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론」은 서울대국사학과 학술 기관지다.

 

1974년 창간호 이후 매년 연말에 한 번씩 내는데

1999년 12월에는 통권 41.42호가 합쳐서 나왔다.

 

이 합집은 이 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일계(一溪) 김철준(金哲埈.1923-1988)

10주기 추모특집이었다.

 

1천 쪽이 넘는 방대한 이 논문집에는 추도사를 뺀 순수 논문이 23편 실렸다.

 

이중 한 편이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설화'란 제목을 달고 있다.

 

필자는 건국대 사학과 김기흥 교수.

 

이 논문은 몇 달 뒤인 2000년 4월「천년의  왕국신라」라는 김 교수의 단행본에

각주만 뺀 채 전재됐다.

 

이 논문이 주장하는 골자를 추려본다.

  

첫째,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라는 두 가지 이름이 있는 진지왕의 아들은

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비형랑>이다.

(김 교수는 김용춘, 김용수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한다.

 

김용춘=김용수=비형랑.

 

한사람이 세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필사본에는 이들 두 사람은 형제로 나온다.

 

둘째, <비형랑>은 화랑이었다.

 

따라서 김용춘, 김용수, 혹은 비형랑은 화랑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셋째, 진지왕은 축출된 뒤 곧바로 죽지 않고 3년 정도 더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진지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연사망설(삼국사기)과 폐위 직후 사망설(삼국유사)의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김 교수는「삼국유사」의 폐위설을  취하면서도

진지가 유폐 생활을 했을 가능성을 추가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실로 담대하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이름이 비형랑이든, 김용춘이든

이들이 화랑이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김 교수가 내세운 근거는 무엇일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만 골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용춘> 혹은 <용수>의 다른 이름인 <비형랑>이 부렸다는 귀신은

「삼국유사」기록을 여러 모로 보건대 실은 화랑도이다.

 

이런 화랑도를 부렸으므로 <비형랑>은 당연히 화랑이다.

 

둘째, 진지왕이 폐위된 뒤 한동안 유폐 생활을 했으리라는 방증 자료로

경북 영일 냉수리비라는 고 신라 비문에 등장하는 지도로 갈문왕(지증왕)을 제시한다.

 

지증왕 재위 4년째인 서기 503년에 건립된 냉수리 비문에는

지증왕이 '왕'이 아니라 뜻밖에도 '갈문왕'이라는 칭호로 나온다.

 

이에 대해 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교수 같은 이는

지증왕 바로 전왕인 소지왕이「삼국사기」기록처럼

서기 500년에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실제로는 강제로 폐위돼

한동안 유폐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고 추정했다.

 

다시 말해, 즉위 이전 갈문왕이었던 지증은 냉수리 비문이 건립되던 503년 무렵까지는

폐위된 소지왕이 여전히 살아 었었기 때문에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갈문왕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갈문왕의 실체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이런 정 교수의 해석을 원용해

김 교수는 진지왕 또한 폐위된 뒤 얼마 동안  유폐 생활을 했으리라 본 것이다.

 

근거야 어떻든 김 교수의 이런 주장은

「화랑세기」필사본이 진짜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이름이 <비형랑>이든 <용춘>이든 <용수>든 상관없이 이들이 화랑이었으며

진지왕이 한동안 유폐 생활을 했다는 기록은

이 지구상에서 오직「화랑세기」필사본에만  나온다.

 

「삼국사기」,「삼국유사」어디를 뒤져봐도

김용춘(김용수) 혹은 비형랑이 화랑이라는 기록은 없다.

 

과정이야 어떻든 김 교수가 도달한 결론은「화랑세기」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김 교수는「화랑세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뜻밖에도 가짜라고 했다.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가 필사본 「화랑세기」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문제의  비형랑-도화녀 설화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잘 드러난다.

 

이 글 어디에서도 「화랑세기」필사본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어떻든「화랑세기」필사본을 가짜라고 자신하는 그가 내놓은 연구 성과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진짜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화랑세기」필사본 출현이후 학계가 가장 놀란 것은

단연 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용수龍壽>와 <용춘龍春>이 여기에는 형제로 나오고 있다는 대목을 꼽을 수 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 모두 김용수 혹은 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춘추의 아버지라고 나온다.

 

전남대 이강래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국내외를  통틀어 한국 고대사 어느 연구자도

<용수>와 <용춘>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는 없다.

 

하지만 필사본에서는 <용수>, <용춘>이 같은 사람의 두 이름이 아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처럼 진지왕의 아들이기는 하되 형제로 등장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동생인 <용춘>은 13대 풍월주를 역임한 것으로 돼 있다.

 

김춘추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용수>가 친아버지이며

작은 아버지 <용춘>은 형 <용수>가 죽은 다음에

형수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조카인 김춘추를 각각 처와 아들로 삼았다고 하고 있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김용춘은 천명부인의 '계부'(繼夫)가 되며 김춘추의 '의부'(義父)가 된다.  

 

이런 기록은 필사본이 소설적 창작품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금껏 당연히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김용수-김용춘이

실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강력한 추정을 제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제 이런 중요성을 주목한 학계에서는

필사본 기록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를 시도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이강래 교수와 함께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가 있다.

 

<용수>와 <용춘>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필사본처럼 다른 사람인가를 접근한 방법은

두 교수가 달랐으나 결론은 같았다.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런 주장이 성립한다면 필사본 진위 논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용수와 용춘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용수와 용춘은 학계가 믿고 생각한 것처럼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필사본 기록대로 다른 사람인가?

 

이를 위해 우선 필사본은 논외로 치고「삼국사기」,「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용수 혹은 용춘에 대한 기록을 모조리 뽑아 접근해야 한다.

 

먼저,「삼국사기」다.

 

용수와 용춘이 어떤 순서와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예컨대 단독으로 등장하는가,

어떤 관위(官位)를 지니고 있는가를 아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진평왕44년(622) 대목을 보면

 

① 이 해 2월에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아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의 3궁을 모두 관장하게 했다."고 하고 있다.

 

용수라는 인물이「삼국사기」에서 가장 먼저, 그것도 단독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용춘이라는 이름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다음은 이보다 7년 뒤인 같은 진평왕 재위 51년(629) 기록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②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 서현(舒玄)과 부장군(副將軍) 유신(庾信)을 파견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게 했다."

 

<서현>은 김유신의 아버지다. 부자가 함께 낭비성 전투에 출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신라군을 이끈 대장군으로 김서현과 함께 용춘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이「삼국사기」에서 용춘이 등장하는 첫 번째 장면이다.

 

용수라는 이름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이 순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여기까지만 보면 용수와 용춘은 누가 봐도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보다 6년이 더 지난 뒤인

선덕왕 재위 4년(635)조의 다음 기록으로 발길을 옮기면 상황이 아주 달라진다.

 

③ "10월에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현(州縣)을 돌며 백성을 위로하게 했다."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용수, 혹은 용춘이라고도 한다'

(龍樹, 一云 龍春)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사정은 서기 654년 태종무열왕 즉위년 조 기록에 가면 비슷하게 반복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④ "왕은 생전 이름이 춘추이니

진지왕 아들인 이찬 용춘(龍春, 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

4월, 돌아가신 왕의 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라 했다."

 

③과 ④의 기록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관찰된다.

 

용수와 용춘이 서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어떻든 학계에서 용수 혹은 용춘을 같은 사람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봤던 까닭은

뒤에서 다룰「삼국유사」관련 기록 및 이 두 기록(③과 ④)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록은 두 사람을 같은 인물로 본 의미없는 자리바꿈인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앞서가려 뽑은 용수 혹은 용춘에 관련된「삼국사기」기록을

등장 순서대로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용수를 A라 하고 용춘을 B라 했다.

 

    ①622년 ---- 용수(龍樹 : A)

    ②629년 ---- 용춘(龍春 : B)

    ③635년 ---- 용수 혹은 용춘(龍樹 一云 龍春 : A 一云 B)

    ④654년 ---- 용춘 혹은 용수(龍春 一云 龍樹 : B 一云 A)

 

지금까지,즉 적어도 필사본 출현 이전까지,

모든 한국 고대사 연구자는 ③과 ④에 등장하는 '일운'(一云)이라는 구절을 주목해서

용수와 용춘은 같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였다).

 

왜 그런가?

  

「삼국사기」나「삼국유사」를 보면 같은 사람,

같은 사물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을 표시할 때

'일운'(一云)이나 '일작'(一作), '혹운'(或云) 같은 표현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모두 같은 뜻인데 '혹은 ~라고 한다'고 옮길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다른 모든 곳에서 '일운'(一云)

혹은 이와 비슷한 표현이 그렇게 사용됐다 해서

'龍樹 一云 龍春'이나 '龍春 一云 龍樹'

또한 그렇게 사용됐으리라 단정해서는 안 된다.

 

위 표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듯 「삼국사기」 등장 순서를 보면  

분명 용수가 먼저 단독으로 나오고 그 다음으로 용춘이 역시 혼자서 모습을 보인다.

 

그런 다음에야 용수와 용춘은 '일운'(一云)이라는 표현으로 한 묶음되고 있는 것이다.

 

용수와 용춘이 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기록되지 않는다.

 

만약 이들이 같은 사람이라면

용수 혹은 용춘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진평왕 44년(622년)조 기록에

'龍樹 一云 龍春' 혹 '龍春 一云 龍樹'라는 표현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용수와 용춘이 정말로 같은 인물이라면

'一云'을 이용한 표현은 맨 먼저 나오는 한 군데로 족하다.

 

③과 ④처럼 두  번씩이나 같은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③과 ④에서 쓰인 '一云'이라는 말에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 같은 사람, 같은 사물의 다른 이름을 표시할 수도 있고,

둘째  각기 다른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택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한층 차이가 분명해 진다.

 

예컨대 'A 一云 B'는 다음 두 가지로 영역된다.

 

첫째는 'A, also called B'(A는B라고도 일컫는다). 이 경우  A=B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두 번째는 'either A, or B'(A이거나 B 둘 중하나). 이 경우 A≠B로서 두 가지는 다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껏 모든 연구자는

'용수 一云 용춘'을 'A, also called B'라는 의미로만 해석하고 말았으며

그리하여 용수와 용춘은 다른 인물임에도

같은 인물이라고 철석같이 믿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덕왕 재위 4년(635) 10월조 「삼국사기」 기록은

이찬 수품(水品)과 함께 주현(州縣)을 돌아본 인물은 용수라고 하지만

용춘이라는 다른 주장(혹은 기록)도 있다는 뜻이며

태종무열왕 즉위년 조 같은「삼국사기」기록 또한

김춘추의 아버지는 용춘이라고 하지만

용수라는 다른 주장(혹은 기록)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그렇다면「삼국유사」에는 어떨까?

 

순서대로 용수-용춘을 뽑아 추린다.

 

①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이름이 김춘추로서

용춘(龍春), 즉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의 아들이다.

용춘은 용수(龍樹)라고도 한다(龍春 一作 龍樹) (왕력편)

  

② 제29대 태종대왕은 이름이 김춘추로서 용수(龍樹. 용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 즉 추봉된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다.(기이편)

  

③ 정관(貞觀) 17년(643)...백제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돌과 나무를 재단했는데 이간(伊干)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이

그 일을 주관했다.(탑상편)

 

여기서는「삼국사기」에서 사용한 '일운'(一云)이라는 표현 대신에

같은  뜻을 지닌 '일작'(一作)을 이용해 용수와 용춘을 연결하고있다.

 

「삼국유사」에서도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용수와 용춘이 같은 인물이라면

이런 표현은 가장 먼저 나오는 ① 한 군데로 만족할 뿐

세 군데 모두 번거롭게 '一作'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삼국유사」찬자인 일연 또한

용춘과 용수를 별개의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두 이름이 다른 인물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이종욱 교수가 지적한 것인데,

같은 인물로 보았을 경우 용수 혹은 용춘이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관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우선 지적 된다.

 

지극히 상식적으로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관위는 올라가야 함에도

용수 혹은 용춘을 한 인물로 볼 경우

비유컨대 국장에서 과장으로 강등되고 있는 모습이 관찰된다.

 

두 번째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대목인데,

작명법(作名法)으로 보아 '용수'는 결코 '용춘'과 같은 별명을 가질 수 없으며

신라인들이 형제간에 돌림자를 쓴 경우가  흔히 있다는 사실이다.

 

신라인들이 돌림자를 쓴 사례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용수(龍樹)와 용춘(龍春)의 龍 역시 돌림자임이 확실해지며

이에 따라 이 둘은 한 사람이 아니라 형제로 밝혀지게 된다.

 

학계가 그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김용수와 김용춘을 한 사람이라고 보았으나

정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기록을 검토할  때

오히려 필사본 기록처럼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농후함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런 농후한 가능성을 아주 확정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까?

  

앞서 우리는「삼국사기」에서 김용수 혹은 김용춘이 등장하는 장면을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만 뽑아 봐도 네 군데가 있음을 확인했다.

 

한데 빠뜨린 곳이 한군데 있다.

 

전형적인 기전체 사서인「삼국사기」는 전체 50권 중

'열전'(列傳)이라고 하는 인물전기 부분에 10권을 배치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 있듯이, '열전'중 김유신 한 인물에만 3권이나 배치하고 있으며,

양으로만 보면 '김유신전'은 전체 열전의 절 반 가량이나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얼마나 김유신을 중시했는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열전은 김유신이 출전한 낭비성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① "건복(健福) 46년(629) 기축(己丑) 8월에

왕이 이찬(2위) <임영리任永里>와 파진찬(4위) <용춘龍春>ㆍ<백룡白龍>,

소판(3위) <대인大因>ㆍ<서현舒玄>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치게 했다."

 

건복은 진평왕 때 제정한 신라 연호.

 

여기서도 분명 용춘은 용수라는 별다른 언급 없이 혼자서 등장하고 있다.

 

이 전쟁에 37세 김유신은 중당당주(中幢幢主)라는 일종의 예하 부대사령관

직위를 갖고 출전한 것으로 열전은 덧붙이고 있다.

 

한데우리가 아주 주의해야 할 대목은

이 때 김용춘의 관위(官位)가 4등 파진찬이라는 점이다.

 

이 사건은 신라본기 진평왕 재위 51년(629)조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②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쳤다."

 

같은 사건에 대한 두 기록을 비교 검토할 때 열전 기록(①)이 일종의  원본이며

신라본기(②)는 이것을 대폭 축약해 실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낭비성 전투의 신라군 총지휘관은 <임영리>라는 인물임에도

본기는 용춘과 서현, 김유신만 남기고 있다.

 

낭비성전투처럼「삼국사기」에는 같은 사건을 중첩해서 다루고 있는 곳이  더러 있다.

 

우리는 이 낭비성 전투 장면을 묘사한 본기와 열전 기록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본기를 어떻게 편집했는지 생생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본기가 원 자료를 대폭 잘라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삼국사기」 편찬진의 취사선택 의지가 분명히 개입돼 있다.

 

「삼국사기」는 이들 세 인물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런 의도에 따라 총지휘관인 <임영리>를 비롯한

다른 주요 지휘관은 본기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낭비성전투의 경우는 다행히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는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기에 망정이지

그들의 취사선택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인물,

얼마나 많은 사건이 기록에서 탈락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삼국사기」가 어떤 원칙, 어떤 목적에 따라 취사선택을 했는지는

더욱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삼국사기」는 20세기 최대의 역사가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빌리면

전통을 창출한 것이며 결코 신라, 고구려, 백제의 목소리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기는 하나

셰익스피어의 산물이지 결코 그리스의 작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점「화랑세기」필사본을 대할 때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필사본이 진정 신라시대 신라사람 김대문의 작품을 베낀 것이라면

고려시대에 창출된 삼국시대 역사인「삼국사기」혹은「삼국유사」와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같은 사건인데도 본기(②)의 경우

김용춘을 대장군이라고만 했으니 관위를 알 수가 없다.

 

대장군은 파진찬도 될 수 있고 소판도 될 수 있다.

 

반면 열전에는 김용춘의 관위가 4등 파진찬이라고 명백히 나와 있다.

 

이점을 기억하고는 타임머신을 타고 7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이때는 진평왕 재위 44년(622)이다.

 

이 해「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③ "봄 정월에 왕이 몸소 황룡사에 거둥했다.

2월에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

일찍이 왕 재위7년(585)에  

대궁(大宮)ㆍ양궁(梁宮)ㆍ사량궁(沙梁宮)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이때 이르러 내성사신 한사람을 두어 세 궁(宮)의 일을 모두 관장하게 했다."

 

여기서 분명 용수는 관위가 2등 이찬이다.

 

김용수와 김용춘을 같은 인물로 본다면 아주 희한한 현상이 벌어진다.

 

622년에 2등 이찬(③)이었던 사람이

7년 뒤에는 2단계나 떨어진 파진찬(①)으로 강등된 것이다.

 

이는 국장이었던 사람이 계장이 된 것과 같다.

 

물론 강등될 수도 있다.

 

예컨대 반란에 연루된다거나 실정(失政)을 저질러 관위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그렇다"는 말은 번갯불과 반딧불의 차이다.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지극히 순리대로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용수와 용춘의 경우 순리는 무엇인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 다른 인물로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용수와 용춘은 다른 인물이다.

 

그래도 여기에 수긍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또 다른 근거가 기다리고 있다.

 

신라인이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명확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예컨대 김춘추(金春秋.604-661)는 틀림없이 중국 고전인「춘추」(春秋)에서

이름을 따왔을 것이다.

 

따라서 '춘추'는 중국식이름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김춘추와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아주 드물게 작명 내력이 남아 있는 김유신(金庾信.595-673)에게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는 그의 출생을 예고하는 태몽이 실려 있다.

 

김유신은 아버지가 김서현이며 어머니는 만명부인이다.

 

만명은 할아버지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立宗) 갈문왕이며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열전에 의하면 김유신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이 모두 태몽을 꾼다.

 

한데 태몽 날짜가 달랐다.

 

김서현은 경신일(庚辰日)이었고 만명은 신축일(辛丑日)이었다.

 

이에 서현은 아들이 태어나자

자기가 태몽을 꾼 날인 경신(庚辰)의 경(庚)이 '유'(庾)라는 글자와 통하고

신(辰)은 '신'(信)과 발음이 같으므로 유신(庾信)이라 이름 했다고 열전은 전하고 있다.

 

김서현은 마침 중국에서 글로 이름 높은 유신(庾信)이라는 인물이 있었으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 아들 이름을 지었다고「삼국사기」는 덧붙이고 있다.

 

이로써 '유신'이라는 이름 또한 '춘추'처럼 전형적인 중국식임이 확인된다.

 

신라의 작명법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불교식 이름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6-7세기 중고(中古)시대 신라왕들의 시호(諡號)인  

법흥(法興)-진흥(眞興)-진지(眞智)-진평(眞平)-선덕(善德)-진덕(眞德)은

불교적 색채를 농후하게 풍기고 있다.

 

이런 이름들에는 그 시대 신라의 사회상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신라의 불교는 이차돈의 순교에서 볼 수 있듯이

법흥왕 이후 국교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이에 덩달아 신라왕의 지위 또한 부처와 동격화 된다.

 

아마도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농후한 신라 고유의 신앙 체계에

법흥왕 이래 불교라는 확실한 교리와 위계를 갖춘 외래 종교가 덧씌워짐으로써

무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 신라왕은 살아 있는 부처로 둔갑 혹은 승격했을 것이다.

 

신라사람 들의 이름에 불기 시작한 불교화 바람은 진흥왕의 경우 두 아들 이름을

불교 설화인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빌려온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으로 지었다는 점에서도 우뚝하게 관찰된다.

 

부처와 동격화 된 신라 왕,

 

혹은 왕을 주축으로 성립된 직계 친족 집단의 절대화된 위상.

 

이는 서기 681년 신문왕 원년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왕권을 제약하는 이른바 진골 귀족들을 처단함으로써

신라가 '전제왕권 시대'에 돌입했다는 이기백 교수의 주장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신라왕의 위상은 김흠돌 난이 일어나기 이미 100-200년 전에

이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제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동남쪽 귀퉁이를 차지한 신라를

이 무렵 요동치게 한 거대한 흐름은 불교와 함께 유교였다.

 

유교가 언제 신라에 도입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보다 훨씬 이전에 신라 땅을 밟았음은 확실하다.

 

유교도입 혹은 확산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의 그것과 아주 밀접하다.

 

한자와 한문이 한반도에 도입된 시기는 정확히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불교 도입 훨씬 이전임은 명백하다.

 

한자 혹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유교 문화 확산에서

불교의 역할을 떼 내어 생각하기는 곤란하다.

 

신라에 소개된 불교 경전은 모두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것들이었는데

이를 읽고 소화하며 보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한자와 한문에 대한 고차원적인 이해 능력이 요구된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자연히 한자와 한문 및 유교 경전이

불교 경전만큼이나 물밀듯 신라로 밀려왔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에서 유교가 언제쯤 불교에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했는지

그 정확한 시기를 말할 수는 없어도 불교의 융성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불교와 유교가 뒤섞여 용솟음치는 현상은 다름 아닌 신라인의 이름에서 관찰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름을 주목한 연구는 국내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신라는 과연 언제쯤 중국식, 혹은 불교식 이름을 사용하게 됐을까?

 

그 결과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중국식과 불교식 이름이 거의 동시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인의 이름 변화에서 주목할 인물로는

법흥-진흥왕 무렵 신라 황금시대를 연 두 주인공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柒夫)가 꼽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내물왕 4세손이며 거칠부는 5세손이다.

 

한데 이들의 이름이 아주 묘하게 느껴진다.

 

대단히 토속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 이름을 뜯어봐도 그렇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일명 태종(苔宗)이라 했고,

거칠부(居柒夫)는 다른 이름이 황종(荒宗)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사=태(苔)', '거칠=황(荒)' 및

'부(夫)=종(宗)'의 대응 관계를 추출할 수 있다.

 

'이사'는 바위에 끼는 식물인 이끼이며

'거칠'은 지금도 고스란히 쓰이는'거칠다'에서 온 것이다.

 

요컨대 '이사부'는 '이끼 사나이'고, 거칠부는 '거친 사나이'가 된다.

 

어떤 국어학자는 거칠부 같은 영웅에게 이런 '불경스런' 이름을 붙였을 리 없다면서

'거칠'은 '신령스럽다'라는 뜻이라고 풀이하기도 하다.

 

김춘추, 김유신 및 법흥-진흥과 같은 이름은 한자가 도입되고

유교와 불교가 본격 확산됨에 따라 태동한 것이며,

그 이전에는 '이끼'라든가 '거칠다'와 같은 토속적인 말에서 이름을 따다 지었다.

 

이사부와 거칠부라는 이름은 그런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사부와 거칠부가 전형적인 중국식 이름인 '태종'(苔宗)과 '황종'(荒宗)이라는 이름을

아울러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사례가 두 가지에 불과하지만 이름을 통해

이사부와 거칠부가 활약하던 법흥-진흥왕 시대에

전통적인 신라식 이름과 중국식 이름이 뒤섞여 서로 충돌하며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두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흥-진흥 무렵을 지나면서

신라에서는 적어도 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층만큼은

전형적인 불교식 혹은 유교식(중국식) 이름 일색으로 변모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법흥의 경우만 해도 뜻을 알 수 없으나

신라식 이름으로 판단되는 모진(募秦)이라는 다른 이름이 확인되고 있으며,

진흥왕 또한 토종임이 확실한 심맥부(深麥夫)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그 이전 신라인의 이름을 보면 비록 뜻은 명확히 알기 어려우나

거의 예외 없이 토속적인 냄새가 완연하다.

 

예컨대 법흥의 아버지인 지증왕은

「삼국사기」에는 본명이 지도로(智度路), 지철로(智哲老) 따위로 나오는데

실제 1989년 4월에 발견된 경북 영일 냉수리 비문(503년.지증왕 4년 건립)에는

지도로(至都盧)라고 등장하고 있다.

 

발음은 한 가지임이 분명한데 표기가 이처럼 다르다는 사실은

이 이름이 순전한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이라는 명확한 증거다.

 

죽은 이에게 후손이나 신하가 올린 이름을 시호(諡號)라고 하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 특히 유교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왕에게 시호를 올린 것은 지증왕이 처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호도입은 신라식 이름 짓기의 변화라는 단순한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사리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사회 변화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라가 불교식 왕국으로 변모하는 한편

다른 한켠에서 유교화를 향해 대보(大步)를 내디뎠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이런 움직임은 시호 도입 이전 사용하던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과 같은 신라 고유의 우두머리 칭호를 버리고

'왕'(王)이라는 중국식칭호를  채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재확인된다.

 

요컨대 적어도 이름으로만 볼 때 신라의 중국화는 지증왕 무렵 준비 단계를 지나

법흥-진흥왕 때에는 불교와 결합해 착근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는 정착, 발전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식 이름이 중국화, 혹은 불교화 돼 가다가 완결되는 모습은

순전한 중국식 이름인 김춘추와 김유신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이름 짓기의 변모는

단순히 마립간이라 부르던 왕을 중국처럼 '왕'이라고 불렀다거나

지증왕 이후 중국식 시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름에도 중국 경전에서 따오기도 했고(김춘추),

법흥 이래 진덕까지 불교 용어를 빌리기도 했으며,

역사상 실재한 인물의 이름(김유신)을 빌리기도 했다.

 

작명법의 중국화는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변화를 불러온다.

 

돌림자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인들이 중국 고전이나 다른 인물에서 따다가 이름을 짓기 시작했으며

이와 더불어 돌림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용수(龍樹)-용춘(龍春)이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데 또 하나의 결정적 구실을 한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같은 사람이나 대상을 가리킬 때

두 가지 이상의 표기가 흔히 나온다.

 

이런 복수 표기는 사람이나 고장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에 특히 두드러진다.

 

앞서 본 '이사부(異斯夫)=태종(苔宗)'이나

'거칠부(居柒夫)=황종(荒宗)'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런 현상은 실제 그 사람이나 고장에 두 가지 이상 되는 이름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소리 나는 대로 적은 우리말을 뜻글자인 한자를 빌려 표기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초래된 측면이 강하다.

 

사람이건 고장이건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에는

서로 일정한 대응 법칙이 발견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런 대응 관계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갈라볼 수 있다.

 

첫째, '이사부/태종'처럼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과,

이를 한자의 새김(훈.訓)으로 옮긴 것이 짝을 이루는 경우가 아주 많다.

 

신라 건국시조'(박)혁거세'(赫居世)를

「삼국유사」는 '불구내'(弗矩內)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순한문인 '혁거세'를 순우리말 새김으로 옮긴 것으로

'붉은 누리'(밝은 세상)라는 뜻이다.

 

둘째, 우리말을 소리대로 적기는 했으되 표기가 다른 경우도 꽤 있다.

 

신라 지증왕의 원래 이름이

'지대로/지도로/지철로'처럼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 현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뜻은 알기 어려우나 같은 소릿값을 가졌음은 명백하다.

 

셋째가 좀 특이하다.

비슷한 글자끼리 그만 혼동을 일으켜 원래는 한 이름이었는데

나중에 아예 두 가지 (이상되는) 이름처럼 둔갑한 경우도 드물게 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며 즉위한 다음 진지왕이 되는

금륜(金輪)이라는 인물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모두 금륜은 일명 '사륜(舍輪)'이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금(金)자와 사(舍)자가 모양이 비슷한 데서 초래된 혼동일 뿐이며

원래 이름은 금륜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표기라고 알았던

김용수(金龍樹)-김용춘(金龍春)의 경우는 어떤가?

 

이름에 똑같은 '龍'자를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름 마지막 글자 樹와 春은「삼국사기」「삼국유사」에 나오는

다른 중복 표기를 통해 추출한 위 세 가지 대응관계 중

적어도 어느 하나에는 해당해야 한다.

 

하지만 용수-용춘은 그 어디에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글자 모양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새김이나 소리로도 그 어떤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김용수(金龍樹)를 예컨대 "일명 김용목(金龍木)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돼 있다면

 

우리는 樹와 木이 뜻이 통하는 글자이므로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표기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

 

같은 논리로 "김용춘은 일명 김용순(金龍純)이라고도 한다"고 했다면

우리는 春과 純의 발음이 비슷하므로(혹은 삼국시대에는 같았으므로)

한 인물에 대한 다른 표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삼국사기」를 보면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金欽純)을

일명 김흠춘(金欽春)이라한다고 해서 春이 純과 음이 통했음을 엿보이고 있다.

 

하지만 김용수(金龍樹)와 김용춘(金龍春)은

이들이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표기라는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는 김용수와 김용춘이 다른 인물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방증 자료가 된다.

 

김용수-김용춘이「화랑세기」 필사본처럼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학계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처럼 한 사람인가를 판별하는

또 다른 결정적 증거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김용수(金龍樹)라는 이름 그 안에 들어 있다.

 

앞서 우리는 신라에서는 적어도 법흥왕 이래 불교의 지대한 영향 아래

불교식 이름이 유행처럼 등장했음을 보았다.

 

그런 보기로 법흥-진흥-진지-진평-선덕-진덕이라는

중고(中古)시대 신라왕의 시호가 불교 용어임을 보았다.

 

비슷한 추가 사례로는 진흥왕이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이름을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설화에서

따와 각각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이라고 지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제28대 진평왕은 원래 이름이 백정(白淨)이며,

첫째 부인은 마야(摩倻)라 하고,

둘째 부인은 승만(僧滿)이라했다고「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백정이니 마야니, 승만이니 하는 이름이

불교 경전에서 나오는 인물에서 따온 것임은 불문가지다.

 

같은 사람이건 형제간이건 상관없이 김용수-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진평왕과 동시대 인물이다.

 

진평은 아버지가 진지왕의 형인 동륜이니 용수-용춘과는 사촌형제인 것이다.

 

진평왕 시대 왕 자신은 물론, 부인과 그 딸인 덕만(德滿. 뒷날 선덕왕)을 비롯해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만큼은 불교식 이름으로 도배질을 하다시피 했다.

 

이런 점에서 진평왕의 사촌동생이면서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龍樹) 또한 불교식 이름이다.

 

용수(龍樹)는 말할 것도 없이 석가모니 부처 사후 불교 중흥을 이룩한

용수(龍樹:Nagarjuna) 보살이라는 실존 인물에서 따온 이름이다.

 

용수보살에 따온 이름의 경우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용수龍樹>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뜻글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씨 성을 지닌 어떤 사람이 공자(孔子)를 너무나 존경해

그 아들 이름을 김공자(金孔子)로 지었다고 하자.

 

이 경우 공자라는 이름 자체는 김공자라는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도

"공자와 같이 되어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경우 김공자에게 '김맹자'와 같은 별명은 있을 수 있어도  

'孔'이나 '子'자 중 어느 한 글자를 바꾼 다른 이름이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공자'라는 이름 자체가 고유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수 또한 마찬가지다.

 

용수보살에서 따와서 지은 이름인데 같은 용(龍)자를 살린

'용춘'(龍春)과 같은 이칭(異稱)이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용수와 용춘은 다른 인물일 수밖에 없다.

 

이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춘추는 틀림없이 중국 고전 '춘추'(春秋)에서 이름을 따왔을 것이며,

김유신은 글로 이름 높은 중국 실존인물인 유신(庾信)에서 빌려왔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이런 경우, 즉, 이름 자체에 무슨 곡절이 있는 이름에는

김춘추를 예컨대 김춘하(金春夏)라고 한다거나

김유신을 김유천(金庾天)이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이런 이름이 등장한다면

그는 김춘추, 김유신과는 관계가 없는 별개 인물로 보아야 한다.

 

돌림자는 항렬자(行列字)라고도  한다.

 

항렬을 국립국어연구원 발간 「표준 국어대사전」(1999)은

"같은 혈족의 직계에서 갈라져 나간 계통 사이의 대수(代數) 관계를 나타내는 말"

이라고 정의하면서

"형제자매 관계는 같은 항렬로, 같은 항렬자를 써서 나타낸다"고 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항렬임을 표시하기 위해 같은 돌림자를 썼다.

 

돌림자는 서구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퇴색, 파괴돼 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돌림자는 같은 문중, 같은 혈족임을 표시하는 가장 뚜렷한 언어 상징 부호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돌림자는 '우리'와 '그들'의 경계선이다.

 

돌림자는 인류학적으로 굉장한 중요성을 지닌다.

 

같은 돌림자를 쓴다 함은 같은 문중, 같은 종중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돌림자는 친족, 혹은 가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키워드가 된다.

 

돌림자가 갖는 의미가 이렇게 중요한데도 이 분야 국내 연구는 찾을 수가 없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돌림자는 같은 종파의 경우

촌수에 관계없이 두루 사용되는 경향이 강한데

이런 전통이 조선시대 내내 그랬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문중이니 종중이니 하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이

실은 성리학이 절대 이데올로기화되는 조선 후기 들어서였고

(퇴계 이황에게도 종중, 문중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전만 해도 사용 범위는 대단히 제한돼 있었다.

 

하지만 돌림자의 사용 범위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는지는 앞서 말했듯이

기존 연구 성과가 전혀 없어 경험으로 보아 대략만 추정할 뿐

구체적인 양상은 밝혀진 바가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조선시대도 아니요,

더구나 고려시대를 뛰어넘어 사료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신라시대에

돌림자 사용이 어떠했는지를 밝힌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게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화랑세기」 필사본이

정말로 김대문의 작품을 베낀 것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 필사본은 기본적으로 화랑 중의 화랑인 각 풍월주에 대한

인물 전기이면서 그들의 족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에 걸맞게 풍월주별로 그들의 가족 관계가 자세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는 돌림자 사용에 대한 풍부한 사례가 나타나 있다.

 

하지만 필사본은 잠시 제쳐두고

「삼국사기」와「삼국유사」와 같은 '검증된' 기존 사료를 통해

신라가 돌림자를 썼는지, 썼다면 언제 등장하고 있으며

어떤 범위까지 사용했는지를 규명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가족 관계, 특히 형제 관계에 대한 기록이 풍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흠결이 너무 많다.

 

기록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림자를 추출하는 작업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을 보면 그에게는 흠순(欽純)이라는 남동생과

보희(寶姬), 문희(文姬) 두 여동생이 있다.

 

이들은 같은 아버지(김서현), 같은 어머니(만명부인)에게서 난 형제자매들이다.

 

김유신-김흠순은 돌림자가 확인되지 않으나

보희-문희는 분명 '희'(姬)를 돌림자로 썼다.

 

김유신열전에는 또 김유신이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셋째 딸 지소를 맞아들여

5남 4녀를 두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맏아들 삼광(三光)은 결코 지소가 낳은 아들이 아니며

「화랑세기」필사본 기록처럼 진광(晋光)-신광(信光)-작광(作光)-영광(令光)으로

이어지는 광(光)자 계열돌림자를 쓴, 영모(令毛)라는 여자의 아들이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는

딸 이름은 나오지 않고 삼광을 필두로 한 아들 이름만 나열되고 있다.

 

삼광을 제외한 다른 네 아들은 이름이 다음과 같다.

 

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장이를 뺀 다른 세 아들이 원(元)을 돌림자로 쓰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벗어난 장이(長耳) 또한 지소의 아들이 맞다면

틀림없이 본래 이름이 '원'(元)을 돌림자로 써야 할 것이나

여기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아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다.

 

'長耳'란 글자 그대로는 귀가 크다, 길다는 뜻인데 희한한 이름이다.

 

김유신 열전에는 또한 직계 손자로 윤중(允中)과 윤문(允文)이 나오고 있다.

 

윤(允)자가 분명 돌림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법민(法敏)으로 나중에 문무왕이 되고, 그 다음이 인문(仁文)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춘추-문희에게서 난 다른 아들로

문왕(文王)-노단(老旦)-지경(智鏡)-개원(愷元)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다.

 

이 계보가 정확하다고 가정할 때

김춘추의 적자(適子) 그룹은 돌림자를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김유신-김춘추 시대

신라인의 돌림자 사용이 다소 유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쓰기도 하고 안 쓴 경우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제자매끼리 돌림자를 쓰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동시대 고구려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연개소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 이름이 남생(男生)-남산(男産)-남건(男建)이라고 했다.

 

분명 세 아들이 남(男)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

 

어떻든 우리의 관심은 필사본이 다루고 있는 풍월주 시대(540-681년)

신라의 돌림자에 있으므로 다른 사례를 보충해 본다.

 

그 결과 서기 600년 무렵에 출생한 김춘추-김유신보다

한 세대(30년) 가량 앞선 시대에 돌림자를 쓴 형제가 집중 출현하고 있음을 본다.

 

진흥왕은두 아들이 동륜(銅輪)과 금륜(金輪. 진지왕)이다.

 

분명 이들은 륜(輪)을 돌림자로 쓰고 있다.

 

동륜의 아들인 진평은 원래 이름이 백정(白淨)이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같은 남동생 두 명이 있었다고「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곳 신라본기 진평왕 원년 조에는

"어머니가 같은 동생인 백반(伯飯)을 진정(眞正) 갈문왕으로 삼고,

국반(國飯)은 진안(眞安) 갈문왕으로 삼았다."고 하고 있다.

 

백반-국반이 '반'이라는 돌림자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들이 갈문왕에  봉해지면서 얻은 새로운 이름들인

진정-진안 역시 진(眞)이라는 돌림자가 매우 주목된다.

 

아울러 이들의 형인 진평(眞平) 또한 진(眞)을 쓰고 있음은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다.

 

아주 특이한 것은 불교식 이름에 유독 돌림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동륜-금륜, 백반-국반, 진정-진안이 불교 용어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김용수-김용춘은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더구나 용수-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면서 진평왕 형제들과는 사촌이었다.

 

따라서 이런 사례들로 보아 이 시점에서 용수보살에서 따온 용수(龍樹)와

그 유래를 확실히 알기 힘든 용춘(龍春)이 같은 인물인가,

아니면 같은 돌림자를 쓴 형제인가는 자연 판가름 난다.

 

둘은 용(龍)을 돌림자로 쓴 형제였던 것이다.

 

아울러 이런 고찰을 통해 신라인의 돌림자에 대해

거칠게나마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신라는 불교가 본격 확산되는 법흥왕 이래 돌림자를 쓰기 시작했고,

그 사용 범위는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가 낳은 형제자매로 국한되며,

어머니가 다른  경우는 김유신 아들들에게서 보듯 다른 돌림자를 썼고

사촌 이상으로 확대되지도 않았다.

 

또한 돌림자를 고리로 신라인이 생각한 가족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도 확인된다.

 

이제 필사본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의 돌림자사용을  유형별로 분석, 정리하고,

이를 통해 어느 누구도 몰랐고,

따라서 어느 누구도 조작해 낼 수 없는 신라사의 한 단면을 파헤치기로 한다.

 

「화랑세기」필사본에는「삼국사기」나「삼국유사」와 같은 기존 사서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 신라인의 돌림자가 아주 빈번히 등장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필사본의 진위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근거하나를 더 보강한다.

 

필사본 돌림자는 가족 관계에 따라 크게 다음 3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같은 아버지-어머니에게서 난 형제끼리 같은 돌림자를 쓴  경우가  많다.

 

이는 요즘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경우 돌림자는 형제자매에만 국한될 뿐 그 범위를 벗어난 가족 관계,

예컨대 4촌 이상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돌림자는 대체로 남자 형제끼리만 쓰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필사본에서는 자매 또한 형제와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는 현상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미진부>는 <묘도>를 아내로 맞아

아들인 10대 풍월주 <미생美生>과 그 누나  <미실美實>을 둔다.

 

남동생과 누나가 미(美)자를 돌림하고 있다.

  

18대 풍월주 김춘추는 <용보>라는 첩에게서 두 아들 차득(車得)과 마득(馬得)을 본다.

 

당시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수레(車)와 말(馬)로써 이름을 지은 점도 재미있거니와

어떻든 돌림자 득(得)을 쓰고 있다.

 

김유신은 <영모>에게서 진광(晋光)-신광(信光)-작광(作光)-영광(令光)으로 이어지는

네 딸을 낳는데 순전히 자매끼리만 광(光)을 돌림자로 쓰고 있다.

 

같은 항렬에서 매우 주목되는 사실은

어머니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른  돌림자를 쓴다는 점이다.

 

이것이 필사본에 나타난 두 번째 돌림자 특징이다.

  

예컨대 20대 풍월주 <예원>은 정처(正妻)인 <우약>공주에게서

아들 <오기>와 함께 세 딸을 낳는데 온희(溫喜)-성희(星喜)-우희(雨喜)가 그 들이다.

 

자매끼리만 희(喜)자를 썼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예원>은 성명 미상의 어떤 첩에게서 아들 둘, 딸 넷을 얻는다.

 

서자는 찰덕(察德)-찰원(察元)이고

서녀(庶女)는 찰희(察喜)-찰연(察燕)-찰미(察美)-찰해(察亥)다.

 

첩의 자식끼리는 찰(察)을 돌림으로 쓰고있다.

  

이는 이 무렵 신라에서 처 첩간 차별이 엄격했다는 단적인 증거다.

 

필사본이 조작된 것이라면 그 창작자는 이런 인류학적 지식까지 알았어야 한다.

  

어떻든 이런 두 유형의 돌림자가 새롭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조선시대나 현대에도 통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식으로 돌림자는 얼마든지 조작해 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유형은 지금껏 한국사의 어느 연구자도  생각지  못했고,

따라서 어느 누구도 쉽사리 조작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부모와 자식이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유형은 다음 4가지로 더 잘게 쪼갤 수 있다.

 

① 아버지와 아들 간 돌림이다.

 

23대 풍월주 군관공의 세계(世系)에 대해 필사본은

동란(冬蘭)이 아버지이며 할아버지는 동종(冬宗)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증조는 오종(五宗)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증조부터 순서대로 계보를 정리하면 오종→동종-동란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종(宗),동(冬)을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다.

 

② 아버지와 딸 사이에도 돌림이 확인된다.

 

24대 풍월주 천광공 전기에는 그에게 첩 5명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이 중 한 명이 효월(孝月)인데 아버지가 효종(孝宗)이라 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 이름이 효(孝)를 공통분모로 하고 있다.

 

천광에게는 만수(萬壽)라는 첩이 있는데 만덕(萬德)의 딸이라고 돼 있다.

 

이 경우도 역시 부녀간 돌림자가 확인된다.

 

③ 어머니와 딸도 때로는 돌림자를 썼다.

 

22대 풍월주 양도공전에 보면

<양도>의 어머니 <양명良明>은 <보명寶明>의 딸이라 하고 있다.

 

어머니와 딸이 명(明)자로 연결돼 있다.

 

또 김유신의 어머니는 필사본뿐만 아니라「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도

만명(萬明)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 어머니를 필사본은 만호(萬呼)라고 하고 있다.

 

역시 모녀가 돌림자(萬)을 쓰고 있다.

 

④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도 돌림자가 포착된다.

 

김유신의 딸 <영광令光>이 사촌인 반굴(김흠순의 아들)에게 시집가 낳은 아들이

<영윤令胤>이라 하고 있다.

 

영(令)자를 고리로 삼고 있다.

 

부모와 자식이 같은 돌림자를 쓰는 현상이 이상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런 일은 서구 기독교 사회나 일본 같은 곳에서는 흔하다.

 

예컨대 20세기를 대표하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딴 경우다.

 

우리의 경우 고금을 막론하고 피휘법(避諱法)이라 해서

자식 이름에는 아버지나 어머니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필사본에 나오는 돌림자는 이런 상식을 파괴하고 있다.

 

어떻든 이런 돌림자 유형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필사본이 정말로 20세기 창작물이라면

이런 식으로 이름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추정이나 심증만으로 무엇을 판별할 수는 없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라야만

추정과 심증은 '확정' 단계로 접어든다.

 

그렇다면 필사본 말고 신라인들이 부모-자식 간에

같은 돌림자를 쓰기도 했다는 증거를 포착할 수 있는가?

 

물론 있다. 있는데도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보면 신라 사량부 사람으로 태종무열왕 때 승려 신분으로

백제와의 조천성(助川城) 전투에 출전했다가 전사한 <취도驟徒>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가 실려 있다.

 

「삼국사기」는 <취도>가 성은 알 수 없으나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비록 한자 표기가 聚(취)와 驟(취)로 다르긴 해도

같은 발음을 표시하는 聚(취)자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발음임은 분명하다.

 

이는 부자가 같은 돌림자를 썼다는 강력한 방증 자료가 된다.

 

같은「삼국사기」열전을 보면

나당 전쟁에 출전한 신라인으로 <소나素那>라는 인물을 소개한 전기가 있다.

 

「삼국사기」는 <소나素那>는 일명 '금천(金川)'이라고도 했다면서

백성군(白城郡)의 사산(蛇山. 현재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일대) 사람으로

아버지는 <심나沈那>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심나>에 대해서는 '식천(熄川)'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이름이 순신라식인 '소나', '심나'이건,

혹은 그것을 한자 새김으로 표기한 '금천', '식천'이건 관계없이

아버지와 아들이 나(那. 혹은 천<川>)라는

같은  돌림자를 썼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부모-자식이 같은 돌림자를 썼다는 아주 결정적인 자료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너무 가까이에 있어

어느 연구자도  지금껏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필사본이 시대 배경으로 삼고 있는

법흥왕 이래 신문왕까지 신라왕의 시호(諡號)를 차례대로 놓아 보자.

 

법흥(法興)→진흥(眞興)→진지(眞智)→진평(眞平)→선덕(善德)→진덕(眞德)

무열(武烈)→문무(文武)→신문(神文).

 

후왕(後王)이 전왕(前王)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물려받고 있다.

 

신라인들이 부모 자식간에도 돌림자를 썼음은 이로써 명백하다.

 

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앞서보았듯이 김용수(金龍樹)-김용춘(金龍春)은 형제이며

김춘추(金春秋)는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용수이며

김용춘은 작은아버지이자 양아버지임을 보았다.

 

양아버지건 작은아버지건 상관없이 김용춘과 김춘추 사이에

춘(春)이라는 공통된 글자가 들어가 있는 사실

또한 부모-자식 간에도 돌림자를 쓰기도 했던 신라인의 풍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