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년 10월 수양제는 끝내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인 615년 8월 수양제는
북쪽 변방을 순시하였다가 안문에서 돌궐에게 포위당하여 죽을뻔하자
616년 7월 수양제는 북쪽이 무서워져 장안(서도)과 동도(낙양)에서는
더 이상 있지 못하고 남쪽 강도(강소성 양주: 남경이 있는 양자강 바로 위)로 도망갔다.
617년 (수나라 공제 의녕 원년)
2월 적양의 와강채에 투신한 <이밀>이 흥낙창을 빼앗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게 한다.
이어서 낙구창을 점거하자 인재와 도적들이 모여
무리가 수십만에 이르고 동도(낙양)마저 위협한다.
(와강채에 있었던 적양의 군대를 와강군이라고 한다. 나중에는 <이밀>이 차지함)
4월 <이밀>이 회낙창마저 점거하자 동도(낙양)을 지키고 있던 월왕 <양동>이
수양제에게 <이밀> 토벌을 주청한다.
5월 월왕 <양동>이 회낙창에서 <이밀>을 패퇴시기니 <이밀>은 낙구창으로 도망갔다.
태원 유수로 있던 <이연>은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특히 동도(낙양)에서 <이밀>이 큰 세력을 떨치자 자기도 반란에 참가한다.
6월 <이밀>이 동도 군사들을 대패시키고 다시 회낙창을 빼앗았다.
7월 <이밀>이 동도를 지키고 있는 월왕 <양동>과 일전일퇴를 벌이자
수양제는 드디어 <왕세충>을 파견하여 월왕 <양동>과 함께 <이밀>을 치도록 한다.
같은 달 5일에 <이연>이 드디어 장안을 점령하려고 태원을 떠난다.
가는 도중에 군사력이 약하자 돌궐의 <시필>가한에게 군사력 지원을 구원한다.
그와 동시에 <이밀>에게는 <이밀>을 주군으로 떠받들겠다고 하며
자기는 <이밀>에게 <이밀>의 당공으로 책봉받고 싶다고 하면서 <이밀>을 안심시키며 계속 남하한다.
9월 서세적(이세적)이 <이밀>에게 여양창을 얻자고 하여 이를 얻어 창고를 열고
백성들에게 멋대로 먹게하니 10여일 만에 정예의 병사 20여만을 얻었다.
이로써 와강군이 최강군이 된다.
그 달에 드디어 <왕세충> 등이 부하를 인솔하고 동도(낙양)에 도착한다.
그러자 월왕 <양동>이 유장공 <방옥>으로 하려금 <왕세충>과 합하여
10여만을 이끌고 낙구에서 <이밀>을 치도록 하였는데
<이밀>이 낙구에서 이기고 <왕세충>이 패하였다.
동도(낙양)에서 이러고 있는 사이에 <이연>이 황하를 건넌다.
그 뒤를 이어 <이연>이 영풍창(섬서성 동관현 북쪽)에 이르러 창고를 열어
굶구린 백성을 구제하니 관리와 백성 그리고 도적들이 귀부하는 것이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다.
이렇게 되니 여기서 군사를 크게 모았다. (19만명)
10월 4일 <이연>이 장안에 도착하였다.
그때 군사는 20여 만이었다.
그리고 그달 14일 장안성을 포위하고, 27일 장안성을 공격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동도(낙양)쪽에서는
<이밀>과 <왕세충>이 일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11월 9일 드디어 <이연>이 장안을 점령한다.
<이연>은 장안을 지키고 있던 수양제의 손자 <양유>를 황제로 세운다.
이때에도 동도(낙양)에서는 <이밀>과 <왕세충>이 일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618년 (당고조 무덕 원년)
3월 <이연>이 장안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문화급>이 주동이 된 황제의 친위대 효과군은 수양제를 시해하고,
진왕 <양호>를 황제로 세우며, 관중(장안)을 향하여 떠난다.
4월 수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연>이 양유를 밀어내고 황제로 즉위한다.
당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5월 수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동도(낙양)에서
<왕세충>과 동도 유수 <원문도>가 월왕 <양동>을 황제로 세운다.
(<양동>은 연호를 황태라고 썼기 때문에 양동을 황태주라고 부른다)
한편 동도(낙양)에서는 <우문화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떨고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수양제와 함께 강도에 있던 <양호>를 황제로 세웠는데
동도에서 제멋대로 또하나의 황제를 세웠기 때문이다.
6월 <우문화급>이 활대에 도착하여 여향에서 <이밀>과 싸웠는데 뜻밖에도
당시 최강이었던 황제의 친위대인 효과군을 거느린 <우문화급>이 패하여 달아났다.
여기서 <이밀>은 동도(낙양)와 싸운 날짜도 오래되고
동쪽으로 <우문화급>을 막았으나 동도(낙양)에서 그들의 뒤를 칠까 두려워
황태주에게 항복을 신청하고 <우문화급>을 토벌하여 속죄함을 받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에 황태주 <양동>이 <이밀>에게
태위 상서령 동남도 대행대 행군원수 위국공의 벼슬을 주며,
먼저 <우문화급>을 평정하고 그 다음에 조정에 들어와 정치를 보필하라고 한다.
7월 <이밀>은 서쪽에 대한 염려가 없어지자 모든 정예의 병사를 가지고
동쪽으로 가서 <우문화급>을 공격하였다.
<이밀>은 <우문화급>의 군사들이 군량이 다하였다는 것을 알고
거짓으로 화해하자고 하였더니 <우문화급>이 기뻐하고
그의 군사들이 멋대로 먹게 하면서 <이밀>이 그들을 먹여주기를 바랬다.
마침 <이밀>의 밑에 있는 사람이 죄를 짓고 도망하여 <우문화급>에게 가서
그 사정을 다 말하니 <우문화급>이 크게 화를내고 영제거를 건너서
<이밀>과 동산 아래에서 싸웠다.
<이밀>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혼절하자
오직 <진숙보>만이 그를 보위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진숙보>가 군사를 수습하고 싸워서 <우문화급>이 물러났다.
그런데 <우문화급>은 급군에 들어가 군량을 구한 뒤,
동군의 관리와 백성들을 고문하고 노략질 하여 쌀과 곡식을 책임지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궤> 등이 감당하지 못하고 <이밀>에게 항복하였다.
동군의 무리들도 <이밀>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니 <우문화급>은 무리 2만으로 북쪽 위현으로 갔다.
이때 동도에서 대기근이 들어 쌀값이 폭등한다.
한편 화북에서는 수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하간(하북성 하간시)을 지키던 <왕종>이 상례를 선포하고 곡을 해서 <두건덕>이 사자를 보내 조문하니 <왕종>이 항복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북의 군현들이 다투어 <두건덕>에게 귀부한다.
이에 <두건덕>이 낙수에 도읍을 정하고 백관을 갖춘다.
9월 <이밀>은 낙구창을 열어 사람들이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였는데
창고가 있는 성에서 곽문까지 쌀이 몇 촌이나 두껍게 깔려 수레와 말이 밟고갔고
여러 도적들이 와서 밥을 먹는 사람은 그 가족과 어울러서 거의 1백만이나 이르렀다.
<이밀>은 동도의 군사가 자주 패하고 미약하며 장상(將相)들이 서로 죽이고 있어서
조석간에 평정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왕세충>은 대권을 오로지 하고서 장사(將士)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고
무기를 잘 수리하고 관리하면서 역시 몰래 <이밀>을 빼앗으려고 기도하였다.
그때 식량이 부족하였던 <왕세충>은 <이밀>의 군사들이 의복이 부족한 것을 이용하여 의복과 식량을 교역하여 식량을 확보하였다.
<이밀>은 <우문화급>을 격파하고 돌아왔지만
그의 힘센 졸병들과 좋은 말들이 대부분 죽었고 사졸들은 피곤하고 병이 들었다.
식량을 확보한 <왕세충>은 <이밀>의 무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그들을 치고자 하였다.
<왕세충>이 언사(하남성 언사현)에 이르러
통제거의 남쪽에 군영을 설치하고 통제거 위에 세 개의 다리를 만들었다.
<이밀>은 <왕백당>을 남겨두어 금융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정예의 군사를 이끌고
언사를 나가서 망산(낙양 북쪽)에서 막으며 그들을 기다렸다.
<정지절>이 내마군을 거느리고 <이밀>과 북망산 위에서 함께 군영을 마련하였는데
<선웅신>이 외마군을 거느리고 언사성의 북쪽에 군영을 마련하였다.
<왕세충>이 수백의 기병을 파견하여 통제거를 건너서 <선웅신>의 군영을 공격하니
<이밀>이 <배행엄>과 <정지절>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해가 저물어 각기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갔다.
<이밀>의 날랜 장수 <손장락> 등 10여 명이 모두 중상을 입었다.
<왕세충>은 밤에 200여 기병을 파견하여 북산으로 잠입시켜서 계곡 속에 숨겨두고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모두 말에게 먹이를 주고
욕식(아침 일찍 하는 식사)하게 하였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 <왕세충>은 군사를 이끌고 <이밀>에게 가까이 갔다.
<이밀>이 군사를 내어 대응하였는데 아직 열도 제대로 갖추지 아니하여
<왕세충>이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쳤다.
<왕세충>은 먼저 모양이 <이밀> 같은 사람을 하나 찾아서 묶어 숨겨 두었다가
싸움이 바야흐로 무르익었을 때 끌어다 진을 친 곳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북을 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미 <이밀>을 붙잡았다”
사졸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숨어있던 병사들이 나타나서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말을 달려서
<이밀>의 진영을 짓누르며 불을 멋대로 놓아 그 여막을 태웠다.
<이밀>의 무리들은 크게 붕괴되었고 그 장수 <장동인>과 <진지략>이
모두 항복하였는데 <이밀>은 1만 여명과 더불어 말을 달려 낙구로 향하였다.
<이밀>이 장차 낙구성으로 들어가려 하니 <병원진>이 사람을 파견하여
몰래 <왕세충>을 끌여들였다.
<이밀>이 이를 알았으나
<왕세충>의 군사가 반쯤 낙수를 건너기를 기다려 그를 치기로 하였다.
<왕세충>의 군사가 도착하였는데 <이밀>의 척후 기병이 때를 맞추어 깨닫지 못하여 장차 출전할 때 쯤에는 <왕세충의> 군사들은 모두 이미 건넜다.
<선웅신> 등이 또 군사를 챙겨서 스스로 점거하고
<이밀>은 스스로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휘하에 있는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호뢰(하남성 형양현 서북쪽)로 달아났고
<병원진>은 드디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이밀>이 자살하여 무리들에게 사과하고자 하였다.
<왕백당>이 <이밀>을 안고서 큰 소리로 울다가 기절하니
무리들도 모두 슬퍼서 울었는데 <이밀>이 다시 말하였다.
“여러분이 다행히 서로 버리지 않는다면
마땅히 함께 관중(당나라)으로 귀부하여야 하고
나 <이밀> 자신은 비록 공로를 세운 것이 없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부귀해짐을 보장 받을 것이오.“
<이밀>을 쫒아서 입관(함곡관 안으로 들어감-당나라로 들어감)한 사람이
무릇 2만명이었다.
같은 달(9월) <우문화급>이 위현(하북성 대명현 서북쪽)에 도착하니
무리들은 대부분 도망하였고 <우문화급>도 실패할 것을 알고서
황제나 해보고 죽기로 결심하고 진왕 <양호>를 독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허(許)라하고 백관을 두었다.
12월 당고조가 <이밀>을 파견하여 산동(낙양지역)으로 가서
그 나머지 무리 가운데 아직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거둬들이게 하였다.
이 틍을 타고 <이밀>이 도림에서 반란을 일으켜,
<성언사>가 추격하여 <이밀>의 목을 베었다.
619년 (당고조 무덕 2년)
1월 회안왕 <이신통>이 <우문화급>을 위현(하북성 대명현)에서 공격하니
<우문화급>이 요성(산동성 요성현)으로 달아났다.
2월 <두건덕>이 요성을 공격하여 <우문화급>의 목을 베었다.
620년 (당고조 무덕 3년)
7월 당고조 <이연>이 <이세민>에게 <왕세충>을 치도록 명하였다.
<이세민>이 신안(하남성 신안현)에 도착하니
<왕세충>은 3만명을 동원이 당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세민>이 보병과 기병 5만을 인솔하고 자간(낙양성의 서쪽)으로 진군하니
<왕세충>은 자간의 수자리를 뽑아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왕세충>의 영토에서 <이세민>에게 연달아 항복을 하였다.
<왕세충>이 불리해지자 <두건덕>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두건덕>이 이에 응하여 <왕세충>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621년 (당고조 무덕 4년)
1월 <이세민>이 낙양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에 당고조 <이연>이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이세민>은 이길수 있다고 보고하고
낙양을 계속 포위하였다.
3월 낙양의 식량사정은 매우 악화되었다.
<두건덕>이 마침내 낙양을 구원하러 군사를 동원하여 남하한다.
10만 여명이 성고(하남성 형양현 서북쪽 사수진)의 동쪽 벌판에 진을 쳤다.
이에 <이세민>은 휘하의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반은 동도(낙양)를 포위하고
자신은 날래고 용감한 병사 3천5백명을 거느리고 동쪽에 있는 무뢰로 갔다.
5월 <이세민>이 무뢰에서 <두건덕>을 대파하고 생포하였다.
이렇게 되니 <왕세충>도 <이세민>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어 마침내 당나라는 낙양마저 점령하여 중국을 재차 통일 하였다.
<隋末唐初 群雄割據圖>
★ 지도 클릭 후 왼쪽 상단 클릭하면 확대
지도상에 거란으로 표시된 지역은 고구려의 강역으로 보아야 할 것임.
이 시기 거란은 아직 강력한 통치자가 출현하기 이전으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었다.
신라는 진흥대제 때 길림까지 진출하였고,
백제는 무령대왕 때 황해도와 요동반도까지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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