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惠)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계季(540-599)>다.

 

그는 위덕왕과 함께 성왕을 보필하였으며, 왕자 시절부터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성왕이 전사한 직후인 555년 2월에는 위덕왕의 명을 받고 왜로 가서

실권자 蘇我槄目과 欽明天皇을 만나 병기와 군대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일로 왜국 조정은 논란을 거듭하였고, 그 같은 논쟁은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계>는 상황을 지켜보며 왜에 머물다가, 왜 조정이 백제를 지원하겠다는 확답을 하자,

556년 정월에 귀국하였다.

   

왜의 흠명천황은 그의 귀국길에 무기와 양마를 보태주고,

여러 가지 진귀한 보물들을 선물로 안겨주었다.

 

또한 축자국의 수군으로 하여금 그를 호송토록 했으며,

따로 축자국의 화군(火君)이 지휘하는 병력 1천을 붙여주었다.

   

이렇듯 혜왕은 위덕왕 즉위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후로도 위덕왕을 도와 여러 가지 정책을 수립하고, 지휘하였다.

 

『삼국사기』는 그의 직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관례로 봐서 그는 상좌평의 직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위덕왕 시절의 정책 대부분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상좌평의 직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597년 4월에 위덕왕의 태자 阿佐가 왜에 파견되는데,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위덕왕이 阿佐를 왜에 파견한 것은 수나라와 고구려의 관계 악화를 기회로

백제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도였다.

 

즉 왜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수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 뒤를 치겠다는 뜻이었다.

 

阿佐가 이 같은 막중대사를 위해 왜에 건너간 그 때,

위덕왕은 노환을 이기지 못하고 병석에 누웠고,

왕권은 자연스럽게 혜왕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阿佐가 왜에서 돌아오자,

혜왕은 세력을 결집하여 阿佐를 제거하고 왕위 계승권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598년 12월에 위덕왕이 죽자, 마침내 혜왕은 왕좌에 올랐다.

   

비록 왕좌를 탐하여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왕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이듬해 그는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법(法)왕은 혜왕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이다.

 

599년에 혜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이미 혜왕 시절부터 왕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이 죽고, 혜왕이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실제 위덕왕의 태자 阿佐를 제거하고, 왕위를 확보한 사람은 효순이었을 것이다.

 

사촌인 阿佐태자를 죽이고 불법적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그런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교를 장려했던 모양이다.

 

그의 묘호가 법왕이라는 사실부터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또 그는 즉위하면서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들까지도 모두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말하자면 살생을 금하라는 불교 계율을 국법에 도입한 것이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정적인 조신들을 대거 참살하고 심지어 형제들까지 죽인 뒤에

불교를 장려했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법왕은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고,

즉위 한 달 만에 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여 명에게 도첩을 내리는 행사도 거행하였다.

 

또한 기근이 들었을 때는 칠악사 절간에 가서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법왕이 이렇듯 불교 부흥에 열을 올렸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성왕이 전사한 뒤로 백제의 왕권은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고,

그런 왕권의 불안은 위덕왕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 혜왕과 법왕이 태자 阿佐를 죽이고 왕위를 탈취하면서

왕실의 위엄은 더욱 실추되고, 왕권은 한층 더 약화되었다.

 

법왕의 불교 부흥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왕권확립정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즉, 법왕은 불교 계율을 국법에 적용하여 신법을 만들어내고,

신법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왕권 강화를 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왕의 신법은 채 5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600년 5월에 막을 내렸다.

 

불교 교리를 국법에 도입한 것도 무리가 있었지만,

아좌태자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에 대한 백성들의 비난과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무마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그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즉위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죽은 것으로 볼 때,

그는 친위 세력과 정적들 간의 대립 과정에서 살해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북사』와『수서』는 위덕왕의 아들로 쓰고 있다.

 

『삼국유사』는『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 것이고,

『수서』는『북사』의 기록을 따른 것이기에,

 

무왕의 혈통은『삼국사기』와『북사』의 내용 중에

어느 것을 옳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법왕은 정적들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무왕을 추대한 세력은 법왕의 정적들이어야 한다.

 

법왕의 정적들은 위덕왕 또는 그의 태자 阿佐의 측근들이다.

 

그런 그들이 법왕의 자식을 다시 왕위에 앉힌다는 것은 자기 목에 칼을 대는 꼴이다.

 

그들은 당연히 위덕왕의 혈통을 왕위에 앉혔을 것이고, 그 대상이 바로 무왕이었다.

 

따라서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왕은 여느 왕손과는 성장 과정이 크게 달랐다.

 

대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요, 제왕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마를 캐는 서동(薯童)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는 무왕의 왕위 계승 과정이 결코 평탄치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그렇다면 한낱 마 캐는 아이로 살던 서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올랐을까?

   

위덕왕이 죽고, 그의 태자 阿佐가 법왕 세력에 의해 제거될 때,

阿佐의 형제들은 거의 모두 살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왕은 궁궐 바깥에서 서민의 신분으로 살고 있었던 덕분에 무사했다.

 

어쩌면 그는 혜왕과 법왕 재위 시에 쫓기는 처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를 캐는 서동으로 행세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서동이 왕위에 오른 과정은 고구려의 미천왕이나,

고려의 현종, 또 조선의 철종과 유사했을 것이다.

 

미천왕은 봉상왕에게 쫓겨 머슴, 소금장수, 거지 생활을 하며 지내다

창조리의 반정으로 봉상왕이 쫓겨나자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를 승계한 경우다.

 

현종은 왕위를 차지하려던 목종의 모후 헌정왕후와 김치양에게 쫓겨 다니며

가까스로 목숨을 보존하다가 강조의 반정으로 왕으로 추대된 경우이며,

철종은 강화도에서 일자무식의 촌부로 살다가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던

안동 김씨 정권에 의해 얼떨결에 왕위에 로는 경우다.

   

법왕 세력에 의해 위덕왕의 자식들이 대부분 죽임을 당하고,

다시 반 법왕 세력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법왕의 자식들이 거의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백제는 왕실의 씨가 마르는 사태에 직면했을 법하다.

 

그때 찾아낸 것이 위덕왕의 서자 서동이었다면,

앞의 세 가지 사례 가운데 미천왕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동 이외에도 왕위를 승계할 만한 왕손이 있었는데도 굳이 서동을 택했다면,

그것은 철종처럼 권력자들의 필요성에 의한 왕위 승계일 것이다.

 

또 서동의 왕위 승계 배경에는

미천왕과 철종의 승계 형태가 혼합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서민으로 살던 서동은 600년 5월,

법왕이 반대 세력에 의해 제거되자,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백제 제30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야말로 딸을 기던 지렁이가 하루아침에 용이 되어 승천한 격이었다.

   

서동의 왕위 승계를 논하자면, 선화공주라는 인물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딸이며,

서동의 아내로서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선화공주는 정말 진평왕의 딸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무왕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는 셈이고,

과정이야 어찌 됐든 백제와 신라 양국은 일종의 결혼동맹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삼국사기』의 기록 어디에도

무왕과 진평왕이 사위와 장인 사이임을 나타내는 말이 없고,

또 당시에 결혼동맹을 맺었다는 내용도 없다.

 

때문에『삼국유사』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화랑세기』 에 따르면 진평왕은 정비인 마야왕후에게서

두 명의 딸만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첫 딸은 천명공주이고, 둘째 딸은 덕만공주였다. 하지만 선화공주에 대한 언급은 없다.

 

『화랑세기』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계보와

그 주변 혈통에 대해 기록한 책인데,

특이하게도 이 책은 왕이나 왕후의 딸들에 대한 기록이 매우 세세한 편이다.

 

풍월주들이 왕의 딸이나 왕후의 사녀(私女)와 결혼함으로써

지위를 보장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평왕에게 선화공주라는 딸이 있었다면,

『화랑세기』에서 필시 이름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화공주라는 이름은 없다.

 

특히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 둘째 딸인 덕만(선덕왕)에게 왕위를 넘겨줬다.

 

대개 아들이 없을 경우 사위가 왕위를 이어받던 것이 당시의 관례였지만,

진평은 덕만이 제왕감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후계자로 삼은 것이다.

 

그 때문에 진평왕은

큰딸 천명공주와 큰사위 김용수(김춘추의 친아버지)에게 양보해줄 것을 요청했다.

 

만약 이 때 선화공주가 있었다면 역시 그녀에게도 동의를 구해야 옳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없다.

   

이렇듯『삼국사기』와『화랑세기』의 기록 어디에도

진평왕에게 선화라는 딸이 있었던 흔적은 없다.

 

그렇다면 선화가 진평왕의 딸도 아니고,

신라의 공주도 아니었다는 추측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금맥을 발견하여 신라 궁중에 많은 금을 보내자,

진평왕이 서동을 남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다.

 

때문에 서동이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진평왕의 신임을 얻는 것은

오히려 서동이 왕위에 오르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야 옳다.

 

더구나 서동은 전혀 정치적 기반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적국의 딸과 결혼한 처지에서

백제 왕으로 옹립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만약 무왕이 진평왕의 사위로서 그의 총애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다면,

무왕 즉위 이후에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한층 호전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왕이 즉위하자마자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그 이전보다 훨씬 악화되었다.

 

무왕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누차에 걸쳐 신라를 공격했고,

심지어는 신라에 속한 성들을 장악하고

그 성주들의 목을 베는 극단적인 상황도 몇 차례 벌어졌다.

   

이런 사실들은 무왕이 진평왕 덕분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조작되었거나, 잘못 전해진 이야기임을 증명하고 있다.

 

더불어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는 기록도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그저 가공된 인물일까?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 이야기에서도

무왕과 선화공주가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선화공주는 결코 가공의 인물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공주라는 호칭을 중시한 것을 볼 때,

그녀가 원래 왕녀 출신인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어느 왕실의 공주이며, 누구의 딸인가?

 

이미 신라의 공주도, 진평왕의 딸도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러면 그녀는 혹 백제의 공주가 아닐까?

  

『삼국유사』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금을 발견하여 그것을 궁중으로 보내자,

선화공주의 아버지는 서동을 총애하였고,

그 덕분에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그렇다면 서동을 총애한 선화의 아버지는 신라 왕이 아니라

백제 왕이 되어야 정상이다.

 

당시 백제 왕이라면, 혜왕이나 법왕일 것이다.

 

그럴 경우, 선화공주는 혜왕과 법왕 중 누구의 딸이었을까?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으나,

이미 밝혔듯이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이며, 법왕의 사촌동생이다.

 

하지만『삼국사기』가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무왕은 혜왕보다는 법왕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즉, 무왕의 아내 선화공주는 법왕의 딸이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이며, 동시에 법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승계한 것이다.

   

무왕 대에는 8대 귀족 가문 중에 해씨, 연씨, 백씨, 사씨 등이 모두 고루 등용되었고, 왕씨, 우씨 등의 신진세력도 함께 중용되었다.

 

이는 무왕 치세에는 파벌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무왕 대에는 위덕왕 세력과 법왕 세력이 화해하고,

연합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양대 파벌이 화해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역시 위덕왕계의 무왕과 법왕계의 선화공주가 결혼할 사건일 것이다.

  

『삼국유사』의 무왕 관련 기사는 서로 적대국인 신라 공주와

백제 왕자가 결혼하여 양국이 화해 국면으로 접어드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선화공주를 법왕의 딸로 설정했을 때도, 똑같은 이야기 구조가 생긴다.

 

서동에게 선화공주는 정적의 딸이고,

법왕에게 있어서 서동은 꼭 죽여야 되는 화근이다.

 

그런데 서동과 선화가 결혼함으로써 양쪽은 극적으로 화해했다.

 

서동과 선화 이야기는 이렇게 백제 내부에서 벌어진 일인데,

구전되는 과정에서 더 극적으로 만들어져『삼국유사』에는

백제와 신라 양국 사이에 벌어진 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왕은 위덕왕의 서자이며, 이름은 장(璋)이다.

 

600년 5월에 법왕이 죽자, 신하들에 의해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고 쓰고 있다.

   

무왕이 즉위하자, 수년간 계속되던 정쟁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신라와 고구려에 뺏긴 옛 영토를 되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재위 3년(602년)에 벌어진 아모산성(충북 음성 일대) 싸움이다.

 

무왕은 그해 8월에 <해수>에게 군대를 안겨 아모산성을 포위하였고,

이에 신라의 진평왕은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맞서왔다.

 

신라는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에 각각 성을 쌓고, 오히려 백제 땅으로 치고 들었다.

 

그러자 위기의식을 느낀 백제는 전면전을 벌이며

군대 4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네 성을 공격했다.

   

신라는 장군 <건품>과 <무은>을 앞세워 해수의 군대를 상대케 했는데,

<해수>는 그들에게 밀려 천산 서쪽 소택지로 퇴각하여 복병을 숨겨놓고 기다렸다.

 

그것도 모르고 승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무은>은

갑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소택지까지 추격해왔다.

 

그때 <해수>의 복병이 급습을 가하자, <무은>은 우왕좌왕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무은>은 몹시 당황하여 사색이 되었지만,

그의 아들 <귀산>과 <소장> <추항>이 창을 휘두르며 활로를 뚫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은 그 과정에서 죽었지만, 그들의 살신성인은 신라군의 전의를 불살랐고,

전세는 역전되어 <해수>가 부하들을 모두 잃고 단신으로 쫓겨 왔다.

   

이렇듯 백제는 첫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듬해 8월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침입하고,

신라는 병력 1만으로 고구려 군을 상대함으로써

삼국은 다시 험한 전쟁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야말로 아군과 적군이 따로 없는 혼란스런 상황이 전개되자,

무왕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605년 2월에 각산성을 쌓았는데,

예상대로 그해 8월에 신라군이 동쪽 변경을 공격해왔다.

   

그 무렵,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도 악화되고 있었다.

 

 604년 7월에 수나라의 양견(문제)이 아들 양광(양제)에게 살해되었는데,

양광은 야심이 강하고 정복욕이 남달랐다.

 

그는 낙양을 새로운 중심지로 건설하고,

낙양과 탁군(북경)을 잇는 대수로를 개발함으로써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 국가들을 위협하였다.

 

북쪽으로는 돌궐을 압박하여 돌궐 왕을 입조시키고,

고구려에 대해서도 조공과 입조를 요구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양국은 팽팽한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무왕은 그 같은 역학 관계를 활용하기 위해 607년 3월에 좌평 <왕효린>과

한솔 <연문진>을 수나라에 보내 함께 고구려를 치자고 제의했다.

 

<양광>이 백제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고구려의 동정을 살펴줄 것을 부탁했다.

   

고구려가 그 소식을 듣고 송산선으로 쳐들어왔는데 함락시키지 못하자,

이내 석두성을 습격하여 백성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무왕은 이듬해 다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제의를 하였고,

<양광>은 답례로 왜에도 사신을 보내 고구려 침략 문제를 논의했다.

   

이렇듯 국제 정세는 점점 전쟁 분위기로 흘러갔고,

611년에 이르러서는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이 기정 사실화되었다.

 

4월에 <양광>은 자신이 직접 백만이 넘는 군대를 탁군에 집결시켰다.

 

무왕은 그와 때를 맞춰 <국지모>를 수나라에 파견하여 그들의 행군 일정을 묻고,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양광>은 기뻐하며 상서기부랑 <석률>을 무왕에게 보내 고구려 공략을 상의했다.

   

바야흐로 중원을 장악한 수나라와 북방의 맹주 고구려,

그 외에 돌궐, 백제, 신라가 모두 전쟁 준비를 하는 가운데,

611년 10월 백제는 느닷없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여 장악하고

그 곳 성주 <찬덕>을 죽였다.

 

신라의 시선을 고구려에 돌려놓고 급습을 가한 전술의 쾌거였다.

   

612년 정월, 마침내 <양광>은 병력 113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쳤다.

 

그러자 무왕은 수나라에 협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쉽사리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전쟁 상황을 지켜보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백제가 길을 안내하고, 후미를 공략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수나라는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양광>은 614년 봄까지 줄기차게 고구려를 두들겼다.

 

그러나 그때마다 번번이 패퇴하였고,

그런 가운데 수와 고구려 사이엔 화친 약조가 이뤄졌다.

   

그때 이미 수나라는 곳곳에서 내란이 일어나 반란군이 설치고 다녔기에

이미 쇠망의 전주곡이 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613년에 <양현감>이 10만 군대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했고,

농민들이 합세함에 따라 반군의 세력은 점차 커져갔다.

 

617년에는 태원의 귀족 <이연>이 반군에 가담했고,

618년 봄엔 <양광>이 강도에서 살해됨으로써 수나라는 몰락했다.

 

그리고 이연이 세력을 규합하여 당나라를 세웠다.

   

이렇듯 중국 대륙이 한바탕 전쟁의 회오리에 휩싸여 있을 때,

무왕은 616년 10월에 달솔 <백기>에게 군사 8천을 안겨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했다.

 

그러자 신라는 2년 뒤인 618년에 <변품>을 앞세워

백제가 차지했던 가잠성을 공격해왔고, 그 곳 성주 <해론>이 전사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백제는 623년에 신라의 늑노현을 공격하였고,

624년에는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6개 성을 동시에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써 기선을 제압했다.

 

또 그 여세를 몰아 626년에는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여

그 곳 성주 <동소>를 죽였으며,

627년에는 장군 <사걸>을 내세워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무왕은 이 때부터 전면전을 선언하고,

웅진성에 대군을 집결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백제 땅을 되찾으려 하였다.

 

신라의 진평왕은 이 소식에 겁을 먹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무왕도 조카 <복신>을 당 태종에게 보내 조공하고, 당나라의 의중을 살폈다.

   

당 태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사신을 모두 불러놓고

전쟁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무왕에게도 조서를 보내 신라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무왕은 일단 당에 표문을 올려 전쟁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몇 달 뒤인 628년 2월세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함으로써

당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잠성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무왕은 한동안 무력 동원을 자제하고 내치에 힘을 쏟았다.

 

62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뢰를 회복하고,

630년에는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였으며,

632년에는 장남 <의자>를 태자에 책봉하였다.

   

그리고 그해 2월에 마천성을 고쳐 쌓은 뒤에 7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략을 재개하였다.

 

633년 8월에는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고,

636년 5월에는 장군 <우소>로 하여금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하지만 <우소>는 신라 맹장 <알천>에거 기습당해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무왕은 더 이상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간 신라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한 덕분에 백제인의 사기는 올라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되었다.

 

그런 탓인지 무왕은 만년에 이르러서는 풍류를 즐기며, 여유를 부리는 모습을 보였다.

   

632년 7월에는 생초 벌판에서 사냥을 즐기기도 하였고,

634년에는 법왕 이후로 30년 동안 지속되던 왕흥사 창건의 기쁨을 맛보며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왕흥사는 강가에 지어져 있어 가람과 풍경이 빼어나고,

채색 장식이 웅장한 대단히 화려한 절이었다.

 

무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불공을 올리곤 하였다.

   

그해 3월에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 낸 섬을 쌓는 등

사치스런 면모까지 드러냈다.

 

636년 3월에는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백마강)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포구의 양쪽에는 기암괴석이 서 있고, 그 사이엔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고『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 날 무왕은 몹시 즐거워하며 술에 흠뻑 취해

스스로 거문고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함께 수행한 신하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같은 해 8월 기사에도 무왕이 망해루에서

군신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며 놀았다는 기사가 보이고,

638년 3월에는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무렵엔 당나라와도 사이가 좋아 때마다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소식을 전하고, 637년 12월에는 당 태종에게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보냈다.

 

그것의 아름다움에 반한 당 태종이

그 보답으로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단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에 639년 10월에 무왕은 다시 철갑옷과 도끼를 당나라에 보냈고,

640년에는 왕자들을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641년 3월, 그는 40여 년의 치세를 뒤로 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는 비록 한낱 마 캐는 아이로 살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지략이 뛰어나고 판단력이 출중하여 국제 관계에 능숙하게 대처했다.

 

또한 물러날 때와 공격할 때를 능히 알아 영토 회복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유의 친화력과 인간미로 신하들을 잘 다독거려 정쟁을 종식시켰다.

 

이는 곧 한없이 추락하던 백제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으니,

무왕은 가히 성군이라 할만했다.

   

무왕에게는 의자왕을 비롯한 여러 자식이 있었으나, 그들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전북 익산시 팔봉동에 소재하는 쌍릉을 그의 능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대세이지만,

쌍릉은 일찍이 도굴당한 까닭에 그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한 상태다.

   

일설에는 무왕이 도읍을 옮기기 위해 전북 익산에 왕궁을 건설했다고 한다.

 

현재 익산시 왕궁면에는 흔히 왕궁 터로 불리는 유적지가 있는데,

이것이 정말 무왕이 천도를 위해 건설했던 궁성이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

 

 

서동에 얽힌 이야기는『삼국유사』‘기이’ 무왕 편에 나온다.

 

일연은 이 이야기를 어디서 발췌했는지 정확하기 밝히고 있지 않다.

 

주(註)를 통해 ‘고본(古本)’의 내용을 옮긴 점을 피력하고 있지만,

고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연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고본에는 서동이 장성하여 ‘무강왕’이 된 것으로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일연은 ‘백제에는 무강왕은 없다’라고 하면서 서동은 무왕이라고 단정했다.

 

따라서 서동을 무왕이라고 설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일연의 판단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서동은 무왕이 아닌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무강왕을 무령왕이나 동성왕으로 보기도 한다.

 

무령과 무강은 그 발음과 뜻이 유사하다는 측면을 들 수 있고,

또한 동성왕이 신라 왕실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혼인동맹을 맺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무령왕과 동성왕을 서동과 연결시킬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동성왕은 어린 시절을 왜에서 보냈고,

무령왕은 홀어머니 밑에서 마를 캐며 연명할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사료를 충분히 검토한 일연의 판단을 종중하여

서동을 무왕으로 설정하고, 그와 관련한『삼국유사』의 기록을 여기에 옮긴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가 경도(사비)의 남지란 못 둑에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다.

 

아명은 서동(薯童)이니, 그의 재능과 도량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평소에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고 곱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경도(서라벌)로 들어와 동리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먹였더니,

여러 아이가 그와 친하게 되어 잘 따랐다.

그래서 그는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이를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는 이렇다.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남몰래 시집 가 두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의 방을(薯童房乙)

밤에 몰래 품으려고 간다(夜矣卯乙抱遺去如)

 

이 동요가 경도 안에 잔뜩 퍼져 대궐까지 알려졌다.

 

백관이 이 일을 책잡는 바람에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는데,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줬다.

   

공주가 귀양지를 향해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뛰어나와 절을 하면서 호위를 하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지만,

괜히 마음이 당기고 좋았기 때문에 따라오게 했다.

 

그리고 남몰래 관계를 한 뒤에야

서동이라는 그의 이름을 알고서 동요가 맞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백제까지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놓고

장차 살림 꾸릴 일을 논의하는데, 서동이 웃으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입니다. 이것으로 한평생 부자로 살 수 있어요.”

   

“내가 어릴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을 내버려 쌓인 것이 흙더미 같소이다.”

   

공주가 그 소리에 크게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세상에 다시없는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 있는 곳을 알거든,

그 보물을 부모님 계신 궁궐로 실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좋다며 금을 끌어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 지명 법사의 처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금을 실어 나를 계책을 물으니,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력(神力)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신라 궁중에 날라다 두었다.

 

진평왕이 이 신기한 일을 성서롭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하면서

편지를 띄워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 덕분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무왕의 왕위 승계와 관련한『삼국유사』의 기록 전부이다.

 

일연은 이 이야기에 미륵사 창건 설화를 덧붙여 놓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고자 용화산 밑 큰 못가까지 왔더니,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났다.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여기에다 꼭 큰 절을 짓도록 하소서. 진정 저의 소원입니다.”

하니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 법사를 찾아가서 못 메울 일을 물었다.

 

지명 법사가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따로 짓고,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함)라는 현판을 붙였다.

 

진평왕이 여러 장인들을 보내 도와줬으니, 그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때 지은 미륵사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는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하고 있다.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높이가 14.24미터나 되는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