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평(眞平)의 등극

 

<진흥(534-576)>제가 죽고 금(金)태자(552?-582 재위 576-579)가 즉위하였다.

 

인하여 <미실美室(547- )>을 받아들였는데 세상의 여론으로 황후로 봉하지 못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美室>을 심히 총애하지도 않았다.

 

<미실美室>은 (후사를 약속한)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思道(535?- )>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폐하고

 

동(銅)태자(550? -572)의 아들 <白淨(567-631)>公을 즉위시키니,

 

이이가 진평(眞平)대제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547-)>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미실>과 <진지>의 다툼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것이 진평이다.

 

 

진흥대제가 죽은 576년에 진흥대제 43세, 진지왕(금륜) 25세,

미실 30세, 진평(백정)은 10세, 문로 39세이다.

 

 

 

2. 진평왕의 여인들과 자식

 

 

1). 진평+은륜공주

 

진평은 사도태후의 손자이며, 은륜은 사도의 막내딸이다. 숙질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은륜은 골을 믿고 방탕하여) 왕의 총애를 잃어 (그들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사도>가 대원신통을 걱정하여

 

11세 풍월주 <하종(564-)>에게 명하여 모시도록 하였다.

 

<하종>과 사이에서 <효종>, <하희>, <월희>를 낳았다.

 

그 중 <하희>는 17세 <염장(586-648)>공에게 시집가서

<윤장>,<하장>,<춘장>(25세 풍월주)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참고로 진흥과 사도에게는 <동륜>, <금륜> 외에 <구륜>이라는 아들과

<덕명>, <아양>{15세 풍월주 유신의 조모}, <태양>, <은륜>의 4딸이 있었다.

 

 

2).진평+태양공주

 

<태양>공주는 은륜의 언니이다. 역시 숙질간이다.

 

<태원>과 <호원> 형제를 낳았으나 진평제를 닮지 않았고,

사신(私臣)을 좋아하여 (형제는) 統을 얻지 못했다.

 

일찍이 진흥과 숙명공주사이의 소생인 <정숙>은 태자로까지 봉해졌으나

이후 혈통을 의심받아 왕통에서 멀어진 경우가 있었다.

 

<흠돌>의 난에서 3간 중의 한명인 <흥원>은 <호원>의 아들이다.

 

 

3).진평+화명, 옥명= 자녀 있었음

 

<화명>과 <옥명>은 <숙명>공주와 4세 풍월주 <이화랑>의 딸로

진평의 후궁으로 들어가 자녀를 낳았다.

 

진평의 할아버지인 진흥과 숙명은 같이 지소태후의 자식이다.

 

그러니 이들은 종숙질 간이다.

 

하지만 적통이 아니어서인지 이들 자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의 손위 누이인 <화명>은 <하종>공과 더불어 좋아하였다.

 

<미실>이 <하종>의 적처로 삼으려 했지만 <만호>가 들어주지 않고

모두 (진골 정통)을 받아 들였다.

 

 

4).진평+용명공주

 

<용명>공주는 진흥과 지도의 딸이므로 그와도 숙질간이다.

 

공주는 13세 풍월주 <용춘(578-647)>공의 손위 누이다.

 

<용춘>공은 진지왕+지도의 아들이다.

 

<용명>이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5).진평+지도태후

 

<지도>태후는 진지왕비로 <기오>공의 딸이다.

 

<기오>공은 <선혜>황후의 사자로

<사도>태후의 포매 <흥도>낭주를 아내로 맞아 <지도>를 낳았다.

 

<지도>는 태상태후 <사도>의 명으로 다시 신왕 진평을 섬겼다.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진흥왕과 월화궁주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염장>공의 3형제를 낳았다.

 

이렇게 진평의 할머니 <사도>와 <지도>의 어머니인 <흥도>가 자매간이므로

그들도 종숙질 간이다.

 

 

6).진평+마야황후=천명, 선덕공주

 

공식적인 첫 황후가 <마야>다.

 

<마야>의 아버지는 <복승>공이며 어머니는 <송화>공주로 <지소>태후의 딸이다.

 

<지소>를 기준으로 역시 종숙질 간이 된다.

 

자식으로 <천명>공주, <선덕>공주가 있다.

 

적자가 없어 13세 <용춘>공의 형 <용수>를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은 왕위를 이을 만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용춘>공을 염두에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선덕>은 <용춘>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용춘>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다시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7).진평+승만황후=아들이 있었으니 일찍 죽음

 

그 때 후비인 <승만>황후가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가계가 불명이라 촌수를 가늠할 수 없다.

 

 

8).진평+보명=양명공주

 

<양명>의 어머니 <보명>은 지소태후와 침신 <구진>의 소생이다.

 

진평제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명>과 <미실>에게 명하여 제를 도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위가 낮고 골이 천하여 <보명>에게 상도를 양보하였다.

 

<보명>은 그 때 <석명>을 가진지 3개월이었기에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미실>이 먼저 사랑을 받았다.

 

제는 양기가 통하게 되자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도할 것을 구하였다.

 

이 해 9월에 제는 <보명>과 <미실>을 좌, 우후로 삼았다.

 

<보명>은 <석명>을 낳고 나서 3년간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양명>을 낳았다.

 

이렇게 <보명>은 진흥과 어머니가 같으므로 조모 항렬에 해당한다.

 

<보종>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자 <미실>궁주가 걱정하였다.

 

<양명>이 꾀를 내어 16세 <보종>공을 유혹하여 <보라>와 <보량>의 두 딸을 낳았다.

 

<양명>은 <염장>공과 혼거하여 아들 <장명>을 낳았다.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하종>공의 아들인데

공주와 더불어 <양도>공을 낳았다.

 

이렇게 공주는 <보종>공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공과 <모종>공을 사신으로 하였다.

 

 

9). 진평+보량(605-)=보로전군

 

<보량>은 <장명>의 손위 누이로 <보로>전군을 낳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보량>은 <보명>의 손녀다.

 

그러므로 항렬 상으로 진평과 같은 재종형제간이다.

 

<승만>후가 질투를 하여 물러나 살 것을 명하고,

장차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보량>은 평소에 <양도>공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

 

<양명>공주가 이에 제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보량>으로 하여금 양도를 배필로 맞게 하면

곧 <보종>의 혈통을 이을 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제가 허락하였다.

 

<보종>공 또한 원하였다.

 

이에 아들 <양효>를 낳았다.

 

<보로>전군에 관해서는 이전 법흥왕와 후궁인 <옥진> 사이에서

난 <비대>전군과 비교된다.

 

당시 비록 성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시 법흥은 <비대>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넘겨줄 생각도 하였다.

 

하지만 진평대에는 전혀 그런 고려가 없고 황후는 오히려 <보량>을 물러나게 하고

타 종실의 신하에게 시집보내려고 까지 하고 있다.

 

<춘추(603-661)>공의 정궁부인인 <보량>궁주는 <보종>공의 딸이다.

 

아름다웠으며 춘추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를 낳아 춘추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보량>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15세 <유신(595-673)>의 동생인 <문희>가 춘추공의 정궁이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보량>궁주가 <양도>공과 함께 산 <보량>과는

다른 인물임이 분명하다.

 

참고로 <<화랑세기>>의 필사자 박창화는

여기서 <보량>궁주를 <보라>궁주로 수정하였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춘추공의 첫 부인은

수정안과 같이 <보라>궁주가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

 

 

10).진평+난야궁주=우아공주

 

<난야>궁주는 진흥과 <미실>의 딸이다.

 

그러므로 이들도 숙질간이다.

 

그의 딸 <우야>공주는 진평제의 소생이다.

 

<보리>공의 처 <만룡>은 20세 <예원>공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명했다.

 

<예원>공과 <우야>의 아들은 28대 <오기>공이며 딸 <온희>는 25세 <춘장>공에게,

<성희>는 <원수>공에게, <우희>는 <마차>공에게 시집을 갔다.

 

 

11). 진평+미실궁주=보화공주

 

<예원>공의 부제 21세 <선품>공은 <미실>궁주의 딸 <보화>공주의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보화>는 <구륜>공에게 시집가서 <선품>을 낳았다.

 

<선품>의 딸 <자의>가 문무왕후이며, 차녀 <운명>은 <오기>공의 부인이다.

 

3녀 <야명>도 문무제의 궁주가 되었다.

 

법흥왕을 기준으로 법흥-삼엽공주-미진부-미실로 연결되고

법흥-지소-진흥-동륜-진평으로 연결된다.

 

그러니 재종숙질 간이 된다.

 

 

12). 진평+석명=두 딸

 

진지왕과 <보명>의 딸인 <석명>공주는 진평과 종형제간이 된다.

 

처음에 진평제를 섬겨 두 딸을 낳고 출궁하였다.

 

<동란>공은 그 때 음성서의 장으로 향가를 잘 하였다.

 

<석명>이 <동란>공에게 가무를 배웠다.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 딸 <석란>을 낳았다.

 

제가 허락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동란>공은 감히 처로 대하지 못하고 군으로 섬기며

자녀를 계속 낳았다.

 

23세 풍월주 <군관>공은 그 네 번째이다.

 

이렇게 3대를 오가면서 무수히 많은 여인을 편력하며 후사를 준비한 진평도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진평의 시대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러 사망 전해인 재위 53년에

칠숙-석품의 난이 있었다.

 

이에 17세 <염장>공이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난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선덕>이 즉위하자 (관에) 들어가 조부의 영이 되었다.

 

일찍이 그의 어머니 <지도>태후가 (진지왕이 죽고) 홀로 되어 진평을 섬겼는데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에게 시집가 <염장>공을 낳았다.

 

이번에는 그의 아들 <염장>공이 다시 진평의 딸 <선덕>에 붙어 발탁된 것이다.

 

 

 

<화랑세기>는 당시 대표 화랑들의 세기이므로 해당시기의 왕가의 직계 혈통에 관하여

모두를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풍월주 등 대표화랑과 관련이 있는 부문만 거론하여도

이렇게 진평의 여인들은 다양하였고 자식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성골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적통 황후 소생의 아들은

말년에야 <승만>후를 통해서 겨우 한명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도 일찍 죽어 결국 성골남진이란 말만 남기고

선덕여왕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 진지왕의 두 가지 죽음

  

먼저「삼국사기」에 기록된 진지왕의 죽음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진흥왕의 아들 금륜인 진지왕은

재위 4년째인 서기 579년 가을 7월 17일에 죽으니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라는 절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진지왕은 왕위에 있다가 죽은 것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 중 하나는 「삼국사기」로는 아주 드물게

왕이 죽은 날짜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주지하다시피 날짜는 중시하지 않았고 월까지만 밝히는 게 통례다.

 

신라에 의한 삼한 통일 이전 왕의 죽음에 대해 구체적인 날짜를 명시한 사례는

제12대 첨해왕(재위 247-261)과 함께 진지왕의 경우가 유일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첨해왕은 재위 15년(261) 겨울 12월 28일에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삼국사기」 체제가 전반적으로 월(月) 중심임에도

첨해왕의 경우 사망 날짜를 밝힌 것은 이른바 기년법 때문이었다.

「삼국사기」는 즉위년 기년법이라 해서

신라는 물론 백제, 고구려에 대한 기록에서도 이 방법을 택하고 있다.

 

즉, 전왕(前王) 재위 마지막 해를 새로 즉위한 왕의 원년으로 삼았던 것이다.

 

하지만 첨해왕의 경우 공교롭게도

사망 일자가 한 해가 다 끝나가는 12월 28일이었으므로

그가 죽은 해가 뒤를 이어 즉위한 미추왕의 즉위 원년이 될 수는 없었다.

미추가 정확히 몇 월 며칠에 즉위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틀림없이 첨해왕 사망 이듬해 1월 초순 무렵에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첨해왕의 경우 사망 날짜까지 「삼국사기」는 밝히게 된 것이다.

 

 

첨해왕 15년(A.D.324)

 

9월 아후(阿后, 아이혜)가 (조분의) 딸 광명(光明)을 낳았다.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11월 왕과 아후(阿后)가 해택으로 들어갔다.

 

12월 부군(副君)이 해택(海宅)에서 조회를 받고, 진재(眞齋)를 베풀었다.

왕이 아후(阿后, 아이혜)와 부군(副君, 미추)과 함께

운제산당(雲梯山堂)에 가서 대일제(大日祭)를 행하고 해택(海宅)으로 돌아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는데 28일의 저녁이었다.

 

부군(副君)에게 즉위하도록 유명(遺命, 임금이나 부모가 죽을 때 남긴 명령)을 남겼다.

 

부군이 고사(固辭)하여 피하여 숨었다.

 

아후(阿后)가 눈을 무릅쓰고 부군이 숨어 지내는 야인(野人)의 집에 이르러,

함께 말을 타고 돌아와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이 때가 청계(靑鷄=乙酉, 325년) 원단(元旦, 1월1일)이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신라사초에서는 선양하였다 하지만 행간을 들여다보면

<아이혜>와 <말흔>, <말구>, <훤술>등이 공모하여 <첨해>를 독살한 것으로 보인다.

 

첨해왕(274-324)은 재위 15년째인 324년 12월 28일 51세에 독살 되었다.

 

그리고 미추왕이 325년 1월1일 즉위하였다.

 



이런 전례에 미뤄보면「삼국사기」에서 유독 진지왕에 대해서만

사망 일자까지 남기고 있는 데는 틀림없이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기록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여기서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는「삼국유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 설화에는 진지왕이

신라 제25대 사륜왕(舍輪王)으로 등장하거니와 진지는 그의 시호라고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지는 대건(大建) 8년 병신년(576)에 즉위해

나라를 다스린지 4년만에 정치가 문란하고 음탕하게 놀아(政亂荒淫)

임금 자리에서 축출됐다 하고 있다. 

진지왕은 축출과 더불어 이내 사망했다고「삼국유사」는 덧붙이고 있다.

 

이에 바로 뒤이어 그 유명한 도화녀-비형랑 설화가 나오고 있다.

어떻든 「삼국사기」든 「삼국유사」든 진지왕은 재위 4년째에 죽었다고  했다.

 

한데 두 기록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즉「삼국사기」는 진지가 왕으로 있다가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하는데 비해「삼국유사」는  진지가 쫓겨난 뒤 죽었다고 하는 점이 그것이다.

「화랑세기」필사본에는「삼국유사」처럼 진지가 쫓겨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필사본에는「삼국유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으니

첫째, 진지를 쫓아낸 주축이 미실을 비롯한 궁중 여인들이라는 점이요,

둘째, 진지는 축출된 뒤 유궁(幽宮)에

3년 동안이나 유폐돼 있다가 죽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화랑세기」에는 도화녀라는 여인은 물론이고 그와 진지에 얽힌 설화도  없다.

 

다만 비형랑이라는 인물만 등장하고 있으니 13대 풍월주 용춘공전에

"(용춘이)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庶弟) 비형랑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고 하고 있다.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 진지왕의 아들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공히 전하고 있다.

 

따라서 비형랑 또한 진지왕의 아들이니 김용춘에게는 서제,

즉 서출 동생이 되는 것이다.

진지왕이 3년 동안 유폐 생활을 했다는 필사본 기록이야말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화녀-비형랑 설화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일거에 풀어주는 모든 키워드가  들어 있다.

 

무엇이 그런가?

첫째, 진지왕은 축출됐으며 곧바로 죽지 않고 3년 동안 유폐 생활을 했다.

 

둘째, 그 유폐생활 동안 진지는 도화녀라는 여인과 관계했다.  

 

셋째, 이들 사이에 난 결실이 비형랑이라는 아들이다.

 

넷째, 그러므로 비형랑은 용춘과는 어머니가 다른 형제가 된다.

 

다섯째, 비형랑이 밤마다 부린 귀신은 실은 화랑의 무리였다.

 

여섯째, 따라서 비형랑이 진평왕에게 천거한 귀신 길달 역시 화랑이었다.

「삼국유사」에서 비형랑이 죽은 진지가 낳은 아들로 기록되고,

진지가 도화녀와 이레 동안 머물 때

"언제나 오색 구름이 지붕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는 기록은

진지왕의 유폐 생활을 상징화한 설화 장치임에 틀림없다.

어느 누구도 지금껏 도화녀-비형랑 설화를 이렇게 풀지 못했다.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는 가짜이므로

나는 필사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노라고 공언하고 다니던 국내 한 고대사 연구자가

이 설화에 숨은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고드는 작업에 뛰어들었는데,

아주 역설적이게도 그의 연구 성과는  필사본이 가짜가 아님을 증명하고 말았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