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문 가운데 본기(本紀)는

표현이 대단히 체계적이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그 서술 방식은 어느 왕 재위 몇 년째 어느 달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식이다.

 

한데 이런 본기 체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뚱딴지같은 사건이 더러 기술돼 있다.

 

마치 오리 떼에 낀 한 마리 백조처럼 이질적이라고 할까?

 

그 대표적인 보기로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평왕 9년(587)조에 나오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이라는 두 인물에 관한 기사가 있다.

 

꽤 길지만 전체를 인용한다.

 

가을 7월에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바다로 떠났다.

 

<대세>는 내물왕 7세손인 이찬 <동대冬臺>의 아들인데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승려 <담수淡水>와 사귀며 놀던 어느 날 말했다.

 

“이 신라의 산골에 살다가 일생을 마친다면 못(池) 속의 물고기와 새장의  새가

푸른 바다의 넓음과 산림의 너그럽고 한가함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오월(吳越)에 이르러 차츰 스승을 찾아

명산에서 도(道)를 물으려 한다.

 

만약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神仙)을 배울 수 있다면,

텅 비고 넓은 허공 위를 바람을 타고 훨훨 날 수 있을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놀이요, 볼만한 광경일 것이다.

그대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담수>는 이를 반기지 않았다.

 

이에 <대세>는 물러나 다시 함께 떠날 벗을 구했는데,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기개가 있고 절조가 뛰어났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南山)의 절에 놀러갔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와 나뭇잎이 떨어져 뜰에 고인 물에 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유람할 마음이 있는데,

지금 각자 나뭇잎 하나씩을 집어 그것을 배로 삼아

누구의 것이 먼저 가고 뒤에 가는지를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이 앞섰으므로 <대세>가 웃으면서

 

“내가 먼저 갈까 보다”고 하니,

 

<구칠>이 화를 발끈 내며 말하기를

 

“나 또한 남자인데 어찌 나만 못 가겠는가” 라고 말했다.

 

<대세>는 그와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고 속내를 은밀히 말했다.

 

<구칠>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바라던 바” 라고 했다.

 

드디어 서로 벗 삼아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가 버렸는데,

뒤에 그들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이 기록을 왜 뚱딴지라 하는가?

 

미운 오리새끼처럼 이 기록은 따로 놀고 있기 때문이다.

 

<구칠>과 <대세>는 「삼국사기」에 난데없이 튀어나와 난데없이 사라지고 있다.

 

또 이들에 얽힌 사연이 진평왕 당대 신라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구칠>과 <대세>가 왜 신라를 떠나야 했는지에 대해

「삼국사기」는 속세에  뜻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리고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신선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어 난데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어쨌다고?

 

여기에 대해 「삼국사기」는 어떠한 해답도 줄 수 없다.

 

<대세>와 <구칠>이  신라를 훌쩍 떠났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의혹투성이인 이 사건은 「화랑세기」를 만나 비로소 풀린다.

 

이들이 신라를 왜 떠나야 했는지,

좀 더 정확히는 이 사건이 왜  「삼국사기」에도 남게 되었는지,

지금껏 종잡을 수 없었던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화랑세기」에는 <대세大世>라는  인물이  9대 풍월주 비보랑 전에

<동대冬臺>공(公)의 아들로 모습을 들이민다.

 

<대세>가 <동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삼국사기」와 일치하고 있다.

 

필사본에 이르기를 <비보>랑은 <대세>가 뛰어난 재주가 있으므로

그를 화랑도 상층부를 이루는 핵심 직위의 하나인 전방화랑에 앉히려 했다고 한다.

 

<비보>랑은 어머니가 <실보實寶>였다.

 

<실보>에게는 손아래 여동생이 있었으니 이름을 <골보骨寶>라 했고

<대세>는 그 아들이었다.

 

따라서 <대세>는 <비보>랑과 종형제가 된다.

 

<비보>랑은 풍월주 자리를 <미생>에게 물려준다.

 

<미생>은 진흥, 진지, 진평에 이르는 3대 왕을 대대로 섬긴 <미실>이라는 여인의

남동생으로 10대 풍월주에 취임한다.

 

<비보>랑은 물러나면서 <미생>에게 부탁해 <대세>를 전방대화랑 자리에 앉힌다.

 

하지만 <대세>는 이내 밀려나고 만다.

 

왜 그랬는지 필사본 설명은 이렇다.

 

신임 풍월주 <미생>은 첩을 아주 많이 거느렸는데

애첩 중 한 명에게 <제문랑諸文郞>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이 <제문랑>이 누나의 권세를 빌려 <대세>를 밀어내고

전방대화랑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았던 것이다.

 

한데 축출 명분이 필요했던 듯,

<대세>에게는 유화(柳花)를 탐하고 폭음하며 행동이 거칠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실제 <대세>에게는 이런 성격이 있었던 것 같다.

 

후견인격인 <비보>랑이 그에게 술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했다고 필사본에도 나온다.

 

술과 신선을 뗄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데 <대세>는 자기를 중국 역사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알려진

<완적>과 <모랑>에 비교했다고 한다.

 

하기야 <대세大世>라는 이름조차 그가 도가에 심취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이에 대해 「화랑세기」는 <미생>랑이 전임 풍월주인 <비보>랑의 청에 못이겨

<대세>를 전방대화랑 자리에 앉히기는 했으나 실권은 주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대세>는 <미생>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대세>는 그만 술병이 도지고 <미생>을 가리켜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가뭄을 불러왔다."고 욕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대세>가 신라를 떠나 서해 바다로 사라지기 2년 전인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평왕 7년(585)조 기록을 보면

"봄 3월에 가물었으므로 왕이 정전(正殿)에 거처하기를 피하고

평상시의 반찬 가짓수를 줄였으며,

남당(南堂)에 나아가 몸소 죄수의 정상을 살폈다."

는 기록이 나오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어떻든 <대세>는 급기야 화랑도에서 쫓겨나고 만다.

 

「화랑세기」는 이어 <대세>가 <비보>랑의 위로를 받아 분발하고 힘써 공부해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친구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고  하고 있다.

 

「화랑세기」는 <구칠> 또한 <비보>랑을 따르는 화랑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필사본 기록들을 살펴보고 난 후에도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대세>와 <구칠>의 수수께끼 같은 증발 사건이 왜 「삼국사기」에도 남게 되었을까?  

 

그만큼 <대세>와 <구칠>의 증발이

당대 신라인들에게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대한 단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있다.

 

여기에는 <대세>와 <구칠>이 떠나자

전임 풍월주 <비보>랑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했다고 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이 사건이 「삼국사기」에 남은 까닭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은 <대세>와 <구칠>의 증발이

실은 화랑도가 각 계파로 갈라지는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화랑세기」는

떠나가는 <대세>와 <구칠>을 가지 말라고 힘써 달랬으나 실패하니

이로 인해 마침내 화랑도의 당파가 나뉘었다고 하고 있다.

 

필사본에 따르면 화랑도는 <미생>이 풍월주로 재임할 무렵에 5개 파로 쪼개졌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는 통합원류파라 해서 8세 풍월주 문노를 따르는 무리 중에서도

최정예로 <임종>, <대세>, <수일>이 주축이었다.

 

두 번째는 <하종>과 <구륜>공이 중심을 형성해 대원신통을 받들려 한 미실파이다.

 

세 번째는 <보리>랑과 <숙리부> 중심으로 진골 정통을 받들려는 문노 일파이며,

 

네 번째가 <정숙>태자를 풍월주로 삼고 <원광>을 부제로 삼으려 한 이화류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천주>공을 풍월주로 하고

<서현>랑을 부제로 삼으려 한 가야파가 있다.

 

신라 화랑도는 <비보>랑과 <미생>랑이 풍월주로 있던 시대에 이르러

이렇게 5개 당파로 쪼개지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재위 9년 조에

<대세>와 <구칠>에 대한  행적이 남게 된 까닭이

화랑도의 분열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래야 뚱딴지같은 이 기록은 비로소 그 뚱딴지성이 해명된다.

 

더불어 우리는「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대세>와 <구칠>이라는 인물이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이들이 스승을 찾아 명산에서 도를 물으려 하고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神仙)을 배우려는 부류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실은 화랑도였음을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다.

 

필사본이 가짜라면 그 창작자는 김부식과 헤로도투스를 아울러 능가하는

위대한 역사가이자 소설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