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德 18년 丙申(576)년에 열제께서 대장 <온달>을 거느리고 가서

갈석산과 배찰산을 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北周를 크게 깨뜨리셨다.

이로서 유림진 동쪽 땅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의 산서 경계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隋書 양제 본기>

 

 

개황 원년(581년)

 

2월 갑자일,

(황)상이 상부(相府){양견은 國相이었음}로부터 평상복을 입고 궁에 들어와,

예복을 갖추고 임광전(臨光殿)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남쪽교외에 단을 설치하고 사신을 보내 섶을 태워 제를 지내며 하늘에 알렸다.

{수나라 건국}

 

3월 임오일,백랑국(白狼國)이 방물을 바쳤다.

 

가을 7월 경오일,말갈 추장이 방물을 바쳤다.

 

8월 임오일,돌궐 <아파阿波>가한(可汗)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갑오일,행군원수 악안공(樂安公) <원해元諧>를 보내,

토욕혼을 청해에서 쳐서 깨뜨리니 항복하였다.

 

9월 임신일,돌궐의 <사발략沙鉢略>가한(可汗)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을유일,백제왕 <부여창扶餘昌>이 사신을 보내 와서 축하하므로,

<부여창>에게 상개부(上開府)、의동삼사(儀同三司)、대방군공(帶方郡公)을 주었다.

 

12월 임인일,고려왕 <고양高陽>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

 

 

- 고구려의 조공에 대하여

 

1) 백제가 사신을 보내‘축하’했다고 하는데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조공’했다는 기록,

 

2) 수서에 바로 앞선 많은 사서들이

‘배(拜)’나 ‘삼았다’, ‘호칭하였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 고려전에도 배(拜)’로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수서 고조 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조만

‘주었다(受)’는 격이 낮은 표현으로 기록 된 점,

 

3)「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에 왕의 호칭이 빠져있는 기록.

 

 

이러한 기록은 무엇을 말하는가?

 

수서가 바로 당 태종 때 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당태종이 수서에 손을 댔다는 말이다.

 

1) 백제가 사신을 보내‘축하’했으면

고구려도 사신을 보내‘축하’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고,

 

2) 수서에도 고구려 임금에게 최소한 배(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며,

 

3)「대장군、요동군공 고구려왕(또는 요동왕)을 배(拜)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당 태종이 ‘축하’를 ‘조공’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고,

‘배(拜)’를 ‘수(受)’로 바꾼 것이며,

「대장군、요동군공 배(拜)하였다.」에서

‘고구려왕(또는 요동왕)’을 빼버린 것임에 틀림없다.

 

왜 그랬을까?

 

당 태종이 고구려를 힘으로 공격하기 앞서 말로서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싸울 때 말로 먼저 제압하면 힘으로 제압하기 훨씬 쉬운 이치와 같다.

 

또한 수양제가 고구려를 300만 대군으로 공격하였지만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멀리있는 타국에 괜히 가서 싸웠기 때문이라는 백성과 병사들의 원망 때문이다.

 

그래야 고구려 원정에서 이길수 있다는 음흉한 흉계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같이 엉뚱한 음흉한 흉계의 결과로

우리역사 기록의 조작 변조 삭제라는 엉뚱한 파편이 튄 것이다.

 

사서 조작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꾸며낸 흉계가 낳은 파편이라는 것이다.

 

 

 

개황 2년(582년)

 

봄 정월 신미일,고려、백제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11월 병오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개황 3년(583년)

 

봄 정월 계해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여름 4월 신미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갑오일,돌궐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5월 계묘일,행군총관 <이황李晃>이 돌궐을 마나도구(摩那渡口)에서 깨뜨렸다.

 

갑진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정미일,말갈이 방물을 바쳤다.

 

임술일,행군원수 <두영정竇榮定>이 돌궐과 토욕혼을 양주(涼州)에서 깨뜨렸다.

 

6월 무인일,돌궐이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를 청하였다

 

8월 정축일,말갈이 방물을 바쳤다.

 

 

 

개황 4년(584년)

 

2월 정미일,말갈이 방물을 바쳤다.

 

돌궐 소니부(蘇尼部) 남녀 만여 명이 투항하였다.

 

경술일,(황제가) 농주(隴州)로 행차하였다.

 

돌궐 가한 아사나점(阿史那玷)이 그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여름 4월 정미일,돌궐、고려、토욕혼 사자에게 대흥전(大興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584년 4월에 수나라는

돌궐、고려、토욕혼 사자에게 대흥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달래고 있는데

이것은 돌궐 고구려 토욕혼이 수나라에게 가장 위험하고도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동쪽에 있는 강국이고, 토욕혼은 서쪽에 있는 강국이며,

남쪽에는 진나라가 있었지만 별 볼일 없는 약체국가이기 때문에 초청을 안 한 것이고

돌궐은 수나라 북쪽에 있는 강국이기 때문에 연회를 열어 달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도 고구려의 그 당시 당당한 위상을 알 수 있다.

 

 

5월 계유일,

거란군주 <막하불莫賀弗>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여,대장군을 부여하였다.

 

9월 경오일,거란이 내부(內附)하였다.

 

 

584년 5월에 거란 군주 <막하불이> 수나라에 항복을 청했다는 기사나

9월 거란이 내부하였다는 기사는

수서 고려전 개황 17년(597년) 기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거기를 보면 수문제가 고구려 영양대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름지기 짐과 함께 덕을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견고하게 가두었소.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에게 신첩 노릇을 하는 게(무엇이 나쁘다고 그처럼)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여 어찌 해치는 뜻이 (그렇게)심하오?“

 

거란이나 말갈이 수나라에게 복종하였는데

고구려가 그들을 다시 고구려 지배 아래로 두었기 때문에

수문제가 이런 말을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기사는 고구려가 중국의 동쪽에서 절대적인 지배자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개황 5년(585년)

 

여름 4월 갑오일,거란 군주 <다미多彌>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5월 갑신일,상대장군 <원계元契>를 돌궐 <아파> 가한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가을 7월 임오일,돌궐 <사발략沙鉢略>이 표문을 올려 신(臣)이라고 칭하였다

 

8월 병술일,<사발략> 가한이 아들 <고합진특근庫合特勤>을 보내 내조하였다.

 

 

 

개황 6년(586년)

 

봄 정월 갑자일,<당항강党項羌>이 내부하였다.

 

경오일,돌궐에 역볍을 반포하였다.

 

 

 

개황 7년(587년)

여름4월 경술일,돌궐 <사발략> 가한이 죽어,

그 아들 <옹우려雍虞閭>가 이어 즉위하니,이가 바로 <도람都藍> 가한이다.

 

 

 

 

개황 8년(588년)

 

겨울10월 기해일,태백(성)이 서쪽 방향으로 나왔다.

 

기미일,회남(淮南) 행대성(行臺省)을 수춘(壽春)에 설치하고,

진왕(晉王) <양광楊廣>을 상서령으로 삼았다.

 

신유일,진(陳)나라가 겸 산기상시 <왕완王琬>과

겸 통직 산기상시 <허선심許善心>을 보내 내빙하였으나 구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갑자일,장차 진(陳)나라를 정벌하려고,태묘에 제를 지냈다.

 

진왕(晉王) <양광>、진왕(秦王) <양준俊>、청하공(河公) <양소楊素>

모두 행군원수로 삼아,진(陳)나라 정벌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진왕(晉王) <양광>은 육합에서 출발하고,

진왕(秦王) <양준>은 양양에서 출발하고,

청하공 <양소>는 신주에서 출발하고,

형주자사 <유인은劉仁恩>은 강릉에서출발하고,

의양공 <왕세적王世積>은 기춘에서 출발하고,

신의공 <한금호韓擒虎>는 여강에서 출발하고,

양읍공 <하약필賀若弼>은 오주에서 출발하고,

낙총공 <연영燕榮>은 동해에서 출발하여,

합이 총관 90명이고,병사가 51만 8천인데,모두 진왕의 통제(절도:節度)을 받았다.

 

동으로는 창해에 접하고,서로는 파、촉을 막아,

각종 깃발(육군)과 각종 배(수군)이,가로로 걸쳐진 것이 수천 리였다.

 

진(陳)나라에 특별사면령을 내렸다. 또 별이 견우(별자리)에서 어두워졌다.

 

 

 

개황 9년(589년)

 

봄 정월 기사일(5일),흰 무지개가 해에 꼈다.

 

신미일(7일),<하약필>이 진(陳)나라 경구를 쳐서 빼앗고,

<한금호>가 진(陳)나라 남예주를 쳐서 빼앗었다.

 

계유일(9일),상서우복양 <우경칙虞慶則>을 우위대장군으로 삼았다.

 

병자일(22일),<하약필>이 진(陳)나라 군대를 장산에서 무너뜨리고,

그 장수 <소마가蕭摩訶>를 포획하였다.

 

<한금호>는 군사를 진격시켜 건업(진나라 서울)에 들어가,

그 장수 <임만노任蠻奴>를 잡고,진(陳)나라 군주 <진숙보陣叔寶>를 포획하였다.

 

진(陳)나라를 평정하여,주(州)30,군(郡) 1백,현(縣) 4백을 합하였다.

 

계사일(29일),

사신을 보내 절을 가지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민심을 달래고 위로하였다.

 

 

 

 

개황 10년(590년)

 

가을7월 신해일,고려 요동군공 <고양>이 죽었다.

 

임자일,토욕혼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11월 병오일,거란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개황 11년(591년)

 

봄정월 신축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무오일,토욕혼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기묘일,돌궐이 사신을 보내 칠보 주발을 바쳤다.

 

3월 임오일,통사사인 <약간흡若干洽>을 토욕혼에 사신으로 보냈다.

 

여름 4월 무오일,돌궐 <옹우려> 가한이 <고합진특근>을 보내 내조하였다.

 

5월 갑자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12월 병진일,말갈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개황 12년(592년)

 

12월 계유일,돌궐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기유일,토욕혼、말갈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개황 13년(593년)

 

봄 정월 병오일,거란、해、습、실위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무신일,말갈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개황 15년(595년)

 

5월 계유일,토욕혼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월 을미일,임읍(林邑)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개황 17년(597년)

 

5월 기사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무술일,돌궐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11월 정해일,돌궐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영양무원호태열제 弘武 9년(598년)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帝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登州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죽였다"고 하였다.

 

..중략..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총관 위충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위충}를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 양견은 또 양양, 왕세적 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 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후>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 척을 징집시켜

동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다 몰사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세계 최대의 麗隋전쟁>

 

 

개황 18년(598년)

 

2월 을사일,한왕(漢王) <양량楊諒>을 행군원수로 삼아,

수륙 30만으로 고려를 정벌하였다.

 

6월 병인일,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高元>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

 

9월 기축일,한왕 <양량> 군대가 전염병을 만나 되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10에 8, 9였다.

 

 

고구려가 584년4월 이후 계속해서 수나라와 관계를 끊고 있는 가운데

589년 1월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킨다.

 

그 소식을 듣고 590년 고구려 평원대제는 수의 침공에 대비한다.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쌓아서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삼국사기 평원왕 32년 조) 」

 

그리고 평원대제가 죽고 영양대제가 즉위하여

이듬해인 591년 1월 외교 및 교역 사절을 재개한다.

 

명백한 정탐사절이다.

 

수나라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 직접 보고자 한 것이다.

 

개황17년(597년)

수문제가 고구려 영양대제에게 협박조의 글을 보내자(근거: 수서 고려전)

고구려는 597년 5월 또 외교 및 교역 사절을 보낸다.

 

다시한번 수나라의 움직임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과연 수나라는 그다음 해인 개황 18년(598년) 2월에

한왕 <양량>을 행군원수로 삼아,수륙 30만으로 고구려를 침략하고 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한왕 양량、왕세적 모두 행군원수로,

주라후를 수군총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해 9월 한왕 양량 군대가 되돌아왔는데,죽은 자가 10에 8, 9였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주라후의 수군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대부분 표류하여 침몰하였다고 한다)

 

거의 몰살을 당한 것이었다.

 

몰살당한 원인에 대하여 수서 본기는 전염병이라고 하고,

수서 고려전에서는 군량의 부족과 전염병이라고 하며

자치통감에서는 식량부족과 전염병, 바람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하게 몰살당한 경과를 기술한 것을 보자.

 

수서 고려전과 자치통감에 의하면,

598년 6월 병인일(27일) 수나라의 국경인 임유관을 나가서부터,

식량부족에다가 전염병마저 만나서 군대가 사기를 떨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 상태로 천리가량을 행군하여 요수에 이르자 영양왕이 두려워해서 사죄하였고,

그래서 수문제는 군대를 철수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가을 9월 기축일(21일) 군대가 돌아왔는데 열에 여덟 아홉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가?

 

자치통감에 의하면,수나라의 국경인 임유관을 나간 때가 6월 병인일(27일)이고

돌아온 때가 9월 기축일(21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굶주림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군대가 3개월을 행군할 수 있는가?

 

사람은 3~4일 굶으면 죽기 시작해서

일주일이면 보통 죽고 3주면 거의 100% 죽는다고 한다.

 

더구나 전쟁하러 가는 병사는 무거운 무기와 갑옷 등으로 무장하고 있고

먼 거리를 걷고 병에 시달리는 판에 굶주린 병든 병사가 며칠이나 견딜 수 있을까?

 

굶주리고 병든 군사가 적어도 한 달 반 이상을 걸어갔는데

‘요수에 이르자 영양왕이 두려워’했다는 말은 무슨 말이며,

사죄 한마디 했다고 30만 대군을 철군시켰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굶주리고 병든 군사가 한달 반 이상을 걸어갔으면 무기를 잡기는 커녕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을텐데 그런 죽기 직전의 군사를 보고

고구려 영양대제가 두려워했다니

쓰러지기 직전의 환자를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대규모로 죽어 나자빠진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사죄했다고 하니,

세상에 그런 일도 있는가!

 

또한 그런 초죽음의 군대가 다시 한 달 반을 걸어서 돌아왔다니, 그게 가능한가!

 

소설을 써도 분수가 있고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는 법이다.

 

이런 것을 써놓고 정사(正史)라고 뻔뻔스럽게 말할 수 있는가!

 

고구려가 사죄해서 군대를 철수시킨 게 아니라

고구려에게 괴멸적 타격을 받아 비참한 패주를 한 것이고,

30만 대군이 식량부족과 일부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겁도 없이 몰려갔다가

고구려에게 괴멸적 타격을 받아 몰살당한 것이 아닌가!

 

강력한 고구려 군대에게 몰살을 당하고도

그 비참한 패배를 감추려고 구차한 말장난을 하다보니

사서(史書)가 소설이 되고 정사(正史)가 웃기는 코메디가 되고 말았다.

 

이런 것을 춘추필법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해도 너무했다.

 

 

 

개황 19년(599년)

 

여름4월 정유일,돌궐의 <이利> 가한이 내부하였다.

 

<달두達頭> 가한이 변경을 침범하여,행군총관 <사만세史萬歲>를 보내 격파하였다.

 

겨울 10월 갑오일,돌궐의 <이利> 가한을 <계인人> 가한으로 삼아,

대리성(大利城)을 건축하고 그 부락을 거처하게(살게) 하였다.

 

12월 을미일,돌궐의 <도람> 가한이 부하에게 살해 되었다.

 

 

 

 

개황 20년(600년)

 

봄 정월 신유일 초하루,돌궐、고려、거란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 임술일,돌궐이 변경을 침범하여,

진왕 <양광>을 행군원수로 삼아,격파하였다.

 

겨울 10월 을축일,

황태자 <양용楊勇>과 여러 아들 모두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11월 무자일,진왕 <양광>을 황태자로 삼았다.

 

 

 

 

인수 원년(601년)

 

봄 정월 을유일 초하루,대사면령을 내리고,연호를 바꾸었다.

 

정유일,돌궐이 항안(恒安)을 침구하여,

주국(柱國) <한홍韓洪>을 보내 쳤으나,관군이 패전하였다.

 

5월 기축일,돌궐 남녀 9만 명이 투항하였다.

 

 

고구려는 598년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몰살한 다음

2년 후인 600년 1월, 외교 및 교역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고 있다.

 

또다시 수나라의 동정을 살펴본 것이다.

 

한편 고구려에게 수나라 30만 대군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동안 잠잠하던 돌궐이 600년 4월 수나라를 침략한다.

 

수나라가 별볼일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다시 601년 1월 돌궐이 수나라를 또 침략한다.

 

 

 

인수 4년(604년)

 

여름4월 을묘일,(황)상이 예측할 수 없었다.(병이 위중하였다)

 

가을 7월 갑진일,(황)상의 병이 심해져서,인수궁(仁壽宮)에 누워,

모든 관료와 작별인사를 하니 모두 악수하고 흐느끼며 한숨을 지었다.

 

정미일,(황상이) 대보전(大寶殿)에서 죽으니,그 때 연세 64세였다.

 

고조가 죽자,(황)상이 인수궁(仁壽宮)에서 황제로 즉위 하였다.

 

8월,시신을 받들어 서울로 돌아왔다.

 

병주(州)총관 한왕(漢王) <양량楊諒>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조서로 상서좌복야 <양소楊素>로 하여금 토벌케 하여 평정하였다.

 

9월 을사일,비신장군 <최팽崔彭>을 좌령군 대장군으로 삼았다.

 

12월 을축일,우무위장군 <내호아來護兒>를 우효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무진일,주국 <이경李景>을 우무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우위솔 <주라후周羅>를 우무후 대장군으로 삼았다.

 

 

 

 

대업 원년(605년)

 

봄 정월 정유일,상주국 <우문술宇文述>을 좌위 대장군으로,

상주국 <곽연郭衍>을 좌무위 대장군으로,

연수공 <우중문于仲文>을 우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 계해일,대장군 <유방劉方>이 임읍(林邑)을 쳐서 깨뜨렸다

 

 

604년,이전에 이미 황태자가 된 양광이 자기 아버지 수문제를 죽인다.

 

그런 다음 황제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수양제이다.

 

604년 7월에 제위에 오른 수양제는

그해 12월 우무위 장군 <내호아>를 우효위 대장군으로

주국 <이경>을 우무위 대장군으로 우위솔 <주라후>를 우무후 대장군으로 삼는다.

 

그 다음 해인 605년 1월

상주국 <우문술>을 좌위 대장군으로,상주국 <곽연>을 좌무위 대장군으로,

연수공 <우중문>을 우위대장군으로 삼는다.

 

여기에 나오는 <우문술>이 상주국임을 보면

<우문술>은 수나라의 최고위 장수임을 알 수 있다.

 

 

 

대업 3년(607년)

 

5월 정사일,돌궐 <계민民> 가한이 아들 <척특근拓特勤>을 보내 내조하였다.

 

병인일,<계민> 가한이 그 형의 아들 <비려가특근毗黎伽特勤>을 보내 내조하였다.

 

신미일,<계민> 가한이 사신을 보내 자기가 (수나라) 변경에 들어가니,

(자기가 탄) 수레를 영접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황)상이 불허하였다.

 

6월 정유일,<계민> 가한이 내조하였다.

 

기해일,토욕혼、고창 모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가을 7월 신해일,<계민> 가한이 표문을 올려 변복(變服)을 청하여,

의관과 각대를 갖춘 정복(正服)을 받았다.

 

조서로 <계민> 가한이 찬배할 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모든 후왕의 위에 있도록 명하였다.

 

갑인일,고을의 성 동쪽에 군왕의 커다란 천막을 세우고,

그 아래 의위(儀衞)를 구비하고,정기(旌旗)를세우며,

<계민> 가한과 그 부락 3천 5백 명에게 연회를 베풀고,

온갖 즐거운 음악을 연주하였다.

 

<계민> 가한과 그 부락(민)에게 각각 차등있게 물품을 주었다.

 

8월 을유일,<계민> 가한이 천막을 장식하고 길을 깨끗이 하며,

(황제의)수레를 맞이하였다.

 

황제가 그 장막에 행차하니,<계민> 가한이 술잔을 받들고 장수를 기원하며,

연회를 극히 정중하고 공손하게 베풀었다.

 

(황)상이 고려 사자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돌아가 너의 왕에게 말하라,당장 빨리 내조하여 알현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와 <계민> 가한이 그대들의 땅을 순시할 것이다.”

 

황후 역시 <의성義城>공주 장막에 행차하였다.

 

기축일,<계민> 가한이 그의 나라로 돌아갔다.

 

 

 

 

대업 4년(608년)

 

2월 기묘일,

사조알자(司朝謁者) <최의崔毅>를 돌궐 <처라處羅> 가한에게 사신으로 보내,

한혈마를 주었다.

 

3월 임술일,백제、왜、적토(赤土)、가라사국(迦羅舍國)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병인일,둔전주사(屯田主事) <상준常駿>을 적토에 사신으로 보내,

나찰(羅剎)을 주었다.

 

5월 임신일,촉군(蜀郡)이 삼족오를 포획하고,

장액(張掖)에서 검은 여우 각각 한 마리씩 포획하였다.

 

가을 7월 을미일,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이 토욕혼을 만두(曼頭)와 적수(赤水)에서 깨뜨렸다.

 

 

 

 

대업 5년(609년)

 

2월 신축일,적토국(赤土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 임인일,고창(高昌)、토욕혼、이오(伊吾) 모두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다.

 

을사일,차적도(次狄道),당항강(党項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5월 병술일,토욕혼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복원천(覆袁川)을 차지하고 지키니,

(황)제가 나누어 명령하기를 내사 <원수元壽>를 금산 남쪽에 주둔시키고,

병부상서 <단문진段文振>을 설산 북쪽에 주둔시키고,

태복경 <양의신楊義臣>을,비파협 동쪽에 주둔시키고,

장군 <장수張壽>를 니령 서쪽에 주둔시켜,사방을 포위하였다.

 

토욕혼의 군주 <복윤伏允>이 수십기(騎)로 달아나며,

그 왕의 거짓 이름 <복윤伏允>을 보내,거아진산을 차지하고 지켰다.

 

임진일,조서로 우둔위대장군 <장정화張定和>로 하여금 가서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장정화>가 앞장서서 나가 맞서 싸움을 걸었으나,적에게 살해되었다.

 

아장 <유무건柳武建>이 격파하고,목을 수백급 베었다.

 

갑오일,그 선두왕(仙頭王)이 포위되어 어려움을 겪으며 들어앉아있게 되자,

남녀 10여만 명을 인솔하고 투항하였다.

 

6월 정유일,좌광록대부 <양묵>、우익위장군 <이경> 등을 보내

토욕혼의 군주를 추격하니,모두 적의 시체를 만났다.

 

계묘일,대두발곡을 지나니,산길이 좁고 험해,한 사람씩 줄지어 나아갔다.

 

바람불고 싸락눈이 내리며 어두컴컴하여,따르던 관리들이 서로 잃어버리고,

사졸 중에서 얼어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임자일,고창왕 <국백아>가 내조하고,

이오 <토둔설> 등이 서역 수천 리의 땅을 바치니, (황)상이 크게 기뻐하였다.

 

계축일,서해、하원、선선、차말 등 4군을 설치하였다.

 

병진일,(황)상이 스스로 풍행전을 살펴,문물을 성대히 진열하고,

구부악을 연주하며,어룡을 줄줄이 이어지게 설치하고,

고창왕과 (이오)토둔설을 전각 위에 오르게 하여 연회를 베푸니,

그 사람함은 남 다른 것이었다.

 

그 만이(蠻夷) 배열자가 30여국이었다.

 

 

607년 6월부터 돌궐의 <계민> 가한이 수나라에 내조하고 있다.

 

이는 돌궐이 수나라에 복종한다는 것을 뜻한다.

 

<계민> 가한이 수나라에 내조하고 있던 8월에

수양제가 <계민> 가한의 장막에 행차했는데

이때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 가한에게 와 있었고,

수양제가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 임금도 수나라에 내조하라고 협박한다.

 

이어서, 609년 5월부터 6월까지 토욕혼을 쳐서 정복하고

그 땅에 서해、하원、선선、차말 등 4군을 설치한다.

이로써 수나라는 고구려를 제외한 주위에 있는 강국을 모두 제압한 것이다.

 

즉, 남쪽의 진(陳)나라는 589년 1월에 멸하였고,

북쪽의 돌궐은 607년 8월에 복종시켰으며

서쪽의 토욕혼은 609년 6월에 그 나라를 정복하여

서해、하원、선선、차말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동쪽의 고구려만 끝까지 남아 수나라와 겨루고 있었다.

 

 

 

 

대업 6년(610년)

 

봄 정월 기축일,왜국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2월 을사일,무분랑 <장진릉>과 조청대부 <장진주>가 유구를 쳐서 깨뜨리고,

포로 만7천 명을 바치며,모든 관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6월 신묘일,실위、적토 모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임진일,안문의 도둑 우두머리 <위문통>이 무리 3천을 모아,

막벽곡을 차지하고 지켰다.

 

응양 <양백천>을 보내 격파하였다.

 

 

 

 

대업 7년(611년)

 

2월 경신일,백제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을해일,(황)상이 강도에서 어룡주로 통제거에 들어와,드디어 탁군에 행차하였다.

 

임오일,(황상이) 일러 말하기를:

 

“무(武)에는 일곱 가지 덕이 있는데,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고,

정(政)에는 여섯 가지 근본이 있는데,

이것으로 의를 가르침으로써 흥기 시키는 것이다.

 

고려의 <고원>은 번국으로써의 예의를 어그려뜨렸기에,

장차 요좌(遼左)에서 죄를 물어 무력을 널리 펴고자 한다.

 

비록 다른 나라를 정벌하는 것이기는 하지만,인하여 사방을 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이제 탁군에 가서,백성의 풍속을 순무할 것이다.

 

그 하북 여러 군과 산서 산동의 연령 90 이상 자는,

태수의 명부를 주고,80 이상자는 현령을 준다.”

 

12월 기미일,서쪽 돌궐 <처라다리處羅多利> 가한이 내조하였다.

 

(황)상이 크게 기뻐하여,특별한 예로 대접하였다.

 

그때 요동 전투병사와 운송자가 길에서 숨이 막혀,밤낮 끊이지 아니하였고,

고역자가 처음 떼강도가 되었다.

 

갑자일,내도위、응양과 군현의 재상들이 추격하여 체포함을 알리고,

따라가 포획하여 목을 베기로 결정을 하였다.

 

 

611년 2월

수양제는 마침내 양자강에서 탁군(지금의 북경 남쪽)까지 대운하를 완성하여

물자수송을 원활하게 한 다음, 고구려를 치겠다는 흉계를 발표하고 있다.

 

이해 12월, 벌써 고구려 원정군을 미리 보냈는데

이때 처음 이들이 고역에 못 이겨 떼강도가 되고 있다.

 

 

 

대업 8년(612년)

 

봄 정월 신사일,대군(大軍)이 탁군(涿郡)에 집결하였다.

 

병부상서 <단문진段文振>을 좌후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임오일,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천지의 큰 덕으로도 가을철에 무서리를 내리며,

성철(聖哲)의 지극한 어짊으로도 형전(刑典)에 갑병(甲兵)을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조화옹(造化翁)이 가을철에 초목을 말라죽게 하는 것에서

그 의리가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알겠으며,

제왕이 창과 방패를 써서 정벌하는 것은 대개 부득이해서 쓰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판천(阪泉)과 단포(丹浦)의 정벌은 모두가 공손하게 천벌(天罰)을 행한 것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빼앗고 혼란한 자를 뒤엎은 것은

모두가 천지의 법도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더구나 감야(甘野)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하여

하(夏)나라가 대우(大禹)의 왕업을 열었고,

상교(商郊)에서 문죄하여 주(周)나라가 문왕(文王)의 뜻을 발현한 경우이겠는가.

 

영원한 감계(鑑戒)가 전 시대에 있어서 이제 짐의 몸에 바로 당하였다.

 

우리 수나라는 하늘의 명에 크게 응해서 삼재(三才)를 겸하여 법도를 세우고,

육합(六合)을 통일하여 한집안으로 만들었다.

 

이에 강역(疆域)이 미친 바는 세류(細柳)와 반도(盤桃)의 바깥이고,

성교(聲敎)가 미친 바는 자설(紫舌)과 황지(黃枝)의 지역이다.

 

먼 곳에서는 덕을 사모해 귀부(歸附)하고

가까운 곳에서는 생업에 편안하여 화합하지 않는 나라가 없어,

공이 이루어지고 다스림이 안정됨이 이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저 고구려의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치 못하여

발해(渤海)갈석(碣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예수(穢)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나라와 위(魏)나라가 주륙(誅戮)하여 그들의 근거지가 잠시 위태로웠으나,

난리로 인해 끝까지 정벌하지 못하자 그 종족(種族)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에 지난 시대에 소굴로 모두 모여들어서 점차 번성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국 땅을 돌아보건대,

잘려 나가 오랑캐의 부류가 된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악이 여물어 가득 찼다.

 

그러나 하늘의 도는 음란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법이라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떳떳한 도를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림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며,

악을 숨기고 간사함을 품은 지가 날짜로는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다.

 

조서(詔書)를 보내 엄하게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망친 반도(叛徒)들을 꾀어 받아들임이 끝닿은 데를 모르고, 변방 지역에 가득 차서,

자주 봉후(烽候)를 번거롭게 올리게 하고,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여,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적에는 하늘의 법망에서 빠뜨려,

바로 앞에서 도망치는데도 주륙하는 것을 늦추어 주었고,

뒤늦게 복종하는 데 따른 주벌도 즉시 시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찍이 그 은혜를 생각지 않은 채 도리어 악함을 길렀다.

 

거란(契丹)의 무리들과 연합하여 바닷가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靺鞨)의 습관을 익혀 요서(遼西) 지방을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바깥에서까지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가에서 조차도 함께 정삭(正朔)을 받드는데,

드디어는 그들이 가지고 오는 보물을 다시 빼앗고 그들이 왕래하는 길을 막았다.

 

이에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함이 미치고, 정성을 바치는 자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수레를 탄 봉명(奉命)한 사신이 해동(海東)에 가고

정절(旌節)을 든 사신이 거기로 가려면

번국(藩國)의 경계를 지나가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황제를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의 도리이겠는가.

 

이런데도 참는다면 무엇을 참고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법령이 가혹하고 세금이 무거우며,

강포한 신하와 힘센 호족들이 모두 국정의 기틀을 틀어쥐고 있어

붕당끼리 결탁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고,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마치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같아서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억울함을 풀 수가 없다.

 

그런데다가 해마다 거듭된 재앙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그치지 않아 요역이 그칠 날이 없으며,

군량을 운반하느라 힘이 다하여 죽은 시체가 도랑과 구덩이를 메우고 있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우니 그 누가 따르겠는가.

 

온 나라 안이 슬프고 두려워하면서 그 폐해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에 머리를 돌려 중국을 바라보면서 제각기 목숨을 보전할 생각을 품고 있고,

노인과 어린아이들조차도 모두 혹독하다는 탄식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풍속을 살펴보며 유주(幽州)삭주(朔州)에 다다랐으니,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는 일은, 다시 군사를 일으킴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에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펴서,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고,

달아났던 무리를 쳐 죽여서 선대(先代)의 교훈을 이을 것이다.

 

지금 군율을 내려 출발하고 지휘를 나누어 길을 나아가되,

발해(渤海)를 엄습하여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扶餘)를 경유하여 번개처럼 쓸어버리라.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서 군사들에게 경계한 뒤에 출발하고,

거듭거듭 알리고 타일러서 필승을 기한 뒤에 싸우라.

 

좌군(左軍) 제1군은 누방도(鏤方道)로 나아가고,

제2군은 장잠도(長岑道)로 나아가고,

제3군은 해명도(海溟道)로 나아가고,

제4군은 개마도(蓋馬道)로 나아가고,

제5군은 건안도(建安道)로 나아가고,

제6군은 남소도(南蘇道)로나아가고,

제7군은 요동도(遼東道)로 나아가고,

제8군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아가고,

제9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아가고,

제10군은조선도(朝鮮道)로 나아가고,

제11군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아가고,

제12군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아가라.

 

우군(右軍) 제1군은점선도(黏蟬道)로 나아가고,

제2군은 함자도(含資道)로 나아가고,

제3군은 혼미도(渾彌道)로 나아가고,

제4군은 임둔도(臨屯道)로 나아가고,

제5군은 후성도(候城道)로 나아가고,

제6군은 제해도(提奚道)로 나아가고,

제7군은 답돈도(踏頓道)로 나아가고,

제8군은 숙신도(肅愼道)로나아가고,

제9군은 갈석도(碣石道)로 나아가고,

제10군은 동이도(東暆道)로 나아가고,

제11군은 대방도(帶方道)로 나아가고,

제12군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아가라.

 

이상의 뭇 군사들은 먼저 묘당(廟堂)의 계략을 받들어서

잇달아 길을 나아가 모두 평양(平壤)으로 집결하라.

 

모든 군사들이 사나운 맹수와 같은 용맹을 가지고 있으며,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웅략(雄略)을 가지고 있다.

 

이에 힐끗 돌아보면 산악이 기울어 무너지고 한번 소리치면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니,

마음과 덕을 함께하는 바로, 용맹한 군사들이 여기에 있다.

 

짐이 몸소 말을 몰아 원융(元戎)이 되어 이들을 절제(節制)하면서

요수(遼水)를 건너서 동쪽으로 가,

바다의 오른쪽을 따라가서 먼 나라 사람들의 거꾸로 매달린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살아남은 백성들을 위해 질고(疾苦)를 물을 것이다.

 

그 외의 군사들은 양식을 싸 짊어지고

수레를 보충하여 기미에 따라 메아리처럼 호응하고,

갑옷을 말아 쥐고 말에게 재갈을 물려서 빠르게 진격해

적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나아가 칠 것이다.

 

또 큰 바다를 건너는 군사들은 천리에 이어진 전선(戰船)을 몰아

빠른 바람을 타고 번개처럼 내달리고,

커다란 전함이 구름처럼 날아가 패강(浿江)을 가로질러서

곧장 평양으로 나아갈 것이니,

도서 지역의 조망이 이에 끊어질 것이며, 어렵고 험한 길이 이에 궁해질 것이다.

 

그 나머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오랑캐 족속들이

시위를 당긴 채 쏘라는 명을 기다릴 것이며,

미(微), 노(盧), 팽(彭), 복(濮)의 군사들이 서로 모의하지 않고도 모두 모여들 것이다.

 

하늘의 이치에 따라서 역적들을 치니 군사들은 용기가 백배는 충만할 것이고,

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하니

형세가 썩은 나무를 부러뜨리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그러나 왕자(王者)의 군대는 그 의리가 살해하는 것을 종식시키는 데 있으며,

성인의 가르침은 반드시 잔학한 자를 막는 데 있는 법이다.

 

하늘은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데,

죄악의 근본은 원악(元惡)에게 있으며 사람들은 사특함이 많은 법이니,

위협에 못 이겨 악을 따라 행한 자는 죄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고원高元>이 원문(轅門)에 와서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스스로 형관(刑官)에게 가서 죄를 받기를 청한다면,

의당 즉시 묶은 것을 풀어 주고 관(棺)을 불살라서 은혜를 크게 할 것이다.

 

그 나머지 신하들은 조정에 귀의하여 순종한다면,

모두 위로하면서 어루만져 주어 각자의 생업에 편안하게 하고,

재주에 따라 임용하여 화이(華夷) 간에 차별을 두지 않을 것이다.

 

영루(營壘)에 주둔함에 있어서는 정돈되고 엄숙하게 하기를 힘쓸 것이며

꼴 베고 나무하는 것을 금지하여 추호도 백성들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와 용서로써 포고하고 화(禍)와 복(福)으로써 유시하되,

만약 서로 도와서 악한 짓을 하여 천자의 관군(官軍)에 대항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으니 한 사람도 남김없이 처단할 것이다.

 

이상을 분명하게 효시하는 바이니, 짐의 뜻에 맞게 하라.』

 

모두 113만 3천 800 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계미일에 제1군이 출발하여, 40일 만에 마쳐, 군대 인솔이 이에 끝났으며

깃발이 천리에 뻗쳤다.

 

근고(近古)에 군대 출동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3월 신묘일,병부상서、좌후위 대장군 <단문진>이 죽었다.

 

계사일,(황)상이 군대가 있는 곳에 갔다.

 

갑오일,군대가 요수 다리에 다달았다.

 

무술일,대군(大軍)이 적에게 막혀,생각한 바대로 건너지 못하였다.

 

우둔위대장군、좌광록대부 <맥철장>,

무분랑장 <전사웅>、<맹금차> 등이 모두 죽었다.

 

갑오일,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넜다.

 

대전(大戰)이 (요수) 동쪽 연안에서 벌어져,적을 격파하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5월 임오일,지난 날 여러 장군이 각각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기회에 따라 나아가지 못하였다.

 

곧 고려가 각각 성을 지키니,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6월 기미일,(황제가) 요동(성)에 행차하여,여러 장군에게 화를 내며 질책하였다.

 

(황제가) (요동)성 서쪽 수 리(數里)에 머무르며,육합성에 나아갔다.

 

7월 임인(25일),<우문술>등이 살수(薩水)에서 패배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죽었다.

 

9군이 모두 함몰하여,

장군이 패주하여 도망해 인솔하여 돌아온 자가 2천여 기(騎)였다.

 

계묘(26일),군대를 데리고 돌아갔다.

 

{7월 25일 살수에서 패하여 2천여 기(騎)가 요동으로 돌아가

7월 26일에 철수한 것으로 보아 살수는 요동 인근이다}

 

9월 경진일,(황)상이 동도(낙양)에 도착하였다.

 

11월 기묘일,종친의딸 <화용華容>공주를 고창왕에게 시집보냈다.

 

갑신일,패장 <우문술宇文述>、<우중문于仲文> 등을 모두 제명하여

서민으로 만들고,상서우승 <유사룡>을 참수함으로써 천하에 사죄하였다.

 

이해에,큰 가뭄과,유행병,사람이 많이 죽었는데,산동이 특히 심하였다.

 

 

612년 1월, 드디어 수양제는 탁군(지금의 하북성 정주)에 전투병 113만 3천 800명과

군량 수송병 226만 이상, 총 340만의 대병력을 집결시켰다.

 

마지막 남은 고구려를 꺾어보겠다고 수나라의 막대한 군사력을 총 집결시킨 것이다.

 

수문제가 30만으로 침략하였으나 고구려에게 열에 여덟 아홉이 죽는 몰살을 당하자

그 열배에 해당하는 전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병력으로

고구려를 밀어버리겠다는 심보이다.

 

340만의 대병력을 집결 시켜놓고 발표한 조서를 보면

억울한 마음과 그에 따른 분통을 터트리는 게 주종을 이룬다.

 

그만큼 고구려에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왔던 모양이다.

 

수양제가 말한 것을 보자.

 

①“우리 수나라는 하늘의 명에 크게 응해서 삼재(三才)를 겸하여 법도를 세우고,

육합(六合)을 통일하여 한집안으로 만들었다.

이에 강역(疆域)이 미친 바는 세류(細柳)와 반도(盤桃)의 바깥이고,

성교(聲敎)가 미친 바는 자설(紫舌)과 황지(黃枝)의 지역이다.

먼 곳에서는 덕을 사모해 귀부(歸附)하고

가까운 곳에서는 생업에 편안하여 화합하지 않는 나라가 없어,

공이 이루어지고 다스림이 안정됨이 이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저고구려의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치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와 예수(穢)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 위에서 삼재(三才)란 천(天) 지(地) 인(人)으로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을 통틀어 말한 것이며

육합(六合)이란 천지와 사방(동서남북), 즉 천하를 말한다.

 

세류(細柳)는 전설 속에 나오는 해가 진다는 곳으로 극서(極西)를 말하고,

반도(盤桃)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이 먹는 다는 복숭아인 반도가 생산되는 곳으로

창해의 끝을 가리킨다.

 

자설(紫舌)은 중국과 다른 말을 쓰는 먼 지역을 말하며

황지(黃枝)는 인도에 있는 옛 나라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서 수나라가 온 천하를 정북하였는데

고구려만이 수나라에 대항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영역에 대해서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무리들이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이고”리고 말하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영역이 서쪽으로 갈석(산)까지 임을 수양제가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요수와 예수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영토가 서쪽으로 예수까지 임을 수양제가 증언하고 있다.

 

즉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갈석과 예수임을 알 수 있다.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낭아산이고 예수는 역수이다.

 

 

②“조서(詔書)를 보내 엄하게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하여 받지 않았으며”

 

⇒ 양광(수양제)이 황제랍시고 사신을 보내 조서라는 것을 보내도

고구려 임금이 직접 받지 않고

문서를 접수하는 관리에게 조서를 받게 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임금이 수나라를 대등한 상대로 보았기 때문에

외교문서 담당관에게 조서라는 것을 접수하게 한 것이다.

 

위 문구가 말하듯이 고구려가 수나라의 아래였다면

수양제가 보낸 조서라는 것을 고구려 임금이 직접 받아야 한다.

 

그런데 고구려 임금이 조서라는 것을 직접 받지 않는다고 타박하고 있으니

이것은 수양제가 직접 고구려가 수나라와 대등하게 행동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③“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려고 하지 않았다.”

 

⇒ 수양제가 고구려 임금에게 직접 내조하라고 협박을 했는데도

고구려가 꿈쩍도 하지 않음으로써 수양제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수나라를 대단한 나라로 보지않고 대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④ “도망친 반도(叛徒)들을 꾀어 받아들임이 끝닿은 데를 모르고,

변방 지역에 가득 차서, 자주 봉후(烽候)를 번거롭게 올리게 하고,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여,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마구 공격하여

수나라 백성들을 살수 없게 되었다고 수양제는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써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는

고구려가 수나라를 공격하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고구려가 수나라를 만만하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⑤“거란의 무리들과 연합하여 바닷가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遼西) 지방을 침범하였다.“

 

⇒ 수서 고려전, 개황 17년(597년) 조를 보면

수문제가 고구려 평원대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말갈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견고하게 가두었소.”

 

이것을 보면 고구려는 거란과 말갈을 확실하게 지배하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양제의 이야기는 고구려가 자기의 지배하에 있는

거란 및 말갈과 합동작전을 펴서

바닷가(산동반도)와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⑥“청구(靑丘)의 바깥에서까지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가에서 조차도 함께 정삭(正朔)을 받드는데,

드디어는 그들이 가지고 오는 보물을 다시 빼앗고 그들이 왕래하는 길을 막았다.

이에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함이 미치고,

정성을 바치는 자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바깥에 있는 국가가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으려고 고구려를 통과하려고 하면,

물건을 빼앗고 왕래하는 길도 막아 조공하는 나라가 오히려 화를 당했다.

 

즉, 자기들의 외교관계 마저 단절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⑦“수레를 탄 봉명(奉命)한 사신이 해동(海東)에 가고

정절(旌節)을 든 사신이 거기로 가려면

번국(藩國)의 경계를 지나가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황제를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의 도리이겠는가.

이런데도 참는다면 무엇을 참고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수나라 사신이 고구려를 통과하여 다른 나라로 가려고

고구려의 경계를 지나려고 하면 지나가지 못하게 도로를 막고,

수나라 사신의 국경통과를 거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예를 들면서 고구려가 황제를 섬기는 마음이 없다고 수양제가 직접 말하며,

따라서 고구려는 수나라의 신하가 아니라고 결론지으며

수양제 스스로 화를 내고 있다.

 

즉, 고구려와 수나라는 감히 주종관계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는 상태에 있음을

수양제가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계속해서 수양제가 말한 것을 살펴보자.

 

①“발해(渤海)를 엄습하여 천둥같이 진동하고,

부여(扶餘)를 경유하여 번개처럼 쓸어버리라”

 

⇒ 군대를 수륙 양쪽으로 나누어 공격하겠다는 말이다.

 

수군은 발해 쪽으로 나가고 육군은 부여 쪽으로 나가게 하겠다는 말이다.

 

② “좌군(左軍)

제1군은 누방도(鏤方道)로, 제2군은 장잠도(長岑道)로, 제3군은 해명도(海溟道)로,

제4군은 개마도(蓋馬道)로, 제5군은 건안도(建安道)로, 제6군은 남소도(南蘇道)로,

제7군은 요동도(遼東道)로, 제8군은 현도도(玄菟道)로, 제9군은 부여도(扶餘道)로,

제10군은 조선도(朝鮮道)로, 제11군은 옥저도(沃沮道)로, 제12군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아가라.

 

우군(右軍)

제1군은 점선도(黏蟬道)로, 제2군은 함자도(含資道)로, 제3군은 혼미도(渾彌道)로,

제4군은 임둔도(臨屯道)로, 제5군은 후성도(候城道)로, 제6군은 제해도(提奚道)로,

제7군은 답돈도(踏頓道)로, 제8군은 숙신도(肅愼道)로, 제9군은 갈석도(碣石道)로,

제10군은 동이도(東道)로, 제11군은 대방도(帶方道)로, 제12군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아가라.

 

이상의 뭇 군사들은 먼저 묘당(廟堂)의 계략을 받들어서 잇달아 길을 나아가

모두 평양(平壤)으로 집결하라.“

 

⇒ 지금 좌,우군별로 각각 평양으로 가는 길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즉, 여기에 나오는 지명은 평양을 가기 위한 경유지이며,

중국으로부터 평양으로 가는 길이고 중국에서 평양에 가기 전에 있는 곳들이다.

 

다시 말해서 낙랑은 평양이 아니라고 증언을 하고 있으며,

대방 역시 평양을 가기 전에 있다고 수양제는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좌군 중 해명도, 조선도, 낙랑도는 수군이며,

우군 중 점선도, 함자도, 흔미도, 임둔도, 제해도, 갈석도, 동이도, 대방도는 수군이다.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낙랑군이 평양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

역시 사기임을 수양제는 똑똑히 증언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지금의 한반도의 평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제1차수양제의 고구려 침략: 612년 >

 

612년 3월 갑오일(15일),

수나라 군대가 요수에 도착한다. 이것이 제1차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이다.

 

수나라 대군이 탁군에 집결한 때가 612년 1월 신사일(1일)인데,  

전투병이 113만 3천 800명이었고, 군량 수송병은 226만이상, 총 약340만 이었다.

 

탁군을 출발한 것이 1월 1일인데 요수에 도착한 것이 3월 15일이다.

 

총 340만이 출발하는데만 40일 걸렸다고 하니

처음 출발한 군대는 요수에 가까이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출발한 군대가 요수에 도착한 것이

첫 부대 출발 후 74일이 걸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수나라가 요수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군에게 공격을 당해 늦어졌을 것이다.

 

고구려군을 뚫고, 또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전진했기 때문에

많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실제 가는 거리는 산이 막혀 있으면 돌아가야 하고

강이 있으면 나루터로 돌아가야 해서

실제 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고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하다.

 

따라서 실제거리는 지도상의 직선거리보다 상당히 멀다.

 

3월 25일 날 수양제가 요수를 건넜다.

그리고 수나라 병사들이 요동성을 포위한다.

 

그러나 4월이 지나 5월이 지나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았다.

 

6월이 되어도 고구려군이 꿈쩍 안하자 수양제는 수하 장군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7월 임인일(24일)

그동안 평양으로 갔던 별동대 30만 대군이 살수에서 무너져 몰살당하여

도망해 오자 그 달 계묘일(25일) 수양제는 군대를 되돌려 도망친다.

 

살수에서 요동까지의 거리는 하루 만에 갈수 있는 가까운 거리임을 알 수 있다.

 

살수가 청천강이고 요동이 요양이라면

천리나 되는 길을 어떻게 하루 만에 갈 수 있겠는가?

 

살수는 요수(今 潮白河)에 이웃한 지금의 조백하 지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도 지금의 난하 인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월 경진일(자치통감에 의하면 경인일이고 날짜로는 13일이다)

수양제가 낙양에 도착하고 있다.

 

그러면 요동에서 낙양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이 거리는 7월25일 요수에서 후퇴를 시작하여

9월 13일에 낙양에 도착하였으니 50일 만에 도착한 것이다.

 

하루 평균 철군 행군속도를 약12km로 보면 약600km를 이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도 요수가 지금의 요하가 아니고 낙양에서 약 600km 내외로 떨어진

조백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潮白河(차오바이허)는 베이징 동부의 가장 큰 강줄기로,

길이는 약 32킬로미터, 수역면적은 14.8 평방킬로미터, 강폭은 평균 500미터이며

가장 넓은 곳은 약 800미터에 달한다. 평균수심은 2.5미터다.

현재 5개 수문과 8개 다리가 건설되어 있으며, 5단계 계단식 저수시설을 실현했다.

 

 

 

대업 9년(613년)

 

2월 임오일,<우문술> 등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또 병사를 징집하여 고려를 토벌하였다.

 

3월 병자일,제음사람 <맹해공>이 병사를 일으켜 도둑이되니,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정축일,정남 10만을 선발하여 대흥(大興)에 성을 쌓았다.

 

무인일,(황제가) 요동에 행차하였다.

 

월왕 <양동楊侗>과 민부상서 <번자개樊子蓋>가 동도(낙양)에 남아 지켰다.

 

경자일,북해 사람 <곽방예>가 무리를 모아 도둑이 되면서,

스스로 노공(盧公)이라고 부르니,

무리가 3만에 이르러,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크게 노략질하고 떠났다.

 

여름 4월 경오일,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넜다.

 

임신일,<우문술>과 <양의신>을 보내 평양을 향해 달려가게 하였다.

 

5월 기묘일,제북(濟北)사람 <견보차甄寶車>가 무리 만여 명을 모아,

성읍을 침구하여 약탈하였다.

 

6월 을사일,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여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병진일,<양현감>이 동도(낙양)를 핍박하였다.

 

하남 찬무 <배홍책裴弘策>이 막았으나,도리어 적에게 패배하였다.

 

무진일,병부시랑 <곡사정斛斯政>이 고려로 달아났다.

 

경오일,(황)상이 군사를 되돌렸다.

 

고려가 후군을 치니,내우무위대장군 <이경李景>이 뒤를 막았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과 좌후위장군 <굴돌통屈突通> 등이

빠르게 (군대를) 출병시켜,<양현감>을 토벌하였다.

 

가을 7월 계미일,여항 사람 <유원진劉元進>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니,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8월 임인일,좌익위대장군 <우문술> 등이 문향에서 <양현감>을 깨뜨리며,

목을 베고 나머지 무리를 다 평정하였다.

 

계묘일,오인(吳人) <주섭朱>과 진릉 사람 <관숭管崇>이

무리 십만 여명을 거느리고,자칭 장군이라고 하며,양자강 남쪽을 침구하였다.

 

갑진일,천자의 명령으로 효과군(驍果軍){황제의 친위대}의 집은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정미일,조서로 군현의 성을 떠나 도로에서 5 리 이상 떨어진 자는,

옮겨 취락을 이루었다.

 

무신일,천자의 명령으로 도적은 그 집을 모두 몰수 하였다.

 

을묘일,도둑의 우두머리 <진진陳瑱> 등 무리 3 만이,

신안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유일,사농경、광록대부、갈국공 <조원숙趙元淑>이 죄로 형벌을 받아 죽었다.

 

9월 기묘일,제음사람 <오해류吳海流>와 동해 사람 <팽효재彭孝才>

모두 거병하여 도적이 되니,무리가 수만이었다.

 

경진일,도둑의 우두머리 <양혜상梁慧>이 무리 4 만을 거느리고,

창오군을 함락하였다.

 

갑오일,황제의 수레가 상곡에 도착하였으나,경비를 지급하지 아니하니,

황상이 대노하여,태수 <우하虞荷> 등의 관리를 파면하였다.

 

정유일,동양(東陽)사람 <이삼아李三兒>와 <항단자向但子>가 거병하여

난리를 일으키니,무리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윤9월 기사일,(황제가) 박릉에 행차하였다.

 

경오일,(황)상이 가까운 신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짐이 옛날 선조를 따라 이곳 주위를 돌 때,나이가 갓 8살 이었는데,

해와 달이 머물지 아니하여(시간이 흘러),갑자기 36년이 지나,

옛날로 돌아가 생각해 보니,다시 바랄 수 없구나!”

 

말을 마치지 못하고,눈물을 흘리며 설움에 복받쳐 목메어 우니(오열하니),

가까운 신하와 호위하는 자들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겨울 10월 정축일,도적의 우두머리 <여명성呂明星>이 무리 수천을 이끌고

동도(하남성 위현)를 포위하니,무분랑장 <비청노費奴>가 쳐서 목을 베었다.

 

임진일,납언 <소위蘇威>를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

 

<주섭>과 <관숭>이 <유원劉元>을 천거하여 천자로 오르게 하였다.

 

장군 <토만서吐萬>와 <어구라魚俱羅>를 보내 토벌케 하였으나,

여러 해 계속 이길 수 없었다.

 

제(齊) 지방 사람 <맹양孟讓>과 <왕박王薄> 등 무리 십여 만이,

장백산에 근거를 두고,여러 군(郡)을 공격하여 빼앗고,

청하의 도적 <장금칭張金稱> 무리 수만(數萬),

발해의 도적 장수 <격겸格謙>이 스스로 연왕이라고 부르며,

<손선아>孫宣雅는 스스로 제왕(齊王)이라고 불렀는데,

무리가 각각 10 만이므로,산동(지역)이 고통을 받았다.

 

정해일,우후위장군 <곽영郭榮>을 우후위대장군으로 삼았다.

 

11월 기유일,우후위장군 <풍효자馮孝慈>가 <장금칭>을 청하에서 토벌하였으나,

도리어 패배하여,<풍효자>가 죽었다.

 

12월 갑신일,<양현감>의 동생 조청대부 <양적선楊積善>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한편이 된 무리 10여 명을 차열하고,불살라 알렸다.

 

정해일,부풍 사람 <향해명向海明>이 거병하여 난리를 일으키며,

황제를 칭하고,나라의 연호를 백오라고 정하였다.

 

태복경 <양의신>을 보내 격파하였다.

 

 

수양제는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다음 해인 613년 2월 또다시 고구려를 침략한다.

 

이렇게 되니 3월에 들어 수나라 백성들이 못 견디고

제음에서 본격적인 반란을 일으켜 대규모 떼도둑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요수에 도착하고,

북해 지역에서는 백성들이 또 떼도둑이 된다.

 

4월 수양제가 또다시 요수를 건너고

<우문술>과 <양의신>으로 하여금 평양을 공격하게 한다.

 

5월 제북에서 또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6월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고 양현감과 친했던 곡사정이 고구려로 도망간다.

 

이렇게 되니 수양제가 또다시 허겁지겁 도망간다.

 

이때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로 망명하여 들어가서,

고려가 정보를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추격을 가하여

후속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

 

곡사정으로부터 비밀을 다 안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후군을 쳐서 괴멸시킨 것이다.

 

돌아온 수양제는 <양현감>을 토벌한다.

 

7월 여항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난다.

 

8월, <양현감>의 목을 베고 <양현감>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달에도 옛 오나라 지역과 진릉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9월 또다시 제음과 동해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이즈음,

수양제가 상곡으로 갔는데

그 지역 지방관이 수양제의 행차비용을 지급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지방관리가 황제의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만큼 나라의 상태가 엉망이다. 

 

동양(東陽) 지역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난다.

 

윤9월에는 수양제가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10월에는 드디어 동도(낙양)을 포위하는 도둑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어떤 자를 천자로 천거하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수나라가 뒤집히는 형국이다.

 

또다시 옛 제나라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발해 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10만 명 규모로 불어났으며 각기 왕을 칭하고 있다.

 

11월 수나라 군대가 도적떼를 토벌하는데

오히려 도적떼에게 패하여 진압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12월 <양현감> 동생의 무리를 처형하였으나

부풍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칭하는 일이 벌어진다.

 

 

 

대업 10년(614년)

 

봄정월 갑인일,종친의 딸을 신의(信義)공주로 삼아,

돌궐의 <갈사나> 가한에게 시집보냈다.

 

 

614년 1월,또다시 종친의 딸을 신의공주로 삼아,

돌궐의 <갈사나> 가한에게 시집 보낸다.

 

고창의 왕에게 시집을 보낸데 이어서 두 번째이다.

 

수나라가 힘이 약하니 종친의 딸을 바쳐서라도 나라의 안전을 구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것이 다 고구려에게 비참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2월 신미일,조서로 모든 관료로 하여금 고려 정벌을 의논하게 명하니,

수 일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신묘일,(황제가)말해 이르기를:

 

「황제(黃帝)는 52차례나 전쟁을 하였고, 성탕(成湯)은 27차례나 정벌을 한 뒤에야

덕이 제후들에게 베풀어졌고, 명령이 천하에 행해졌다.

 

노방(盧芳)과 같은 하찮은 도적에 대해서도 한조(漢祖)는 오히려 친정(親征)하였고,

외효(隗囂)의 잔당들에 대해서도 광무제(光武帝)는

오히려 직접 농서(隴西)의 길에 올랐다.

 

이것이 어찌 포악한 자를 제거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며,

먼저 수고를 하여 뒤에 편안하고자 해서가 아니겠는가.

 

짐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있으니,

해와 달이 비치는 곳과 바람과 비가 젖는 곳에

그 누가황제의 신하가 아니라서 홀로 성교(聲敎)에서 동떨어져 있겠는가.

 

그런데 저 하찮은 고구려만은 멀리 치우쳐 있는 변방에 살고 있으면서

흉악한 기세를 돋우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오만하게 깔보면서 공순하게 굴지 않은 채 우리의 변경 지방을 노략질하고,

우리의 성진(城鎭)을 침략하였다.

 

이 때문에 지난해에 군사를 출정시켜 요갈(遼碣)에서 죄를 캐물어,

현도(玄菟)에서 흉악한 자를 목 베고, 양평(襄平)에서 날뛰는 자를 쳐 죽였다.

 

부여(扶餘)의 뭇 군사들이 바람처럼 번개처럼 내달려

패배해 달아나는 적들을 추격하여 곧바로 패수(浿水)를 건넜고,

창해(滄海)의 군함들이 적도들의 한가운데로 쳐들어가

그들의 성곽을 불사르고 그들의 궁실을 더럽혔다.

 

그러자 <고원高元>이 도끼를 짊어지고 머리에 진흙을 바른 채

군문(軍門)에 나아와서 화친을 청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들어와 조회하면서 형관(刑官)에게 죄를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짐은 그가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조서를 내려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런데도 악한 마음을 고치지 않고는 놀이에 빠져서 자신의 몸을 망치고 있다.

 

이런데도 차마 용서한다면 그 어느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이에 육사(六師)에게 명령을 내려서 모든 길로 일제히 진격하게 하는 바이다.

 

짐은 마땅히 직접 무절(武節)을 잡고서 여러 군사들의 앞에 임어(臨御)할 것이다.

 

환도(丸都)에서 군마들에게 꼴을 먹이고,

요수(遼水)에서 군사들을 사열한 다음 바다 밖에서 하늘의 주륙을 행하여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을 구해 줄 것이다.

 

정벌(征伐)로써 바르게 하고 명덕(明德)으로써 주벌을 행하되,

원악(元惡)을 제거하는 데에서 그치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만약 존망(存亡)의 분수를 아는 자가 있고

안위(安危)의 기틀을 아는 자가 있어서 번연히 와서 항복한다면,

이는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 도와 악을 행하면서 천자의 군대에 대항하여

요원(燎原)의 불길이 일어나듯 악한 짓을 한다면,

용서치 않고 형벌을 내릴 것이다.

 

유사(有司)는 위의 내용을 편의에 따라서 선포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서 알게 하라.」

라고 하였다.

 

정유일,부풍 사람 <당필唐弼>이 거병해 반란을 일으켜,

무리 10만이,<이홍李弘>을 추대하여 천자로 하고,자칭 당왕(唐王)이라고 하였다.

 

 

614년 2월 나라의 상황이 매우 혼란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구려를 꺾어보겠다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니

감히 어느 누구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다.

 

죽음의 공포와 불가능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수양제는 또다시 궤변을 늘어놓으며 전쟁을 독려하고 있다.

 

수양제가 한 말을 보자.

 

「천하를 다 정복하였는데 고구려만이 수나라를 오만하게 깔보면서

공순하게 굴지 않은 채 수나라의 변경 지방을 노략질하고,

수나라의 성(城)과 진(鎭)을 침략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요갈(遼碣)에서 죄를 캐물었다느니, 현도(玄菟)에서 흉악한 자를 목 베었다느니,

양평(襄平)에서 날뛰는 자를 쳐 죽였다느니」

등등 별별 웃기는 얘기를 다 늘어놓으면서

수양제는 제3차고구려 침략을 독려하고 있다.

 

수양제의 이야기만 들으면 저번 전쟁에서 수나라가 대승을 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34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초대병력이 괴멸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뻔뻔스러운 말장난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거짓말도 분수가 있고 뻥을 쳐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그들이 써 놓은 대로 보아서는 안 되고

사실과 거짓을 정확히 알고 중국사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양제가 그러한 허황된 말을 늘어놓는 그 순간에도

또다시 부풍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규모가 역시 10 만 명 규모이며,

그 괴수를 천자로 추대하고 그 괴수는 왕을 자칭하고 있다.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는 수양제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며 현실이다.

 

 

3월 임자일,황제가 탁군으로 행차하였다.

 

계해일,다음으로 임유궁에 행차하여,친히 황제 전투복을 입고,

황제(黃帝)에게 제를 지내며,

배반한 군사의 목을 벤 피를 북에 발라 신에게 제사 지냈다.

 

여름 4월 신미일,팽성의 도적 <장대표張大彪>가 무리 수만을 모아,

현박산을 확보하고 도적이 되었다.

 

유림태수 <동순董純>을 보내 격파하고,목을 베었다.

 

갑오일,황제의 수레가 다음으로 북평(北平)에 행차하였다.

 

5월 경자일,조서로 군(郡)에서 효자, 형제에 대한 우애가 깊은 자,

청렴한 자, 행실이 바른 자 각 10명을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임인일,도적의 우두머리 <송세모宋世謨>가 낭사군을 함락시켰다.

 

경신일,연안 사람 <유가론劉迦論>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자칭 황왕(皇王)이라고 하며,나라의 연호를 대세(大世)라고 정하였다.

 

6월 신미일,도둑의 우두머리 <정문아鄭文雅>와 <임보호林寶護> 등 무리 3 만이,

건안군(建安郡)을 함락시켰으며,태수 <양경상楊景祥>이 죽었다.

 

가을 7월 계축일,황제의 수레가 그 다음으로 회원진(懷遠鎮)에 행차하였다.

 

을묘일,조국(曹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갑자일,고려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곡사정>을 가두어 보냈다.

 

(황)상이 크게 기뻐하였다.

 

8월 기사일,(황제가) 군대를 되돌렸다.

 

겨울 10월 정묘일,(황)상이 동도(낙양)에 도착하였다.

 

기축일,(황상이) 서울(장안 대흥성)에 돌아왔다.

 

11월 병신일,

<곡사정>을 금광문 밖에서 팔다리를 하나하나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였다.

 

을사일,큰 일이 남쪽 교외에서 일어났다.

 

기유일,적의 우두머리 <사마장안司馬長安>이 장평군을 깨뜨렸다.

 

을묘일,이석의 흉노족 유묘왕(劉苗王)이 거병해 반란을 일으키며,

자칭 천자라고 하고,그 여섯째 아들을 영안왕(永安王)으로삼으니,

무리가 수만(數萬)에 이르렀다.

 

장군 <반장문潘長文>이 토벌하였으나,이길수가 없었다.

 

이달에,도적의 우두머리 <왕덕인王德仁>이 무리 수만(數萬)을 손에쥐고,

임려산을 확보하며 도적이 되었다.

 

12월 임신일,(황)상이 동도(낙양)에 이르렀다.

 

그날,대사면령을 천하에 내렸다.

 

무자일,(황상이) 동도(낙양)에 들어갔다.

 

경인일,도적의 우두머리 <맹양孟讓> 무리 십여 만이,도량궁을 점거하였다.

 

강도군 승(丞: 벼슬이름) <왕세충王世充>을 보내 격파하고,

그 무리를 다 포로로 잡았다.

 

 

614년 3월 임자일(14일),수양제가 또 북쪽 국경의 전진기지 탁군으로 행차한다.

 

계해일(25일),임투궁에 행차하여,친히 황제 전투복을 입고,

황제(黃帝)에게 제를 지내며,

배반한 군사의 목을 벤 피를 북에 발라 신에게 제사 지낸다.

 

고구려 제3차 침략을 실행한 것이다.

 

그동안에도 수나라 각지에서는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났다.

 

4월에는 팽성에서 수만명이 반란을 일으켜 도적이 되고,

 

5월에는 낭사군을 함락하는 도둑들이, 연안(延安)에서도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칭하는 자가 나타난다

 

6월에도 도둑의 무리 3만이,건안군을 함락시키고 태수를 죽인다.

 

이러한 상태에서

7월 계축일(17일)에 수양제가 그 다음으로 회원진에 행차했었다.

 

그런데 같은 달 갑자일(28일) 고구려가 항복을 청하고,<곡사정>을 가두어 보낸다.

 

이것을 구실로 8월기사일(4일),수양제는 군사를 되돌린다.

 

수양제가 612년 1차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 을지문덕 장군은 두 번 항복하였다.

 

첫 번째는 난하를 건너가 수나라 진영으로 직접 가서 항복을 했고,

 

두 번째는 수나라 군대가 평양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오자 사신을 보내 항복하였다.

 

물론 두 번 다 거짓항복이었고

사실은 적정을 정탐하기 위한 방문이었다고 자치통감은 전하고 있다.

 

또한 항복을 그럴듯하게 보여주기 위해 하루 일곱 번 싸워 일곱 번을 져 주었고

그래서 수나라 군대를 평양에서 30리까지 끌어들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항복을 할때는

왕을 모시고 직접 수양제에게 찾아가 항복하겠다고 말하였다.

 

그 말에 따라 수나라 군대가 후퇴하자

그때부터 폭풍같은 고구려 군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살수에서 30만 대군을 괴멸시켜 살아 돌아간 자가 2천7백명 뿐이었다.

 

따라서 항복을 청했다는 것은 또다시 적정을 정탐한 것이며

또다시 더 이상 침략해 들어오면

비참한 패배를 맛볼 것이라는 무언의 경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항복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하여 <곡사정>을 보내 주었다.

 

이에 따라 수양제는 군대를 되돌린다.

 

더 이상 갔다가는 뼈도 못추릴 비참한 패배를 당하느니

거짓 항복이라도 받고 살아서 무사히 돌아가는 게 낫다고 판단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군사를 되돌릴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엄청난 군비를 들여 그 먼 거리를 꾸역꾸역 왔는가?

 

무엇 때문에 자기나라에서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수습도 못하면서

수많은 군대를 동원하였는가?

 

잔뜩 공포에 질린 수양제의 모습이 상상된다.

 

거짓 항복의 말 한마디에 휴~하고 한숨을 내쉬며 6일 만에 군사를 거두어 되돌아간다.

 

되돌아 갈 때의 행군속도를 보자.

 

8월 기사일(4일)군사를 되돌려서 10월 정묘일(3일) 동도(낙양)에 도착한다.

 

59일 만에 요하부근에서 낙양까지 행군한 것이다.

 

이 또한 요하가 지금의 요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1월 고구려에 대한 분풀이를 <곡사정>에게 가하고 있다.

 

그 달에 또다시 장평군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흉노족이 거병해 반란을 일으키며,

자칭 천자라고 하니,토벌하였으나,이길 수가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다른 쪽에서 무리 수만(數萬)이 임려산에서 난리를 이으킨다.

 

산지사방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난리를 일으켜도

수습을 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고구려에게 워낙 엄청난 패배를 당하여 국력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12월에 수양제가 동도(낙양)으로 다시 갔으나 각지에서 반란은 계속되고 있다.

 

 

 

대업 11년(615년)

 

봄정월 갑오일 초하루,모든 관리에게 대연회를 베풀었다.

 

돌궐、신라、말갈、필대사(畢大辭)、가돌(訶咄)、전월(傳越)、오나갈(烏那曷)、

파랍(波臘)、토화라(吐火羅)、구려건(俱慮建)、홀론(忽論)、가다(訶多)、

패한(沛汗)、구자(龜茲)、소륵(疎勒)、우전(于闐)、안국(安國)、조국(曹國)、

하국(何國)、목국(穆國)、필(畢)、의밀(衣密)、실범연(失范延)、가절(伽折)、

거란(契丹)등의 나라가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무진일,도적의 우두머리 <양중서揚仲>가 무리 만여 명을 이끌고,

북평을 공격해,활공(滑公) <이경李景>을 격파하고 목을 베었다.

 

병자일,상곡 사람 <왕수발王須拔>이 반란을 일으켜,

자칭 만천왕(漫天王)이라고 하고,국호를 연(燕)이라 하며,

도적의 우두머리 <위조아魏刁兒>는 자칭 역산비(歷山飛)라고 하고,

무리가 각 10여 만으로,북으로 돌궐과 연합하고,남으로 조(趙) 지방을 침구하였다.

 

5월 정유일,우효위대장군、광록대부、성공 <이혼李渾>과 장작감、

광록대부 <이민李敏>을 죽이고,아울러 그 가문의 족속을 멸하였다.

 

계묘일,도적의 우두머리 <사마장안司馬長安>이 서하군(西河郡)을 깨뜨렸다.

 

기유일,(황제가) 태원에 행차하여,분양궁(汾陽宮)에서 피서하였다.

 

가을 7월 기해일,회남 사람 <장기서張起>가 군사를 일으켜 도적이 되니,

무리가 3 만에 이르렀다.

 

8월 을축일,(황제가) 북쪽 변방을 순시하였다.

 

무진일,돌궐의 <시필始畢> 가한이 기병 수십만을 거느리고,

황제가 탄 수레를 습격하려고 하니,

의성(義成)공주가 사신을 보내 변란을 알렸다.

 

임신일,황제가(황제의 수레가) 안문(雁門)으로 달렸다.

 

계유일,돌궐이 성을 포위하니,관군이 급박한 전쟁으로 불리하였다.

 

(황)상이 매우 두려워하여,정예 기병을 인솔하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민부상서 <번자개樊子蓋>가 굳게 간하여 그만 두었다.

 

제왕 <양간楊>이 후군으로 우곽현을 확보하였다.

 

갑신일,조서로 천하의 모든 군(郡)에게 병사 모집을 명하니,

이에 (각 고을의) 수령(守令)이 각각 위험에 처한 나라를 구하러 왔다.

 

9월 갑진일,돌궐이 포위망을 풀고 갔다.

 

정미일,태원에 특별 사면을 하고、안문군에는 사형의 죄 이하에 특별 사면을 하였다

 

겨울 10월 임술일,(황)상이 동도(낙양)에 도착하였다.

 

정묘일,팽성 사람 <위기린魏騏驎>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도적이되어,

노군을 침구하였다.

 

임신일,도적의 우두머리 <노명월盧明月>이 무리 10여 만을 모아,

진(陳)과 여(汝) 사이를 침구하였다.

 

동해의 도적 우두머리 <이자통李子通>이 무리를 거느리고 회(수)를 건너,

스스로 초왕(楚王)이라고 부르며,

 

나라의 연호를 명정(明政)이라고 정하고,강도(江都)를 침구하였다.

 

11월 을묘일,도적의 우두머리 <왕수발王須拔>이 고양군(高陽郡)을 깨뜨렸다

 

12월 경진일,조서로 민부상서 <번자개>로 하여금 중병(中兵)에게 공문을 보내,

강군(絳郡)의 도적 <경반타敬盤陀>、<시보창柴保昌> 등을 토벌하도록 명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이길 수 없었다.

 

초군(譙郡) 사람 <주찬朱粲>이 무리 수 십만을 손에 쥐고,형양을 침구하며,

초(楚)나라 황제를 참칭하고,연호를 창달(昌達)이라고 정하였다.

 

한남(漢南)의 여러 군(郡)이 대다수 함락되었다.

 

 

615년에 들어서니

2월에 수나라 북쪽변경이 수습 불가능한 상태로 간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노선인 북평, 상곡에서 반란을 일어나 나라를 세우고

북으로 돌궐과 연합하고 남으로 옛 조나라 지방을 침구한다.

 

5월에는 역시 북쪽지방인 서하군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수양제는 태원으로 간다.

 

7월에는 회남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8월에는 수양제가 북쪽변경을 순시하는데 돌궐이 수양제를 습격하려고 한다.

 

돌궐은 607년 <계민>가한이 직접 수양제에게 와서

복종의 의식을 가졌던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수양제를 죽이겠다고 습격하려는 것이다.

 

이게 다 고구려에게 대패해서 생긴 일이다.

 

불과 8년 전에는 돌궐의 임금이 수양제에게 무릎을 꿇고 만수무강의 술잔을 올렸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수습 불가능한 패배를 당하고 나니

항복했던 놈도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수양제가 안문으로 도망가니 돌궐이 쫓아가 포위한다.

 

수양제가 매우 두려워하여 정예병으로 뚫고 나가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신하들이 그것은 위험하다고 말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여러 군(郡)에게 구원병을 부른다.

 

이래서 돌궐이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수양제가 동도(낙양)에 돌아와도 사태는 절망적이다.

 

팽성에서,진(陳)과 여(汝) 사이에서, 동해에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11월에는 고양군에서

 

12월에는 강군(絳郡)의 도적을 토벌했으나 오래도록 이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초군(譙郡)에서는 초나라 황제를 칭하니,

한남(漢南)의 여러 군(郡)이 대다수 함락되는 사태에 이른다.

 

 

 

대업 12년(616년)

 

봄정월 갑오일,안문 사람 <적송백翟松柏>이 영구(靈丘)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는데,군사를 돌려 방현(傍縣)을 공격하였다.

 

2월 기미일,진랍국(臘國)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계해일,동해의 도적 <노공섬>이 무리 수 만을 거느리고,우창산을 차지하였다.

 

여름 4월 정사일,현양문(顯陽門)이 불에 탔다.

 

계해일,<위조아魏刁兒> 소속의 부장 <견적아甄翟兒>가

다시 역산비(歷山飛)라고 부르며,무리 10 만이,군사를 돌려 태원을 침구하였다.

 

장군 <반장문潘長文>이 토벌하였으나,도리어 패배를 당하여,<반장문>이 죽었다.

 

가을 7월 갑자일,(황제가) 강도궁(江都宮)에 행차하여,월왕 <양동楊侗>、

광록대부 <단달段達>、태부경 <원문도元文都>、검교,민부상서 <위진韋津>、

우무위장군 <황보무일皇甫無逸>、우사랑 <노초盧楚> 등 모두에게

죽은 뒤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봉신랑 <최민상崔民象>은 도적이 가득찬 것으로,

건국문(建國門)에서 표문을 올리며,

황제가 마땅히 순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아뢰었다.(간諫 하였다).

 

(황)상이 대노하여,먼저 그 턱을 잘라버리고,비로소 목을 베었다.

 

무진일,풍익 사람 <손화孫華>가 스스로 총관이라고 부르며,

군사를 일으켜 도적이 되었다.

 

고량의 통수 <세보철洗珤徹>이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일으키니,

영남 계동에서 대다수가 호응하였다.

 

기사일,황제가 다음으로 사수에 행차 하였는데,

봉신랑 <왕애인>王愛仁이 도적이 날로 번성하니

황제에게 서경으로 돌아가자고 아뢰었다.

 

(황)상이 분노하여,목을 베고 행차하였다.

 

8월 을사일,도적의 우두머리 <조만해趙萬海> 무리 수십 만이,

항산에서 고양으로 침구하였다.

 

9월 정유일,동해사람 <두양주杜揚州>、<심멱적沈敵> 등이 난리를 일으키니,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다.

 

우어위장군 <진릉陳稜>이 격파하였다.

 

임술일,안정 사람 <여비세웅非世雄>이 <임경령臨涇令>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일으키며,스스로 장군이라고 불렀다.

 

겨울 10월 기축일,

개부의동삼사、좌익위대장군、광록대부、허공 <우문술>이 죽었다.

 

12월 계미일,파양의 도적 <조천성操天成>이 군사를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키며,

스스로 원흥왕(元興王)이라고 부르고,나라의 연호를 시흥(始興)이라고 하며,

예장군(豫章郡)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을유일,우익위대장군 <내호아>를 개부의동삼사、임시 좌익위대장군으로 삼았다.

 

임진일,파양 사람 <임사홍林士弘>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나라 이름을 楚라고하고,나라의 연호를 태평으로 정하며,

구강(九江)과 여릉군(廬陵郡)을 공격하여 함락 시켰다.

 

당공{당고조 <이연>}이 <견적아>를 서하에서 깨뜨리고,

남녀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616년에 들어서니 사태가 계속 절망 상태로 빠진다.

 

이러한 상태는 617년에도 계속되더니

618년 3월 드디어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이 수양제를 죽인다.

 

<우문술>은 살수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아 도망친 패장, 바로 그 사람이다.

 

이로써 수양제는 50살의 파란만장한 삶을 매듭짓는다.

 

그로써 수나라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게 다 고구려에게 대패한 때문이다.

 

 

 

대업 13년(617년)

 

봄 정월 임자일,제군(齊郡)의 도적 <두복위杜伏威>가

무리를 거느리고 회(수)를 건너,역양군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병진일,발해 도적 <두건덕竇建德>이 제단을 하간의 낙수에 설치하고,

자칭 장락왕(長樂王)이라고 하며,연호를 정축(丁丑)으로 정하였다.

 

신사일,도적의 우두머리 <서원랑徐圓朗>이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동평군을 깨뜨렸다.

 

홍화 사람 <유기성劉企成>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도적이 되니,

방군(傍郡)이 고통을 받았다.

 

2월 임오일,삭방사람 <양사도梁師都>가 군승(郡丞) <당세종唐世宗>을 죽이고,

군(郡)을 점거하며 반란을 일으키고,자칭 대승상이라고 하였다.

 

은청 광록대부 <장세륭張世隆>을 보내쳤으나,도리어 패배하였다.

 

무자일,도적의 우두머리 <왕자영王子英>이 상곡군을 깨뜨렸다.

 

기축일,마읍교위 <유무주劉武周>가 태수 <왕인공王仁恭>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일으키며,

북으로 돌궐과 연합하고,자칭 정양(定楊) 가한이라고 하였다.

 

경인일,도적의 우두머리 <이밀李密>、<적양翟讓> 등이

흥락창(興洛倉)을 함락하였다。

 

월왕 <양동楊侗>이 무분랑장 <유장공劉長恭>과 광록소경 <방즉房>을 보내

쳤으나,도리어 패배하여,죽은 사람이 10에 5~6이었다.

 

경자일,<이밀>이 스스로 위공(魏公)이라고 부르며,원년(元年)을 칭하고,

창고를 열어 떼 도둑을 떨치니,무리가 수십만에 이르니,

하남의 여러 군이 잇따라 모두 함락되었다.

 

임인일,<유무주劉武周>가 무분랑장 <왕지변王智辯>을 상건진에서 깨뜨리니,

<왕지변>이 전사하였다.

 

3월 무오일,여강사람 <장자로張子路>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

 

우어위장군 <진릉陳稜>을 보내 토벌하였다.

 

정축일,도적의 우두머리 <이통덕李通德> 무리 십만이,여강을 침구하니,

좌둔위장군 <장진주張州>가 격파하였다.

 

여름 4월 계미일,금성교위 <설거薛>가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자칭 서진패왕(西秦霸王)이라고 하며,연호를 진흥(秦興)이라고 정하고,

농우 여러 군(郡)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기축일,도적의 우두머리 <맹양孟讓>이,밤에 동도(낙양) 외곽에 들어와,

풍요로운 도시를 불태우고 떠나갔다.

 

계사일,<이밀李密>이 회락의 동쪽 창고를 함락하였다.

 

정유일,도적의 우두머리 <방헌백房憲伯>이 여음군을 함락하였다.

 

이달에,광록대부 <배인기裴仁基>、회양태수 <조타趙佗> 등이

모두 무리를 들어 배반하며 <이밀李密>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5월 갑자일,당공(唐公){당고조 <이연>}이 의로운 군대를 태원에서 일으켰다.

 

병인일,돌궐 수천 명이 태원(太原)을 침구하니,당공이 격파하였다.

 

가을 7월 병진일,무위 사람 <이궤李軌>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하서 여러 군(郡)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자칭 양왕(涼王)이라고 하며,연호를 안락(安樂)으로 정하였다.

 

8월 신사일,당공(당고조 이연)이 무아랑장 <송로생宋老生>을 곽읍에서 깨뜨리고,

목을 베었다.

 

9월 기축일,(황)제가 강도(江都) 사람 여자 과부를 망라하여,

장군의 당번병으로 나누어 주었다.

 

이 달에,무양군 승(丞) <원보장元寶藏>이 군을 들어 배반하고

<이밀李密>에게 돌아가고,

그와 함께 도적의 우두머리 <이문상李文相>이

여양창(黎陽倉)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겨울 10월 정해일,태원의 <양세락楊世洛>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약성읍(掠城邑)을 침구하였다.

 

병신일,나현의 현령(羅令) <소선蕭銑>이 현을 들어 반란을 일으키니,

파양 사람 <동경진董景珍>은 군(郡)을 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소선>을 나현에서 맞이하여,양왕(梁王)이라고 하고,

방군(傍郡)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무술일,무분랑장 <고비高毗>가 제북군의 도적 <견보거甄寶車>에게

산에서 패하였다.

 

11월 병진일,당공(당고조 이연)이 서울에 들어왔다.

 

신유일,멀리서 황제를 높여 태상황으로 하고,

대왕(代王) <양유楊侑>를 황제로 세우며,연호를 의녕(義寧)으로고쳤다.

 

(황)상이 궁에서 나와 자기를 붉게 물들여,장차 양자강 남쪽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의녕원년 11월 임술일,(황)상이 대흥전(大興殿)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황제가) 말하여 이르기를:

 

「...(상략)...대업 13년을 고쳐 의녕 원년으로한다。...(하략)」라고 하였다.

 

갑자일,광록대부、대장군、태위 당공(이연)을 가황월、사지절、

대도독 내외 제군사、상서령、대승상으로 삼고,진급시켜 당왕으로 봉하였다.

 

기사일,당왕의 아들 농서공 <이건성李建成>을 당나라 세자로 삼고,

돈황공을 경조윤,진공으로 고쳐 봉하였으며,

<이원길李元吉>을 제공(齊公)으로 삼았으며,식읍은 각 만호로 하였다.

 

태원에 진북부(北府)를 설치하였다.

 

을해일,장액의 <강로화康老和>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2월 계미일,<설거薛>가 자칭 천자라고 하며,부풍을 침구하였다.

 

진공(秦公){이건성李建成}을 원수로 삼아 격파하였다.

 

정해일,계양 사람 <조무철曹武徹>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연호를 통성(通聖)으로 정하였다.

 

정유일,의로운 군대(당고조 이연의 군대)가

효위대장군 <굴돌통屈突通>을 문향에서 생포하고,그 무리 수만을 사로잡았다.

 

을사일,도적의 우두머리 <장선안張善安>이 여강군을 함락하였다.

 

 

 

(의녕) 2년 봄정월 정미일,조서로 당왕이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어전에 오르며,

입조할 때 종종걸음을 하지 않으며,천자를 배알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앞뒤로 일산과 음악연주를 더하도록 명하였다.

 

임술일,장군 <왕세충王世充>이 <이밀李密>에게 패하여,

하내통수 <맹선의孟善誼>、무분랑장 <왕변王辯>、

<양위楊威>、<유장공劉長恭>、<양덕梁德>、<동지통董智通> 모두 죽었다.

 

경술일,하양군위 <독고무도獨孤武都>가 <이밀李密>에게 항복하였다.

 

3월 병진일,우둔위장군 <우문화급宇文化及>이

태상황{수양제}을 강도궁(江都宮)에서 죽였으며,

우어위장군 <독고성獨孤盛>이 전사하였다.

 

제왕 <양간楊>,조왕 <양고楊杲>,연왕 <양담楊>,

광록대부、개부의동삼사、임시우익위대장군 <우문협宇文協>,

금자광록대부、내사시랑 <우세기虞世基>,은청광록대부、어사대부 <배온裴蘊>,

통의대부、행급사랑 <허선심許善心>,모두 살해 당하였다.

 

<우문화급>이 진왕(秦王) <양호楊浩>를 황제로 세우고,

자칭 대승상이라고 하였으며,

조정의 문무 신하 모두 그 관작을 받았다.

 

광록대부、숙공 <맥재麥才>,절충랑장、조청대부 <심광沈光>이,

함께 도적을 토벌할 것을 모의 하여 <우문화급>의 군영을 밤에 습격하였으나,

도리어 살해 당하였다.

 

무진일,조서로 당왕에게 구석(九錫)의 예를 갖추게 하며,

옥새와 인끈、원유관、녹려수(조개풀로 물들인 인끈)을 더하고,

여러 후왕의 위에 위치해 있게 하였다.

 

당나라는 승상 이하를 설치하며,한결같이 옛 방식에 의거하였다.

 

 

 

 

(의녕)2년 3월,

우둔위장군 <우문화급宇文化及>,무분랑장 <사마덕감司馬德戡>과 <원례元禮>,

감문직각 <배건통裴虔通>,장작소감 <우문지급宇文智及>,

무용랑장 <조행추趙行樞>,응양랑장 <맹경孟景>,내사사인 <원민元敏>,

부새랑 <이복李覆>과 <우방유牛方裕>,천우좌우 <이효본李孝本>과

<제효질弟孝質>,직장 <허홍인許弘仁>과 <설세량薛世良>,

성문랑 <당봉의唐奉義>,의정 <장개張愷> 등이,효과(군)으로 난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였다.

 

(황)상이 온실에서 죽으니,그 때 나이 50살이었다.

 

소후(蕭后)가 궁인에게 영을 내려

침상의 대나무 자리를 거두어 관으로 삼아 매장하였다.

 

<우문화급>의 난이 일어난 뒤에,

우어위장군 <진릉>이 황제의 시신을 성상전에서 받들어,

오공의 능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묻었다).

 

염을 시작할 때에 용모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서 무리들은 다 특별하게 다루었다.

 

당나라가 양자강 남쪽을 평정한 후에 뢰당으로 옮겨 다시 장사를 지냈다(묻었다)

 

5월 을사일 초하루,조서로 당왕에게 면류관에 12개의 구슬과,천자 정기를 세우며,

출입할 때 행인을 금하고 도로를 치워 경계하게 하고,

금근거가(金根車駕) 다섯 량일 때 부속 수레를 준비하고,

황제의 의장행렬 선두에 세우던 소꼬리 털로 장식한 깃발, 구름 깃발을 설치한수레,

음악과 춤은 8명× 8명으로 하며,

궁에는 종과 종을 거는 틀과 현악기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왕후、왕자、왕녀의 작위명 호칭은,한결같이 옛 법전을 좇았다.

 

무오일,이날,(황)상이 대당(大唐)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주고,휴국공이 되었다.

 

무덕 2년 여름 5월 죽었는데,그 때 나이 15세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