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제  2년(655)조 기록을 보면

<금강金剛>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봄 정월에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으로 삼고, 파진찬 문충(文忠)을 중시로 삼았다."

고 하고 있다.

 

이때라면 <김춘추> 왕 만들기 1등 공신인 <김유신>이 만 60세가 된 해이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얼마나 돈독한 관계인지는

재방송이 필요없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더구나 이 때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는 김춘추의 아내이자 황후였다.

 

그럼에도 <김춘추>는 즉위한 후 처음으로 단행한 중요 인사에서 최고위직  상대등에

60세나 된 <김유신>을 제치고 <금강>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을 등용하고 있다.

 

여기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도 있다.

 

당시 <김유신>은 상대등 자리가 아니어도 그에 준하는 자리에 있었으리라고.

하지만 이런 반박은 같은 신라본기 무열왕7년(660)조에

"봄 정월에 상대등 <금강>이 죽었으므로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는 기록에 맞닥뜨리면서 설득력을 상실한다.

 

<김유신>은 만 65세에, 그것도 <금강>의 죽음을 기다리고 나서야 상대등이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첫째, <금강>이 <김유신>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며  

둘째, 그가 <김춘추>나 <김유신>조차 무시 못 할 존재였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도대체 <금강>은 누구인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유감스럽게도  

<금강>에 대한 기록이 위에서 든 두 군데가 전부다.

 

<금강>은 상대등으로 나타났다가 상대등으로 사라지고 있다.

 

한데 이 <금강>이란 인물이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8대 풍월주를 지낸 인물로 <문노文弩(538-606)>라는 이가 있다.

 

전임 풍월주들과 달리 무사적 기질이 농후하다.

 

주된 활동 시기는 진흥왕-진지왕 재위 무렵이다.  

 

필사본에는 삼한 통일을 이룩한 뒤 <김유신>은

그를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았다."고 하고 있으며,

죽은 <문노>의 화상이 포석사(포석정)에 모셔졌다고 한다.

 

이로보아 <문노>는 신라의 영웅 <김유신>의 영웅이자 신라인  모두의  영웅이었다.

 

실제 「화랑세기」에 그려진 <문노>의 활약상은 뒷 세대인 <김유신>에 필적한다.

 

필사본이 신라시대 작품이라면

우리는 <문노>라는 또 한 명의 신라 영웅을 만나게 된다.

 

고구려장수 <온달>은 정확히 언제 신라와 싸우다가 전사했는지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라-고구려 전투정황으로 보아

<온달>을 전사하게 한 신라군 주축은 놀랍게도 <문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노>는 언제 때 사람인가?

 

「삼국사기」권 제47 (열전 제7)  <김흠운>전을  보면

 

<김흠운>은 내물왕 8세손으로

무열왕 2년(655) 백제와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있다.

 

이 때 그의 직책이 낭당(郎幢) 대감이라 했다.

 

죽을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 기록이 없다.

 

한데 같은 <김흠운> 열전에는

 

그가 어려서는 화랑 <문노文努> 문하에서 놀았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문노>가 <김흠운>보다 앞선 세대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 등지의 다른 기록에는

<문노>는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화랑세기」 필사본은 8대 풍월주 <문노>에 대해

진지왕 폐위에 관여한 공으로 선화(仙花), 곧 풍월주가 되고

 

이에 덩달아 관위 또한 아찬에 이르러 없던 골품까지 얻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모계 쪽이 가야인 그는 건복 23년(606)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보아  문노는 538년생이다.

 

 

그의 아내 <윤궁>은 진흥대제 무렵 신라 황금시대를 연 거칠부(일명 황종)의 딸로서

처음에는 진흥대제의 장자인 <동륜>태자를 섬겼다.

 

 

하지만 남편 <동륜>이 진흥대제 33년(572) 아버지의 후궁인

<보명>이 사는 궁궐  건물인 보명궁 담장을 뛰어넘다가

큰 개에게 물려죽음으로써 과부가 되어 5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홍제(진흥대제 때 연호) 5년(576) 10월에

<지도>황후(진흥왕비)가 <문노>를 국선(國仙)으로삼으면서

그에게 <윤궁>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도록  했다고  필사본은 전하고 있다.

 

선모로 삼았다 함은 국선의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뜻이다.

 

<윤궁>에게  문노는  두 번째 남편인 셈인데

이와 같은 뒷남편을 필사본은 '계부'(繼夫)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데 <윤궁>에 대해 필사본은 <문노>보다 10살이 적고

그와 같은 해에 죽었다고  했으니

<윤궁>은 548년에 출생해 57세가 되던 서기 606년에 사망한 것이 된다.

 

<문노>와 <윤궁> 사이에는 3남 3녀가 있었다.

 

 

아들로는 <대강大剛>, <충강充剛>, <금강金剛>이 있었고,

딸로는 <윤강允剛>, <현강玄剛>,<신강信剛>이  있었다.

 

 

<금강>은 <문노>의 세 아들 중 막내였다.

 

이로 보면 <금강>은 적어도 <문노>가 사망하는 606년 이전에 출생해야 하며,

또 <문노>와 <윤강>이 결혼한 572년 이전에는 출생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윤강이 임신할 수 있는 연령을 넉넉잡아 50세(599년)까지로 가정하고

막내 아들임을 고려한다면 금강은 대략 580-590년에 출생했음이 틀림없다.

 

595년생인 <김유신>보다 나이가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는 출신 배경으로 보아 나중에 그 화상이 포석사에 모셔지고

<김유신>이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받든 '대영웅' <문노>의 아들이었다.

 

이런「화랑세기」필사본을 통해 우리는 <문노>의 아들 <금강>이

왜 60세나 되던 <김유신.보다 앞서

서기 655년 상대등에 임명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필사본이 지닌 위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