따라 (업성에)도착하였다.

 

문무의 일품 이상(의 관리를) 불러 주화문(朱華門)으로 들어오게 하여,

술과 음식을 내리고,종이와 붓을 주어,北周를 막을 방도를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각기 의견이 달라,황제가 따를 바를 알지 못하였다.

 

또 <고원해高元海><송사소宋士素><노사도盧思道><이덕림李德林> 등을 불러,

황태자에게 선위하자고 의논하였다.

 

이에 앞서 기운을 살피는 사람이 말하길,응당 혁명적인 바꿈이 있어야 한다고 하자,이에 천통(天統)의 고사에 의해,어린 군주에게 황제의 지위를 주었다.

 

 

 

577년 (승광원년=융화 2년) 봄 정월 을해일,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8세 였으며,개원하여 승광 원년으로 하였다.

 

정축일,北周의 군사가 점점 핍박하니,

계미일,유주(幼主){어린 주군}이 또 업으로부터 동쪽으로 달아났다.

 

기축일,

황하를 건너 제주(濟州)로 들어갔다.

 

그날,유주(幼主)는 대승상、임성왕 <고개高>에게 선위하였다.

 

시중 <곡률효경>에게 선위 문서 그리고 옥새와 인끈을

영주(瀛州)로 보내도록 명하였으나,<곡률효경>은 오히려 北周로 돌아갔다.

 

또 임성왕의 조서로,태상황을 무상황으로 하고 ,유주를 수국천왕으로 하였다.

 

태황태후를 제주(濟州)에 남기고,<고아나굉>을 보내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태상황이 황후와 유주(어린군주)를 끌고 청주(青州)로 달아났는데.

<한장란韓長鸞>、<등옹鄧顒> 등 수십명이 따랐다.

 

태상황이 이미 청주에 도착하여,즉시 진(陳)나라에 들어가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고아나굉高阿那肱>이 은밀히 北周 군을 불러,

北齊의 주군(主君)을 산 채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

 

이에 누차 사신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적군은 멀리있고 이미 사람에게 명령하여 다리와 길을 불사르고 끊었다.”

고 하였다.

 

태상황이 이에 지체하고 느슨해졌다.

 

北周 군이 갑자기 청주에 이르니,태상황이 위급함에 닥쳐,

장차 진(陳)나라로 달아나려고,금 주머니를 안장 뒤에 놓고,

<장란長鸞>、<숙비淑妃> 등 십 수명과 더불어

말을 타고 청주(青州) 남쪽 등촌(鄧村)에 이르렀으나,

北周 장수 <위지강尉遲綱>에게 포획되었다.

 

업(성)에 보내니,北周 무제는 저항한 빈객의 주인을 대하는 예절을 베풀어 ,

태후와 함께 유주(幼主)、여러 왕 모두 장안으로 보내고,

황제를 온국공(溫國公)에 (책)봉하였다。

 

 

578년

 

건덕 칠년(578년)에 이르러,의주(宜州)자사 <목제파穆提婆>가 모반하고,

<연종延宗> 등 수십명이 젊은이와 노인 할 것없이 다 독약을 내려 죽이니,

신무(神武){北齊를 사실상 세운 신무제 高歡을 말함}의 자손 중에서

생존자는 이때에 이미 열에 하나 둘 뿐이었다.

 

대상 말년(580년)에 이르러,

<양휴지陽休之>、<진덕신陳德信> 등이 대승상 수공(隋公)에게 아뢰어,

장례를 수습할 것을 청하니 들어주어,장안 북쪽 언덕 홍독천(洪瀆川)에 장사지냈다.

 

 

 

 

3. 北齊의 멸망

 

 

북제가 고구려에서 나온 우리 민족 고씨가 세운 나라이니

북제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자.

 

북제는 550년에 건국하였고 진(陳)나라와 북주는 함께 557년에 건국하여

북제는 이 두나라와 대립하였다.

 

<진패선陳覇先>은 양나라 시절 북제세력을 꺾고 진(陳)나라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陳)나라는 원초적으로 반북제(反北齊)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북제의 북쪽에는 돌궐이 있었는데

北周와 돌궐은 동맹을 맺은 반면 北齊는 돌궐을 정벌하였다.

 

따라서 北周와 돌궐이 손을 잡고 북제를 공략한다.

 

이러한 모습을 조금 살펴보면,

 

보정 3년(563년) 수국공 <양충>으로 하여금 무리 1만을 이끌고 돌궐과 함께

北齊를 정벌하도록 명하였다.

 

<양충>의 군대가 형령을 넘으니

<사근>{돌궐의 군주}이 기병 10만을 이끌고 와서 만났다.

 

다음해(564년) 정월 北齊의 주군을 진양에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해(564년)에 <사근>이 다시 사신을 보내 물건을 바쳐오며,

다시 동쪽 정벌을 청하였다.

 

조서로 <양충>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이끌고 옥야진을 나가고

진공 <우문호>에게 낙양으로 진격해 호응하라고 명하였다.

 

<우문호>와 만나 싸우는데 불리하자 <사근>이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보정5년 (565년) 조서로 진공 <우문순>, 대사도 <우문귀>、신무공 <두의>、

남안공 <양천> 등으로 하여금 가서 <사근>의 딸을 맞이하도록 명하였다.

<周書 권50, 이역열전 하 돌궐전>

 

그 다음,

北齊와 北周는 東魏와 西魏 시절부터 서로 잡아먹으려고 싸웠던 사이이다.

 

따라서 北周와 진(陳)나라는 반북제(反北齊)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진(陳)나라는 北齊와 싸웠고(573년),

이때 北齊는 충격을 받았으며

北周 역시 北齊와 싸워 北齊는 드디어 멸망하였던 것이다.(577년)

 

北齊는 진(陳)나라와 北周 양쪽의 공격을 받는 공동의 적이 되어 멸망하였던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北齊는 북쪽에서 돌궐, 서쪽에서 西魏 및 北周, 남쪽에는 진(陳)나라와 싸움으로써

주위의 모든 나라와 싸웠던 것이다.

 

한마디로 외교의 대실패로 北齊는 멸망했다고 볼수 있다.

 

 

조금 더 나가, 북제가 멸망하는 마지막 모습을 보자.

 

1) 576년 12월 경술일(6일)

진주(晉州)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 북제 멸망의 결정타가 되어

 

2) 576년 12월 신유일(17일)

진양(북제의 핵심 거점이자 제2의 수도)에서도 대패하고

 

3) 577년 1월 계사일(19일)

북제의 서울 업(鄴) 전투마저도 대패하여 수도를 빼앗겨 진나라로 도망하다가

 

4) 577년 1월 기해일(25일)

북제의 군주인 안제(安帝){고위高緯}와 그 태자 <고긍>이 청주에서 생포됨으로써

북제는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몰락 원인을 살펴보면,

 

첫째,

 

진주 전투에서는 북제가 진주를 공격할때

북주 황제의 군대가 갑자기 구원해 올 것이 걱정되어

진주 성 남쪽에서부터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까지

길고 커다란 물웅덩이(해자)를 파놓았는데

결국 북주의 본대(本隊)가 오자 양쪽 군대가 긴 물웅덩이 양쪽에 대치하였는데,

북제가 그 길고 커다란 물웅덩이를 다시 메꾸고 북주 군대를 공격하다가

북주의 군대가 되받아 치자,

북제의 군대가 조금 밀리는 것을 보고 크게 겁을 먹어

북제 황제와 근신들이 황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북제 군대 전체가 무너진 것이었다.

 

엄청나게 길고 커다란 물웅덩이(해자)를 팠을 때도

인적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모되었는데

양쪽 대군이 대치한 그 살벌한 순간에 그 길고 커다란 물구덩이를 다시 메꾸어

엄청난 인적 에너지를 대량으로 고갈시킴으로써

결정적 순간에 군사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이 대패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그 살벌하고 결정적 순간에 힘을 북돋워도 이길지 말지 하는 판에

노동으로 힘을 다써 지치게 한 것은 적을 너무 깔본 것으로 생각된다.

 

적의 진영을 보고 저것들 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자기군대의 반을 투입하여 엄청난 물구덩이를 메꾸고

나머지 반으로 쳐도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물구덩이를 메꾸었으나

힘을 비축하고 있던 북주의 군대들이 사력을 다해 들이치자

앞에 있었던 노가다부대가 힘을 못쓰고 쓰러졌고

이것을 본 북제의 황제 측근들이 황제의 안위만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앞뒤 가릴 것 없이 황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힘있는 전투부대마저도 그냥 무너져 버린 것이다.

 

살벌한 칼바람이 난무하는 전쟁에서 한번 꺾이면 전원이 살겠다고 제각기 도망친다.

 

이때는 군법도 소용없고 군대 조직도 소용없으며 명령이고 뭐고도 없고

졸병이나 장교나 할 것없이 모두 다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바쁘다.

 

엄청난 공포에 휩싸이고 넋이 나가 손가락으로 톡 치기만해도 쓰러진다.

 

이래서 북제의 수십만 대군이 한꺼번에 무너진 것이다.

 

여기서 대패한 결정적 원인은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의 힘을 고갈시킨 것이다.

 

그리고 군심(軍心)의 이반에 있다.

(그 엄청난 물구덩이를 파라고 할때는 언제고 다시 메꾸라고 할때는 언제냐?)

 

그 배경에는 적을 너무 깔 본데에 있다.

 

우리 민족은 남을 쉽게 깔보는 단점이 있다.

 

우리 민족의 일파인 고씨가 세운 북제가 그 엄청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우리 민족의 단점인 남을 너무 쉽게 보고,

앝보는 습관 때문이다.

(깔보지 않았으면 엄청난 물구덩이를 메꾸고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임) 

 

이러한 모습은 관구검의 난 때도 그대로 볼수 있다.

 

동천대제 20년(246년) 관구검이 쳐들어오자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 가에서 맞아 싸워서 이기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 싸워서 또 이기고,

3천여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이렇게 되자 동천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위나라(조조의 위나라)의 대군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대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 그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다.”

고 말하며

 

적을 깔보고는 드디어 철기(鐵騎) 5천명만을 거느리고 위나라 군대를 깔아뭉갰다.

 

사지(死地)에 들어간 위나라 군대는 죽게된 마당이니

죽기살기로 싸우게 되어 동천왕이 대패하고 말았다.

 

이래서 고구려 군대는 무너지고

위나라 군대는 드디어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까지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면서

우리 민족은 남을 너무 쉽게 보는 버릇을 고쳐야 하고

남을 너무 쉽게 깔보는 습관을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와같이 한순간에 무너져 또다시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그 모든 것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북제의 수도 업에서도 패배한 것은

 

재물을 풀어 군사를 모을 때

북제의 황제는 자기 재물이 풀리는 것을 아까워한 때문이다.

 

그 위험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재물을 아까워 했으니

재물보다 귀한 목숨을 바칠 리가 있겠는가?

 

위험한 순간에는 재물을 아낌없이 내 던져야 한다.

 

결정적 순간에 쓰자고 재물은 모으는 것이다.

 

 

또한 그 결정적 순간에 분위기를 바꿔야한다며

황제의 자리를 어린 아들에게 물려준 때문이다.

 

위험하고 결정적 순간에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해야 하는데

분위기를 바꾼다고 지도자를 바꾸어 버렸으니

군과 지도자가 한 몸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군심(軍心)이 흩어진 것이다.

 

 

셋째

 

우리 민족은 지긋하지 못하고 너무 쉽게 바꾸는 버릇이 있는데

이는 좀 고칠 부분이 있다.

 

우리 민족은 시간이 좀 지나면 지루해 하는 버릇이 있다.

 

몇 년, 몇 십년을 꾸준히 밀고 나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지겨워서 배기질 못한다.

 

쉽게 빨리 바꾼다. 장소도 바꾸고, 사람도 바꾸고, 물건도 바꾸고, 분위기도 바꾸고,

계획도 바꾸고.....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펄펄 끓는 에너지가 있고 신바람의 민족이라 그런지 잠시를 가만히 있지 못한다.

 

좋은 자질을 지닌 민족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브레이크이다.

 

멈춰야 할때 언제든지 멈출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한다. 

 

차가 아무리 잘나가면 뭐하나... 멈출 수 없으면 부딪히고 깨지고... 사고가 날 뿐이다.

 

바람처럼 확 몰렸다가 바람처럼 흩어지는...

그게 우리 민족인데 여기에는 좋은 점도 있고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이러한 특성에서도 우리의 좋은 점은 살리고 나쁜 점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북제가 멸망하고 북주에서 양견(수 문제)이 나라를 빼앗아 수나라를 세웠으며

드디어 군사를 돌려 양광(수양제)이 진(陳)나라를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