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敏達(538-585)>천황은 흠명(欽明)천황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선화(宣化)천황의 딸 석희(石姬)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572년 4월 3일 천황에 즉위하여

그 달 백제대정(百濟大井)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민달(敏達)천황은 백제 성왕의 왕자이다.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 터는 현재의 나라현 광릉정(廣陵町) 백제(百濟)로 비정한다.

 

이곳에 백제사(百濟寺) 삼중탑이 남아있고 그 지역이 백제(百濟)로 불리고 있으나

궁궐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서기575년 1월 오키나가 마테왕의 딸 광희(廣姬)를 황후로 세웠다.

 

황후는 1남 2녀를 낳았다.

 

첫째가 압판언인대형(押坂彦人大兄)황자{아좌태자}

둘째가 사카 보리 황녀, 셋째가 우지 시즈카이 황녀라 한다.

 

그 해 11월 황후 광희(廣姬)가 죽었다.

 

서기576년 3월 액전부(額田部)황녀를 황후로 맞아 2남 5녀를 보았다.

 

이 시대 불교 수용여부를 두고 논란이 심했으나

민달(敏達)은 불교를 공인하지 않고 두창으로 585년 사망했다.

 

서기 576년 두 번째 황후가 된 소아액전(蘇我額田)황녀가

서기 592년 12월 33대 <추고推古(554-628)> 여왕이 되는데

일본서기 추고(推古) 조에 그녀는 18세 때 황후가 되었고

34세에 남편을 여이었으며 39세에 천황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추고천황은 서기 554년 출생한 것으로 되며 소아액전(蘇我額田) 황녀가

18세때 시집왔다면 서기 571년 결혼한 것으로 된다.

 

이는 민달(敏達)이 즉위 전에 소아액전(蘇我額田) 황녀와 혼인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서기에서 첫째 황후가 575년 죽어서

576년 두 번째 황후로 액전부(額田部)황녀를 들였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

 

왜 일본서기에 이런 모순된 기록이 생겼을까?

 

흠명(欽明)조의 석희(石姬)와 같은 방법으로

백제 위덕왕의 황후 광희(廣姬)를 민달(敏達)의 황후로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이다음에 등장할 34대 서명(敍明) 천황 때문이다.

 

서명천황은 이후의 일본 황실을 열어 갈

38대 천지(天智)천황과 40대 천무(天武)천황의 부친이다.

 

그런데 하필 그 사람이 백제 위덕왕의 왕자 아좌태자(570-598)의 아들이다.

 

그러니 서명(敍明) 천황{훗날의 의자왕}과 그의 아버지 아좌태자의 족보가 필요하다.

 

아좌태자의 족보를 만들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 광희(廣姬)를 어딘가 꼭 끼워 넣어야 되는데

가장 적당한 곳이 위덕왕의 친동생 민달(敏達)이다.

 

따라서 광희(廣姬)를 민달(敏達)의 족보에 올리고 광희(廣姬)를 첫 황후로 만들어

아좌태자가 민달(敏達)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아좌태자는 백제 위덕왕의 아들이고 일본식 이름이 압판언인대형(押坂彦人大兄)이다. 

 

그런 뒤 첫 황후가 죽어서 다음 황후를 뽑았다는 등의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위덕왕은 서기 530년생, 민달 천황은 538년으로 본다.

 

소아액전(蘇我額田) 황녀는 명실상부한 민달(敏達)의 정비(正妃)로

민달(敏達)의 즉위 전에 결혼하여 즉위 후에 황후가 된 것이다.

 

백제와 일본의 황실을 혈연적으로 분리하기 위하여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고민하여 내 놓은 결과물이 일본서기의 혈연기록이다.

 

소아액전(蘇我額田) 황녀가 낳은 5녀 가운데

오하리다 황녀와 사쿠라이 유미하리 황녀의 두 딸이

압판언인대형(押坂彦人大兄) 황자에게 시집갔다.

 

놀라운 것은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로 기록된 넷째 딸이

서명(敍明)천황 (押坂彦人大兄황자의 아들)에게 시집간 사실이다.

 

결국 5녀 가운데 딸 둘을 押坂彦人大兄)황자{아좌태자}에게 보내고

한명의 딸을 그의 아들 서명(敍明) 천황에게 시집보냈으니

아좌태자 부자가 백제와 왜의 왕위 계승권의 중심인물임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백제 무령왕 – 성왕 – 위덕왕 – 아좌태자 (押坂彦人大兄)황자 – 의자왕(서명 천황) –

고인대형(古人大兄) 황자로 이어지는 백제의 적장자들의 명단이다.

 

소위 백제왕실의 장손들의 리스트인 것이다.

 

부부가 모두 천황을 지낸 민달(敏達) – 추고(推古)천황의 커플조차

자기 아들을 황위에 세우지 못하였다.

 

왕위 계승권은 적장자가 0 순위였던 것이다.

 

왜의 서명(敍明)천황이 서기641년 백제 의자왕으로 부임한다.

 

물론 일본 측 기록은 641년 서명(敍明)천황이 죽었다고 되어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상기 가계에서 네 번째에 있는 채녀(采女) 우나코의 기사이다.

 

채녀(采女)란 천황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궁에 들어 온 여자이다.

 

따라서 천황의 비로 들어 온 여자보다 신분이 낮은데

천황의 눈에 들어 자식을 갖게 되면 비가 된다.

 

채녀(采女) 우나코가 낳은 누카데 히메 (일명 타무라 황녀 또는 타카라 왕) 황녀와

압판언인대형(押坂彦人大兄) 황자 사이에서 서명(敍明)천황 (593–660)이 태어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때부터

타무라(田村), 타카라(寶), 타메(田眼), 타미(多米), 계미(鷄彌)등의 비슷한 이름이

남녀 불문하고 서명(敍明)천황 주변의 여러 사람에게 붙여진다.

 

우리말의 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서명(敍明)천황, 황극(皇極)천황, 제명(齊明)천황 그리고 서명(敍明)천황의 어머니

이름이 모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서명(敍明)천황에게 추고(推古)천황의 딸 타메(田眼 또는 多米)황녀가 시집가는데

서명(敍明)천황은 593년생, 타메황녀 594년생이다.

 

서기 594년이라면 추고(推古)천황 40세 때이므로 자식을 낳을 수도 있는 나이지만

민달(敏達)천황이 서기585년 사망했다 하므로 부친이 누구일지 의문이 남는다.

 

어쩌면 민달(敏達)천황은 왕위를 물러나 더 살아 있었을 수도 있다.

 

타메 황녀는 서명(敍明)천황의 황후였고

천황의 사랑을 받았으나 자식을 낳지 못 하였다.

 

이 여인이 서명(敍明)천황 다음의 35대 <황극皇極(594-661) 천황이 되나

서기 645년 을사의 변으로 쿠테타의 제물이 되어 추방된다.

 

이때 서명(敍明)천황의 장자 고인대형(古人大兄)의 나이가

천황이 될 나이에 미치지 못하여

그가 30세가 될 때까지 황극(皇極)천황이 한시적으로 천황자리에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고인대형(古人大兄) 황자는 대략 615년생이며 30세가 되는 서기 645년

그가 천황이 될 해에 맞춰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 황극천황을 폐위시킨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한 쿠테타 그룹은 자기들의 반역의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훗날의 <제명齊明(601-661)과 황극 천황이 동인인물이라고 역사를 조작하여

자기들이 천황을 폐위시킨 사실을 은폐한다.

 

- 소가(蘇我)씨의 비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