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대제의 원년은 임인년(BC19)이다.

 


원년{BC19}임인,

 

9월, 선제를 용산(龍山)에 장사하고, 선제의 유명으로 순사(殉死)를 금했다.  

 

<아이阿爾>비가 아들 <도절都切>을 낳았다.  

 

<예禮>후를 태후로 올렸다.  

 

12월, <오이烏伊>를 황룡왕{黃龍王), <마리摩離>를 비리왕(卑離王)으로 삼았다.

 

이때 태후 <호예> 39세, 광명대제 <유리> 22세, <소서노> 48세, <아이> 21세,

<오이> 47세, <마리> 45세, <재사> 52세? <협보> 32세, <고루> 17세,

<온>공주 18세, <온조>26세이다.



 

 

 

2년{BC18}계묘,

 

정월, 년호를 유리광명(琉璃光明)으로 바꿨다.  

 

<재사再思>를 태보로, <협보陜父>를 좌보 겸 주민대가로,

<분노芬奴>를 우보 겸 주군대가로, <고루高婁>를 주궁대가로 삼았다.

 

<옥지屋智>는 곡물담당, <구추勾鄒>는 형벌담당, <도조都祖>는 의약담당,

<송의松義>는 보빙담당, <구도仇都>는 제신담당 대가의 일을 맡았다.  

 

3월, 하(河)변에서 수군과 육군을 사열하였다.  

 

9월, <소召>후와 함께 서하(西河)땅의 농사를 살피고,

온탕엘 가서 흰 노루를 손에 넣었다.  

 

10월, 란새가 궁궐의 새 뜰에 모였다.

황후가 딸 <진> 공주를 낳았다.

 

 

3년{BC17}갑진,

 

정월, 순노(順奴)・절노(絶奴)는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에서 다스리게 하고,

관노(灌奴)・계루(桂婁)는 <온조溫祖>가 우양(牛壤)에서 다스리게 하였으며

연노(涓奴)・황룡(黃龍)・행인(荇人)・구다(句茶)・비리(卑離)는

상이 <소>황후와 함께 다스리기로 하여서 <소>후의 마음을 위안하였다.  

 

3월, <화희禾姬>를 거둬들였다.  

 

5월, 태후 및 황후와 함께 해산(海山)엘 갔다가

소금과 돌화살촉을 가지고 돌아왔다.

 

동명신궁(東明神宮)이 완성되었다.  

 

7월, <송松>씨를 비로 올렸다.

 

골천(鶻川)에 이궁을 짓고, 상이 <소>황후 및 <온溫>공주와 함께 기거하였다.

 

한남왕(汗南王) <온조>가 입조하여

위나성(尉那城)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청하여서, 허락하였다.  

 

10월, <온溫>공주가 나이 스물에 죽어, 상이 이틀을 감식했더니,

<소>황후가 위로하며 그만하시라 하였다.


4년{BC16}을사,

 

2월, 농경을 권장하며 수자리를 순시했다. 

 

4월 황후가 <불>을 낳았다.

 

7월 후와 같이 동쪽을 돌면서 어루만졌다.

 

<시길>이 차거, 보합, 옥마, 산호를 바쳤다.  

 

8월 <비류>와 <온조>가 입조하였고 <유하劉河>를 잠사로 삼고 누에치기를 가르쳤다.

 

송씨가 아들 <도조>를 낳았다.  

 

9월, <마馬>공주와 <정공>의 딸 <치희{雉姬}>가 입궁했다.  

 

<평平>씨가 딸 <준>을 낳았다.  

 

12월, <분노芬奴>와 <구추>가 북옥저의 돈하(敦河)를 쳐서 평정하였다.

 



 

5년{BC15}병오,

 

정월, <향香>공주를 <고루高婁>의 처로 삼았다.  

 

3월, 자몽(紫蒙)왕 <섭신涉臣>의 딸 <고두皐豆>를 <을두지乙豆智>의 처로 삼고,

<만曼{계루의 딸}>공주를 <비류沸流>의 처로 삼았다.

 

화씨와 치씨가 양곡으로 이사했다.

 

동해의 신마의 7천필을 사고 차기부를 설치했다.

 

<을두지>를 장군 겸 어가주부로 삼았다  

 

5월, 구루성(溝婁城){쌍산}에 한인과 교역하는 호시(互市)를 열었다.  

 

8월, <소召>후와 함께 서하(西河)에서 농사를 권장하고,

양 열 마리와 돼지 다섯 마리씩 키우기를 장려하였다.  

 

10월, 호구(滸口)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만>공주가 <비류>의 자식 <양인>을 낳았다.

 


 

6년{BC14}정미,

 

황후가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4월, 서하와 하빈에 한관(漢館)의 수를 늘리고,

한 가지 기술에라도 능통한 자는 불러들여서 후하게 녹봉을 주고 짝도 지어 주었다.

 

<송松>비를 위해서 두곡(豆谷)에 행궁(行宮)을 지었다.  

 

7월, 개마성(蓋馬城)을 빼앗고, 그 곳의 왕 <소쾌小噲>를 붙잡았더니,

매년 양 오천마리와 소와 말 각 2백마리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후가 딸 <眞>을 낳았다.

 



7년{BC13}무신,

 

정월, <불艴>태자가 네 살에 죽었다.  

 

4월 황후가 한남(汗南)으로 갔다.

 

이로서 <구추>를 현토태수로 삼았고 경계하여 성을 지켰다.  

 

5월, <송>비가 두곡에서 <해명解明>을 낳았다. 

 

상이 한남으로 가서 황후를 맞이하여 돌아왔다.

 

어유사(魚遊詞)라는 노래가 생겼다.

 

<화씨>가 <도>공주를 낳았다.

 

황후가 한남으로 가자 유리가 자신의 심복인 구추를 현토태수로 삼았다는 내용인데

그 이전까지는 황후의 모사격인 을음이 태수로 있었는데 직위를 박탈하였다는 것이다.



8년{BC12}기유,

 

5월, <시길柴吉>이 죽어 아들 <창특昌特>이 섰다.  

 

<익翊>공주가 입궁하였다.


9년{BC11}경술,

 

4월, 기산(箕山)에서 7일간 사냥을 하다가,

<계桂>후의 무덤가에서 진주를 주워서 량곡(凉谷)(골천행궁)으로 돌아왔다.  

 

<치희雉姬>가 <화희禾姬>와 서로를 욕하다가 친정으로 돌아갔다.

 

<치희>는 <정공鄭共>의 딸이었고, 친정집은 한(汗) 수변 위쪽에 있었다.

 

그녀를 뒤쫓아 가다가 나무 밑에 이르러서 황조사(黃鳥詞)를 지었다.  

 

 

8월, <소노素奴>{비리왕}가 딸 <가치可治>를 <양羊>태자에게 처로 주었다.

 

태보 <대방량>이 물러나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양>태자는 황룡국 <양길>의 딸 <화>소비의 아들이다.



10년{BC10} 신해,

 

정월, <재사>가 죽어 <비류沸流>를 태보로 삼았다.

 

<송>비가 여아 <목>을 낳았다. 

 

<섭신>(자몽국왕)이 그 아들의 혼인을 청하였는데

공주가 어리다고 답하여 화목을 잃었다. 

 

 4월, 남구(南口)에서 군사를 훈련하여 개마와 자몽국에 대비하였다.  

 

<화>씨가 아들 <해술解術>을 낳았다.

 


11년{BC9} 임자,

 

4월, <섭신>이 반란하여, <분노芬奴>가 그의 도성을 쳤더니,

<섭신>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치희雉姬>가 딸 <정>을 낳고 <작희鵲姬>가 딸 <와>를 낳았다.

 



 

12년{BC8}계축,

 

漢의 <유오{鷔=成帝}>가, 아들이 없어, 조카 <유흔{欣=哀帝}>을 태자로 삼았다.

 

2월 <송>비가 여아 <은>을 낳았다.

 

황후가 <람>공주를 낳았다.



13년{BC7}갑인,

 

정월, <아이阿爾>후가 춘추 서른에 죽었다.

 

<아이>후는 <소>황후 전 남편 <구태仇台>의 딸이다.

 

성품은 따뜻하며 자애롭고 정숙하며 영리하였고,

<도절都切>태자와 공주 셋을 낳았다.  

 

<금와金蛙>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한>공주(한소의 딸 평씨의 딸)을 거두었다.

 

<송>비를 후로 삼았다.

 

<온조>가 동명묘를 세웠다.

 

 

<금와>가 죽은 것과 <온조>가 동명묘를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온조는 금와의 서자 구태의 아들이다.

 


 

14년{BC6}을묘,

 

정월, <도절都切>이 책성으로 가서 <대소帶素>의 딸과 혼인하였다.  

 

7월, <재사再思>공주를 <온조>에게 처로 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땅에 목책을 세웠는데 아마도 남진의 뜻이 있었다.

 

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과 경(황후)은 서쪽으로 나아가고,

<온조>와 <재사>는 남진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제(추모)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

 

이때는 <재사>가 비류의 妃가 되어있던 까닭이다.  

 

 

10월, <대소>가 5만군을 끌고 들어와 송강에서 노략하다가

큰 눈이 7일간을 내려서 얼어 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 되자,

<해소觧素>의 간언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였다.

 

 

온조13년{BC 6} 

 

봄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하물며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 (漢水)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에 한산 (漢山)아래에 목책을 세우고,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에 마한 (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 (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 (熊川)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 (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도절都切>太子의 어머니는 <阿爾>后이며, <召西奴>가 낳은 <구태仇台>의 딸이다.

 

<類利>太子는 그녀를 맞아들여, <都切>과 딸 5명을 낳았다.

 

그리고나서 유리 13년(BC7년)에 <아이>후는  세상을 떠났다.

 

<아이>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리>는 <도절>을  부여에 인질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소서노>는 <도절>의 동부여 인질을 반대하였고

<유리>세력과 일대 혈전을 벌린다.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투구를 입고 군사를 지휘하는 소서노와

그녀를 호위하는 다섯명의 중신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유리>가 왕권을 강화하고자 <소서노>의 세력을 제거코자 하니

<소서노>와 그의 중신들이 이에 저항하다가 결국 <소서노>는 죽게된다.

 

<소서노>는 BC 66년에 태어나서 BC 6년에 61살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고구려는 <소서노>의 죽음을

<예>태후가 죽은 해(AD 28)에 <유리>와 함께 죽은 것으로

슬쩍 집어넣어 은폐하려 하였다.

 

 

유리14년(기원전 6)

봄 정월에 부여 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서 방문하여 문안하고

인질을 교환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 (都切)을 인질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으므로 <대소>가 화를 냈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병력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이 많이 얼어 죽으니 이에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도절>은 하는 수 없이 동부여에 인질로 가고

<소서노>의 졸본세력이 제거되자 동부여의 <대소>가 고구려를 침공한다.

 

 

 


19년{BC1}경신,

 

8월,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달아난 제사희생용 돼지를

장옥택(長屋澤)에서 상하게 하였기에, 그들을 땅에 묻으라고 명하였다.

 

이후 상의 목숨이 위중하여 졌더니,

황후와 무당이 <탁리>와 <사비>를 땅에 묻어 죽인 제의 잘못을 빌고 사죄하였다.  

 

<무골武骨>을 좌보로, <고루高婁>를 우보로 삼았다.  

 

漢에서는 <애제><흔>이 죽고, 종제{4촌동생}인 <평제><연>이 섰다.

 

<동현>부처가 자살하고, <왕망>의 딸이 정사를 도맡았다.

 


20년{AD1}신유,

 

정월, <도절都切>태자가 책성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으니,

<대소帶素>는 이 일을 자괴하여, <도절>의 시신은 돌려보내고,

자신의 딸은 데리고 있으려 하였더니, 죽은 <도절>이 슬퍼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5월, <송>후가 <두>공주를 낳았다.

 

<비류沸流>가 37살에 죽었다.

 

상은 감식하며 <소>황후를 위로하였고,

<아이阿爾>의 딸 <진眞>공주를 <비류>의 아들 <양인昜人>에게 처로 삼아 주었다.  

 

<만曼>공주가 <도조都助>에게 개가하였다.  

 

<협보陜父>를 태보로 삼았다.

 

태보 <대방량大房良>이 82살에 죽었다.

 

그의 처 <엄掩>공주에겐 매년 양식을 주도록 하였다.

 


21년{AD2}임술,

 

제사 희생물을 관장하는 절노(絶奴)부의 <설지薛支>가 도망간 돼지를 좇아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岩)에 다다랐더니,

큰사슴 작은 사슴 물고기가 풍성하고 넉넉하며, 오곡을 가꾸기 적당하고,

무성한 숲과 큰 나무가 많고, 약수가 샘솟고, 신성한 산이 있어,

도읍으로 하기에 합당한 곳임을 발견하였다.

 

3월에 상께 도읍을 세우기를 주청하였다.  

 

4월, 위중림(尉中林)으로 사냥을 나가서,

황후와 함께 국내가 도읍으로 삼기에 어떠한 지를 살폈다.  

 

9월, 황후와 함께 국내의 웅심(熊心)・합환(合歡)・위나암(尉那岩)등의 땅을

살피러 갔다가, 사물택(沙勿澤)을 유람하고,

은거하고 있던 사람 <위사물位沙勿>을 늪의 반석으로 찾아가서 만났다.

 

상이 이 사람을 태우고 돌아왔더니,

 

황후가

 

“산 속에 사는 미천한 사내를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상은

 

“그렇지 않소. <이윤>이나 <여상{呂尙>도 이와 같은 사람이었소.”라 답하였다.  

 

<현玄>공주를 <작鵲>태자의 비로 삼았다.  

 

<재사再思>공주가 <온조溫祚>의 아들 <다루多婁>를 낳았다.

漢의 <연>이 <왕망>의 딸을 처로 삼았다.

 

<왕망>은 또 ■■의 딸■을 불러들였다.

 

■는 둘 째 처가 되었다.

 


22년{AD3}계해,

 

10월, 위나암(尉那岩)으로 이거하니, 이곳이 북도(北都)이다.  

 

은천령(銀川岺) 아래에 주류신궁을 지었다.  

 

12월에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며 닷새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협보陜父>가

 

“천자가 사냥을 함은 병사를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풍설에 사냥마를 심하게 내돌려서 행락하심이 가당하신지요?”라 아뢰었다.

 

상은, 비류(沸流)에서 <협보陜父>를 처음 만나고서부터

마음속에 쌓여 온 것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자,

그를 파면하여 정원을 관리하는 소형으로 삼았다.

 

<협보陜父>는 작은 배로 물을 건너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23년{AD4}갑자,

 

2월, <해명解明>이 동궁이 되었다.

 

보령 열일곱이었고,

모친 <송松>후가 란새가 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서 낳았다.

 

성품은 영명하며 씩씩하고, 얼굴도 상을 많이 닮았다.

 

이에 황후의 딸 <진珍>{유리와 아이후의 소생}공주로 처를 삼아 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널리 풀어 주었다.

 

왕과 황후가 동궁(해명태자)과 동궁비(진공주)를 데리고 온탕에 가서

졸본척신(소서노 계열)과 비류척신(송양계열) 30명과 잔치를 열었다.   

 

<송松>후가 은천(銀川)의 새 궁전에서 <무휼無恤>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를 비췄다.’하여 궁의 이름을 주류(朱留)궁이라 하였고,

‘흰 학이 고개 위를 선회하였다.’하여 고개 이름을 학반령(鶴盤)이라 하였다.  

 

<작鵲>태자가 물을 건너서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해명>태자와 <진>공주의 결합으로 동궁이 강해져서

더 이상 <작>태자로서는 어떤 희망도 없게 되므로 신라로 떠나게 되는데

초기의 신라는 지금의 경주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낙랑과 신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4년{AD5}을축,

 

9월, 기산(箕山)에서 사냥하다가, <우택羽澤>이라는 사람을 얻었고,

<준鱒>공주를 처로 삼아 주었다.

 

짐승을 길들이고 가두어 기르는 재주가 있었다.


26년{AD7}정묘,

 

4월, <송>후가 <해읍주解邑朱>를 낳았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땅으로 이거하였다.  

 

<대소帶素>의 형제 여덟이 보위를 다투며 서로를 죽였다.

 

<준>공주가 아들 <眞>을 낳았다 

 

병사와 식량을 보내서 <온조>의 한{韓) 정벌을 도왔다.

 

3년을 계속하였다.

 


 

온조왕 24년(A.D.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

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온조왕 25년(A.D.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온조왕 26년(A.D.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온조왕 27년(A.D.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는 남하하여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AD 6~9년까지 마한을 정벌한다.

 

 

 


27년{AD8}무진,

 

3월, <해명觧明>을 자진하게 했다. 이때 21살이었다.

 

황룡왕 <오이烏伊>가 보궁(宝弓)을 <해명>에게 주었더니,

 

<해명>이 이를 부러뜨리고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고 활이 튼튼하질 못했소.”라고 하였더니,

 

<오이>는 엄청 참담하였다.  

 

황후가

 

“<해명>은 자기 처를 아끼지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는데도,

폐하는 어찌 <해명>을 꾸짖지 않으십니까?”라 주청하니,

 

상은 <해명>을 불러서

 

“<진珍>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함이며,

나라의 노신을 모욕함은 사직을 가벼이 함이고, 후궁들과 교통함은 음란할 징조이다.

정녕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겠다.”라고 책망하였더니,

 

<해명>은 비참하고 억울했으나

려진(礪津)에서 창을 꽂아놓고 자진하였다.

 

동원에서 장사를 지냈고 묘를 세웠는데 창원이라고 불렀다.

 

나라사람들이 슬퍼하여 용감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신라(新羅)가 왕녀를 <협보>에게 처로 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 땅으로 천도하였다.  

 

 

7월, <도조都助>태자가 죽었다. 24살이었다.

 

<해명>의 동복형으로, 성품은 외조부 <송양松讓>을 닮아서,

자신을 과시하다 여러 번 질책을 받았다.

 

<해명>이 죽은 것을 보더니 동궁이 되고자,

자기 처 <만曼>공주에게 상께 청하라 하였더니,

 

<만>공주가

 

“동궁자리는 스스로를 닦아서 차지하는 것이지 달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라 하자,

 

번민하여 스스로 달아오르더니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토악질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용감해도 역시 죽고, 나약해도 역시 죽음뿐이다.”라고 하였다.

 

 



29년{AD10}경오,

 

6월, 모천(茅川)에서 붉은 개구리가 검은 개구리를 공격하였더니,

오(鏖)땅의 사람이 <대소帶素>가 패망할 징조라 하였다. 

 

<재사>공주가 그 아들 <다루>와 더불어 조정에 와서

상이 무당에게 명하여 <다루>에게 복을 기원했다

 

5일후에 돌아갔는데 왕이 손수 한남까지 배웅하였는데

공주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협보>가 신라(新羅)의 태보가 되었다.

 




31년{AD12}임신,

 

7월, 漢인 <전담田譚>이 색두(索頭)와 싸우다가 <구추勾鄒>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구추>가 <연비延丕(소후의 조카)>를 보내서 <전담>을 공격하여 죽였더니,

<엄우嚴尤>가 쳐들어왔기에, <엄우>의 장졸 2천을 사로잡고

무수한 병마와 병장기 및 인과 12개를 노획하였으며 땅도 7백여 리를 빼앗았다.

 

10월, 10월 <을두지>의 비 <고두>가 죽었다.

이 때문에 <양昜>공주를 <을두지>의 비로 삼았다.

   

자몽국왕 <섭신>은 딸 <고두>를 <을두지>{추모와 화비의 소생}에게 주어

화친을 하였으나, <섭신>의 아들의 혼사로 유리에게 딸을 달라고 하였으나

딸이 어리다는 이유로 혼담을 거절하여 화친을 잃었으나

이 시기엔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33년{AD14}갑술,

 

정월, <무휼無恤>을 동궁으로 삼고, 활쏘기 및 말 타기와 용병술을 가르쳤다.  

 

7월, <두豆>공주를 <고루高婁>에게 처로 주었다.  

 

8월, <오이烏伊>가 군사 2만을 이끌고 <섭신涉臣>을 쳐서 구리성(勾麗城)을 빼앗고,

<섭신>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자몽(紫蒙) 12국을 모두 평정한 것이었다.

 

9월 상이 <람>공주(유리와 아이후의 소생)와 온탕에 갔다.

 

10월, <마리摩離>가 군사 2만을 이끌고

맥굴(貊窟)과 패사(貝沙)를 쳐서 그 땅을 빼앗고 돌아왔다.  

 

<대불帶弗>이 <대소帶素>를 죽이고 보위에 올랐다.

 


 


37년{AD18}무인,

 

4월, <해술觧術>이 려진(礪津)에서 익사하였다.

 

<제수>가 그 시신을 찾았으며, 왕골령(王骨岺)에 장사하였다.  

 

<해술>은 <화>씨의 자로 성품이 부녀자 같았으며,

<해명>을 사모했던 <진>공주(해명의 처)도 따라 죽었다

 

7월, <오이烏伊>가 죽고 <보득宝得>의 아들 <모린毛獜>이 섰다.

 

<모린>은 <오이>의 사위이다.

 

<오이>는 책성 욕살(태수) <오문>의 자이다.

 

동명의 으뜸 공신으로 큰 뜻이 있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슬퍼하고 한탄하였는데,

이 때문에 <해명>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이에 또 <해술>의 일을 보고 병을 얻었다.

 

<해명>과 <양길>의 꿈이 누적되어 심하게 놀라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리명왕 37년(A.D.18)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 해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유리명왕이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온조>의 구데타로 <유리>와 <오이>, <해명>,<해술>이 죽은 것이다.

 

고구려는 온조의 반정을 숨기기 위하여

<해명>과 <해술>이 자살한 것으로 은폐히였다.


 

 

 

38년{AD19}을묘,

 

정월, 북도(北都)에 큰 지진이 있었기에 동도(東都)로 이거했다.  

 

<묵거黙居>를 태보로 삼았다.


39년{AD20}경진,

 

3월, 용산(龍山)의 가운데 고개에 동명신묘(東明神廟)를 세웠다.

 

재사(再思) 공주와 다루(多婁)가 궁에 들어왔기에,

<선蘚>・<백苩> 공주 둘을 <다루>의 처로 삼아 주고,

정윤관인(正胤冠釼)을 주어서, 한남(汗南)[국]의 전국옥새{傳國玉璽}로 삼게 했다.  

 

9월,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 동궁이 거루(巨婁)를 닮은 신마를 얻었더니,

상이 “동명(東明)이 부흥할 징조로구나.”라 하였다.  

 

10월, 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온조>의 반정을 축하하기 위하여

동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까마귀를 보낸 것이다.

 


40년{AD21}신사,

 

 2월, 비리왕인 <마리摩離>가 죽었는데 나이 84세다, 아들 <의록義鹿>이 섰다.

 

<의록>의 어미는 <소노{素奴}>의 딸이었다.


41년{AD22}임오,

 

7월, <유수>가 군대를 일으켜 <왕망>의 <신>을 토벌하였다.

■■■가 그를 따랐다.  

 

9월, 무신일 초하루, <왕망>이 절(대)에서 참수 되었다.

 


42년{AD23}계미,

 

11월, <대불帶弗>이 쳐들어왔기에,

학반령(鶴盤岺) 아래에서 그 군대를 크게 쳐부쉈다.

 

 

 

43년(AD24)갑신

 

2월 왕과 왕후가 태후의 장수를 빌러 동도로 가서 동명의 큰 제사를 지냈다.

 

묵거가 죽었는데 나이가 82세였다.



44년{AD25}을유,

 

2월, <고루高婁>를 태보로, <송의松義>를 좌보로,

<을두지乙豆智>는 우보 겸 주병대가로 삼았다.


47년{AD28}무자,

 

8월, <예태후>가 춘추 여든다섯에 죽어, 두곡(豆谷) 동쪽 언덕에 장사했다.  

 

10월, 상과 황후가 두곡 별궁에서 죽었다.

 

상은 춘추 예순 여덟이었고, 황후는 춘추 여든 셋이었다.

 

둘 다 태후릉 경내에 장사했다.  

 

동궁이 두곡 이궁에서 즉위하였다.


찬자는 “<광명光明>은 엄하고 굳세어 너그럽진 않았으나 지켜 이룸에 충실하였고,

인재 발탁을 권장하여 천하를 40년간 다스렸다.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풍족했으니 현명하였다 할 만하다.

<협보{陜父}>・<해명{解明}>・<소{召}>후 관련 처결은 모두 흠결이 있었다.”고 하였다.

<유리>는 18년에 <소서노>는 BC 6년에 죽었는데

예태후가 죽은 28년에 슬쩍 집어 넣었다.

<온조>의 반정과 동부여계 신명선제의 재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고구려사초를 편찬하다보니 고구려 초기 기년이 뒤틀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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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