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39 – 571년간 재위에 있던 일본 29대 흠명(欽明){성명왕의 동생} 천황

기록의 80%는 백제 성명왕의 언사로 장식되어있다.

 

나제동맹을 믿고 550년 백제 성왕은 신라, 가야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 공격에 나서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성을 수복하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오히려 금현성을 빼앗겼는데,

신라장군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군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도살성과 금현성을 모두 차지하고 군사 1 천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이후 백제, 신라,가야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도 황해도 지역에 6개의 군을 회복하였다.

 

신라는 이때 비로소 죽령 이북의 땅을 확보하여

한강유역에 접근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신라를 물밑에서 접촉하여

나제동맹을 무력화시키고 신라와 동맹을 성립시킨다.

 

고구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고

신라는 마음을 바꿔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의 배반으로 백제는 당혹하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신라군은 한강이북의 갓 수복한 백제 땅을 차지하고 한성까지 장악해 버린다.

 

성왕은 궁지에 몰려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굴욕을 감수하며 가까스로 신라의 맹공을 누그러뜨린다.

 

 

진흥왕 14년(553)가을 7월에

신라는 백제의 동북변경을 확보하고 그곳을 新州로 삼았다.

 

그 신주의 軍主로 임명된 자가 바로 <김무력>이다.

 

<김무력> 휘하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 땅인 신주뿐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현 충북 증평)과 금현성(현 충북 진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곳의 軍主 <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투항한 가락국 마지막 왕 <김구해>의 3남이며

뒷 날 태어날 <김유신>의 조부이다.

 

이런 연고로 <김유신(595-673)>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굴산성과 환산성 및 성치산성>

 

신라의 배신에 이를 갈던 성왕은 이후 왜와 가야와 연합군을 편성하고

554년 5월 왜의 수군이 도착하자 신라 정벌을 시작하여 신라의 함산성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 갔으나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 주력군은 굴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퇴각하여 환산성 (고리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성왕이 이끄는 백제연합군도 충북 영동군의 핏골전투에서 패하여

성치산성으로 지휘본부를 옮기게 되었다.

 

 

 

<삼성산성(관산성)>

 

반격에 나선 신라군은 현재의 옥천분지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금산지역의 백제군과 대치하였다.

 

성치산성에서 환산성까지는 약 20 킬로미터, 말을 타면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삼성산성 (관산성){충북 옥천}이 위치하고

이곳은 신라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백제성왕의 움직임을 이들은 포착하고 있었다.

 

554년 12월

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만 데리고 해가 서산에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태자 여창의 군영, 환산성으로 출발했다.

 

백제는 신라의 매복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신라는 백제 진영의 이동을 훤히 파악하고

태자 <여창>의 군대와 성왕의 교통로를 관산성에서 차단하여

양군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관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실개천이 있는데 현재 서화천이라 불린다.

 

역사기록은 이곳을 구천(狗川)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 말 개천을 한자표기로 개(狗)로 바꾼 것이다.

 

성왕은 현지 방언인 구진베루(벼랑)밑에 흐르는 개천가에서

매복하고 있던 신라복병에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백골산>

 

이후 관산성의 신라군은 환산성과 성치산성의 백제군을 각개 격파한다.

 

성왕이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의 백제군이 필사적으로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신라조정은 이때 도살성과 금현성의 김무력에게 관산성으로 이동하여

백제군을 섬멸할 것을 명령한다.

 

김무력의 기병대는 진천 – 청주 – 신탄진 – 대전 – 백골산성으로 진격하여

백제태자 여창군의 배후로 달려든다.

 

백골산에서 신라군을 방어하던 백제군은

현재의 대청호를 등지고 신라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김무력>의 기병이 무방비 상태인 배후를 공격하여 일방적인 공격을 퍼 붙는다.

 

학살과 다름없는 신라기병의 맹공으로 백제의 <여창> 군은

좌평 4명과 사졸 2만 9천 6백여 명을 잃었다.

 

<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 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츠쿠지 국조(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 사이에 <여창>은 겨우 도망쳤다.

 

 

 

<백골산 배후 공격 루트>

 

554년 7월 신라와 백제의 대회전은 역사에 관산성 전투라고 기록되지만

실재는 백골산성에서 대회전이 치러졌고 신라는 이때부터

한반도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는 반면 백제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이 전쟁에 참전하여 백제를 도왔던 경북 고령의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되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몇 백년간 백제와 동맹관계를 유지해 왔던 가야제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진흥왕은 만주 길림까지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관경비와 단양에 적성비를 세워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다.

 

창녕비는 561년,

함남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나

북한산비는 훼손이 심하여 건립연대의 해독이 불가하다.

 

북한산 문수봉 아랫 쪽의 비봉에 세워져있던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 순조 16년 (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백제는 가야를 합병하지 않고 몇 백년간 동맹국으로 대우해 왔는데

6세기의 신라는 상대국을 정복하면 바로 신라의 땅으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확립은 삼국 가운데 가장 늦었으나,

고구려나 백제보다 150년 후에야 불교를 수용하면서

신라는 늦은 만큼 확실하게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진흥왕은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죽었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그의 치세 하에 마련된 것이다.

 

이 시절의 신라 군부를 움직인 <이사부>와 <거칠부> 두 사람은

시대가 낳은 탁월한 전략가로서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이던 나라가

100년 후 삼국통일의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6세기 중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10개의 가야 소국들이 남아 있었는데 

고령의 대가야 (加羅國) 가 마지막으로 562년 신라에게 멸망하자

일본의 欽明천황(510– 571)이 남긴 피맺힌 절규가

일본서기 흠명치세 23년 (562년) 여름 6월 기사로 실려있다.

 

신라는 서쪽 구석에 치우친 보잘것없고 야비한 나라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무도를 저지르고 우리의 은의를 배반하고 우리의 직할지를 쳐부셨다.

 

우리 인민을 해치고 군현에 해를 입혔다.

 

옛적에 신령스럽고 총명하였던 신공황후는 천하를 주행하며 힘 써 인민을 보살폈다.

 

신라가 곤란한 일을 당하자 불쌍히 여겨 신라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으며,

요해지의 땅을 주어 신라가 번영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언제 섭섭하게 한 적이 있었느냐.

 

우리국민도 신라에 원한 같은 것은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장창과 강궁을 들고 임나{대마도}를 공격하여

거대한 이빨과 날카로운 손톱으로 인민을 학살하였다.

 

간을 찢어 발기고, 사지를 도려냈으며,

뼈를 부시고 , 시신을 불태우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임나사람을,

관리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칼 도마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난도질을 하고있다.

 

왕의 땅에 살면서 왕의 신하로서

그 땅의 곡식을 먹고 그 땅의 물을 마시고 산 사람으로서

이러한 말을 듣고 애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태자, 대신들은 서로 도와서,

대지위에 피눈물을 흘릴망정

원한은 드러나지 않게 가슴 속에 감추고 가야할 사람들이다.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그 몸을 수고하여 봉사하는 자 일진데,

선왕의 은혜를 입고 후세에 선왕의 뜻을 이어 가려면

단장의 아픔을 이겨낼 생각으로 반역자를 응징하여,

천지의 아픔을 달래고,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을 수 없다면

죽어서도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 한 한(恨)을 남길 것이다.

 

흠명치세 32년(571년) 여름 4월 15일 천황이 병으로 누웠다.

 

황태자가 타지에 있어 부재중이므로

역마를 달려 대전으로 불러들여 그 손을 잡고 천황이 말했다.

 

나는 병이 무거워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뒤를 부탁한다.

 

너는 신라를 쳐서 임나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전과 같이 임나와 사이좋은 사이로 회복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이 달 천황은 62세로 붕어하였다.

 

위와 같은 언사를 보고

欽明천황이 가야의 후손일꺼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가야를 빌어 백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欽明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30대 敏達천황(538–585)이 등극하며

그는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欽明의 아들이 아니라

백제 성명왕의 둘째 아들로 위덕왕의 동생이다.

 

이 때 왕위 계승권은 철저하게 장자에게 있었으며

흠명천황은 성명왕의 동생이므로 그 아들 중 천황이 된 사람은

32대 崇峻천황 (530–592) 한 사람 뿐이다.

 

나머지 백제 27대 위덕왕(530-598), 일본 30대 敏達천황(538-585),

일본 31대 用明천황 (540– 599){벡제 29대 혜왕}은 모두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일본 33대 推古천황 (554–628)도 성명왕의 딸이다.

 

 

위덕(威德)왕은 성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창이다.

 

525년에 태어났으며,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국정을 이어받았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국정에 깊이 참여하였고,

신라가 동맹을 어기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을 땐, 신라 정벌론을 펼쳤다.

 

그의 강경론에 따라 성왕이 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에 자신이 선봉에 서서 관산성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창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어코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죽었는데,

창은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도 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하게 만류하자, 뜻을 굽히고 왕위를 승계했다.

 

그는 성왕의 삼년상을 치르고 557년 3월에야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자기 탓으로 부왕이 죽은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보인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불안한 가운에 태자로서 왕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국정을 맡자마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554년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까지 달려와 백제를 위협하였다.

 

백제의 옛 도읍지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사비성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백제의 폐부와 같은 곳인데, 고구려가 한달음에 달려왔으니,

백제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 군을 패퇴시켰지만,

고구려의 재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고구려 침략은 신라가 길을 터준 결과였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백제가 의지 할 곳은 오랜 동맹국인 왜와 가야밖에 없었다.

   

그런 판단 아래 그는 아우 계(혜왕)를 왜에 파견하였다.

 

왜로 떠난 계는 555년 2월에 왜국 도성에 도착하여

흠명(欽明)천황을 만나 군대를 요청하였고,

당시 왜국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소아도목(蘇我槄目)의 동의를 얻어냈다.

 

1년가량 왜에 머무르던 계는 556년 1월에

왜군 1천여 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왔다.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의 협공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제, 왜, 가야 삼국의 공동 대응이 절실한 입장이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의 재건이 필요했다.

 

가야의 힘이 강해지면, 신라가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거기에 왜의 군대까지 가세하면,

백제는 고구려와의 싸움에 주력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왜 역시 가야의 몰락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터라,

가야 재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위덕왕은 아우 <계>를 파견하여 왜와 백제가 함께

가야를 복원시키자는 제의를 하였고, 왜 조정이 이에 호응했던 것이다.

   

물론 위덕왕은 가야 쪽에도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빼앗긴 가야 땅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것은 562년 7월에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사이,

가야는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말려 1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를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며,

침략의 명분을 찾고 있던 신라로서는 더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은 장군 사다함을 앞세워 순식간에 가야 전역을 휩쓸어버렸고, 그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가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가야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자, 가장 당황한 쪽은 백제가 아니라 왜였다.

 

가야와의 무역을 기반으로 자국의 식량 부족을 해소하고 있던 왜국으로서는

자칫 식량 부족에 허덕여야 할 위기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간 백제가 끊임없이 가야 재건을 위해 병력 파견을 충동질했을 때도

섣불리 나서지 않은 것은,

일이 잘못되어 가야가 완전히 신라 수중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왜의 영토는 대부분 산악지대이고, 그것도 여러 섬으로 나뉘어 있어,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왜가 일찍부터 가야와 동맹을 맺고 형제처럼 지낸 가장 큰 이유는

양곡이 충분히 생산되는 가야와의 무역을 통해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왜의 식량 부족분을 채워주던 가야가 적국 신라에 패망함으로써

왜는 졸지에 식량난을 염려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왜는 563년 7월에

마침내 백제에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 공략에 나섰다.

 

사실, 위덕왕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가야의 재건이 아니라

왜의 적극적인 개입이었는지도 올랐다.

 

어차피 가야는 몰락지경에 처해 있었기에 재건은 요원한 일이었다.

 

거기에다 가야가 쇠망하지 않고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왜가 쉽사리 신라를 공격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백제는 차라리 가야를 몰락시키고,

왜가 적극적으로 신라 공략에 나서도록 하는 전략을 짰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왜는 백제가 그토록 원하던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왜와 백제는 다리(섬진강 하류 지역)에 군대를 집결하여

가야 지역으로 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왜의 수장 기남마려(紀男麻呂)는 신라군의 전략에 말려

많은 군사를 잃고 백제 땅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뒤로 왜와 백제는 섣불리 신라를 공격하지 못했고,

신라 역시 왜와 연합한 백제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으며,

고구려에 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

 

덕분에 위덕왕은 고구려와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577년에 백제가 신라의 서부 지역을 공격하여 한 차례 전쟁을 치르긴 하나,

별로 심각하지 않은 국경 분쟁에 불과했다).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위덕왕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당시 중국 대륙은 한바탕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남조에선 진패선이 557년에 양을 멸망시키고 진(陣)을 세웠으며,

북조에서도 557년에 서위를 무너뜨린 우문 선비의 북주(周)와

동위를 차지한 한족(韓族) 고씨의 북제(齊)가 양립하고 있었다.

   

백제는 진(陣)과 북제에 모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고 외교적 안정을 꾀하였다.

 

또 577년에 북주(北周)에 의해 북제가 멸망되고,

581년에 북주의 외척 양견이 주 왕실을 무너뜨리고 수나라를 세우자,

위덕왕은 양견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589년에 양견이 진을 몰락시키고 대륙을 통일하자,

위덕왕은 수나라를 충동질하여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수가 진을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제주도)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주고, 선물까지 가득 안겨 돌려보냈다.

 

양견은 이 일로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한다는 계획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에 그런 의지를 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덕왕은

598년에 수와 고구려가 요동 땅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장사 <왕변나>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면서,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향도가 되어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위덕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도록 충동질하고

향도가 되겠다고 한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 조정은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노략질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그런 상황에서 598년 12월에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위덕왕은 44년여의 오랜 세월을 왕위에 머물렀지만,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극히 미미하다.

특히『삼국사기』의 기록만으로는 그의 치세를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일본서기』에 위덕왕과 관련한 기록들이 다소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스런 상황이다).

 

  『삼국사기』엔 위덕왕의 가족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일본서기』추고천황 편에 백제 왕자 아좌(阿佐)라는 이름이 보인다.

 

597년 4월 위덕왕이 그를 왜에 파견했으며,

왕자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봐서, 그는 위덕왕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또한 위덕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의논할 목적으로 왜에 건너갔다는 것에서

그가 태자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고,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아좌는 백제와 왜의 군사 협력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왜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일본서기』는 그가 언제 백제로 돌아갔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또한 위덕왕의 사망과 혜왕의 즉위에 대해서도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듬해에 위덕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혜왕, 즉 위덕왕의 아우였다.

 

태자가 멀쩡히 있는데,

그것도 일흔이 넘은 혜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곧 혜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혜왕의 왕위 찬탈은 언제 이뤄진 것일까?

 

아마도 태자 아좌가 왜에 있을 동안에 벌어진 사건일 것이다.

 

당시 위덕왕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하지만 아좌가 왜에 파견될 당시엔 병중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태자를 왜에 파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위덕왕은 아좌가 왜로 떠난 뒤에 급작스럽게 병상에 누웠고,

그런 와중에 아우 계(혜왕)가 위덕왕을 대신하여 왕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계>와 그의 아들 효순(법왕)이 정권을 장악하고

왕위를 넘보게 된 것이다.

   

아좌태자는 국정을 의논하기 위해 왜에 왔기 때문에

필시 잠시 머물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사비에 당도한 뒤에 혜왕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덕왕에겐 아좌태자 이외에도 여러 아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 남아 있는 사람은 무왕(제30대)뿐이다.

 

무왕은『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서 모두 법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나,

『북사』와『수서』에서는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백제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 설화에 따른 성장 과정을 따져볼 때,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 일본 천황의 선조는 백제 왕족

 

 

 

 

 

 

 

 

-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백제인들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나라는 백제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백제가 왜에 승려를 파견한 것은 성왕 대인 552년이다.

 

 

성왕은 석가불의 금동상 1구와 경전 몇 권을 보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법은 모든 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입문하기 어려워, 주공과 공자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법은 무량무변한 복덕과보를 낳고, 무상의 보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비교하건대, 사람들이 여의주를 품으면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듯이

이 묘법의 보물도 그러합니다.

 

기원하는 것은 마음대로이며, 모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천축에서 삼한에 이르기까지 받들어 모시고,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렇듯 성왕의 뜻과 함께 불상과 경전이 전해지자,

왜국 조정은 부처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논의했다.

 

 

당시 실권자 <소아도목>은

 

“서쪽의 여러 나라가 다 섬기고 있습니다. 일본이 어찌 혼자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며 흠명천황에게 불교를 받아들일 것을 청했다.

   

하지만 대신 <미려(尾與)>와 중신 <연겸자(連鎌子)>가

전통적인 신도를 거스르는 처사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흠명천황은 <소아도목>에게 불상을 내리고 예배토록 했다.

   

그 뒤에 왜국 전역에 역병이 번지자,

미려와 연겸자가 불상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청하며 불상을 던져버리라고 하자, 흠명천황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불상을 강물에 던지고, 불상을 안치했던 절을 태워버렸다.

   

이 사건 후, 왜는 한동안 불법을 접하지 못하다가,

32년 후인 584년 민달(민달)천황에 이르러 다시 불교가 전파되었다.

 

이 때 불교를 왜에 전파한 사람은 백제 사람 녹심신(鹿深臣)과 좌백련(佐伯連)이었다.

 

그들은 왜에 들어오면서 각각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은 불상을 소아도목의 아들 <마자(馬子)>에게 주었고,

<마자>는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수행자를 찾았다.

 

비록 공식적으로 불교가 들어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왜국엔 불법을 받아들여 승려가 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방으로 수소문을 해본 결과,

고구려 출신 환속 승려인 <혜편(惠便)>이라는 인물을 찾는데 성공했다.

 

마자는 그를 스승으로 삼고, <사마달등(司馬達等)>의 딸 <도(島)>를 출가시켰다.

 

그리고 <도>의 제자가 될 두 여인을 다시 출가시켰다.

   

<마자> 대신은 혼자 불법에 귀의하여 세 명의 여승을 섬겼고,

자기 집 동쪽에 절을 지어 미륵상을 안치했다.

 

또한 세 비구니를 초청하여 법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듯 왜의 불교는 <마자> 대신의 노력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역병이 창궐하자,

반소아파 조정 대신들은 모든 것이 <소아> 대신이

불법(佛法)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탑과 사찰이 무너지고, 비구들은 소환되어 감금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창이 번져 그것으로 죽는 자들이 늘자,

백성들은 불상을 불태웠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수군거렸다.

   

그 무렵 <소아마자>도 병에 걸려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병은 불법의 힘을 빌려야만 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민달천황은 <소아> 대신 혼자만 불법을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하고,

감금했던 세 명의 여승을 풀어줬다.

   

민달천황이 죽고, 용명(用明)천황이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2년에 두창에 걸린 그는 불교에 귀의하려고 했다.

 

이 일로 대신들 간에 찬반양론이 일었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런 가운데 용명천황은 두창이 심해져 죽었고,

이후 왜 조정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에 휩싸였다.

   

치열한 다툼 끝에 내분은 결국 <소아> 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왜 조정은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여 백제에 승려를 요청했다.

 

588년에 백제에서 <혜총> 등 세 명의 승려에게 불사리를 모시게 하여 보내왔다.

 

또 <영조율사>, <영위>, <혜중>, <혜숙>, <도엄>, <영개> 등의 승려와

기와 장인, 탱화 장인, 절 목수 등을 파견하여 왜의 불법 전파에 도움을 주었다.

   

또 <선신(善信)> 등의 비구들을 백제 사신에게 딸려 보내

불교를 배워오도록 했으며, 법흥사를 창건했다.

   

백제로 떠난 <선신> 등의 비구들은 2년 뒤인 590년에 왜로 돌아왔고,

그 뒤로 귀족의 딸과 아들들이 대거 출가하여 승려가 됨으로써

일본은 불교의 토대를 닦기 시작했다.

   

이렇듯 일본의 불교 수입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불법 포교를 둘러싼 논쟁의 배경엔

친 백제파와 반 백제파와의 팽팽한 정치적 다툼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조선 말기에 천주교에 대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던

벽파와 시파의 당파 싸움과 유사했던 것이다.

 

따라서 소아씨와 같은 불교 옹호론자들의 승리는

친 백제파가 왜국 조정을 장악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성왕과 위덕왕의 진짜 목적은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즉, 불교를 지렛대로 삼아 왜국 조정에 친 백제파 세력을 키우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백제가 왜에 불교를 전파한 행위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음모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 참고 <明穠(500?-554) 一代記>

 

 

- 성왕의 즉위 및 패수(예성강) 사수(524)

 

 

성왕 원년 (서기 524)

 

가을 8월, 고구려 병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임금이 좌장 지충(志忠)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싸우게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패수>

 

 

- 무령왕대에 교류가 없던 신라와 만나는 명농 (525)

 

성왕 3년(서기 525)

 

봄 2월, 신라와 서로 교빙하였다. (與新羅交聘)

 

 

 

- 웅진성을 수리하고 사정(沙井)에 목책을 세우는 백제 (526)

 

 

성왕 4년(서기 526)

 

겨울 10월, 웅진성(熊津城)을 수리하고 사정(沙井)에 목책을 세웠다.

 

 

 

- 백제의 국운을 건 오곡원에서 대패하는 3만의 백제군 (529)

 

 

성왕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3만의 백제군이 옛 땅 6군(재령지역을 중심으로 한 6개군)을 회복하기 위해 

오곡 벌판에 진을 치고 있다.

 

3만의 군대는 근초고왕, 근구수왕 이후에는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대군이다.

 

백제는 국운을 건 오곡벌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끌고 나온 것이다.

 

백제는 전방에 3만이라는 대규모 병력 동원력을 과시한 반면

후방은 소홀히 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백제의 대군을 막아내기 위해 혈성(강화도)를 점령한 후

파주에 상륙하여 왕봉(행주)를 차지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는 백제의 후방에 빈집 Drop을 실시하여 3만 대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이다.

 

백제군의 보급로 차단에 성공한 고구려는 오곡벌에서 백제군을 물리친다. 

 

큰 패배를 당한 백제군은 북한산성으로 후퇴했을 것으로 보인다.

 

 

 

<혈성과 오곡원>

 

 

-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한 고구려

 

 

국가의 운명을 걸었던 오곡벌 전투에서 백제가 대패하면서

고구려는 남하하고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영토는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로 인식되는 영토이다.

 

 

- 살해되는 안장대제 (531)

 

 

일본서기 계체 25년 (서기 531)

 

태세(太歲) 신해 3월, (...) 이 달에 고려(高麗)가 그 왕 안(安)을 시해했다.

 

 

고구려 안장왕 13년(서기 531)

 

여름 5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안장왕(安藏王)이라 하였다.

 

 

고구려 안원왕 원년 (서기 531)

안원왕(安原王)의 이름은 보연(寶延)이며, 안장왕(安藏王)의 아우이다.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커서 안장왕이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보연이 왕위에 올랐다.

 

 

 

안장대제 <흥안>이 살해되고 동생인 <보정>이 즉위하니 안원대제이다.

 

 

 

- 안라회의; 반파국(대가야)이 신뢰를 잃자 가야의 중심으로 떠오른 안라,

  안라회의에서 왕따당한 백제 (531.3)

 

 

일본서기 계체 23년 3월 (서기 531)

 

이 달에 오구미 게누노오미(近江 毛野臣)를 안라로 보내 조칙으로 신라에 권하여

남가라, 탁기탄을 다시 건립토록 했다.

 

백제는 장군군윤귀(將軍君尹貴), 마나갑배(麻那甲背), 마로(麻鹵)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신라는 번국의 관가를 부순 것이 두려워 대인을 보내지 않고

부지내마례(夫智柰麻禮), 해내마례(奚柰麻禮)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이에 안라는 새로이 고당(高堂)을 지어 칙사를 인도하여 올라가는데,

국주는 따라 올라갔고,

국내의 대인으로써 미리 당에 올라와 있는 사람도 하나 둘 있었으며,

백제 사신 장군군(將軍君)등은 당 아래에 가있었다.

 

그 뒤로 몇달동안 두세번 당위해서 모의 했는데

장군들은 뜰에 있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520년대 후반에 탁순국이 신라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 와중에 탁기탄국이 신라에 병합되자,

가야연맹 내의 남부제국은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 대가야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구책으로 자체 내의 단결을 도모했는데 함안의 안라국이 이를 주도했다.

 

즉 안라가 높은 건물을 지어서 새로운 정치적 합의체 맹주로서 의 면모를 갖추고,

백제, 신라, 왜 등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

즉 안라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를 반영한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혼인동맹이 파탄되고 탁기탄국이 멸망하면서

대가야는 가야진영 전체에게 욕을 먹게 되었다.

 

그러면서 안라국이 가야연맹 정치적 맹주로 부상한다.

 

안라국은 높은 건물(고당,高堂)을 짓고 안라회의를 개최하여

안라국이 가야의 정치적 맹주가 되었음을 표방한다.

 

반면 백제사신 윤귀(尹貴)는 가야에게 왕따 당해서 

고당에 올라가지 못하고 몇달 동안 뜰에 서 있게 된다.

 

 

 

- 모야신의 배반음모를 파악하고 백제와 신라에 청병하는 탁순왕; 

   큰 피해를 입고 토벌에 실패하자 탁순왕을 꾸짖는 백제장군,

   백제에 삐진 탁순왕 (531.9)

 

 

일본서기 계체 24년 (서기 531)

가을 9월 임나의 사신이

 

“모야신(毛野臣)이 드디어 아리사등(久斯牟羅)에서 집을 짓고

2년[어떤 책에 3년이라고 한 것은 가고 온 해를 센 것이다]을 머물며

다스리기를 게을리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인과 임나인이 자식 때문에 자주 다투었으나 해결하기 어려웠고

처음부터 판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毛野臣은 즐겨 서탕(誓湯)을 설치해 놓고

‘진실된 사람은 문드러지지 않을 것이고 거짓된 사람은 반드시 문드러질 것이다’

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탕에 던져져 데어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길비(吉備)의 한자(韓子) 나다리(那多利)· 사포리(斯布利)

[大日本人이 蕃女를 취하여 낳은 자식을 韓子라 한다]를 죽이고

人民을 괴롭혔으며 끝내 화해시키지 못하였습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천황이 그 행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 들였으나 오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하내모수마사수(河內母樹馬飼首) 어수(御狩)로 하여금 서울에 나아가

 

“臣은 王命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되돌아간다면

힘써 갔다가 헛되이 돌아가는 것이 되니 부끄러워 편안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國命을 이루고 조정에 들어가 謝罪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요”라 아뢰게 하였다.

 

使者를 보낸 후 다시 스스로 꾀하기를

 

“그 조길사(調吉士)는 또한 황화(皇華)의 사자(使者)이니 만약 나보다 먼저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면 나의 罪過는 반드시 무겁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調吉士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을 지키게 했다.

 

이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이) 사소한 일만 일삼고

맡은 바 임무에 힘쓰지 않는 것을 알고 歸朝할 것을 자주 권했으나

오히려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의) 행적을 다 알아서 배반하려는 마음이 생겼으므로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를 보내어 신라에 가서 청병(請兵)하고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백제에 보내어 청병했다.

 

毛野臣이 百濟兵이 온다는 것을 듣고 배평(背評)

[背評은 지명인데 또한 능비기부리(能備己富里)라고도 한다]에서 맞아 토벌했는데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붙잡아 형틀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놓고

신라와 함께 성을 에워쌌다.

 

阿利斯等을 책망하며 꾸짖기를 “毛野臣을 내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毛野臣은 城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으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편리한 곳을 찾아 한 달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는데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이라 한다.

 

돌아올 때 길목의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포나모라(布那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아부라(阿夫羅)· 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의

다섯 성을 쳐부수었다.

 

 

 

탁순국의 왕 아리사등(阿利斯等)이 모야신(近江毛野臣, 게나노오미)의 배반음모를

알아내고 <모야신>을 몰아내기 위해 백제와 신라에 청병(請兵)한다.

 

탁순에 도착한 백제군은 모야신(毛野臣)이 있는 배평(背評)의 성을 공격하는데 

백제의 피해가 커서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 되었다.

 

열받은 백제장군은 백제 청병사신 노수구리(奴須久利)를 형틀을 채우고

쇠사슬에 묶은 후 탁순왕 아리사등(阿利斯等)을 이렇게 꾸짖는다.

 

“毛野臣을 내줄 수 있겠는가”

 

모야신 토벌에 실패한 백제와 신라는

한달동안 탁순에 머물다가 구례모라성을 쌓고 돌아간다

.

 

<안라와 구례모라성>

 

<모야신>은 안라의 왜신관에 파견 된 왜인이다. 

 

 

 

- 안라회의에서 왕따당한 것에 대한 조처를 하는 백제;

  안라에 이르러 걸탁성과 구례산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백제군 (532.3)

 

 

일본서기 계체 25년 3월 (서기 532)

 

태세(太歲) 신해 3월, 군대가 나아가 안라에 이르러 걸탁성(乞?城)을 영위했다.

 

 

일본서기 흠명 5년 3월

 

신라는 봄에 탁순(卓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구례산(久禮山) 수비병을 내쫒고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모야신>을 토벌하기 위해 탁순으로 간 후 1년 뒤에

백제는 다시 군대를 보내 백제군을 안라 주변의 걸탁성에 머물게 한다.

 

백제장군 <윤귀>를 안라회의에서 왕따시킨 것에 대한 조처를 

백제군을 안라주변에 머물게 하여 해결하는 것이다.

 

백제는 군사력의 힘으로 가야연맹에서 백제의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려 한다.

 

 

 

 

- 다대포에서 3개월동안 모야신(毛野臣)에게 군사시위를 하는 신라의 이사부 

  (532.4)

 

일본서기 계체 23년 4월 (서기 532)

이 달 사신을 보내어 기능말다간가(己能末多干岐, 탁순왕 아리사등)를 보냈다.

 

아울러 임나에 있는 近江毛野臣에게 명령하여

 

“아뢴 바를 알아보고 서로 의심하는 것을 화해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毛野臣은 웅천(熊川)에 머물면서

[어떤 책에는 任那의 구사모라(久斯牟羅)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불러 모았다.

 

신라왕 좌리지(佐利遲)는 구지포례(久遲布禮)를 보내었고

[어떤 책에는 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라 하였다]

백제는 은솔(恩率) 미등리(彌騰利)를 보내어

毛野臣이 있는 곳에 가서 모이게 하고 두 왕은 참석하러 오지 않았다.

 

毛野臣이 매우 화를 내며 두 나라 사신을 꾸짖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이다

[어떤 책에는 큰 나무의 끝은 큰 나무로 잇고

작은 나무의 끝은 작은 나무로 잇는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에 두 나라의 왕이 몸소 와서 천황의 명령을 받지 않고

가벼이 사신을 보내는가.

 

이제 비록 너희 왕이 스스로 와서 명령을 받겠다 하더라도

나는 칙을 선포하지 않고 반드시 쫓아가서 물리칠 것이다”라 하였다.

 

久遲布禮와 恩率 彌騰利가 마음속으로 두려워 각각 돌아가서 왕을 부른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그 上臣 이사부(利叱夫禮智, 이질부례) 간기(干岐)로 바꾸어 보냈는데

[신라에서는 大臣을 上臣이라 하는데 어떤 책에는 伊叱夫禮智奈末이라 하였다.]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毛野臣이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웅천(熊川)으로부터 임나(任那)의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갔다.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는 다다라원(多多羅原)에 머물며

공경하여 돌아가지 않고 세 달을 기다리며 칙을 들으려고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사부(伊叱夫禮智,이질부례지)가 거느린 사졸(士卒)들이

마을에서 걸식하고 있었는데

毛野臣의 종자(從者) 하내마사수(河內馬飼首) 어수(御狩)와 마주쳤다.

 

御狩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숨어서

걸식하는 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주먹으로 쳤다.

 

걸식자가 보고

 

“삼가 세 달을 기다리며 칙지(勅旨)를 듣고자 했으나 아직도 선포하려고 하지 않고

칙을 들으려는 사신을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上臣을 죽이고자 함임을 알겠다”

라 하였다.

 

이에 소견(所見)을 모두 上臣에게 아뢰었더니

上臣은 4개의 村

[금관(金官)·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다다라(多多羅)·수나라(須那羅)·화다(和多)·비지(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이 “多多羅 등의 4개 촌을 노략질하게 한 것은 毛野臣의 잘못이다”라 하였다.

 

 

 

 

탁순왕을 지원하기 위해 신라 법흥왕은 이사부에게 3천의 병력을 주어 

모야신(毛野臣)을 소탕하도록 했다.

 

이사부는 다다라원(多多羅原, 현재 다대포)에 주둔하여

웅천에 머무르고 있는 모야신에게 석달동안 군사시위를 한다.

 

 

 

 

- 금관국을 몰락시키고 웅천을 빼앗는 이사부,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가는 모야신(毛野臣) (532)

 

 

일본서기 계체 23년 4월(서기 532)

 

 

毛野臣이 멀리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고 무리가 수천 명인 것을 보고,

웅천(熊川)으로부터 임나(任那)의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갔다. (...)

 

上臣(이사부)은 4개의 村

[금관(金官)·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가 4개 촌이다.

어떤 책에는 다다라(多多羅)·수나라(須那羅)·화다(和多)·비지(費智)를

4개 촌이라 하였다]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사람과 물건을 다 가지고 본국에 들어갔다.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신라 법흥왕 19년(서기 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3개월간 군사시위를 하던 이사부는 갑자기 남가라(금관가야)를 습격하여 무너뜨린다.

 

신라는 계속해서 웅천까지 함락시킨다.

 

웅천을 빼앗긴 모야신(毛野臣)은 기질기리성으로 후퇴한다.

 

 

 

<다다라, 웅천, 기질기리>

 

 

 

-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는 백제 (538)


 

성왕 16년(서기 538)

봄, 도읍을 사비(泗?, 부여)[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538년 백제는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도읍을 사비로 이전한다.

 

이는 성왕 초기 부터 추진하던 왕권 강화책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한다.

 

 

 

 

- 내외 관청을 22부로 확대하고 수도와 지방을 5부와 5방으로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성왕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웅진시대 이래 행해졌던 내외관제를 정비하여

지배체제의 정비와 통치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왕도의 통치조직으로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지방통치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를 개편하여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같이 중앙관제와 지방의 통치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운영에 있어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 사비천도를 통해 왕권으로 권력을 단일화 시키는 성왕

 

 

성왕 이전의 백제는 중앙과 지방 귀족간의 권력이 이원화 되어 있었다. 

 

반면 성왕이 이룩한 왕권강화는 왕권 중심으로 권력이 일원화되어

과거처럼 귀족세력이 왕을 임의로 교체할 수 없게 되었다.

 

 

 

- 신라군을 끌여들여 반대집단을 소탕하고 스스로 신라에 편입된 탁순 (538)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탁순(卓淳)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신라(新羅)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그러나 任那의 경계는 新羅와 접해 있어서 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탁순(卓淳) 등이라 함은 탁기탄(?己呑), 가라(加羅)를 말한다.

卓淳 등의 나라와 같은 패망의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 흠명 5년 3월(서기 538년)

"신라는 봄에 탁순(卓淳)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구례산(久禮山) 수비병을 내쫒고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탁순왕 아리사등은 신라군의 지원으로 모야신을 몰아내고 신라로 투항한다.

 

신라는 탁순을 신라로 편입시키고 구례산의 백제군을 몰아낸다.

 

 

 

- 우산성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패하는 백제 (540)

 

 

성왕 18년(서기 540)

가을 9월, 임금이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구려 안원왕 10년(서기 540)

 

가을 9월, 백제가 우산성(牛山城)을 포위하였다.

임금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보내어 그들을 물리쳤다.

 

 

 

백제는 우산성 전투에서 패배한다.

 

백제의 전력으로는 고구려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 나제동맹의 부활; 나제동맹의 부활을 요청하는 백제 (541)

 

 

신라 진흥왕 2년(서기 541)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기에 허락하였다.

 

 

 

백제가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야 했다.

 

백제의 요청으로 나제동맹이 부활한다.

 

 

 

-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백제 (541)


 

성왕 19년(서기 541),

임금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모시(毛詩)박사(博士)와 열반경(涅槃經) 등의 경서 해설서 및

기술자와 화가 등을 보내주기를 요청하니, 양나라에서 이를 들어주었다.

 

 

 

- 1차 사비회의; 사비에 모인 가야 소국들 (541)

 

 

538년에 泗(충남 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를 南扶餘로 고치는 등 중흥을 꾀하여,

내외 관청을 22부로 확대하고 수도와 지방을 5부와 5방으로 정비하였다.

 

그는 이러한 통치체제 재정비를 토대로 삼아 적극적인 대외관계를 전개하였다.

 

그래서 백제는 541년에 양(梁)나라에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경의(涅槃經義)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고, 신라에 화해를 요청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백제는)가야연맹의 회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541년 4월과 544년 11월의 두 차례에 걸쳐

安羅(경남 함안), 加羅(경북 고령), 卒麻(경남 함양), 散半奚(합천군 초계면),

多羅(합천), 斯二岐(의령군 부림면), 子他(진주시), 久嗟(고성) 등

가야연맹 7~8개 소국의 旱岐 등이 백제 수도에 모였다.

 

제1차 사비회의에서 가야연맹의 사신단은 자신들의 독립 보장 및

신라의 공격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제 성왕은

안이한 자세로 가야연맹 제국을 부속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상호간의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잠복해 있는 상태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안라(함안), 가라(고령의 대가야). 졸마(함양), 산반해(합천초계), 다라(합천),

사이기(의령부림), 자타(진주), 구차(고성)의 대표들이 사비에 모였다.

 

1차 사비회의는 가야의 소국들의 대표들이 사비에서

성왕과 안면을 텃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다.

 

 

- 2차 사비회의 (544) ; 

  가야의 독립성이 유지되는 정책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백제

 

 

3년 후에 열린 제2차 사비회의에서 백제 성왕은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1) 가야연맹 및 왜의 협조 아래 가야의 변경에 6성을 축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신라의 久禮山 5성을 쳐서 회복하고,

 

(2) 안라 중심의 독자 세력 추진 집단을 무력화시키며,

 

(3) 임나의 下韓에 파견된 백제의 郡令과 城主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성왕이 제시한 것은 가야 영토에 대한 점진적 침탈 정책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야를 위한 양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야연맹 집사들은 그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백제는 545년부터 3년에 걸쳐 문물 증여를 통해서 가야연맹의 마음을 달래고

왜국에 대해서도 백제 문물의 우수성을 입증시킴으로써,

그 대가로 기존의 세 가지 계책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백제와 가야연맹 제국 및 왜로 이어지는 외교-교역망이 구축되어,

546년에 왜는 말 70필과 배 10척을 보내고,

548년에는 왜 병사를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가야의 소국들이 다시 사비에 모였다.

 

1차회의에서 친목을 다졌기 때문에 이제는 실제 현안이 다루어져야 했다.

 

사비회의에서 가야가 원한 것은 가야의 독립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라가 탁기탄, 탁순, 금관가야를 계속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이런 가야의 사정을 알고 있는 백제는 가야국들에게 백제휘하에 있으면서

가야의 독립을 유지시키는 3가지 정책방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사비회의에서 백제가 제시한 백제의 계책은

겉으로는 가야의 독립을 유지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백제의 군령과 성주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야국들이 원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 평양의 추군(群)과 국내성의 세군(細群)간의 내전이 발생한 고구려;

  말살되는 국내성의 세군 세력 (544)

 

 

일본서기 흠명 7년(544년):

이해에 고구려에서 대란이 일어났다.

 

싸우다가 죽은자가 2천명이 넘었다.

 

<백제본기> 에서 말하기를,

 

정월 병오일에 고구려에서 중부인(中夫人, 둘째 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가 8살이었다.

 

고구려왕에게는 부인이 3명 있었는데,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의 아들이 세자로, 그 외가는 추군(群)이었다.

 

소부인(셋째 부인)에게도 아들이 있었는데 그 외가는 세군(細群)이었다.

 

고구려 왕이 병들어 눕자 세군과 추군은 각각 자기네 왕자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으며, 그 결과 세군측에서 죽은 사람이 2천명이 넘었던 것이다.

 

 

고구려에서 평양과 국내성간의 내전이 발생하엿다.

 

평양의 추군세력은 국내성의 세군 세력에게 승리하는데

이 과정에서 국내성의 세군세력이 말살된다.

 

이로인해 고구려의 국방력이 약화되었다.

 

 

 

- 내전에서 승리하고 왕이 되는 평성(양원대제) (545)

 

 

고구려 양원왕 원년 (545)

양원왕(陽原王)<혹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평성(平成)이고 안원왕의 맏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기개가 크고 호탕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안원왕이 재위 3년에 태자로 세웠고, 15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 나제동맹의 위력; 독산성전투에서 고구려에게 승리하는 백제와 신라 (548)

 

 

신라 진흥왕 9년(서기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성왕 26년(서기 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북(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고구려에게 계속 패하던 백제가 독산성(충남예산)에서 승리한다.

 

이는 신라가 독산성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팽창은 한계에 다다랐고

고구려 단독의 힘으로는 나제연합을 이겨낼 수 없었다.

 

 

 

<독산성>

 

 

 

- 안라국의 요청으로 의해 독산성(마진성)을 침략한 고구려;

  고구려가 독산성 전투에서 패하자 백제에 종속되는 가야연맹

 

 

일본서기 흠명 9년

여름 4월 임술삭 갑자(3일)에 백제가 中部杆率掠葉禮 등을 보내 아뢰었다.

“德率宣文등이 신의 나라[臣蕃]에 이르러 칙명을 받들어 말하기를,

 

‘요청한 구원병은 때에 맞추어 보내주겠답니다’라고 하였으니,

 

삼가 은혜로운 조서를 받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그런데 馬津城전투

「정월 신축(9일)에 고구려[高麗]가 무리를 이끌고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하였다」

에서 한 포로가 일러 말하기를,

 ‘안라국(安羅國)과 야마토노 미코토모치[日本府]가 부르러 와서

(백제를) 벌주기를 권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을 상황에 비겨 볼 때, 참으로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그말을 조사하려고 세 번이나 부르러 보냈어도 매번 오지 않았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可畏天皇

「서쪽 이웃나라[西蕃]는 모두 야마토[日本]의 천황을 可畏天皇이라고 부른다」께서는 먼저 죄를 조사하십시오.

 

요청한 구원병은 잠시 머무르게 하고 신이 보내는 보고를 기다리십시오.”

(천황이)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아뢰는 말을 듣고 걱정하는 바를 접해 보건대,

야마토노 미코토모치 [日本府]와 안라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해주지 않았다니,

이는 짐도 걱정하고 있는 바이오.

 

또한 고구려[高麗]에 몰래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기 어렵소.

 

짐이 명해야 스스로 보낼 수 있을 것인데, 명하지 않았으니 어찌 할 수 있었겠소?

 

원컨대 왕은 옷깃을 풀고 허리띠를 끌러 편안히 마음을 안정시키고

깊이 의구치 마시오.

 

마땅히 임나와 함께 지난 번 조칙대로 힘을 다하여 북방의 적을 함께 막아

각자 봉해진 땅을 지키시오.

 

짐은 약간의 사람들을 보내 안라가 도망간 빈 곳을 채울 것이오."


 

 

(백제가 가야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안라국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고구려에게 백제 정벌을 요청했다.

 

그러나 獨山城, 즉 馬津城(충남 예산군 예산읍) 전투가

신라의 참전으로 인하여 고구려의 패배로 끝나면서,

고구려와 안라 사이의 밀통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안라의 상층부는 백제에게 대항할 계책이 궁해져 무력화되었다.

 

결국 백제의 설득과 문물 증여에 따라 그 뜻이 관철되면서

550년을 전후하여 가야연맹은 백제에게 종속적으로 연합되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가야를 계속 몰락시키는 신라에 대응하기 위해 백제에 기대를 걸었던 가야진영은

사비회의에서 백제에게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맺는다.

 

고구려는 가야와 동맹을 맺어 나제동맹에 대응하려 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안라의 요청으로 백제를 정벌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나당연합에게 패하고 안라와 고구려의 밀약은 백제에게 발각되었다.

 

가야를 도울 수 없는 고구려의 한계를 목격한 가야는 

백제를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가야는 평양성 전투와 관산성 전투에 백제의 일원으로 참가한다.

 

 

 

- 해체되는 안라왜신관(임나일본부) (550)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任那支配說 4種과 外交交易說 4種으로 나뉜다.

 

이제 왜의 임나 지배를 논하던 전형적인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을 상실하였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관련 사료의 분석에 의하여,

‘임나일본부’는 4~5세기에는 존속하지 않았고 6세기에만 존재했다고 본다.

 

게다가 그 6세기의 ‘임나일본부’ 문제도

이제 백제사와 가야사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볼 때,

‘임나일본부’는 6세기 당시의 용어도 아니고

그릇된 선입견을 불러일으키는 용어이기 때문에,

보다 사실에 가까운 安羅倭臣館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안라왜신관은 540년대에 가야연맹이

신라와 백제의 복속 압력을 받고 있던 시기에,

가야연맹의 제2인자였던 안라국이 자신의 王廷에 왜계 관료를 영입하여

왜국과의 대외관계를 주도함으로써,

안라를 중심으로 한 연맹 체제를 도모하기 위해 운영하였던

외무관서와 같은 성격의 기구였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하여,

이 기구는 상호간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해가고 있던 백제와

왜 왕권의 불신임 속에 해체되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 -任那問題를 包含하여)

 

 

 

안라국이 가야 독자 노선을 추구하기 위하여

540년대에 왜계 관료를 영입하여 설치한 기구인 안라왜신관(임나일본부)은

마진성 전투에서 백제가 승리함으로써 550년을 전후하여 해체된다.

 

 

 

- 남조 양나라의 몰락 (549)

 

성왕 27년(서기 549)

겨울 10월,

임금이 양나라 도읍에 반란이 일어난 것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궁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 대궐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 양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잡아 가두었다.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 고구려의 금현성과 도살성을 빼앗은 백제 (550.1)


성왕 28년(서기 550)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독산성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백제는

중부 내륙의 가장 중요한 성인 금현성과 도살성을 빼앗는다.

 

그러자 금현성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 군이 남하하여 금현성을 포위한다.

 

 

 

금현성을 함락시키는 고구려 (550.3)

 

신라 진흥왕 11년(서기 550)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남하한 고구려군은 백제에게 뺏긴 금현성을 되찾는다.

 

 

 

-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는 신라 (550.3)

 

 

신라 진흥왕 11년(서기 550)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는 북진하여 도살성을 빼앗고 다시 북진하여 금현성까지 차지한다.

 

이사부는 두성에 병사 1천명을 주둔시킨다.

 

 

 

<도살성과 금현성>

 

 

 

- 청주, 충주, 진천, 증평, 괴산, 음성을 장악한 신라;

   낭성(청주)을 순수하는 진흥왕 (551.3)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떠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고,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만들게 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금현성과 도살성을 장악한 신라는 낭성(청주)과 국원(충주)를 장악하였다.

 

신라는 가야의 백성들을 충주일대로 이주시킨다.

 

진흥왕은 낭성을 순수하면서 가야금 연주를 듣기 위해

국원(충주)으로 사민된 가야 출신의 우륵을 호출한다.

 

 

 

- 혼란스러운 고구려 정치상황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진흥왕 12년(서기 551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때 혜량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만나게 되니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

 

이에 거칠부가 같이 수레에 타고 돌아와서 왕에게 배알시켰다.

 

왕이 그를 승통(僧統, 승려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회(八關法會)를 열었다.

 

 

 

551년에 고구려의 정치상황이 혼란스러워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신라로 망명한다.

 

 

 

- 신성을 공격하는 돌궐; 약해진 고구려 남부 전선 (551.9)

 

 

양원왕 7년(551)

가을 9월에 돌궐(突厥)이 신성으로 와서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왕은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신성으로 돌궐이 쳐들어왔다.

 

고구려는 돌궐의 침략을 막아낸다.

 

 

 

 

- 남평양으로 진군한 백제군 (551.10)

 

 

일본서기 흠명 14년
 

겨울 10월 庚寅 초하루 己酉 百濟의 왕자 餘昌[明王의 아들 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高麗國을 향했는데,

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餘昌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중략)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百濟는 高麗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高麗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百濟軍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高麗王을 東聖山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돌궐의 침략으로 고구려가 정신없을 동안 백제는 북진을 개시한다.

 

남쪽의 고구려 방어선을 뚫은 백제는 평양까지 진군한다.

 

일본서기에서는 평양성 전투가 묘사되어 있다.

 

 

 

- 남평양성을 무너뜨리는 백제 (551)

 

일본서기 흠명 23년 8월

천황이 대장군 大伴連狹手彦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狹手彦은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뜨렸다.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狹手彦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 七織帳, 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

[옛 책에 “鐵屋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七織帳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2벌, 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

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 五色幡 2竿, 미녀 媛[媛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吾田子를 蘇我稻目宿? 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輕의 曲殿에 살게 했다

[鐵屋은 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을 比津留都에서 쫓아내었다”고 한다].

 

 

 

남평양이 백제에 의해 함락당한다.

 

 

 

- 평양을 격파하고 옛 땅 6군을 회복하는 백제 (551)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진흥왕 12년(서기 551) 신미에 (...)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  

 

 

일본서기 흠명 12년 (551)

이 해 백제 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두 나라는 新羅와 任那를 말한다) 高麗를 정벌하여 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남평양이 함락되었으므로 백제는 옛 땅 6군을 회복하게 된다.

(백제가 함락시킨 평양을 남평양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 백제가 남평양으로 향하자 고현(철령)으로 진군하는 신라 (551)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진흥왕 12년(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남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백제가 남평양으로 진격하자

신라는 고현(지금의 철령)으로 진군하여 10군을 차지한다.

 

 

<고현과 남평양>

 

 

- 격파된 안학궁 대신 장안성을 쌓는 고구려 (552)

 

 

양원왕 8년(서기 552)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이듬해 기원 551년에 돌궐족(突厥族)이 지금의 몽고로부터 동침(東侵)해 와서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岩城)을 공격하므로,

양원왕이 군사를 나누어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는 동안

백제의 달솔 부여달기가 정병 1만으로 평양을 급습하여 점령하니,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을 신축하고 서울을 옮겼다. (조선상고사 / 신채호)

 

 

고구려는 남평양에 장안성을을 쌓는다.

 

 

 

- 신라와 동맹을 맺는 고구려 (552)

 

 

일본서기 흠명 13년(552)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라, 안라가 中部德率 木今敦,

가후치베노 아시히타[河內部阿斯比多] 등을 보내 아뢰었다.

“고구려[高麗]와 신라가 친교를 통하고 힘을 합쳐서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망시키고자 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하여 먼저 불의에 공격할까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조칙대로 따르겠습니다.”

 

 

일본서기 흠명 14년(553)

 

8월 신유삭 정유(7일)에 백제가 上部奈率시나노 시라키[科野新羅],

下部固德汶休帶山등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였다.

“…… 올해 문득 들으니, 신라와 貊國이 다음과 같이 계책을 통하였다고 합니다.

 

‘백제와 임나가 자주 야마토[日本]에 가고 있소.

 

생각건대 이는 군병을 빌어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 아닌가 하오.

 

일이 만약 그렇다면 나라의 패망이 발돋움하고 기다리는 격이오.

 

그러니 바라건대 야마토[日本]의 군병이 아직 발동하지 않았을 사이에

먼저 안라를 쳐서 빼앗아 야마토 길[日本路]을 끊어야 하오.’

 

그들의 책략이 이와 같습니다.

 

臣등은 이를 듣고 위태로움을 깊이 느꼈습니다.”

 

 

 

삼국유사 진흥왕조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가 동맹을 맺는다.

 

 

 

 

- 신주를 설치하는 신라 (553.7)

 

 

성왕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신주를 설치하자 백제는 보급로를 차단당한다.

 

보급로를 차단당하고 우봉과 북한산성에 고립된 백제는 후퇴를 선택하여야 한다.

 

 

 

 

- 신라가 신주를 설치하자 전멸의 위기에 빠진 3만의 백제군;

  남평양(옛땅 6군)과 한성(한강일대)을 버리고 사비로 돌아가는 백제 (553)

 

 

일본서기 흠명 13년 (553)

이 해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우두방)·尼彌方(니미방)이다.

 

 

성왕 31년(서기 553)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일본서기 흠명 15년

얼마 후 苦都가 明王(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백제는 한성과 평양을 버린다. 

 

그 이유는 백제 주력군이 우봉에 고립되고 보급로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간 것은 백제가 항복의식을 치루고

항복의 증명으로 딸을 바친 것이다.

 

 

 

<신주>

 

 

 

- 백제로 온 왜국 지원 부대 (554.6)

 

 

 

일본서기 흠명 15년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下部)의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에 있는 왜신(倭臣)들, 임나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들은

아룁니다. 

 

 

사라(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고구려)과 마음을 함께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 官家)를 명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유지신(有至臣)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사라(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보복전을 준비한다.

 

 

 

 

 

- 구타모라에 보루를 쌓고 신라의 진성(珍城)을 공격하는 백제 (554.7)

 

 

 

성왕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 

 

 

신라 진흥왕 15년(서기 554)

 

백제 왕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일본서기 흠명 15년

 

여창이 신라정벌을 계획하자  기로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사옵니다.”라고 간하였다.

 

그러자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을 낼 것이 있겠소? ”

 

라고 하고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성왕은 구타모라에 보루를 쌓고 신라와의 전투를 시작한다.

 

최초의 전투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인 탄현과 접하고 있는

진례성(충남금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 진성(珍城)을 함락시키는 백제 (554.9)

 

 

 

삼국유사 진흥왕조 (554)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백제는 진성(충남금산 추정)에서 3만9천의 백성과 말을 빼앗아 가는 대승을 거둔다.

 

관산성 전투의 초반은 백제의 기세가 신라를 압도하고 있다.

 

 

 

<진성>

 

 

 

 

- 신라를 지원하는 고구려; 웅천성 전투에서 패하는 고구려 (554.10)

 

 

 

양원왕 10년(554)

겨울에 백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백제 위덕왕 원년(554)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해 왔으나

패하여 돌아갔다.

 

 

 

 

 

신라가 백제에 의해 위기에 빠지자

고구려는 신라를 지원하기 위해 웅천성을 공격한다.

 

신라는 웅천성 전투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번다.

 

 

 

- 관산성을 공격하는 부여창, 신라군을 지휘하는 김무력 

 

 

 

신라 진흥왕 15년(서기 554)

백제 왕 명농이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웅진에서 고구려에게 승리한 백제는 관산성으로 향한다.

관산성 전투는 김무력이 지휘한 것으로 생각된다.

 

 

 

 

- 관산성 전투의 주력 부대는 가야의 병력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554년 6월에 왜군 1,000명을 받아 12월 9일에 函山城,

즉 관산성을 공격하였고, 竹斯島의 왜군을 더 보내 임나를 도와주기를 바라며,

백제는 군사 10,000명을 보내 임나를 돕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전사한 29,600명 중에 18,600명 이상이 임나,

즉 가야의 군대이니, 관산성 전투의 주력부대가 가야군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백제는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대부분을 가야인으로 구성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는 백제의 말대로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후고(後顧)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백제군을 더 투입하지 못하고 왜 군의 증원을 계속해서 요청했던 듯하다.

(5~6세기 高句麗와 加耶의 관계 / 김태식)

 

 

 

 

관산성 전투에 참여한 백제 부대의 수는 1만명이며 왜군의 숫자는 1천명이다.

 

따라서 18.600명 이상이 가야의 병력이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의 주요병력은 가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 관산성을 함락시키는 백제 (554.12)

 

 

일본서기 흠명 15년

 

겨울 12월 백제가 하부(下部)의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東方)의 령(領)인 물부(物部) 막기무련(莫奇武連)을 보내

자(自)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병사 죽사(竹) 물부(勿部)  막기위사기(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신라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고구려)이 사라(斯羅)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에 있는 군사를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신이 따로 군사 만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

 

단지 좋은 비단 2필, 탑등 1령(領) 도끼 300구(口) 

사로잡은 성(城)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송구하옵니다"라고 아뢰었다.

 

 

 

부여창의 백제군은 12월에 관산성을 함락시킨다.

 

 

 

<관산성>

 

 

 

 

- 관산성 함락을 치하하기 위해 여창의 진영으로 향하는 성왕

 

 

일본서기 흠명 14년 (554)

그 아버지 明王은 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태자 여창이 웅진의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이어서 관산성을 함락시키자

태자를 위로하기 위해 성왕이 관산성으로 향한다.

 

 

 

 

 

- 보병과 기병 50명으로 구천(구진벼루)에 들어선 성왕 

 

 

 

성왕 32년(서기 554)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태자 여창을 치하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50명으로 관산성으로 가던 성왕은

구천(구진벼루)로 들어선다.

 

<구천(구진벼루)>

 

 

 

 

- 구천(구진벼루)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참수당하는 성왕

 

 

일본서기 흠명 15년 (554)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충북 보은)의 飼馬奴(사마노, 말을 관리하는 노비)

고도(苦都)에게

 

“고도는 천한 노비이고 명왕(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성왕은 구진벼루에서 신라 복병에게 기습당하고

삼년산군의 신라장수 고도에게 참수당한다.

 

 

 

 

- 성왕을 참수하자 관산성을 기습 공격하는 신라의 김무력;

  전멸하는 3만의 백제군

 

 

 

신라 진흥왕 15년(서기 554)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성왕을 참수하자 삼년산군의 군사들이 관산성을 급습한다.

 

이 공격으로 백제군 3만이 전멸한다.

 

(관산성의 지형을 볼 때, 

그리고 관산성이 함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군이 백제군을 전멸시키는 것을 볼 때,

신라군은 백제군을 의도적으로 관산성으로 유인하였으며

관산성을 포위하여 백제군을 전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성왕은 백제가 신라를 패배시켰으며 

따라서 신라군이 관산성에서 물러난 것으로 판단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실상은 신라군이 관산성을 애워싸고 있던 상황으로 보인다.)

 

 

 

 

 

- 관산성의 신라 포위망을 탈출하는 여창

 


일본서기 흠명 15년 (554)

여창(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은 관산성의 신라 포위망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진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