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주변을 발굴한 결과

포석(砲石)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 6점이 확인됐다.

 

발굴단은 이 기와를 포함한 출토유물 대부분이 신라시대에 속하며,

그 중 일부는 7세기 무렵 삼국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조사단은 이로써 현존 어느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포석정 창건 연대는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통일신라 후기가 아니라

7세기 무렵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 고대사, 특히 신라사는 요동을 친다.

 

기존에 나온 이 분야 연구 성과의 적어도 절반 이상은 쓰레기통으로 가야한다.

 

왜냐하면 그 명칭이 포석정(鮑石亭)이든 포석(砲石)이든

이것이 이미 삼국시대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오직「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조사단의 그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필사본 진위 논쟁은 그 순간에 끝나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학과 국문학을 비롯한 관련 학계에서

필사본을 가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 까닭은 이것을 진본이라고 인정했을 경우

그들이 지금껏 쌓은 연구 성과의 절대 다수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든 포석정이 삼국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기록은

그것이 진짜든 가짜든 오직 필사본밖에 없다.

 

한데 필사본에는 포석정이 포석사(鮑石祀),

혹은 줄여서 포사(鮑祀)라는 이름으로 여러 군데 등장하고 있다.

 

제사 시설인 사당을 뜻하는 사(祀)자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청망청 술 마시고 노는 데가 아니라 신성한 사당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필사본에 나타난 포(석)사는 어떤 곳인가.

  

첫째, 결혼식 같은 길례(吉禮)가 열리는 곳이었으며,

 

둘째, 그렇다고 아무나 이곳에서 길례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진골 이상 고위 신분에만 허용됐음이 드러난다.

 

셋째, 중요한 인물의 화상이 모셔지기도 했다.

 

넷째,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 신궁(神宮)과는 짝을 이루어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능은 포석이 사당이라는 필사본 기록 자체와 정확히 부합한다.

 

그렇다면 필사본에서 포석사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골(骨)이 없던 8대 풍월주 문노가 진골(眞骨)로 추정되는 골을 얻어

같은 진골인 윤궁과 길례를 올리는 장소로서 포석사가 등장한다.

 

이때는 진평왕이 다스리던 때였고

결혼식으로 생각되는 이 길례에 진평왕이 친히 참석하고 있다.

 

길례(吉禮)란 무엇인가?

 

상례(喪禮).장례(葬禮) 등을 흉례(凶禮)라고 하는 데 반해

좋은 일에 따르는 의식을 모두 길례라고 한다.

 

「예기」와 더불어 고대중국의 양대 의례서로 꼽히는

「주례」(周禮) '춘관'(春官)편 대종백(大宗佰)이란 곳을 보면

"길례로써 나라의 귀신을 제사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보아 길례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필사본의 경우 길례는 예외 없이 결혼식일 것으로 생각된다.

 

길례장소로서의 포석사는

12대 풍월주 보리공전에 나오는 보리공과 만룡의 결혼식 장면에서도 재확인된다.

 

또한 18대 풍월주 김춘추 또한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길례(결혼식)를 올리는데

그 장소가 포석사로 돼 있다.

 

이와 더불어 8대 풍월주 문노전을 보면

포석사에는 죽은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을 필사본은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

(김)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았다.

각간(角干)으로 추증하고 신궁(神宮) 선단(仙壇)에서 대제(大祭)를 올렸다."

고 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앞서 잠깐 지적한

포석사와 신궁과의 밀접한 관계를 실물로 확인하게 된다.

 

문노의 경우, 죽은 다음 그 화상은 포석사에 안치했으나

그를 각간으로 추증하는 의식은 신궁의 선단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포석사-신궁의 쌍둥이 같은 관계는

앞서 말한 보리공과 만룡의 결혼식 대목에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만룡은 동륜태자의 아내이자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의 딸이었고,

이 때 보리는 13살, 만룡은 겨우 7살이었다.

 

따라서 만룡은 태생적으로 공주임이 분명했으나 결혼에 앞서

정식으로 공주가 되는 의식을 치러야 했던 모양인 듯

보리공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만호)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으로 가서

공주례(公主禮.공주가 되는 의식)를 행하고나서 포사에서 길례를 올렸다."

 

이처럼 공주례는 신궁에서 치른 반면 길례, 즉 결혼식은 포석사에서 올렸다.

 

필사본을 보면 비단 공주례뿐만 아니라 왕자의 한 종류인 전군(殿君)이 되기 위해서도

어떤 특정한 의례 행위를 거쳐야 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이런 경우 또한 예외 없이 장소는 신궁이다.

 

어떻든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포석사를 정리할 수  있다.

 

즉 결혼식 등 길례를 올리는 장소이자 영웅의 화상을모시기도 한 장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삼국사기」신라본기 경애왕 4년(927) 겨울 11월조에 나오는 기록,

 

즉 후백제 견훤의 군대가 경주로 쳐들어왔을 때 왕이 왕비와 궁녀들,

왕실 친척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는 기록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이때가 양력 12월 한겨울로

포석정에서 야외 잔치를 벌이기에는 부적당하고

필사본에 포석정이 포석사라는 사당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근거로

경애왕은 흥청망청하기 위해 포석정에 갔던 것이 아니라

후백제 침략군을 물리쳐 달라고

선조들에게 기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풀이했다.

 

하지만 필사본에 나타난 포석사의 기능을 고려할 때

이 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기도한 게 아니라

결혼식과 같은 길례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할 듯하다.

 

그렇다면 포석사와 짝을 이루는 신궁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라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이자「화랑세기」필사본 전편을 관통하는

"신라는 신국(神國)"이라는 말을 총 집약한 신궁.

 

어느 누구도 몰랐던 이 신궁이

마침내 신라 멸망 1천 년 만에 베일을 벗고 우리 앞에 부활한다.

 

22대 풍월주 양도(良圖)공은 아버지가 모종이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양명공주다.

 

양명은 모종에 앞서 16대 풍월주 보종과의 사이에서 딸 보량을 낳았다.

 

따라서 양도와 보량은 어머니가 같은 누나-남동생이 된다.

 

양도의 부모는 이들 남매를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양도는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한다.

 

어머니가 같은 누나를 아내로 맞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양도는 신라의 극심한 근친혼을 매우 싫어했다.

 

이에 어머니 양명공주가 아들 양도에게 타이르기를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가 있으니 어찌 중국의 도를 따르겠느냐?"

고 한다.

 

이에 양도는 어쩔 수 없이 누나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경우 '신국의 도'는 중국과는 다른 근친혼을 말한다.

 

이처럼 필사본은 곳곳에서 신라는 신국,

즉 신들이 사는 나라라는 관념을 표출하고 있다.

 

신국을 표상하는 대표적 상징물이 신궁(神宮)이라는 존재다.

 

신국으로서의 신라를 이야기할 때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필사본에 나타난 신라왕들이 실은 '살아 있는 신'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 신라의 신앙 체계를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여러 측면에서 일본의 '이케가미'(生神) 신앙을  연상시킨다.

 

이케가미란 말 그대로 현신인(現神人),

즉 살아 있는 사람을 신으로 높인 것이다. 천황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라왕들의 경우 살아서 신이니 죽어서도 당연히 신이다.

 

이들은 죽은 다음에는 신궁에 봉안됐을 것이다.

 

법흥은 신궁에 봉안됐음이 확인됐다.

 

아울러 필사본에는 왕이 아닌 인물로서 (대)영웅,

혹은 (대)영걸로 표현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거칠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황종(荒宗)과 8대 풍월주를 지낸 문노(文弩),

15대 풍월주를 역임한 김유신(金庾信)이 대표적이다.

 

이들 중에서 황종과 문노는

죽은 다음에 신궁에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김유신은 그러한 사실이 필사본에서 명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황종과 문노의 사례로 보아 그 역시 신궁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보아 신궁이 신국으로서의 신라를 표상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신궁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궁을 아는 것은 곧 신국으로서의 신라를 풀어헤치는 지름길이 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삼국사기」와「삼국유사」같은 기존 사서는 물론이고

필사본「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궁 관련 기록을 모조리 뽑아내

귀납적으로 정리.분석, 그 실체를 유추하는 길밖에 없다.

 

미리 지적하자면 필사본에 나타난 신궁은

종래 이 분야 전문가들이 제시한 신궁의 개념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있다.

 

요컨대 신궁에 대한 모든 학설이 다 틀렸다는 말이다.

 

주인을 모르는 신궁. 우선 신궁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궁은 글자 그대로는 '특정 신 혹은 여러 신의 궁전'이다.

 

즉, 한 명의 신을 모시거나 여러 신을 받들어 제사지내는 곳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모신 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기에 각종 설이 난무하는 것이 바로 신궁의 주신(主神) 문제다.

  

먼저「삼국사기」같은 기존 사서에 나오는 신궁 관련 기록을 뽑아 보는데,

첫 머리부터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왜냐하면 신궁을 처음 설치한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삼국사기」부터가 상이한 두 기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신라의 종묘(宗廟) 제도를 살피건대,

 

제2대 남해왕 3년(서기 6)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의 묘(廟)를 세워

네 철[四時]로 제사 지내고 ,친누이동생 아로(阿老)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제22대 지증왕은 시조가 탄강(誕降.내려와 태어남)한 곳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세워 제향했다. (잡지 제사조)

  

② (소지왕) 9년(487) 봄 2월에 나을(奈乙)에 신궁을 설치했다.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신라본기)

 

이처럼 신궁 설치 연대를 한 곳에서는 소지왕 때라고 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지증왕 때라 하고 있다.

 

다만 소지왕 바로 다음 왕이 지증왕이므로

신궁 설치연대가 큰 격차가 진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때문인지 많은 연구자가 어떻든 신라의 신궁은

소지-지증왕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처리하곤 한다.

 

그렇다면 신궁이 명칭으로 보아 신을 배향하는 곳임은 분명한데 이곳에 모신 신,

 

그 중에서도 만약 신을 떼로 모셨다면 그 중심이 되는 신, 즉 주신은 과연 누구인가?

 

앞서 말한 대로 이를 둘러싸고 아주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고 있다.

 

이를 정리하자면 크게

 

▲ 신라 건국 시조이자 박씨 왕 시조인 박혁거세

▲ 김씨 시조인 김알지

▲ 김알지 후손으로서 김씨로는 처음 왕이 된 미추왕

▲ 김씨가 신라 왕위를 독점하는 계기를 마련한 내물왕이라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이는 뭉뚱그린다면 신궁의 주신을 조상신으로 보는 견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박혁거세라는 주장은 신궁이 설치된 장소가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이란 곳에 설치됐다는 점에 주요한 근거를 둔다.

 

이런 종래의 견해에 대해 고려대 최광식 교수는

지난 94년 신궁의 주신은 조상신이 아니라

천신(天神)이라는 견해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한 마디로 중구난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다. 왜 그런가?

 

「삼국사기」를 비롯한 현존 기록 어디에도

신궁의 주신이 누구인지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사조 기록을 제외한「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을 죽 훑어보면

신궁은 22대 지증왕(재위 500-514년) 이래 55대 경애왕(재위924-927년)까지

20차례 가량 등장하고 있으나

이 중 어디에도 누구를 제사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대신 「삼국사기」는 거의 예외없이

"王(親)祀神宮"(왕이 <친히> 신궁에서 제사를 드렸다)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신궁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다시 지적하지만 「삼국사기」그 어디에도 신궁에 모신 신이 누구인지 언급이 없다.

 

비유컨대 이는 집이 있는데 주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경우와 같다.

 

하지만 필사본「화랑세기」를 훑어보면 신궁에 봉안된 모든 신을 가려낼 수는 없어도

그 중 몇 명은 명확히 실체를 드러낸다.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베일에 철저히 가려진 신궁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필사본에 나오는 신궁 관련 기록을 모조리 적발해 내야만 한다.

 

첫째, 필사본 서문의 첫 구절이다.

  

"화랑은 선도(仙道)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대제(大祭)를 행함이

마치 연(燕)나라의 동산(桐山), 노(魯)나라의 태산(泰山)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를 좋아해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 하기를 국화(國花)라 했는데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 원화(源花)를 삼게 했다.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해 사람들에게 그를 받들게 했다."

 

이 구절은 화랑의 유래와 전개 과정을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다룬다는 것은 화랑 전체를 다루는 엄청난 작업이 되므로

신궁에만 국한해서 본다면 우선 주목되는 것이

신궁이 대제(大祭)를 올리는 곳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대제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으나

사전적 의미로는 천지사방(天地四方)에 드리는 제사 정도가 된다.

 

하지만 신궁에서 드린 대제가

꼭 이와 부합하는지는 좀더 철저한 검토를 해 봐야 알 수 있으리라.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대목은 신궁 혹은 대제와 화랑,

혹은 그 전신인  원화의 관계이다.

 

이 또한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어서 이 자리에서는 간단히

화랑 혹은 원화가 신궁 제사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만 짚어두기로 하자.

 

아마도 원화 혹은 화랑은 신궁이나 대제에 봉사하는 신관(神官) 정도가 아닌가 한다.

 

신궁이 등장하는 두 번째 대목은 4대 풍월주 이화랑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대목은 필사본의 훼손이 너무 심해

신궁에 대해 알아낼 만한 것이 별로 없다.

 

단 "신궁은 발원하는 곳"으로 나온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다음 신궁은 5대 풍월주 사다함전의 마지막 부분

사다함 세계(世系) 대목에 나오는데 특이한 것은

그냥 신궁이 아니라 내물신궁(奈勿神宮)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대목 또한 필사본의 결락이 너무 많아 아쉽기만 하다.

 

"(사다함은)아버지가 구리지(仇利知)이고 할아버지는 비량(比梁)이며,

증조부는 비지(比知)이고, 고조부는 비태(比太)이다.

(비태의 아내 ...는)미해공(美海公)의 딸인데

처음에는 내물왕…. … 후궁으로 산황(山凰)을 낳았다.

실성왕이 명하여 내물…. ㅇㅇ왕이 들어서자 후궁으로 들였고,

(나중에) 사랑하는 아우에게 내려주었다.

실□(實□)…미해공…. 혹은 말하기를 심황(心凰)은 실상공(實相公)의 딸이라고도 한다.

눌지왕이 이에 심황에게 명하여 내물신궁의 주(主)로 삼았다."

 

결락이 심한 위 구절은 사다함의 고조부 비태의 아내에 얽힌 이야기일 것이다.

 

비태의 아내, 즉 사다함의 고조할머니가 되는 여인이

산황(山凰)인지 심황(心凰)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의 경우 모녀가 같은 돌림자를 쓰고 있는 사례가 허다하게 발견된다는

점에 미루어 심황이 산황의 딸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산황을 눌지왕은 내물신궁의 주(主)로 삼은 것이다.

 

눌지왕은「삼국사기」에 따르면 내물왕의 아들이다.

 

따라서 눌지는 아버지를 모신 신궁,

즉 내물신궁을 주관하는 일을 산황에게 맡긴 것이다.

 

내물신궁 주가 되었다는 말은 아마도 내물신궁의 신관(神官)이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아주 곤란한 문제에 봉착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궁은 분명 소지왕이나 지증왕 무렵에 처음 등장해야 함에도

이보다 1세기 훨씬 이 전에 그 명칭이 무엇이든 신궁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필사본이 정말로 김대문의 바로 그「화랑세기」를 복사한 것이라면

신라 신궁 연구는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불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소지왕 혹은 지증왕 무렵에 신궁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삼국사기」기록 또한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야만 한다.

 

예컨대 필사본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때 등장한 신궁은

기존의 내물신궁이나 박혁거세 시조묘 같은 여러 신궁 혹은 사당을 합친 것이든지,

아니면 새로운 신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내물신궁을 모시는 우두머리 신관이 여자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맡은 여자가「화랑세기」필사본 서문에서 말한

바로 그 원화(源花)일 것이라는 강력한 심증을 갖게 한다.

 

이는 아울러「삼국사기」신라본기 제2대 남해왕 3년(서기 6)조 기록,

 

즉 이해 봄에 설치된 시조박혁거세 묘(廟)의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왕의 누이동생 아로(阿老)가 맡았다는 사실을 연상케 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기록을 훑어보면

아로처럼 여성이 제관(祭官) 혹은 신관을 맡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필사본 기록을 존중한다면 이들은 모두 화랑의 원조인 원화이며,

이미 건국 초기에 이런 원화가 존재했음이 밝혀지게 된다.

 

어떻든 신궁 혹은 원화에 관한 이러한 필사본 기록들은

조작이 불가능할 터인 만큼 치밀하게 서로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 신궁의 구조와 함께 거기에 봉안된 신(神)들을 만나보자.

 

다음 신궁 기록은 8대 풍월주 문노전에 나오는 것으로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모셨다.

(김)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문노)을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았다.

각간(角干)으로 추증하고 신궁(神宮) 선단(仙壇)에서 대제(大祭)를 올렸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69세였다.

(윤궁)낭주 또한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파해낼 수 있다.

  

첫째, 신궁에는 선단이 있었다.

 

여기서 '선'은 필사본 서문에 말하는 "화랑은 선도(仙徒)이다."라고 하는

바로 그 선(仙)일 것이다.

  

둘째, 신궁에서 대제를 거행했음이 재확인된다.

  

셋째, 신궁이 포석사라는 사당과 짝을 이루고 있음이 드러난다.

 

대 영웅 문노가 죽고 난 뒤 그의 화상은 포석사에 모셔진다.

 

이와 더불어 죽은 문노는 각간으로 추증되는데 그 의식은 다름 아닌 신궁,

그 중에서도 신단에서 치러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식 뒤에 대제(大祭)를 올리고 있다

(혹은 각간 추증 의식 자체가 대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제는 누구에게 바치는 것인가?

 

하늘, 즉 천신(天神)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다음 신궁은 11대 풍월주 하종전에 등장한다.

 

이곳에서는 미실이라는 여인이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수종(壽宗)을 전군(殿君)으로 봉하는 의식을 신궁에서 치르고 있음이 확인된다.

 

전군은 왕자의 여러 등급 중 하나인데

왕과 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수종을)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전군의 출생 49일째에 거행했다.

제(帝)와 더불어 미실전주(殿主), 수종전군 및 공(하종)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에 이르러 예를 올렸다."

 

이처럼 전군이 되는 의식을 치른 장소가 바로 신궁이다.

 

그렇다면 예를 올린 대상은 누구인가?

 

이 경우 또한 하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 가지덧붙이자면 전군 의식을 치른 때가 아주 묘하다.

 

전군이 되는 수종의 출생 49일째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불교적 영향이 짙게 느껴진다. 불교의 49재를 연상케 한다.

 

신궁의 다음 모습은 12대 풍월주 보리공전에서 관찰된다.

 

이 대목을 주목하자.

 

신궁에 어떤 인물들을 모셨는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리)공이 처음 하종공 아래에 있을 때 신궁에 따라 들어갔다.

 

(하종공이)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身像)에 절을 하는데

옥진에게 먼저 절한 다음에 제(帝.법흥)에게 절을 했다.

 

공이 옳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귀한 것은 모두 선제(先帝)께서 내려준 것인데 어찌 선제에게 나중에 절합니까?"

라고 하니,

 

하종공이 이렇게 말했다.

 

"선제께서 또한 (생전에) 말씀하시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神)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고 하셨다.

 

영실공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에게 절했다.

 

이것이 바로 그 상(像)이다. 무릇 (이것은) 미실이 가르쳐 준 것이다."

 

공이 할 수 없이 따랐다. 그런 다음 아시공에게 절을 했다.

 

ㆍㆍㆍ태종공ㆍㆍㆍ. 공은 또한 그 순서에 의심을 가졌으나 따지지 않았다."

 

이런 기록을 보면서 신궁 안 모습을 구현해 보자.

 

우선 신궁 안에는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이 모셔져 있다.

 

교신상이란 섹스하는 모습을 본뜬 조각이다.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신성한 신궁 안에 죽은 왕이 후궁(옥진은 법흥이 끔찍하게 총애했던 후궁이다)과

섹스하는 장면을 조각해 놓았다니.

  

이를 통해 우리는 신라인의 무덤에서 왜 남녀 간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토우(土偶)가 나오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무덤은 그 자체가 일종의 신궁(神宮)이다.

 

신궁에 교신상을 모셨듯이 신라인들은 다른 차원의 신궁인 무덤에도

흙으로 빚어 만든 교신상을 함께 묻었던 것이다.

 

교신상과 더불어 아시공과 태종(=거칠부)을 모신 데가 있음도 알 수 있다.

 

아시공은 초대 풍월주 위화랑전에 따르면 법흥이 이끌던

이른바 '마복칠성'가운데 한 명으로 법흥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인물이다.

 

태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법흥왕-진흥왕-진지왕 무렵까지

신라 중흥기를 이끈 인물로

「삼국사기」에는 그의 열전이 '거칠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정도다.

 

죽은 아시공과 태종이 교신상처럼 조각돼 있었는지,

아니면 화상으로 모셔져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후대의 신주(神主)처럼 위패로 모셔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이 신궁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로써 신궁은 베일의 일면을 벗게 된다.

 

신궁은 왕을 필두로 그 후궁,

혹은 생전에 추앙받은 사람들이 죽어 신이 되어 떼로 모셔진 곳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몰랐던 신궁의 모습인 것이다.

 

신라인들은 사람이 죽어 신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신들을 모신 곳, 그 곳이 신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궁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왕을 비롯해 최고위 지배층만의 독점적, 배타적 신적(神的) 공간이었다.

 

이런 신궁이 앞서 보았듯 공주가 되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더불어 신궁이 포석사와 한 세트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장 큰 숙제를 남겨 두고 있다.

 

이곳에 모신 신들 가운데 우두머리,

즉 기존 학계가 주신(主神)이라고 표현한 '神 중의 神'은

누구인지를 여전히 모르고 있다.

 

하지만 곧 밝혀진다.

 

다음에 인용하는 13대 풍월주 용춘공전 세계(世系) 기록을 통해

우리는 신궁의 조직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여기서 신궁에  모신 신 중에서도 최고신으로 판단되는 신궁황신(神宮皇神),

 

이 분야 전문학자들이 그 토록이나 찾아 헤매던 주신(主神)을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신궁의 주신은 여자였다.

 

"(용춘은)아버지가 금륜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황후이다.

금륜의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사도태후다.

지도의 아버지는 기오(起烏) 각간이고 어머니는 흥도(興道)이니 영실공의 딸이며

곧 사도태후와는 배가 같은 동생이다.

기오의 아버지 홍기(洪器)가 신궁봉사(神宮奉事)가 되어

신궁황신(神宮皇神)과 통해 선혜황후를 낳았다.

홍기의 아버지는 보기(寶器)이고 어머니는 수리(首里)이다.

보기는 아버지가 보신(寶信)이고 어머니는 황아(皇我)이다.

보신의 아버지는 미해(美海)이고 어머니는 보미(寶美)이다."

 

이것은 용춘의 조상이 누구인지 족보를 따지는 장면이다.

 

필사본에 나오는 거의 모든 풍월주의 세계가 그렇듯이

용춘공 또한 아버지 계통은 물론이고 어머니계통도 매우 자세히 언급돼 있다.

 

용춘의 모계 쪽을 밟아 가면 우선 어머니는 지도황후이며

지도황후의  어머니는 사도태후가 된다.

 

사도는 어머니가 흥도이다.

 

흥도는 남편이 기오 각간이다.

 

기오는 아버지가 홍기다.

 

한데 필사본은 이 홍기라는 인물이 신궁봉사라는 직책에 있었다고  하고 있다.

 

신궁봉사란 무엇인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명칭으로 보아 신궁에서 제사를 받드는 일을 주관했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홍기는 신궁황신과 정을 통해서 딸을 낳으니 그가 바로 선혜황후라고 했다.

 

신궁황신은 신궁봉사처럼 그 자세한 실체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명칭으로 보아 틀림없이 신궁에 모신 신 중에서도 최고신일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이 신궁황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인 신궁봉사 홍기가 이 신궁황신과 정을 통해 낳은 딸이

선혜황후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궁황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선혜황후의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

 

그 어머니가 바로 신궁황신이기 때문이다.

 

선혜황후는 누구인가?

 

「삼국사기」를 보면 선혜는 신라 제21대 소지왕(炤知王)의 비(妃)로서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로 돼 있다.

 

선혜는 필사본에도 몇 차례 등장한다.

 

그가 내숙의 딸이라는 점은「삼국사기」와 일치한다.  

 

다만 필사본에는「삼국사기」에서는 볼 수 없는

선혜의 계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정보가

6대 풍월주 세종전에 다음과 같이 수록돼 있다.

 

 "(세종은) 어머니가 보옥공주이니, (습보공의) 딸이다.

습보공은 내물왕의 손자가 된다.

지소의 어머니는 보도황후이니 소지왕의 딸이다.

보도의 어머니는 선혜황후인데 내숙공의 딸이다.

선혜의 어머니는 조생부인인데 눌지왕의  딸이다.

조생의 어머니는 아로이고 아로의 어머니는 내류이며 내류의 어머니는 광명이고,

광명의 어머니는 아이혜이고, 아이혜의 어머니는 홍모이다.

홍모의 어머니는 곧 옥모이다."

 

이렇게 보면 선혜는 아버지가 내숙공이며

어머니가 19대 눌지왕의 딸인 조생부인(鳥生夫人)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궁황신은 조생부인이 된다.

 

하지만 이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선혜의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해 다름 아닌 필사본 자체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즉 13대 풍월주 용춘공전에는

신궁봉사 홍기가 신궁황신과 정을 통해 낳은 딸이 선혜라 하고 있는 반면

 

6대 풍월주 세종전에 따르면 선혜는 내숙공의 딸로서

어머니가 조생부인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파고들기 전에 우선 조생부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조생부인은 필사본에는 분명 눌지왕과 아로부인 사이에서 난 딸로 기록돼 있다.

 

조생이란 이름은「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즉위 원년 조를 보면

지증왕의 어머니이며 눌지왕의 딸로 나오고 있다.

 

이로 보아 조생부인이 눌지왕의 딸이며 지증왕의 어머니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조생의 남편, 즉 지증왕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같은「삼국사기」에 따르면

조생부인은 내물왕 손자인 습보(習寶) 갈문왕과의 사이에서 지증을 생산했다.

 

필사본 6대 풍월주 세종전에도 습보는 내물왕의 손자라고 기록돼 있다.

 

이제 미뤄둔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선혜의 어머니가 조생부인임이 분명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내숙공인가,

아니면 신궁봉사 홍기인가를 확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다.

 

다만, 조생의 정식 남편이 내숙공인 것은 사실이지만

선혜황후는 조생이 신궁봉사인 홍기와 사통(私通)을 해서

낳은 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어떻든 신궁에 모신 신들 중에서도 최고신인 신궁황신(神宮皇神)은 조생부인이었다.

 

이렇게 보면「삼국사기」에 나오는 신궁 설치에 관한 상이한 두 기록 중에서

지증왕 때 만들었다는 '제사'조 기록이 더욱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증왕은 서기 500년,

64세에 즉위하고 난 뒤 신궁을 세우고 그 곳에 어머니 조생부인을 모셨던 것이다.

 

어떻든 이런 고찰을 통해 우리는 신궁이

왕을 비롯해 생전에 대 영웅이나 호걸이라고 칭송받던

신라 최고 지배층을 형성한 주요 인물들을 신으로 모신 곳이었으며

따라서 신궁에서 받든 신은 조상신임을 알 수가 있다.

 

더불어 신궁은 공주나 왕자가 되는 의식과 같은

국가의 중요한 대제를 행하는 곳으로 활용됐음도 확인했다.

 

또 나아가 신궁에 모신 신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황신은

지증왕의 어머니인 조생부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신궁은 살아생전에 이미 신인 왕을 비롯해

죽어서 신으로 추앙된 인물들을 모신 신국(神國) 신라의 구심체였던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