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의 휘는 <연불然弗>이고 동천대제의 맏아들이다.

 

모친은 <명림전明臨鳣>후로 태보<명림식부>의 딸이고,

갑진년{AD224} 2월에,

꿈속에서 산궁이 있던 마을 골짜기에 불이 퍼지는 것을 보고 제를 낳았다.

 

자라서는 의표는 뛰어나게 시원스러웠고,

차분하면서도 의지가 강하고 지략이 있어 무리를 잘도 이끌었다.

 

그런데 <관구검>의 난리를 겪고 난 후,

동천대제가 서안평으로} 급하게 진공하였음을 후회하면서,

 

상에게

 

“魏와는 싸우지 말고, 내정을 잘 살피되, 신라와 백제는 복속하라.”

고 타이른 까닭으로, 용병함엔 신중하였으며,

다만 전렵과 황색하기로 그 삶을 마쳤다.

 

그러나 동천대제를 섬기는 데는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 유지를 저버리지 않았음에,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예물預物>과 <사구奢勾>가 난을 일으킨 것은 불륜에 따른 것이어,

한탄할 일이라 하겠으나, 당시의 세상은 유도{儒敎}는 아직 흥하기 전이었고,

황노(黃老){道敎}는 즐기며 사는 것만 알았으니,

다만 장생불사와 부국강병을 제일로 여겼을 뿐이었다.


중천대제 원년{AD248}무진,

 

9월, 대행제(大行帝)가 호천땅에서부터 병을 얻어 돌아와서,

태자를 불러서 신검을 넘겨주고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채 조금 있다가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고, 이때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동10월, 동천대제를 장사하였다.

 

<전鱣>황후가 따라죽으려 하자,

상이 붙잡아 따라죽지 못하게 말리고 천궁황태후로 높였다.

 

이외의 다른 후궁들은 대행의 시절과 같게 하였다.  

 

<요要>공주는 상황후로, <잠蚕>씨는 중황후로,< 엽葉>씨는 하황후로 삼았다.  

 

 

11월, 왕의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선제가 짐독을 당했다는 주장을 퍼뜨리면서

병사를 일으켜 범궐하였고, 관군이 이를 격파하였다.

 

상이 <예물>과 <사구>를 해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끝내 어지러이 쏟아지는 화살 아래에서 죽어 구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여 주었으며, 이들을 후하게 장사하여 주었다.  

 

눈이 많이 내리자, 상이 <주朱>후의 궁으로 찾아 갔다.

 

<주朱>후가

 

“신첩은 나이가 이미 마흔 다섯이니,

무덤이나 지키게 하여 주시지요.”라고 말하였으나, 상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전태후 <명림전> 44세, 주후 <주남> 45세, 엽후 <연엽> 22세, 중천대제 25세,

태자 <약우> 9세, <관나> 18세, <예물> 23세, <사구> 21세, <옥모> 11세이다.



 

 

중천대제 2년{AD249}기사,

 

춘정월, 상이 <전>태후와 함께 졸본으로 가서

사당을 배알하여 즉위를 고하고 돌아왔다.

 

태보 <명림소탑明臨小塔(164-249)>이 나이 86살에 죽어,

<달부達夫>가 이를 대신하고,< 방축方丑>이 좌보를, <회고湏古>가 우보를,

<공부貢夫>가 대주부를 맡았다.

 

보의소후인 <관나貫那>씨를 <전>>태후궁의 소후로 삼았다.  

 

동10월에 <전>>태후가 아들 <소발素勃>을 낳았다.

 

 


중천대제 3년{AD250}경오,

 

춘정월, <잠蚕>황후가 아들 <약신若信>을 낳았고,

<엽葉>황후가 아들 <약민若民>을 낳았다.

 

상은,<명림明臨>씨・<목穆>씨・<연椽>씨들에게 잔치를 베풀고는,

 

“상황께서는 딸 낳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지금 들어 내 후궁들은 모두 아들을 낳았소.

이는 황령들께서 보살펴주심일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중외대부 <목장穆萇>에게 명하여, 동천릉에 가서 고하라고 하였다.  

 

2월, 국상 <명림어수>가 내외병마사를 겸임하게 되었는데,

 

조서로써

 

“선황께서는 병마의 일을 손수 주관하시어 오랫동안 애쓰시다가

춘추 40에 요절하셨으니, 짐은 매우 애통합니다.

지금부터는 짐이 숙부께 병사를 맡길 것입니다.

훗날에 허물이 되지 않도록 하시오.”라 하였다.

 

<맥麥>씨의 오빠 <모태牟太>를 동해 패자로,

<엽葉>씨의 부친 <연황椽况>을 중부 대사자로,

<연淵>씨의 부친 <연악淵岳>을 중부 패자로 삼았다.

 

상은 <연淵>씨를 측은히 여겨서

<연淵>씨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대신하여 거두어들이려 하였더니,

이 일로 여러 신하들이 들고일어나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주朱>후가 <주방朱邦>태자를 낳았다.  

 

 

3월, <목평穆平>을 북부 대사자로 삼았다.  

 

겨울엔 많은 눈이 왔다.

 

 


중천대제 4년{AD251}신미,

 

춘정월, <연감淵甘>을 보의 소후로 삼았다.

 

<연감淵甘>은 <연淵>씨의 여동생인데, 승은을 입자 뛰어넘어 상례가 되었고,

애가 생기자 뛰어올라 후가 되었다.

 

궁중이 모두 놀랐다.

 

이때 <관나貫那>는 승은을 독차지 하고서도,

<연椽>황후와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면서 서로를 해하려고 하였다.

 

이에 상은 홀연히 <연감淵甘>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여름 4월, 상이 <감甘>후를 데리고 기구로 사냥을 다녀와서

<관나貫那>를 물에 던져버렸다.

 

애초에 <관나>는 두눌원 달박호(達泊湖)에 있는 리택(鯉宅) 사람의 딸이었는데,

얼굴이 곱고 맑았으며 머릿결은 아홉 자나 되었었다.

 

<관구검>의 난리 중에 옹구(壅口)로 제를 따라 들어가서 승은을 입고

<엽葉>비 봉례가 되었으며, <엽葉>비와의 인연으로 제를 곁에서 모시게 되었고,

<엽葉>비 또한 <관나>로 인하여 총애를 받았더니,

서로 간에 동혈지서(同穴之誓)를 하였었다.

 

<엽葉>비는 <일우逸友>를 낳고, <관나>는 <공貢>을 낳았더니,

두 사람 모두가 소후가 되었었다.

 

금상이 즉위하자, <엽葉>은 <약우若友>태자의 어미인 까닭으로

뛰어올라 황후가 되더니만 <관나>를 깔보았다.

 

<관나>는 이런 억울함을 삼키고는,

밤을 맞을 때마다 옹구(壅口)에서 예쁜 여인들이 불려 들어가서

승은을 입던 일을 시시콜콜 되뇌었더니,

상이 <엽葉>을 천하게 여겨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이에 <엽葉> 또한 약이 올라, 밤을 맞을 때마다 상주하길

 

“<관나>의 머리카락은 지아비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선제께서 호천에서 사냥하시던 시절, <관나>가 따라 들어가서 승은을 입던 때,

그 긴 머리채가 구렁이로 변하더니

상{동천제}을 여러 겹으로 감았었고 그 때문에 병이 드셨었습니다.”라 하였다.

 

상은 그것이 참소하는 것임을 알아서 믿지 않았더니,

 

또한 참소하길

 

“서쪽의 魏가 머리 긴 여자를 구한다고 하니,

그 여자{관나}를 바치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엽葉>비는 몸집이 좋아 푸짐하였기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내가 듣기엔 魏가 살지고 푸짐한 여자를 찾는다고 하니,

당장에 날을 잡아서 당신을 보내주어야겠소.

당신은 魏주의 승은을 입게 되거든 짐의 은혜를 잊지 마시오.”라 하였다.

 

이에 <엽葉>은, 화들짝 놀라 제의 품에 달려들어 꼭 껴안고 소리 내어 울면서, 말하길

 

“신첩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약우若友>는 어쩌시렵니까?”라 하였다.

 

상은, 측은히 여기고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말하길

 

“옹구(壅口)에서의 일은 당신의 잘 못은 아니오.

다만 좀 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소.”라 하였다.

 

이때부터, <엽葉>후는 감히 <관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관나>는 이에 힘입어 총애를 독차지 하더니만,

엽후의 지위까지 빼앗고 싶어서 거짓으로 아이를 가진 척하고는,

 

애교떨며 상주하기를

 

“황후가, 신첩을 촌뜨기계집이라고 험담하고, 폐하가 사냥 나가시는 틈을 타서,

신첩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습니다.

기구(箕丘)까지 폐하를 따라가고 싶습니다.”라 하였다.

 

상은 참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어,

끝내 <감甘>후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환궁하였더니,

<관나>가 가죽자루를 가지고 나와 울면서 상을 맞이하며 말하길

 

“황후가 이것에다 신첩을 집어넣어서 큰물에 던져버리려 하였습니다.

신첩은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당신은 너른 물에 빠지고 싶어 하니, 너른 물이 당신의 집일 것이오.”라고 하고는,

 

<호구虎句>에게 명하여 서하에 던져버리게 하였다.

 

이때 나이 스무 한 살로 한참 물오른 나이인데 일찍 죽은 것이다.

 

이에 나라사람들이 이를 가엽게 여기고 장발곡(長髮曲)을 지었다.

 

추8월, 서천(西川)땅의 농사를 살피고, 조서로 이르길

 

“근년 들어, 콩과 보리 소출이 줄어들고 기장과 조도 잘 여물지 않는데,

먹여야 할 입은 점점 늘어나고, 소와 양의 숫자도 옛날과 다름이 없소.

 

비단 옷을 입을 사람은 많은데, 누에치는 일도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소.

 

마땅히 명을 내려서 5부의 권농 관리들이 백성들을 힘써 독려하게 하시오.

 

황금과 백은은 우리나라의 보배이오.

 

사사로이 서로 사고팔거나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하고,

민간 여인들은 좋은 금화로 머리를 장식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오.”라고 하였다.

 

신라가 딸을 후궁으로 바쳐왔기에, 다의로 삼으라 하였다.  

 


 

 


중천대제 5년{AD252}임신,

 

춘정월, 비로소 전농부를 설치하고,

<목준穆濬>을 전농대경으로 삼아, 농・상・목・축・인삼・감초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목준穆濬>은 <휘양輝陽>{신대제와 목후의 딸}의 아들이며,

이 방면의 일에 능숙하고 면밀하였다.

 

즐거워하지는 않았으나 현명하여 달통하였다.  

 

 

2월, <전>태후가 아들 <호발豪勃>을 낳고는 인삼과 잉어를 여러 번 먹었다.

 

상이 친히 고아주었더니,

 

<전>태후가

 

“첩은 이미 체질이 쇠하여 가고 있어서,

폐하께서 보살펴 주심이 넉넉하고 깊고 넓은 연못 같으시나,

결초보은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 말하였다.

 

이에 상은

 

“속된 말에도 모자는 3생{三生}이라 하거늘,

태후께는 지금 무슨 말을 하십니까.

이전과 같이 쾌차하시기나 하세요.”라고 하였다.  

 

 

여름 6월, 작고한 태보 <상제尙齊>의 처

<명림어고明臨於姑(177-252)>가 주부 <음우陰友>의 집에서 76살에 죽었다.

 

<명림답부(128-179)>의 딸이었다.

 

세세하고 민첩하였으며 누에 키워 천짜기를 잘하여,

후궁들과 궁인들을 이끌고 <전>태후의 친잠을 도왔으며, 국대부인으로 봉함을 받았다.

 

<명림어고>의 딸 <상해尙觧>가 <음우陰友>의 집으로 도망간 이래로,

 따라가서 <음우陰友>의 집에 기거하며 <음우陰友>를 아들처럼 돌보았더니,

나라사람들은 <명림어고>를 <음우陰友>의 모친으로 여겼었다.


추8월, 비로소 <월가회{月歌會}>를 행하고,

<첨해>의 딸 <월정月精>을 <월선{月仙}>으로 삼았다.

 

이것은 본시 옛 풍속이었었으며, 오늘날에는 신라의 풍속으로 되어 있었다.

 

상은 <월정>을 위로하려고 그 자리에 납시었다.  

 

6의(六儀)를 고쳐서 8부(八部)를 되살렸으니

향부(香部)・단부(丹部)・도부(道部)・장부(藏部)・약부(藥部)・

다부(茶部)・온부(醞部)・선부(饍部)가 그것이다.

 

소후는 소의로 하였으며, <회동回同>의 처인 <방을方乙>은 향부의 소의로 삼았다.

 

<방을方乙>은 나이 14살에 내의로 들어왔는데,

모습이 단아하고 맑았으며 행실이 정숙하여, 궁인들의 아름다운 모범이 되었고,

<요要>공주와 쌍벽을 이루었다.

 

상이 즉위하니, <요要>공주는 나이 12살에 <방을>과 함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었다.

 

<요>공주는 후위에 올랐다.

 

<방을>은 <회동回同>에게 하가하여 지금 아들 <방회方回>를 낳았고,

<요>황후는 아직껏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더니,

상은 <방회方回>의 모습이 넉넉하고 장대함을 보더니만 지난 일을 후회하고,

<방을>을 다시금 불러들여 정을 나누었으니, 이것도 운명이었다.  

 

<주朱>후가 <주원朱瑗>태자를 낳자, 식읍과 노비를 얹어주었다.

효자들과 순손들에게 <전>>태후의 궁에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월정月精(236?- )>은 <첨해(274-324)>의 딸이 아니고

<골정骨正(207-285)>의 딸일 것이다.

<첨해>는 <옥모>와 <내해>의 아들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골정(207-285)>이 <옥모(238-311)에게 장가드니

<옥모(238-311)>는 <월정月精(236?- )>의 모(母)가 되는 셈이다. 




10월, <첨해>가, <옥모>를 모시고, 나라의 경계까지 찾아와서 래조하니,

상이 <전>>태후와 <월정>을 데리고 하상(河上)에서 이들을 맞이하였다.

 

사흘간 크게 연회를 벌여주었으며,

<옥모>에게는 치렁치렁한 담비가죽 옷과 금팔찌・옥귀고리・향합・진주머리장식・

백옥목걸이・백마 등 40여 가지의 선물을 주었다.

 

대략 <월정>의 모친을 위함이었다.

 

이미 상은 <옥모>를 태후의 예로 받들면서도,

<옥모>를 후궁으로 거두고 싶어하자,

<전>>태후가 이를 시샘하여 그리하지는 못하였다.

 

<첨해>가 돌아가려 하자,

상은 <옥모>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보이며

각별하게도 친히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하더니만,

이윽고 죽령의 땅을 하사하여 신라 땅이 되게 하였더니,

이에 돌려보낸 이들이 8,000여 호나 되었다.

 

평생토록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고 쇠판에다 새겼다.

 

 

252년은 신라 벌휴왕 9년이다.

이때 중천대제 29세, <옥모> 15세, <월정> 17세?이다.



 

 


중천대제 6년{AD253}계유,

 

춘정월, 인삼・감초・물개배꼽・낙타를 <옥모>태후에게 보내주면서,

 

“백옥루(白玉樓)에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은근한 글을 손수 써넣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말뜻을 몰라서 백옥루를 만들어서 상을 맞이하고자

우리에게서 옥을 꿔갔으며, 인필{칼과 칼집}을 만드는 치공 12명을 보내왔다.

 

명을 내려서 이 야공들을 5부에게로 나누어 보내서 시범을 보이게 했다.

 

지난해 하상에서 만났을 때,

상은 신라 사람들의 칼과 미륵창이 정교하고 날카로운 것을 보고는

<첨해>에게 보내달라고 명하였더니, 지금 도착하였던 것이었다.  

 

 

2월, 활 만드는 장인에게 명하여 촉제를 지냈다.  

 

 

4월, <옥모>태후에게 사신을 보내, 다시금 일상의 안부를 물었다.

 

황금 5백 냥, 비단・명주 각 100필, 양 5,000마리를 보내주었다.

 

이 달에 <옥모>의 궁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고,

금성의 누운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섰다.

 

< 옥모>가 친히 상에게 글로 쓰기를

 

“예전에 저의 월백선황께서 쌍어를 타고 선계로 올라가시며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꽃이 피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지난해엔 꿈속에서 가르침을 받아서 폐하를 섬겼더니

총애와 융숭한 선물을 받게 되었고 죽령 땅도 첩의 탕읍이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첨해>를 어루만지셨더니 지아비께서 신첩을 어루만지셨으며,

周실에서 왕모의 아름다운 연못을 준비한 예법이 있었더니

漢실에선 <여치{呂雉>와 <모돈冒頓> 사이의 법도가 있었습니다.

신첩도 마음속으로 원하는 바 있어서 제 딸을 후궁으로 보내드렸던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황자와 황녀를 보시고,

세세토록 장인과 사위로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 하였다.

 

상은, 크게 기뻐하며 남쪽을 향해 무릎 꿇어 절하며 말하기를

 

“나의 태후께서는 진정한 성인이시다.

나라에 이와 같은 큰 성인이 있으셨으니,

용이 현신하고 버드나무가 일어선 것 역시 마땅하다 아니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 해, 신라에서는 5・6・7월 내내 가물고 비가 아니 와서,

<첨해>가 조상의 묘에 빌었더니,

비는 내렸지만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이 굶고 도적이 불길같이 일었다.

 

이에 상이 명하여 100척의 배를 띠워

맥・속・량・두 등 3천석을 <옥모>태후에게 보내며 말하길

 

“모친의 곁을 떠난 이래 더욱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불을 지피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어지신 어머니의 정이야 지금 어련하시겠습니까.

이에 관리에게 명하여 이것들을 보내드리니, 도움치고는 넉넉지 않은 것이오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심이 어떠하시겠는지요.”라 하였다.

 

<옥모>가 답하기를

 

“<요>임금 9년 큰비와 <탕>임금 7년 가뭄이 이제 첩의 일이 되었습니다.

선황이래로 백성들은 풍요로이 살아왔었습니다.

또한 폐하의 총애가 있었더니, 용과 버드나무의 상서로움이 나타났었습니다.

어찌 요사스런 재앙이 시샘하여 일어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첩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제 부황께서 멀리서 하늘같은 양식을 보내주시어

저의 백성을 구제해주셨으니, 첩은 각골난망입니다.”라 하였다.  

 

5부에 명하여, 겨울엔 고기와 소금을 저장하며, 여름엔 보리와 조를 저장하라 하였고,

재주 있고 법도를 아는 백성을 가려 뽑아서,

그들에게 경사{經史}・궁마{弓馬}와 효의{孝義}의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한 것들을 잃지 않게 하라 하였다.

 

 


중천대제 7년{AD254}갑술,

 

4월, 국상 <명림어수明臨於漱(198-254)>가 나이 57살에 죽었다.

 

<명림어수>는 <전>태후의 오빠이며, 오래도록 국정을 잡고 있었다.

 

대사자와 패자 모두가 그의 문하이며, 태수와 장군에 그의 사람들이 많았었더니,

5부가 나라에 바치는 공물이 배증하였다.

 

상이 <전>태후의 지친에게 맡기고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더니,

죽음에 임박하여서는 비류 패자 <음우陰友>를 천거하여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음우陰友>는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관리의 아들이었는데,

<명림수고明臨漱姑>와 <명림어고明臨於姑>의 사위로 있었고,

<음우陰友>의 부친은 <明臨於漱명림어수>를 모시었다.

 

<명림어수>가 이때에 이르러 <음우>를 천거하였음은,

그의 재능이 자신의 후임으로 자리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림어수>가 정사를 도맡은 이래 삼보들은 무력하였으며,

임명하기도 하고 말기도 하였었는데, 유명무실하였었다.

<전>태후가 아들 <보불宝弗>을 낳았다.  

 

7월에 지진이 있었다.  

 

<전>태후를 천후로,<요>후를 지후로, <엽>후를 인후로, <잠>후를 일후로 삼았고,

<월정>도 후로 삼았다.

 

그때, <월정>이 태자 <봉鳳>을 낳아놓고 걱정하며

 

“딸을 낳아 평범한 사람에게 출가시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 말하였더니,

 

상은 그녀가 배척당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그녀의 지위를 다섯 후의 반열인 황후로 올려주었다.

 

군신들도 감히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  

 

중천의 언덕에서 군사사열을 크게 벌였다.

 

 


중천대제 8년{AD255}을해,

 

정월, 태자 <약우>를 정윤으로 삼고, 동궁에 관료를 배치하였다.

 

나이는 16살이었고, 준수하고 인후하여, 많은 이들의 기대함이 좋아보였다.

 

<통>공주 소생의 <문부門夫>태자는 < 약우>보다 나이가 많았는데도,

상의 속내를 알아채고는 스스로 물러나서 양위하였다.

 

<약우>가 태어날 때 나타났던 그 백룡이 이때에 이르러 또 나타났기에,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으며,

현명한 이를 불러들이고 재주 있는 사람을 뽑아 들였다.

<주朱>후가 <천茜>공주를 낳았는데, 난산이었다.

 

상이 친히 약을 권하여 위로하였다.

<전>후가 <막莫>공주를 낳았다.

 

 


중천대제 9년{AD256}병자,

 

춘3월, 상이 친히 <옥모>를 국경까지 나와서 전송하였고,< 첨해>가 와서 맞이하였다.

 

사도해(沙道海) 위쪽에 큰 물고기 세 마리가 있었는데,

길이는 3장에 높이는 1장 2척이었다.

 

사람들은 성인 셋이 나타날 징조라 하며, 노래하기를

 

“하늘엔 별 셋이 있고, 땅에는 성인 셋이 있으며, 물에는 물고기 셋이 있다.”

라 하였다.  

 

 

추8월, <우수于漱>의 딸 <오두五斗>를 황태자비로 삼았다.

 

그녀의 모친은 산상대제의 딸 <통>공주이다.

 

일찍이 동궁 상례시절에 <문부門夫>를 낳았더니, 덕이 있어 양위를 하였기에,

상이 그 딸을 정연{정윤의 배필}으로 삼아서

그녀{<통>공주}의 마음을 위로한 것이었다.  

 

<옥모>가 황자 <달가達賈>를 낳았다.

 

상은 사신을 보내서 <옥모>를 황후로 삼고,< 첨해>는 황자로 삼았다.

 

 

10월에 하늘에 제사하였고, <옥모>에게는 고기를 보냈다.

 

<옥모>가 종실의 딸 셋을 가려 뽑아 바쳐 와서, 천궁・월궁・동궁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달 그믐에 <신라>에서는 일식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11월, <연방椽邦>을 <장獐>공주의 부마로 삼고, 호천 도위로 삼았다.

 

<연방椽邦>은 <주酒>후의 조카인 <연백椽白>의 아들이다.

 

각각에게{<연방>과 <연백>} 궁료・노비・장원을 딸려주었다.  

 

 

12월, 눈은 오지 않고,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중천대제 10년{AD257}정축,

 

춘정월, <전>후가 <홀도笏覩>의 집 엄표궁(淹淲宮)에서 <락駱>공주를 낳았다.

 

상이 그 집으로 가서 씻어주고 옷을 하사하였다.  

 

색두(索頭)에서는 <응록應鹿>이 죽고, <록돈>이 섰다.  

 

여름 4월, <옥모>와 만나 대령(大嶺)에서 사냥하였다.

 

상이 사슴 한 마리를 쏘고 나서, <옥모>에게도 그 사슴을 쏘라고 명하니,

 

<옥모>가 말하기를

 

“상께서 쏘셔서 사슴은 이미 쓰러졌습니다.

응당 소첩은 그것을 거두어 하늘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 땅의 이름은 헌천구(献天溝)가 되었다.

 

나라사람들이 헌천구 위쪽에 2성사(二聖祠)를 지었다.

 

후세 사람들은

 

“사당 고개에 춘풍이 부니, 사슴은 자신을 살찌워서 하늘에 바쳤고,

<옥>후는 황상을 모시고 돌아갔다네.”라는 시를 남겼다.  

 

이때 <백제>는 크게 가뭄이 들어 수목이 모두 말랐다.

 

사람들은 두 성인이 교합하여 서쪽 택지의 물이 말랐다고 하였으며,

 

“흑룡{고구리}과 창룡{신라}이 교합하니, 백룡{백제}이 애태운다.”는 노래가 번졌다.  

 

고현부(高顯部) 소가 <정희鄭熙>를 죽였더니,

<정희鄭熙>의 신하 <왕간王簡>이 그 시신을 들러 메고 유주로 들어갔다.  

 

5부들에게 병장기를 새롭게 하라고 명하였다.  

 

동해 땅에 대풍이 들었다.  

 

<통>공주가 황태자의 딸 <소두少斗>를 낳았더니,

<전{鳣}>태후가 씻어 주고 옷도 내려 주었다.

 

 


중천대제 11년{AD258}무인,

 

춘2월, 말갈의 <장라탕長羅湯> 등과 <고이>가 상통하여 함께 <첨해>를 치려하였다.

 

명을 내려 <장라탕>을 쳐서 목 베었고, <고이>의 사신을 사로잡았으며,

<고이>의 토산물은 <첨해>에게 보냈다.

 

<고이>는 이전에 받았던 해마 10필로 사신을 바꾸어 갔다.

 

258년은 백제 구수왕 5년, 신라 내해왕 2년이다.  

 

 

5월, 상이 <옥모>를 해상(海上)에서 돌려보냈다.

 

대령에서 함께 사냥한 이후 두 성인은 비류 행궁에서 함께 지냈었고,

이때가 되어 해로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상은

 

“산에는 꽃이 피고, 물에서는 물고기 헤엄쳐 노는데,

어이하여 내게는 꽃도 물고기도 없단 말인가.”라 노래하였다.

 

상이 눈물 흘렸더니, <옥모> 또한 눈물 흘렸다.

 

 


중천대제 12년{AD259}을묘,

 

춘정월, <연방椽邦>을 <옥모>에게 보내어

의・육・포목・옥패・약물 등 백 가지를 하사하고,

<첨해>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으로 봉하고,

금・은 도장 2개를 내려주었다.

 

<옥모>가 황녀 <운雲>공주를 낳았다.  

 

 

2월, 상이 손수 밭갈이를 하고,< 전>태후가 친히 누에를 쳤다.

 

전농대경 <목준穆濬>에게 명하여 졸본의 맥구사(麥鳩祠)에 제사하였다.  

 

<주朱>후가 <주기朱起>태자를 낳았다.  

 

<상제尙齊>의 아들 <상극尙克>을 미서대가(尾署大加)로 삼아,

5색당전(色璫磚)과 문미(紋尾),웅각(熊脚)등을 만들어서 신라로 보내고,

<옥모>의 새 궁전을 고쳐주라 명하였다.

 

상이 <옥모>에게 황금 천 냥과 백금 만 냥 및 공인 200인을 보내주었다.

 

신라가 가물고 황충이 일어 도둑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는,

<목준>에게 명하여 곡식 2만 석, 소와 양 8천 두, 짐승 젖으로 담근 술,

피륙으로 만든 옷가지 등과 잡다한 물건 등을 헤아리지 말고 보내게 하였다.

<첨해>가 <오>나라 칼을 만들고 양잠을 가르치는 벼슬아치를 각각 2인씩 보내왔다.  

 

이때 <가락>의 <거등>이 죽었다.

 

<마품>이 섰으며, 모친인 <모정>과 함께 찾아와 토산물을 바쳤다.

 

<신라>의 사신을 따라왔다 돌아간 것이었다.

 

9월, 동궁비 <우于>씨가 아들 <상부相夫>를 낳았다.  

 

 

겨울12월, 두눌곡에서 사냥하고, 호사(湖祠>에서 <관나>후를 제사하였다.

 

갑자기 魏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노략한다 하기에,

위위장군(衛尉将軍)<목원穆遠>을 시켜서,

날랜 기병 5천을 추려서 양맥곡에서 거꾸로 들이쳐서 대파하였다.

 

魏군의 장수 <위지개尉遲稭>를 목 베고, 8천여 급을 베었더니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를 양곡대전이라 한다.

 

반적 <왕간王簡>은 도주하였다.  

 

상은 <목원>을 현도태수로 삼고 부산공(富山公>으로 봉하였으며,

후에 마산공(馬山公)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중천대제 13년{AD260}경진,

 

춘정월, 조서를 내려 이르길

 

“나라가 관리를 둔 지 오래되었으나, 제도를 갖추기는 미흡하였소.

마땅히 명하노니, 삼보・국상・대주부・중외대부는

漢의 예를 살펴서 새로운 관직의 호칭을 정하시오.”라 하였더니,

 

<음우陰友>가 상주하여 아뢰길

 

“나라의 사정이 漢과 똑같지 않으니 漢의 제도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삼보를 삼공으로 하고, 국상을 승상으로 하자는 얘기는

일찍이 산상대제 시절에 논의하여 정하였던 바 있었으나,

관습에 부합하지 않은 이유로 아직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5부들의 학문은 아직 달통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나라가 무를 숭상하고 문을 그르치면,

백년이 되기도 이전에, 문물을 중원과 견주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그렇다고 여기고는 그만두었다.  

 

<전>태후가 <월越>공주를 낳고는 산궁으로 들어갔다.  

 

 

2월, 북부의 대사자 <목평穆平(189-260)>이 나이 72살에 죽었다.  

 

명을 내려서 5부는 금을 캐고 동해는 물개를 잡아 <옥모>에게 보내주라고 하였더니,

 

<전>태후가 간하여 말하길

 

“신첩은 衛왕이 <하희夏姬>를 좋아하다가 아들에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소.

 

지금 폐하는, <옥모>를 첩으로 < 첨해>를 아들로 삼고 있소.

 

이것은 늙은 여우를 품에 안아주고 사나운 고양이를 달래려는 격이오.

 

신첩은 이 일의 위험함을 감히 잊을 수 없소.” 라고 하였다.

 

이에 상이 아뢰길

 

“신에게 이런 병이 있어서 매번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하지만 신에게는 모후께서 계시온데,

제가 어찌 감히 <옥모>에게 푹 빠져버리기만 하겠습니까.

 

신라를 병합할 계획을 가지고 있음입니다.”라 하였다.  

 

 

7월, <옥모>가,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친애하는 지아비 황상의 도움으로 이렇듯 새 궁전을 지었습니다.

 

천자를 여기에 모시고 싶습니다.

 

이렇게 앙이의 정을 써서 보냅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그곳으로 가보려 하자,

 

<전>태후가 간하여 말하길

 

“폐하가 거기에 가시면, 첩은 응당 누대에서 투신하겠소.”라 하였다.

 

상은 하는 수 없어 답하여 아뢰길

 

“제 처의 나라가 여름엔 비로 산이 40여 군데나 무너졌고,

또한 가을엔 혜성이 동쪽으로 뻗쳐서 재앙이 남아있음을 알렸습니다.

 

어리석은 믿음이 없지는 않으나, 위령지철(衛靈之轍)은 삼가 명심하겠습니다.

 

경께서 진수(溱水)를 건너시겠다면, 응당 효교(孝橋)를 놓아드릴 것이니,

원하건대 무산(巫山)에 들어가시어서

다시금 대업을 이룰 기회를 매듭지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9월, 졸본으로 가서 <동명>사당에 제사를 올리고, 거루제도 지냈다.


 

 


중천대제 14년{AD261}신사,

 

춘2월, 그믐날, 상이 <옥모>와 함께 졸본해 위쪽에서 만나

고기잡이 하는 것을 돌아보다가,

신라의 <달벌성(達伐城) 내마 <극종克宗>을 성주로 삼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부에 명하여 삼을 캐서 <옥모>를 위안케 해주었다.

 

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었다.

 

<조분>의 사위인 <미추>가 섰다.

 

<미추>는 <옥모>의 동생이다.

 

<미추>가 글을 올려 신라국 황제를 세움에 대하여 청하길

 

"조카인 황제가 나라를 등졌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신에게 감국 하라고 하나,

신은 재주가 용렬하여 즉위하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누님이신 후와 형황께서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옥모>와 단궁에서 동침하다가,

이 급보를 듣고는, <옥모>에게

 

“당신 동생 <미추>가 조신하고 후덕하기가 가장 나으니,

또한 해 볼 만하지 않겠소?”라 물으니,

 

<옥모>가 눈물 흘리며 답하길

 

“첩은 이미 나라를 짊어지고 와서 지아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아비이신 황상의 뜻이 소첩의 뜻이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이윽고 <명림어윤>을 시켜 칙명을 받들어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황제・동해 대왕・우위대장군을 봉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과 면{면류관}・포{황제나 왕의 관복}를 내렸다.

 

그날이 바로 임오년{AD262} 정월 25일이었다.

 

색두(索頭)의 <이록비伊鹿肥>가 아들 <사막沙漠>을 魏에 보냈더니,

魏가 그를 가두었다.

 

261년은 신라 내해 5년이다.

첨해가 죽고 미추가 즉위한 해는 325년이다.

 


 

 


중천대제 15년{AD262}임오,

 

정월, 그믐날에 <명림>씨와 <연>씨 및 종척의 여인들을 대각궁에 모아놓고

<옥모>황후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첨해>를 장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은 <옥모>와 함께 단궁에서 거애하였다.  

 

 

2월, 상은 <옥모>황후를 데리고 온탕으로 가서,

<옥모>의 초상 열 폭을 그리게 하고는, <계림성모사>를 세워서 거기에 걸어 놓았다.

 

여섯 조상인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를 한데모아

제사토록 하였다.

 

상이 <옥모>와 함께 <구도>에게 술을 따라 올리더니,

 

말하길

 

“<구도>대왕이 뛰어나게 용맹하셨음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고,

지금은 나의 부친이 되셨는데,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되겠소?”라 하였다.

 

이에 <옥모>가 말하길

 

“첩 또한 훌륭하신 조상님이신 <동명>의 사당에 가서 술을 따르겠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이를 허락하자, 졸본으로 갔다가, <단檀>태자를 낳았다.  

 

 

추7월, 상은 <옥모>를 데리고 기구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동11월, 뇌성이 울리고 지진이 있었다.  

 

신라의 사신이 토산물을 바치며 말하기를

 

“금년 3월에 궁궐의 동쪽 연못에 용이 나타났으며,

7월에는 금성의 서쪽 문에 불이 났는데, 민가 100여 구역을 연이어 태웠다.”고 하였다.

 

 

<구도(218-301)>는 이때 45세로 신라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천대제 17년{AD264}갑신,

 

춘2월, 졸본에 가서 <용산릉{芻牟陵}>에 제사하고,

<소>태후{소서노}의 사당을 세웠다.    

 

<전>후가 <조趙>공주를 낳았다.

 

 

 

중천대제 18년{AD265}을유,

 

2월, 자기와 옥기를 만드는 이들에게 명하여

사슴과 기린을 만들어 현무의 받침으로 하고,

닭의 벼슬을 비단에 그려서 덮개로 하라고 명하였다.  

 

<주朱>후가 <화畵>공주를 낳았다.

 

후의 나이는 61살이었다.

 

옷과 술을 내려 위로하였다.

 

비로소 “화{火}・미{米}・치{雉}・용{龍}”의 문양이 들어간 곤룡포를 입고,

옥화로 꾸며진 금관을 면류관으로 쓰게 되었다.

 

 


중천대제 19년{AD266}병술,

 

2월, 금인성(金人城)의 <주周>가 황금 일곱 근으로 쌍기둥을 세운 금관을 만들고,

자색 옥화로 장식하였다.

 

그 이름을 환희천관(歡喜天冠)으로 하였다.  

 

동궁이 <주朱>후의 궁을 찾아 갔으며,

<주朱>후는 남자라면 가리지 않았기에, 유감없이 즐겼다.

 

 


중천대제 20년AD267}정해,

 

4월, 두눌원(杜訥原)주 <호구虎句>를 신성(新城)으로 유배를 보냈더니,

<호구虎句>가 <관나貫那>와 몰래 연통하였다.

 

일이 드러나서, <관나>의 평자를 주살하려 하였더니,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내치기만 하였다.

 

<관나>를 다시 불러들이려 하였더니,

 

<요>황후가 말리며 말하기를

 

“천자는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아니 됩니다.”라고 하기에 그만두었다.  

 

<주朱>후가 동궁의 딸 <돈敦>공주를 낳았다.

 

 


중천대제 21년{AD268}무자,

 

3월, 권선문(勧善文)을 5부에 보냈더니, 동네마다 그것을 익혔다.

 

하나는 충성, 둘은 효, 셋은 정절, 넷은 우애, 다섯은 화평이라고 되어 있었다.

 

 


중천대제 22년{AD269}기축,

 

9월, 백제에서는 혜성이 자미궁(紫微宮)으로 흘렀다

 

10월에 <명림전(205-269)>태후가 춘추 예순다섯에 죽었다.

 

상이 백제에서 혜성이 흘렀는데

<명림>후에게서 조응하는 것을 보고 괴이하다고 여겼더니,

모두들 자식나라에서 혜성이 흐르고

모국에서 조응하였음을 어찌 이상하게 여기느냐고 하였다.

 

 


중천대제 23년{AD270}경인,

 

동10월, 두눌원으로 거둥하여 <관나>와 함께 연달아서 즐기기 열흘에 병들어 죽었다.

 

청목궁(靑木宮)에서 태후에게 정성을 쏟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춘추 46세였다.

 

중천원에 장사했다.

 

이 해 4월에, 평산(平山)에서 사냥하고 나서

<해숙觧熟>의 딸 <문門>을 태워서 돌아왔었는데,

나이 열다섯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서 아이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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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