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지왕(재위 576-579)에 대해

삼국사기는 재위 4년만인 서기 579년에 사망했다 하고

삼국유사는 재위 4년째에 정치를 어지럽히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쫓겨난 직후에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89년과 95년에 두 종류가 각각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은

진지왕이 재위 4년째 되던 해에「삼국유사」기록처럼 쫓겨나기는 했으나

곧바로 죽지는 않고 3년 동안 유폐생활을 하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때 편찬된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서기 700년 즈음

신라 사람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필사본중

어느 쪽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까.

 

정답은 화랑세기 필사본이다.

 

그 답을 풀 수 있는 열쇠는 놀랍게도 삼국유사에 실린 도화녀-비형랑 이야기에 있다.

 

설화로 윤색된 이 이야기에 따르면 진지왕은 폐위되고 죽은 다음 귀신으로 환생해

살아 생전에 그토록이나 소유하고 싶어했던 도화녀라는 미인과 결합해

<비형랑(580?- )>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비형량은 용춘(578-647)의 서제이다.

 

이 설화로 보아 진지왕은 폐위되면서 곧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쫓겨나 살면서 도화녀를 취해 비형랑을 낳은 것이다.

 

수수께끼같던 이 도화녀-비형랑 설화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고 나서 비로소 그 의문이 풀렸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한국 고대 사학계 대부분이 누군가가 20세기 초반에

가짜로 지어낸 이야기라는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 논쟁은 막을 내린다.

 

화랑세기 가짜론자들은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지낸 사다함과 김유신,

김춘추를 비롯한 32명의 전기인 이 필사본이 가짜라는 유력한 근거의 하나로

여기에 나타난 신라인의 풍습 마복자(摩腹子) 제도를 들었다.

 

화랑세기가 몰고온 최대 충격인 마복자란

신하나 부하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왕이나 상관에게 바쳐 난 아들이다.

 

쉽게 말해 신라인들은 자기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왕이나 상관에게 바쳤던 것이다.

 

이런 상식을 뛰어넘는 관습을 통해 부하와 상관은 같은 아이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정치적 고리를 공유하게 된다.

 

인류학 사상 마복자와 같은 제도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짜론자들은 화랑세기가 가짜라고 공격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례가 없다는 것은

오히려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아무리 뛰어난 소설가라 해도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전혀 엉터리가 아닌 이야기를 지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는 스스로를 신국(神國), 즉 神의 나라라 일컬었고

神國에는 나름의 도(道)가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神國의 道란 한마디로 신라인이 사는 신라, 나름의 제도와 원칙을 말한다.

 

마복자 말고 충격에 충격을 거듭하는 神國의 道는 화랑세기에 부지기수로 나온다.

 

이에 따르면 신라 왕실에는 왕에게 색공(色供)을 바치는 여인 집단이 있었고

이런 여성들은 진공정통(眞骨正統)이거나 대원신통(大元神統) 출신이었다.

 

그런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어머니를 통해 그 자리가 정해졌다.

 

즉 어머니가 진골정통이면 그 자식은 무조건 진골정통이며 대원신통 또한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사다함斯多含(547-564)>의 애인이었다가

진흥, 진지, 진평 3황제를 섹스로 섬기고 여러 명의 풍월주와도 관계한

<미실美室>이라는 여인은 바로 색공을 하는 여자였다.

 

화랑세기가 말하는 신라인의 성생활이 이처럼 문란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 즉 神國의 道가 있었다.

 

왕을 비롯한 신라 지배계층은 수많은 여자를 거느리고

때로는 신하나 부하의 아내까지 강제로 빼앗거나 성노리개로 삼았으나

( 이를 물고기를 낚는다는 뜻에서 어색(漁色)이라 했다 )

신라 남자에게 정식 부인은 단 한 명이었다.

 

즉 신라는 조선처럼 일부일처제 사회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처가 아닌 後妻에서 난 서자들에 대해서는 극심한 신분차별이 있었다.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범하고,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딸 선덕공주에게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 남자 3명을 차례로 들여 보냈으며,

왕을 황제라 일컫고 독자 연호를 사용한 나라,

이것이 우리가 몰랐던 신라이며 神國의 道였다.

 

이제 지루한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 논쟁은 막을 내려야 한다.

 

이 필사본이 정말로 20세기 들어와 역사적인 안목을 갖춘 누군가가 지어낸 것이라면

이것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사 연구가 가짜 화랑세기보다 못하다는 비판에 직면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지왕이 폐위되고도 3년을 더 살았다든가,

우리가 철석같이 동일 인물로 알았던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578-647)>이

실은 각개의 인물로서 형제지간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오직 화랑세기만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9년 많은 고대 사학자들이 이 필사본을 가짜라고 몰아붙이는 가운데

이것이 김대문이 쓴 바로 그 화랑세기가 맞다는 굳은 신념 아래

모든 것을 걸고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한 역주본을 낸 서강대 이종욱 교수.

 

그가 이번에는 이 필사본을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라는 이름으로

쉽게 풀어낸 단행본을 선보임으로써 화랑세기가 이래도 가짜인가 라고

학계와 일반 독자를 향해 동시에 반문하고 있다.

 

화랑세기와 남당유고가 낭당 <박창화>의 창작이라면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그 숱한 인명과 지명 및 역사적 사건을 창작한 <박창화>는

세기적인 대천재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 왕실 도서관에 우리의 진정한 역사가 잠들고 있었던 것이다.

 

 

 

- 일본왕실 도서관의 비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