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隋書)는 서기 618년 수의 멸망이후

7세기 후반 <위징魏徵(580–643)>등이 찬(撰)한 역사서이다.

 

서기 636년 열전 50권이 완성되었다 하므로

일본서기보다 약 80년 먼저 나온 역사서로

권(卷) 81 열전(列傳) 제46 동이전 (東夷傳)에 왜국(倭國)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일부는 일본서기에 기록이 없고

또 일부는 일본서기에 나오지만 수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사서에 나오는데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많이 보아왔다.

 

3 세기 위지 동이전의 히미코(卑彌呼) 기사와 5세기 宋書의 왜5왕 기사가 그러하였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역사 왜곡 가능성이 제기된다.

 

송서에 기록된 서기 488년 왜무왕의 상표문 이후 나타나지 않던 왜국의 기사가

서기 600년 수서 열전 동이 왜국전에 나오는데 일본서기에는 이 기사가 빠져 있다.

 

일본서기가 편집방침과 맞지 않는 역사를 누락하거나 왜곡시킨 사례를 보아 왔다.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확보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가치는 황실의 만세일계,

킨키 야마토 (近畿 大和)의 유일 정통성,

그리고 백제의 부정과 열도의 자생적인 진화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세 가치와 상충되는 역사는 누락 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기 600년 수서 동이왜국전의 내용들은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남기고자 하는

일본황실의 역사와 배치되므로 일본서기에서 고의적으로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히미코(卑彌呼)기사의 역사성은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화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릴 것이므로 히미코를 일본서기에서 다루지 않았다.

 

송서의 왜5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를 제외시키지 않고는

만신창이가 된 황실의 만세일계를 과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기 600년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견수사 기사는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의 유일 정통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사이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다.

 

삼국사기를 삼국(三國)의 사기(史記)라고 하여도

우리는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日本)의 서기(書紀)라고 하기에 웬지 좀 찜찜하다.

 

왜냐하면 일본서기는 일본황실을 위하여 씌여진 역사이지

일본의 역사로 씌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일본과 일본황실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별로 문제시 하지 않는다.

 

실로 백제왕실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물려 준 일본열도를 완벽하게 관리해 온 셈이다.

 

수서에서는 다른 역사서에 보이는 왜(倭)라는 명칭 대신

인변(人)에 타(妥)를 쓰는 글자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였으나

대충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대세(大勢)이다.

 

따라서 콤퓨터 식자가 가능한 왜(倭)를 사용하고 주제와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한다.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毎、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

云委我弟。高祖曰:「此太無義理。」於是訓令改之。

 

개황(開皇) 20년 (서기600年)

왜왕 성(姓)은 아메(阿毎), 자(字)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호(号)는 아베계미(阿輩雞彌), 견사(遣使)하여 왕궁(王宮)에 들어왔다.

 

황제가 왜국의 풍속을 물었다.

 

사자(使者)가 대답하기를

 

“왜왕은 하늘(天)을 형으로, 해(日)를 동생으로 하여,

하늘(天)이 아직 밝지 않았을 때 나와 가부좌하고 정사를 보다가,

해(日)가 뜨면 곧 정무를 멈추고 동생에게 맡깁니다.

 

고조(高祖)가 말 하기를

 

“그것은 의리에 어긋나니 고치도록 하라.”

고 훈령하였다.

 

 

王妻號雞彌、後宮有女六七百人。名太子為利歌彌多弗利。無城郭。内官有十二等:一曰大德、次小德、次大仁、次小仁、次大義、次小義、次大禮、次小禮、次大智、次小智、次大信、次小信、員無定數。有軍尼一百二十人、猶中國牧宰。八十戸置一伊尼翼、如今里長也。十伊尼翼屬一軍尼。

 

왕비를 계미(雞彌)라 하고 후궁으로 여인 6–7백 명이 있다.

 

태자를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라고 한다.

 

성곽(城郭)은 없다.

 

12 관위 제도가 있다.

 

십이등(十二等)의 관제가 있으며,

처음을 대덕(大德)이라 하고, 다음을 소덕(小德),

다음 대인(大仁), 다음 소인(小仁),

다음 대의(大義), 다음 소의(小義),

다음 대례(大禮), 다음 소례(小禮),

다음 대지(大智), 다음 소지(小智),

다음 대신(大信), 다음 소신(小信)이라 한다.

 

관원의 정원은 없다.

 

군니(軍尼) 120명이 있고 이는 중국의 목재(牧宰)와 같다.

 

팔십호(八十戸)에 일 이니익(一伊尼翼)을 둔다.

 

중국의 현 이장(里長)과 같은 것이다.

 

십 이니익(十伊尼翼)은 일 군니(一軍尼)에 속한다.

 

 

其俗殺人強盜及姦皆死、盜者計贓酬物、無財者沒身為奴。自餘輕重、或流或杖。

毎訊究獄訟、不承引者、以木壓膝、或張強弓、以弦鋸其項。或置小石於沸湯中、

令所競者探之、云理曲者即手爛。或置蛇甕中、令取之、云曲者即螫手矣。

 

그곳의 풍습으로는 살인, 강도및 간통은 사형,

도둑은 가치를 살펴 재물로 변상시키고, 변상할 재산이 없는 자는 노예로 한다.

 

그 외는 경중에 따라 유형(流刑), 또는 장형(杖刑)에 처한다.

 

범죄사건을 취조할 때마다 인정하지 않는 자는

주리를 틀거나 강한 활 줄을 당겨 목을 가격한다.

 

또는 끓인 물속에 작은 돌멩이를 넣고

쟁송(爭訟)하는 자들로 하여금 돌을 찾도록 한다.

 

거짓말 하는 자가 화상을 입을 것이라고 한다.

 

또는 옹기 그릇에 뱀을 넣고 그것을 맨손으로 꺼내도록 한다.

 

정직하지 않는 자는 손을 물릴 것이라 한다.

 

 

人頗恬靜、罕爭訟、少盜賊。樂有五弦、琴、笛。男女多黥臂點面文身、沒水捕魚。

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사람들이 매우 순박하여 쟁송은 거의 없고, 도둑질 하는 자도 거의 없다.

 

악(樂)에 오현(五弦), 금(琴), 적(笛)이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팔, 얼굴 또는 몸에 문신이나 점을 새긴다.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문자는 없다.

 

다만 나무를 깎아 매듭을 만들어 통신한다.

 

불법(佛法)을 받들고 백제에서 불경을 구해 와서 처음으로 문자를 갖게 되었다.

 

점 치는 것을 알고 더욱 박수 무당을 믿는다.

 

 

毎至正月一日 必射戲飲酒 其餘節略與華同 好棋博 握槊 樗蒲之戲 氣候温暖

草木冬青 土地膏腴 水多陸少 以小環挂鸕○項令入水捕魚 日得百餘頭 俗無盤俎

藉以檞葉 食用手餔之 性質直 有雅風 女多男少 婚嫁不取同姓 男女相悅者即為婚

婦入夫家 必先跨犬 乃與夫相見 婦人不淫妒

 

매년 정월 1일이 되면 반드시 활쏘기시합을 하고 술을 마신다.

 

그 외의 절기를 지키는 것은 중국과 거의 동일하다.

 

장기, 쌍륙(雙六), 윷 놀이를 좋아한다.

 

기후는 온난하고 초목은 겨울에도 푸르다.

 

토지는 부드럽고 기름지나 바다가 많고 땅은 적다.

 

물오리의 목에 줄을 매달아 물속에서 고기를 잡게 하여 하루 백여 마리 잡는다.

 

풍속에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이나 도마같은 나무판 등을 쓰지 않고

나뭇잎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집어 먹는다.

 

품성은 곧고 우아하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다.

 

동성과는 혼인하지 않으며 남녀간에 서로 좋아하면 혼인한다.

 

신부는 반드시 개를 타고 신랑집에 들어 가 남편과 만난다.

 

부인은 음행이나 질투하지 않는다.

 

 

死者斂以棺槨、親賓就屍歌舞、妻子兄弟以白布製服。貴人三年殯於外、

庶人卜日而瘞。及葬、置屍船上、陸地牽之、或以小輿。有阿蘇山、

其石無故火起接天者、俗以為異、因行禱祭。有如意寶珠、其色青、大如雞卵、

夜則有光、云魚眼精也。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사람이 죽으면 관곽(棺槨)에 넣는다.

 

친밀하게 지낸 가까운 손님들이 시신 곁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처자형제는 백포로 상복을 만든다.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3년간 빈소에 안치하나 보통사람들은 날을 받아 매장한다.

 

장의(葬儀)에 이르면 시신을 선상(船上)에 놓고 육지에서 그것을 끌어 당기거나

조그만 상여를 가지고 행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그곳의 돌은 왠지 모르지만 불기둥이 되어 높이 치솟아

하늘에 이른다.

 

사람들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도한다.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있는데 그 색은 푸르고 크기는 달걀정도이다.

 

밤이 되면 빛을 발하여 물고기 눈의 정령이라 한다.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치며 진기한 물건이 많아서 항상 통사가 왕래한다.

 

 

大業三年、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

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

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勿復以聞。」

 

대업(大業) 3년 (서기 607) 그 왕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자가 이르기를

 

“해서(海西)의 보살천자(菩薩天子) 가 불법을 많이 일으킨다고 듣고

사자를 보내 예를 올리며 사문(沙門) 수십 인이 와서 불법을 배우도록 할 것 입니다”.

 

그 국서에 이르기를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노라. 건강한지 운운).

 

황제가 이를 보고 기분이 상하여 홍로경(鴻臚卿)에게

 

“야만족 오랑케로부터 또 다시 무례한 글이 오면 나 한테까지 가지고 오지 마라.”

고 일렀다.

 

 

明年、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羅國、經都斯麻國、

迥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又經十餘國、達於海岸。自竹斯國以東、皆附庸於倭。

 

다음 해인 대업(大業) 4년 (서기 608)

 

황제는 문림랑(文林郞) 배청(裴淸)을 사자로 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쯔시마국(都斯麻国)을 거쳐 멀리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잇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쯔쿠시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쯔쿠시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倭王遣小德阿輩臺、從數百人、設儀仗、鳴鼓角來迎。後十日、又遣大禮哥多毗、

從二百餘騎郊勞。既至彼都、其王與清相見、大悅、曰:「我聞海西有大隋、禮義之國、故遣朝貢。我夷人、僻在海隅、不聞禮義、是以稽留境内、不即相見。今故清道飾館、

以待大使、冀聞大國惟新之化。」清答曰:「皇帝德並二儀、澤流四海、以王慕化、

故遣行人來此宣諭。」既而引清就館。其後清遣人謂其王曰:「朝命既達、請即戒塗。」於是設宴享以遣清、復令使者隨清來貢方物。此後遂絶。

 

왜왕이 소덕 아베다이(小德 阿輩臺)에게 수백인을 딸려 보내 의장(儀仗)을 설치하고 고각을 불며 도착을 환영하였다.

 

십일 후 다시,

대례(大禮) 가다비(哥多毗)에게 이백여기를 딸려 보내 교외에서 위로하였다.

 

이미 그의 서울에 도착하여,

 

그 나라 왕과 배청(裴淸)이 만나 매우 기뻐하며

 

“나는 해서(海西)에 있는 대수(大隋)는

예의의 나라라 들었으므로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읍니다.

나는 이인(夷人)으로서 먼 바다 한 구석에 있으므로

예의(禮義)에 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궁벽한 촌 구석에 머물러 뵈올 기회가 없었나이다.

지금 길을 닦고 객관(館)을 꾸며 놓고 대사를 기다렸으니

아무쪼록 대국유신 (大国惟新)의 덕화(德化)에 대해 들려 주시옵소서.”

 

배청(裴淸)이 대답하기를

 

“황제의 덕은 이의(二儀)로 서고, 은혜의 연못은 사해로 흐릅니다.

왕을 어여삐 여김으로서 덕화(德化)를 이루고

그런 연유로 사자를 보내 여기에 황제의 뜻을 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배청은 물러나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그 후 배청이 사람을 보내 왕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명을 이미 전달하였으므로 곧 귀국길에 나서기를 청 합니다."

 

그래서 배청을 위하여 향연을 베풀고

그의 귀국편에 다시 사자를 딸려 방물을 공헌하였다.

 

그런 다음 사신의 발길이 끊겼다.

 

 

 

 

서기 600년이면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8년인데

수서에 왜의 여왕에 관한 언급은 전무하다.

 

수서의 기록은 남왕(男王)을 상정하고 있으며

일본서기을 통 털어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만 보더라도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의 추고(推古) 여왕 이외의

다른 왕이 견수사를 보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킨키 천황가 이외의 권력주체를 부정한다.

 

일본에서는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을

국조(國造)와 도치(稻置)로 해석하고 있으나 정당성을 확보할 권위는 없다.

 

왜냐하면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은 킨키(近畿) 야마토(大和)가 아닌

구주백제 (九州百濟)의 관제이기 때문이다.

 

덕(德),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관직에 채용하고 있으니

유교의 가치관은 이미 깊숙히 일본 열도까지 들어와 있다.

 

주민 80호 당 관리자 이니익(伊尼翼)을 두고

10명의 이니익(伊尼翼)은 1군니(軍尼)에 속한다.

 

그러니 80호를 1명의 이장(= 伊尼翼)이 관리하고

10개의 리(里)는 1개의 면(= 軍尼)이 되며 전체 120개의 면(面)이 있다고 하였으니 120 x 10 x 80 = 96,000 호의 인구이므로 수서에는 10만호의 인구라고 나와 있다.

 

호당 7인으로 보면 약 70만의 인구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관리 아래 있었다고 보면 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그곳의 돌은 왠지 모르지만 불기둥이 되어 높이 치솟아

하늘에 이른다. 사람들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도한다.”

 

이 기사는 배청이 몸소 아소산을 방문하고 자기 눈으로 확인한 장면으로 이해한다.

 

왜(倭)의 수도에서 아소산까지 중국 사신이 왕래 가능한 거리였다는 뜻이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쯔시마국(都斯麻國)을 거쳐 먼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잇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지쿠지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 (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똑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지쿠지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수서의 이 기록을 두고 왜의 서울이

야마토(大和)인지 큐우슈우(九州)인지 확인해 줄 역사가는 없다.

 

모두 나름대로 추측하고 다툴 뿐이다.

 

우리는 배청(裴淸)이 방문한 왜의 수도를 현 大分縣 中津市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中津市에서 아소산(阿蘇山)까지는

고귀한 신분의 중국 사신이라도 육로를 통하여 왕래 가능한 거리이다.

 

왜왕이 배청을 대면하고 듣고자 한 것은

유학의 기본명제인 예(禮)와 의(義)에 관한 것이었다.

 

왜의 관위제도는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이었고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훗날 백제의 의자왕이 되었을 때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구주백제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아좌태자(阿佐太子, 일본이름 押坂彦人大兄皇子, 570 – 598) 의 장남으로

서기 598년 부친이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서기 598년 백제의 위덕왕과 쿠우슈우(九州)의 아좌태자(押坂彦人大兄皇子)

부자(父子)가 죽자 야마토의 推古여왕은 九州를 병탄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推古10년 (서기 602)과 11년 (서기 603) 2차례에 걸쳐 九州 원정군을 파견한다.

 

일본서기는 큐우슈우(九州)의 존재를 감추기 위하여 신라 원정군이라고 기록된다.

 

그러나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九州軍의 역습을 받아 야마토가 항복한다.

 

일본서기 推古 11년 (서기 603) 12월 구주백제의 관위제가 시행되고

서기 604년 4월 헌법 17조가 발표된다.

 

九州의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 에게 패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제도를 수용하고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명에 의하여

야마토에 사찰건립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 진다.

 

수서의 기록은 매우 담담하다.

 

배청이 언제 왜국에 도착하여 언제 떠났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또 왜국의 사자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다.

 

서면(書面)으로 국서를 보냈다거나 하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그러나 지리, 문화, 풍습등의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런데 흥미진진한 일은 일본서기가

배세청(裴世淸)의 왜국방문을 야마토(大和)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앞에 인용한 수서의 내용보다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두개의 친서를 공개하면서 국서에 집착한다.

 

이를 증거로 야마토(大和)의 위상을 증거하려고 애 쓴다.

 

심지어 국서를 백제에 강탈 당하였다는 해괴한 내용도 있다.

 

그 시대 중국황제의 국서를 어떻게 감히 백제인이 강탈 할 수 있겠는가?

 

백제는 자기의 남쪽 바다를 지나간 중국의 사신 배청 기록을

자기 역사에 기록할 정도로 대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다.

 

개황(開皇) 20年(서기 600)은 推古 8年에 해당하나

이 때의 수서기록은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推古 15년 (서기 607) 7월 대례(大禮) 小野臣妹子를 대사로

鞍作福利를 통역으로 하여 대당(大唐)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나온다.

 

推古 16년 (서기 608) 4월 小野臣妹子가 대당(大唐)에서 돌아왔다.

 

당나라는 그를 소인고(蘇因高)라고 불렀다.

 

대당 대사 배세청과 12명의 수행원이 小野妹子와 함께 쯔쿠지(筑紫)에 도착했다.

 

難波吉士雄成를 파견하여 대당객 배세청등 당나라의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나니와(難波) 고구려 館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동년 6월 15일 당의 손님들이 나니와즈(難波津)에 정박하였다.

 

그날 30척의 배를 장식하여 강구에서 그들을 환영하고

새로 지은 외국인 館으로 안내하였다.

 

거기서 妹子臣이

 

“소신이 귀국할 때 당나라 황제 (실제로는 수의 양제)가 서간을 제게 주었는데

백제국을 통과할 때 백제인이 훔쳐 갔읍니다.

그래서 서간을 제출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라고 推古 여왕에게 보고하였다.

 

군신들이 상의한 뒤

 

“외교관이란 생명을 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되거늘

태만하게도 대국의 서간을 잃어 버렸다니 말이 되는가?”

라 하며 유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왕이

 

“이모코(妹子)는 서간을 잃어버린 죄가 있으나 가볍게 단죄해서는 안 된다.

방문중인 대국의 사신들이 이를 들으면 언짢아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며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배청(裵淸)의 왜국 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무왕 9년(608) 봄 3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문림랑(文林郞) 배청(裵淸)이 왜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우리 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奉使倭國 經我國南路)

 

 

동년 8월 3일 당의 손님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 날 여왕은 75마리의 말을 장식하여 海石榴市에서 손님을 환영하였다.

 

額田部連-比羅夫가 환영사를 하였다.

 

8월 12일 당의 객이 조정에 들어 와 사자의 취지를 아뢰었다.

 

그리고 대당(大唐)의 진물(進物)을 정원에 진열하고 使主 배세청(裴世清)은

황제의 서간을 소지하고 두번 재배하고 일어서 사자의 취지를 아뢰었다.

 

그 글에

 

“황제는 여기서 왜황(倭皇)의 안부를 묻는다.

사자 장사대례(長史大禮) 소인고 (蘇因高) 일행이 와서

왜황 (倭皇)의 뜻을 자세히 전 하였다.

나는 삼가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였다.

덕을 널리 펴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미치게 하려고 한다.

자애롭게 백성을 기르는 마음에 멀고 가까움이 있겠느냐?.

왜황(倭皇)은 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는 태평하며,

사람들의 풍습도 화목하고, 심지가 깊고 지성의 마음이 있어,

멀리까지 조공하러 온 것을 알고 있다. 그 아름다운 충성심을 기쁘게 생각한다.

점점 날씨도 풀리고 짐은 전과 같이 편안하다.

그리하여 홍로사장객(鴻臚寺掌客) 배세청(裴世清)등을 보내 방문의 뜻을 전하고

겸하여 따로 물건들을 보내노라.”

 

그 때 阿倍臣이 나가 이 글을 받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大伴囓連이 나가 이 글을 받아 대문 앞에 있는 책상위에 놓고

여왕에게 주상한 뒤 물러났다.

 

이 때 황자(皇子) 제왕(諸王) 제신(諸臣)들은 금으로 만든 머리장식을 꽂고

의복은 모두 금자수직(錦紫繡織) 및 오색(五色)의 능라(綾羅)로 만든 것이었다.

 

8월 16일 조정에서 당객들에게 향연을 베풀다.

9월 5일 나니와(難波)에서 객등에게 향연을 베풀다.

 

9월 11일 당의 배세청이 귀국했다.

 

다시 小野妹子를 대사로, 吉士雄成을 부사로,

福利를 통역으로 당객에 딸려 파견하였다.

 

거기서 여왕이 당제(唐帝, 실제로는 수양제)에게 인사를 표하는 글을 보냈다.

 

“동방의 천황이 서방의 황제에게 삼가 올리옵니다.

사인(使人) 홍로사장객(鴻臚寺掌客)  배세청(裴世清) 일행이 와서

오랜 꿈이 이루어 졌나이다.

가을에 접어들어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때 안녕하신지요?

이번 대례(大禮) 소인고 (蘇因高), 대례(大禮) 오나리(乎那利)등을 보냅니다.

간략하나마 삼가 인사 올리나이다.”

 

이 때 4명의 학생과 4명의 학문승 도합 8명을

당국(唐國, 실제로 隋나라) 에 파견하였다.

 

推古 17년 (서기 609) 9월 小野臣妹子 등이 대당에서 돌아왔다.

 

다만 통역 후쿠리(福利)는 오지 않았다.

 

推古 22년 (서기 614) 6월 13일 犬上君御田鍬, 矢田部造를 대당에 파견하였다.

 

스이코(推古) 23년 (서기 615) 犬上君御田鍬, 矢田部造가 대당에서 돌아왔다.

 

이상이 推古朝에 나오는 견수사 기록의 전부이다.

 

서기 618년 수가 멸망하므로 그 다음에 대당기사가 나와야 되나

일본서기는 견수사를 모두 견당사라고 처리하였다.

 

일본서기는 배세청(裴世淸),

수서는 당 시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배청(裴淸)으로 기록된다.

 

그것은 당태종의 이름이 세민(世民)이었으므로 “世”자를 피한 것이다.

 

배세청의 관직을 수서와 삼국사기는 문림랑(文林郞)이라 했으나

일본서기는 홍로사장객(鴻臚寺掌客)으로 기록하고 있다.

 

小野妹子의 국서분실사건은 일본서기에 나오나 수서에 나오지 않으며

수서에는 小野妹子의 이름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수서에 지쿠지국(竹斯國)과 진왕국(秦王國)의 국명이 나오지만

야마토(大和)의 국(國)에 해당되는 국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마타이에 서울이 있다 (都於邪靡堆)고 나오므로

서울은 야마타이(邪靡堆)에 있었다고 추측되나 그곳이 어디인지 아직 정설이 없다.

 

배세청이 도착하고 그의 환영식을 지휘한 소덕(小德) 아베다이( 阿輩臺)와

대례(大禮) 가다비(哥多毗)의 이름이 수서에 나오지만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 고위관리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推古 여왕을 적어도 3회 접견하였는데

귀국하여 왜왕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은 납득할 수 없다.

 

또 배세청이 왜국을 방문하고 환영받은 의전의 내용이

수서와 일본서기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쪽은 사실이 아닐 터이다.

 

일본의 古田武彦은 큐우슈우(九州)에 야마토(大和)와 다른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역사학자이다.

 

이를 큐우슈우 왕조설 (九州王朝說)이라 부르며

일본학계에서는 치열한 논전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착각하기 쉬운 점은 큐우슈우 왕조설 (九州王朝說)을 인정하는 사람은

큐우슈우 왕조 (九州王朝)라는 실체를 상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큐우슈우 왕조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야마토 왕조라는 실체가 또 따로 존재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쪽도 왕조의 실체 같은 것은 없었고

세월속에 인간의 이합집산이 있었을 뿐이다.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동일한 인물이 한 곳에 붙박이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큐우슈우의 왕, 야마토의 왕, 또는 백제의 왕을 돌아가며 맡는 것이 백제의 제도였다.

 

우리는 보통 아버지가 왕이면 왕자는 부왕이 죽을 때까지

그냥 할 일 없이 기다릴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백제 왕실은

왕자들을 큐우슈우와 야마토에 보내 어렸을 때부터

그들로 하여금 나라을 관리하도록 훈련시켰다.

 

큐우슈우 왕조의 왕이 야마토의 왕이 되면 열도는 통일 상태이며

야마토의 왕이 큐우슈우를 관리할 힘과 권위를 잃으면

어느 때고 큐우슈우 왕조가 존재하게 된다.

 

서기 629년 구주백제왕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야마토를 장악하고

서명천황(敍明天皇)이 되었을 때는 야마토와 큐우슈우가 통일상태이며

서기 641년 그가 백제 의자왕이 됨으로써,

황극(皇極)과 제명(齊明)이 야마토와 구주를 따로 관리할 때는

큐우슈우 왕조가 존재한 것이다.

 

큐우슈우의 왕 카루황자(輕皇子)가 쿠데타를 일으켜 야마토를 장악하고

야마토의 효덕천황(孝德天皇)이 되면 큐우슈우 왕조는 사라진다.

(을사의 변 직후의 상황).

 

이렇게 큐우슈우 왕조는 시대의 풍운에 따라 존재와 비존재를 반복하였고,

야마토 왕조 또한 이와 유사한 변화속의 존재로 파악된다.

 

영원하지 않는 존재를 영원하게 만들고자 하거나,

만세일계가 아닌 것을 만세일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고자 하는 행위이다.

 

수서와 일본서기 기록의 불합치는 이러한 작위의 결과일 것이다.

 

推古 16년 (서기 608) 배세청이 나니와(難波, 현 오오사카)에 도착하고

推古 여왕과 대면하고 국서를 낭독하였다는 일본서기 기사를 신용하기 어렵다.

 

서기 608년 왜국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배세청이 남긴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되었을

수서 왜인전 내용에서 야마토 방문의 단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년 9월 배세청의 귀국편에 4명의 학생과 4명의 승려을 파견하는데

이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파견한 것이다.

 

대업(大業) 3년 (서기 607) 그 왕 다리시북고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자가 이르기를

“해서의 보살천자 (菩薩天子) 가 불법을 많이 일으킨다고 듣고

사자를 보내 예를 올리며 사문(沙門) 수십 인이 와서 불법을 배우도록 할 것 입니다.”

하였는데 그 연장선에서 서기 608년 8명의 학생이 파견된다.

 

공교롭게도 高向漢人-玄理, 新漢人-日文, 南淵漢人-請安이 귀국하였을 때

다리시북고는 야마토(大和)의 왕이 되어 있었고

일본서기는 그 이름을 서명천황(敍明天皇)이라 적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초대 중국유학생 출신들이

서명천황(敍明天皇, 593 – 660) 주위에 머무르게 된다.

 

견수사의 주체가 야마토(大和)인지 구주왕조인지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직 누가 그것을 결정하였나가 중요할 뿐이다.

 

견수사가 되었건 견당사가 되었던

모두 다리시북고 = 조메이천황 = 백제 의자왕의 작품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