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선제(神明仙帝)의 장자다.

 

어머니는 <호화芦花>태후, 부여(扶餘)씨로 동부여의 태사 <왕문王文>의 딸이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볼 수 있었으며,

신통한 힘이 있어 병사를 이에 끌고 요동을 쳐서 누차 큰 공을 세웠다.

 

이 때에 이르러 선위 받았으니 나이 45세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도타웠으며,

자신을 개의치 않고 타인을 따랐다.

 

부황이 정사에 염증을 느껴 어머니에게 자문을 구하니, 태후가 정사를 결정하였다.

 

태보를 따로 두지 않았었다.


 

 

원년 임자(A.D.112)

 

6월 선제(先帝)를 태상황(太上皇)으로,

모후(母后)를 호화궁(芦花宮)황태후(皇太后)로 높였다.

 

<마락麻楽>을 좌보, <송두지松豆智>를 우보로 하였다.

 

년호를 신명(神明)이라 쓴 것은 선제(先帝)가 살아계신 까닭이었다.

 

삼대경(三代鏡) 57권이 이루어졌다.

 

동명(東明), 광명(光明), 대무(大武) 3대의 성스러운 그림이다.

 

선황(仙皇)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무릇 임금의 사람됨이란 대경(代鏡)을 가지고 있으니,

경(鏡)은 선행을 비추는 것이지 잘못을 비추는 것은 잘못이다.

 

악행을 하는 자는 폐(廢)하여, 나의 자손들을 경계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색두(索頭)에서는 <응묵應默>이 죽어 <두공功>이 섰고, <모계母鷄>를 처로 삼았다.


이때 신명선제 <재사> 65세, 태후 <호화> 64세, 태조황제 <궁> 45세, <수성> 42세,

<高>황후 21세, <상천화> 9세, <상온> 32세이다.

 

 

 

2년 계축(A.D.113)

 

정월 태후가 친히 태보의 정사를 보았다.

 

(태후가) 나라안팎의 현량(賢良), 재예(才藝), 용맹(勇猛)한 사람을

골품(骨品)을 따지지 말고 천거하라고 명령하여 말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식량은 백성의 근본이다.

 

너희 높고 낮은 모든 관리와 병사는 농목양직(農牧釀織)에 힘써

가난하여 궁색함에 떨어지지 마라. 짐도 마땅히 모범을 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왕과 함께 친히 밭 갈고 누에치기를 행하였다.

 

유(幽), 병(幷), 기(冀), 요(遼)의 땅 지도를 간행하여

총준(總俊)한 관리와 병사(士)에게 나누어 주고,

요(遼)의 땅을 정벌할 계획을 도모하였다.


 

 

3년 갑인(A.D.114)

 

2월 선사(仙師) <상인尙仁>이 죽었다. 시호(諡)는 보존선사(普尊仙師)이다.

 

<상인>은 천화(天畵)를 잘 그렸고, 상제(上帝)의 품()이 120권이 있었으며,

춘추 98세였다.

 

<고덕高德>의 딸 고씨(高氏)를 황후로 삼았다.

 

당시 황후가 <만륵萬勒>을 낳은 까닭이다.

 

<고덕>은 <고루高娄>태자의 여덟 째 아들이다.

 

선술에 고명(高明)하여 보존(普尊)에 비견(比肩)되었는데,

왕손인 까닭에 선사의 자리를 보존에게 양보하였다.

 

두문(杜門)하여 도를 닦았으며, 불과 연기를 피우지 않았더니,

83명의 처자가 감히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오로지 왕이 찾아가서 절하여 과일을 드리면 가르쳐서,

백성을 사랑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선(仙)을 숭상하고, 교만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화식(火食)하고, 장수(長壽)하라 청하였더니,

 

답하여 말하기를

 

“상제(上帝)께서 저를 불러 멀리 서토를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또한 죽었다.


 

 

4년 을묘(A.D.115)

 

2월 서하(西河), 남구(南口), 하성(河城), 안평(安平), 장령(長岺),도성(菟城),

둔유(屯有), 평곽(平郭), 하양(河陽),고현(高顯),남소(南蘇) 등의 성을 고쳐 쌓아

서남(西南)을 대비하였다.


8월 나라의 남쪽에 메뚜기 피해가 있어서, 순시하여 남해(南海)에 이르렀다가,

10월에 돌아왔다.


 

5년 병진(A.D.116)

 

2월 <우혁羽弈>의 딸을 부후(副后)로 거두었다.


3월에 일식이 있었다.



12월 눈이 5척(尺)이나 쌓였다.


<두공功>이 동생 <건健>)을 보내, 낙타 30필을 바쳤다.

 

<적荻>공주를 시집보냈다.


 

 

6년 정사(A.D.117)

 

3월 상황(上皇)이 순수(巡狩)하여 창촌(淌村)에 이르러,

<상온尙溫>의 딸 <천화天花>를 후궁으로 거두고,

<상수尙須>의 사당을 수리하라 명하였다.

 

<상수>는 매구곡(買溝谷){수곡성}의 우두머리로,

귀화하여 주축(主畜)(대가)가 되었다.

 

<상수尙須>는 대무신제13년(AD 40)에

소와 말 만여마리를 끌고 대무신제를 알현하였다. 

 

그의 아들 <상인>은 해산(海山) 고선(高仙)이 되었으며, <상온>은 그 손(孫)이다.

 

대대로 덕을 닦고 마음을 비우더니 이에 이른 것이다.

 

<천화>는 성품이 온유하며 또한 부드러웠고,

용모 또한 만고에 미치는 절색중의 한명이었다.

 

고(高)황후가 <원元>공주를 낳았다.


 

 

7년 무오(A.D.118)

 

3월 3군을 두었다.

 

<우혁羽奕>을 중군장군,

<고량高良>을 좌군장군, <화직禾直>을 우군장군으로 삼았다.

 

지진이 있었다.


6월 한인(漢人)들이 도성(菟城)에 쳐들어와 패하여 돌아가더니,

화려(華麗)를 공격하였다.

 

한인(漢人) <사대師大>가 역대치란회(歷代治亂繪) 7권을 올리니,

매년 곡물을 주고 소와 양을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원조(元初) 5년(A.D.118) 다시 예맥(濊貊)과 함께 현토(玄菟)를 노략질하고,

화려성(華麗城)〈화려현은 낙랑군에 속한다>을 공격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7월 우박이 내렸다.


8월 5부의 선원(仙院)에 명하여 현량(賢良)하고 효순(孝順)한 사람을 천거하여,

관직을 주도록 하였다.

 

4궁(四窮,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을 물어서

스스로 살기 어려운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다.

 

<마락麻楽>을 태보, <송두지松豆智>를 좌보, <을포乙布>를 우보로 삼았다.


 

 

8년 기미(A.D.119)

 

정월 부후(副后){<우혁>의 딸}가 <우羽>공주를 낳았다.


6월 <우혁羽弈>, <고량高良>, <화직禾直> 등이

숙거(宿車), 후성(候城), 요수(遼隧) 등지를 정벌하고,

생구(生口) 천여 명을 잡아 돌아왔다.


9월 8예지사(八藝之士)를 천거하였다.

 

1은 예(禮), 2는 악(樂), 3은 사(射), 4는 기(騎),

5는 화(畵), 6은 산(算), 7은 약(藥), 8은 도(陶)라 하고,

창인(槍劍)은 사(射)과에, 서각(書刻)지사는 화(畵)과에,

음역(陰易)지사는 예(禮)과에, 학무(鶴舞)지사는 악(樂)과에,

침구(針灸)지사는 약(藥)과에, 장목(匠木)지사는 도(陶)과에 속하게 하였다.

 

채금사(採金使)를 두어 여러 나라의 돈과 화패(貨貝)를 주관하게 하였다.

 

상이 <천화天花>를 거두고 궁인으로 삼았는데, 상황(上皇)의 명이었다.


 

 

9년 경신(A.D.120)

 

2월 한인(漢人) <요광姚光>이 도성(菟城)태수라고 자칭하더니, 문성(汶城)에 근거하여

수차례 도성(菟城), 평곽(平郭), 둔유(屯有)를 수차례 침략하여 약조를 어겼다.

 

왕제(王弟) <수성遂成>에게 <화직禾直>과 <을어乙魚> 등을 이끌고 가게 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요광>은 도망갔고, 문성 역시 우리에게 귀의하니,

찾아와서 항복한 한인이 천 명이나 되었다.

 

한인 <사대師大>에게 명하여 삼대경그림 180권을 그리게 하여,

신경(新鏡)으로 삼았다.

 

그 그림이 정해(精) 요연(燎然)하였고,

구경(旧鏡) 57권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하고 간소하였다.

 

법으로 삼을 만하여 정경(政經)이라 이름을 붙였다.

 

<사대>는 처음에 구경(旧鏡)을 번역하였는데, 지금 다시 새로이 도달한 것이다.

 

이에 <을포乙布>의 딸을 시집보내고, 소형(小兄)의 작위도 주었다.


 

 

10년 신유(A.D.121)

 

정월 궁인 <천화天花>가 아들 <백고伯固>를 낳았다.

 

앞서 상황(上皇)의 꿈에 <천화>와 왕이 합하여 용을 낳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응답이 온 것이라 하여 이름을 <백고伯固>라 하였다.

 

또 으뜸 됨이 반드시 굳어지라는 뜻이다.

 

장성하며 어질고 현명하여, 상황(上皇)의 명령과 이름 지은 뜻을 잘못하지 않았다.

 

거룩하도다! 선황(仙皇)의 살펴봄이여!

 

<두공功>이 죽고, <건健>이 섰다.



2월 <요광姚光>이 유주(幽州)로부터 쳐들어와

구리(丘利) 거수(渠帥) <후돌后突>을 죽였다.

 

<화직禾直>이 구하러 달려가서 크게 깨뜨리고,

<을어乙魚>는 그 대군(大軍)을 용도(甬道)로 끌어들여 험지에 매복하여 막아서

모두 죽였으며, 획득한 병장기와 마필이 무수히 많았다.

 

적산(赤山)에서 극성(棘城)으로 추격하여 성곽과 양초(糧草)를 불사르고,

생구(生口) 2천여 명을 사로잡아, 기능(技能)이 있는 자는 선별하여 직책을 주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인들은 장사들에게 첩으로 주었다.

 

상황(上皇)이 백고(伯固)를 씻어 주고 병이 나서 한 달여를 앓다가 2월 그믐에 죽어,

모산(茅山)에 장사지냈다.


 

 

건광(建光) 원년 (A.D.121)

 

봄 유주자사 <풍환馮煥>과 현토태수 <요광姚光>과 요동태수 <채풍蔡諷>

〈혜동이 말하기를 “위지(魏志)와 북사(北史)에는 風이라 썼다”라고 하였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예맥의 거수(渠師)를 붙잡아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궁宮>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遂成(71-165)>에게 군사 2천여 명을 보냈다.

 

<요광> 등을 만나 사신을 보내어 항복했다고 사칭하니 <요광> 등이 믿었다.

 

<수성>이 험한 땅을 막아 점거하고 대군(大軍)을 차단하였으며,

몰래 3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토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살상(殺傷)하였다.

〈혜동이 말히기를 “위지(魏志)는 후성(候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로 들어갔다라고 하고 후성은 원토군(元菟郡)에 속한다.”라고 하였으며,

선겸(先謙)은 말하기를 “관본(官本)에는 2천여 명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잡았다.〉

 

이때부터 광양(廣陽),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탁군(涿郡)

속국(屬國)에서 3천여 명의 기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 등을 구원하였으나,

맥인(貊人)은 이미 돌아가 버렸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4월 요수(遼隧)에서 <채풍蔡諷>을 친정(親征)하여 신성(新城)까지 싸웠으며,

그의 장수들 <경모耿芼>, <용단龍端>, <공손포公孫酺>, <손수孫壽> 등

140여 명을 베었다.

 

극성(棘城)의 동쪽이 우리 땅이 되었다.

 

<채풍>은 유주(幽州)로 도망하여, 다시는 감히 침입하지 않았다.


 

 

 

<채풍蔡諷> 등이 신창(新昌)에서 추격하다가 전몰(戰歿,)하였다.

 

공조(功曹) <경모耿耗>와 병조연(兵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호위하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馬韓)과 예맥(濊貊)의 군사 수천 기(騎)를 거느리고

현토를 포위하였다

〈혜동이 말하기를 “본기(本紀)에는 겨울 12월이다.”라고 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아들 <위구태尉仇台>

〈혜동이 말하기를 “태(台)는 어떤 사서에는 치(治)라고 적혀있다”라고 하였다.〉

를 보내어 병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군(州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8월 한(漢)의 벼슬아치가 내조(来朝)하여

상황(上皇)의 빈소에 조문하고 부의를 바치며 화친을 청하였다.

 

군신(群臣)들이 그들은 간사한 오랑케이니 믿을 수 없으니 죽이자고 청하였다.

 

왕이

 

“저들이 우리를 예로써 찾아왔는데, 어찌 사납게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며,

빈부(賓部)에 후하게 대접하라 명하였다.

 

<수성>이 등후(鄧后)의 나이를 묻자, 사신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수성>이 말하길

 

“지난날 여후(呂后)는 평성(平城)에서 허리띠를 풀어 <모돈冒頓>을 즐겁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왜 <등만鄧曼>이 내게 허리띠를 풀게 하지 않으며

어육(魚肉)이 되고자 하느냐?

 

만약 우모(祐母)를 나에게 첩으로 주지 않는다면,

낙양(洛陽)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이 오랫동안 좋은 말로 어루만진 연후에 왕명을 따름이 마땅하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수성을 꾸짖어 말하자,

 

수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漢)을 초개(草介)같이 여기는데,

우리가 저들을 두려워함이 심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經)이 말하지 않더냐?

벌레 한 마리도 조심하여야 하거늘, 하물며 사람과 임금 된 자는 어떠하겠느냐.

교만하면 패한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궁宮>이 죽고, 아들 <수성遂成>이 섰다.

 

<요광姚光>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고구려의 초상을 틈타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고자 하니,

(後漢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기를

 

“<궁宮>이 생전에 용감하고 영리하여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죽자 고구려를 치는 의롭지 않습니다.

 

조문(弔問)보냄이 마땅하며, 쌓인 빚을 양보하고, 옛날의 죄를 사면하며,

더 이상 치지 않는다면 그들이 후자의 선(善)을 취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안제(安帝)가 그 말에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遂成>이 한(漢)의 생구(生口)를 돌려보내고

현토(玄菟)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수성> 등은 용감하나 반역할 마음이 없다.

 

목을 베어 젓을 담아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하나,

다행히 사령(赦令, 사면령)을 만나 죄(罪)를 빌고 항복을 청하였도다.

 

(그러나) 선비(鮮卑), 예맥(濊貊)은 해마다 노략질하고 백성을 몰아내거나 약탈하여

수천 명이 옮겨갔으나 겨우 수십 혹은 백 명만을 돌려보내니,

향화(向化, 귀화)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 (後漢의) 현관(縣官)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돌려보내면 (生口) 모두를 속전(贖錢)으로 비단을 곧바로 지불할 것이다.

 

어른은 40필을 주고, 어린이는 반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수성遂成>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섰다.

 

그 뒤로 예맥(濊貊)이 따르고 복종하니, 동쪽 변방에는 일이 작았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 420~479)의

<범엽范曄(398~445)>이 432년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인 후한서는

요동태수 <채풍>이 죽고 풍지박살이 났는데 漢은 <수성>의 죄를 용서해 주고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捕虜)를 송환(送還)하고 항복하여 포로들을 속전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명선제가 죽은 것을 태조가 죽은 것으로 알고 

태조의 동생 <수성>을 태조의 아들로 알고있는  漢이다.

 

그 漢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현도와 요동이 위험에 처하자 한(漢)은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요동)속국에서

3천여 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보냈다고 후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요동)속국 등은 어디에 있었으며

현도와 요동은 어디에 있었겠는가?

 

탁군은 지금의 북경 남쪽 인근이다. 

 

결코 지금의 요하인근이나 한반도 인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10월 왕이 태후와 함께 부여로 가서 유화(柳花)성모와 태후 조상의 사당에 제사하고,

백성들 중에 궁한 이들을 물어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숙신(肅愼)이 찾아와서 자색 호구(狐裘)와 백응(白鷹)및 백마를 바쳤다.

 

숙신은 양맥(梁貊)의 북쪽슬하(膝河) 땅에 있었다.

 

어렵(漁獵)으로 생활하였으며,

그 풍속은 옛사람들처럼 순박하며 부자인축(父子人畜)이 한 집(室)에서 섞여 살았다.

 

맥궁(貊弓)을 가지고, 고개(岺)너머 물길로 한(漢)에 오가더니

나라의 형편을 누설하였기에 조정에서 이들을 단속하였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와, <수성遂成>을 대추가(大芻加)로 삼아 병권을 위임하였다.

 

태후의 명(命)에 따른 것이었다.

 


 

12월 <요광姚光>이 구려(勾麗) 거수 <도리屠利>를 꼬드겨

현도도위(玄菟都尉)로 삼고, 비리(卑離) 반적(反賊) <위구태尉仇台>와 함께

자몽(紫蒙)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모의하였다.

 

천서(川西)에 새로운 현도부(玄菟府)를 두어 살았다.

 

왕이 마한(馬韓), 개마(盖馬)의 1만 기병을 이끌고 천서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11년 임술(AD122)

 

2월 왕이 다시 마한(馬韓), 구다(勾茶), 개마(盖馬) 3국의 군대를 이끌고

천서(川西)와 구려(勾麗)를 쳐서 빼앗았다.

 

<요광姚光>은 도주하다가 자기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위구태>는 서자몽(西紫蒙)으로 피하여 들어가 서부여(西扶余)로 자칭하였으나,

후에 <우문宇文>에게 쫓겨났다.


 

4월 태보 <마락麻楽>이 죽었다. 나이 69살이었다.

 

아버지 비리왕(卑離王) <의록義鹿>은 <마리摩離>의 아들이다.

 

대무신(大武神)의 딸 <도都>공주에게 장가들어 <마락>을 낳았다.

 

배에는 삼성(三星)의 붉은 문양이 있었다.

 

날래고 용감하여 전쟁에 뛰어나니 여러 번 큰 공을 세우고 삼보의 지위에 올랐다.

 

대신(大臣)이 되어 다스림에는 몸소 대사(大事)를 잘 결정하였으니

가히 현명한 재상이라 칭송할 만하였다.

 

그러나 부녀자를 다스림에는 엄하지 아니하여,

시신이 식기도 전에 처와 딸이 달아났다. 사람들이 가여워하였다.

 

<송두지松豆智>를 태보, <을포乙布>를 좌보, <수성遂成>을 우보,

<우혁羽弈>을 대주부, <상온尙溫>을 대평자, <상잠尙岑>을 마장군,

<상번尙蕃>을 전중(殿中)조의(皂衣)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12년 계해(A.D.123)

 

2월 서하(西河)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10월 <목도루穆度婁>를 비류패자, <고복장高福章>을 환나패자,

<상온尙溫>을 엄표패자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막역하게 사귀면서 나라를 다스림에 현명하였으니,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이들을 삼태(三台)라 불렀다.


 

 

13년 갑자(A.D.124)

 

5월 우장군 <목길穆吉>이 죽어, <상잠尙岑>이 대신하게 하였다.

 

<화직禾直>이 자몽군(紫蒙軍)을 거느리고 <위구태尉仇台>를 정벌하여,

월해(月海)를 깨뜨리고 월도(月都)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수성遂成>을 좌보로, <우혁羽弈>을 우보로 삼았다.


 

8월 태백산(太伯山)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백록(白鹿)을 잡았는데,

큰 놈은 말만하고 자색 뿔이 있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구태왕(仇台王){소서노의 전 남편}때에 이 말이 나타났다가 지금 또 나타났다.”

라고 하였다.

 

녹색 비단으로 안장을 만들어 타고 다녔다.

 

왕은 신장이 8척이고, 체중은 100여근인데, 사슴이 흰색인 것은 옛날과 같았다.

 

타고 다니는 말로 삼아 매일 아침 타고 달리니,

사람들이 백록대왕(白鹿大王)이라 불렀다.

 

하루는 모둔곡(毛屯谷) 삼현대(三賢坮)에 이르러

성모(聖母, 유화)의 천(釧, 팔찌, 가락지)을 줍고,

이에 우발수(優勃水)에서 제사지냈다.

 

나라의 남쪽에 황충(蝗)이 나타나 선인(仙人) <양부陽父>를 보내서

황충을 뿌리 뽑도록 하였다.


 

9월 경신(庚申)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한(漢)의 사신이 보내 화친을 청했다.



11월 동도(東都)에서 지진이 있었다.

 

상후(尙后)가 <납衲>공주를 낳았다.

 

<호만好万>을 태보로 삼았다.

 

<송두지松豆智>가 죽었는데 나이 71세였다.

 

그의 처 <전典>공주에게 해마다 곡식을 내렸다.


 

 

14년 을축(A.D.125)

 

정월 <상온尙溫>을 우보, <주문朱文>을 중외대부,

<부문冨文>을 송강(松江)패자로 삼았다.

 

<주문朱文>과 <부문冨文>은 호화(芦花)태후(49-132)의 동생이다.


 

11월 태백산(太伯山) 무당 <거산倨山>이

누런 얼룩무늬가 있는 암컷 백록(白鹿)을 바쳤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내 말에게 암컷을 주는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창수궁(淌水宮)에서 기르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사슴에게도 흰색 암컷이 있는 것은 짐에게 현명한 후가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에 수컷은 명각(明角)이라 이름하고, 암컷은 현지(玄池)라 이름 하였다.

 

왕이 후와 함께 나누어 타고,

매일아침 창궁(淌宮)을 출발하여 하안(河岸)을 따라

유원(楡原)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내정(內庭)에 새로 사슴 우리를 짓고, 녹사(鹿師) 두 명을 두었다.


 

 

15년 병인(A.D.126)

 

2월 7일 <마락麻楽>의 처 오씨(烏氏)가 <목숭穆崇>의 아들 <정靖>을 낳고

마락의 아들로 삼아 달라고 청하니, (왕이) 허락되었다.

 

<상온尙溫>의 딸 <은화銀花>를 부후(副后)로 삼았는데,

<은화天花>는 <천화天花>의 여동생이다.



 

16년 정묘(A.D.127)

 

7월 갑술(甲戌)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상후(尙后)가 아들 <장고将固>를 낳았다.



 

17년 무진(A.D.128)

 

8월 갈사왕(曷思王) <도두都頭>가 나라를 바치러 찾아왔기에, 우태(于台)에 봉하였다.

 

<상온尙溫>을 동부대사자(東部大使者)로, <우혁羽弈>을 우보로 삼았다.


 

 

18년 기사(A.D.129)

 

3월 <송기松奇>가 딸 <황룡黃竜>을 왕에게 바쳤다.

 

<송기>의 처는 <목도루>의 여동생이었다.

 

<상온尙溫>의 셋째 딸 <난화暖花>가 또 후궁으로 들어갔다.

 

고(高)황후가 <막덕莫德>태자를 낳았다.

 

상(尙)후가 <비裶>공주를 낳았다.


 

 

20년 신미(A.D.131)

 

2월 <난화暖花>를 <만륵萬勒>태자에게 시집보냈는데,

고(高)황후의 청에 따른 것이다.

 

<송기松奇>를 대평자로 삼았다.


七月 太輔好万薨 年七十三

7월 태보 <호만好万>이 나이 73살에 죽었다.

 

<호만好万(59-131)>은 <호동好童(33~60)>의 아들이다.


 

 

21년 임신(A.D.132)

 

정월 호화(芦花)태후가 춘추 84세로 죽었다.

 

신장은 8척에 체중도 130근이었고, 상대를 겁주는 힘도 있었고 창과 칼도 잘 썼다.

 

모본(慕本) 초에 부황(夫皇) 재사(再思)대왕을 따라가 부여내란을 평정한 공이 있었다.

 

선제(仙帝)시절엔 나라의 큰일들이 태후에게서 결정되었다.

 

왕의 즉위 초엔 또한 태보의 자리에 있었는데,

용기 있는 결단으로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처결하였다.

 

정사의 큰 틀을 알고 일에 요점을 꿰었다.

 

죽음에 임하여 근심하며, <수성遂成>에게 전위하게 하여 우애를 도탑게 하라하였다.

 

또 <천화天花>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원화(源花)는 수성과 공유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인륜이 무너지고, 정치가 잘못되게 되었다.

 

상후(尙后)가 아들 <춘고春固>를 낳았다.

 

<수성遂成>이 태보, <우혁羽弈>이 좌보, <화직禾直>이 우보가 되었다.

 

 

臨崩 勸與遂成相傳 以篤友愛

又言天花 國之源花 可與遂成 共之

以是 亂倫而失政           

<박창화 필사본 태조황제기>

 

王諱遂成 國祖王之胞弟也

勇壯有威嚴 秉國軍事 累建大功

事國祖甚恭 然性少慈仁之心

雖子侄不恕 國祖諸子 皆畏之

以延傳位之約 致傷友愛之情       

<본기신편열전 차대왕기>

 

 

<수성>과 <궁>은 <호화>태후가 낳은 동모(同母)형제이다.

<호화>태후는 <수성>에게 전위하라고 유언을 남긴다.

<수성>은 형인 <궁>을 지극 정성으로 모신다.

<궁>이 전위의 약속을 지연시키지 형제간의 우의가 상하게 된 것이다. 


 

3월 조나(藻那)왕 <심心>이 반란하여,

관나(貫那)패자 <달가達賈>와 동부대사자(東部大使者) <목도루穆度婁>를 보내

쳐서 평정하고, <심>을 관나로 옮겼다

관나와 조나는 모두 동부여의 땅이다.

조나는 흑수의 입구에 있고, 빈해(濱海)에서 가장 먼 곳이다.

그런 연유로 금와왕의 후손인 <심>을 왕으로 삼은 것이다.〉

 

<목도루>를 책성(柵城)태수로 삼았다.


4월 왕이 상후(尙后)에게 <수성遂成>과 함께

태백산(太伯山) 여러 선원(仙院)을 돌아보라고 명하여,

7월 윤달이 되어 함께 돌아왔다.


 

 

22년 계유(A.D.133)

 

정월 <수성遂成>을 황태제(皇太弟)로 삼아 동궁(東宮)에 두고,

관료 78인을 딸려주었다.

 

상후(尙后)를 <수성遂成>의 비,

<우혁羽弈>을 태보, <을포乙布>를 좌보, <상온(尙溫>을 우보로 삼았다.


6월 <수성遂成> 비(妃)가 수성의 아들 <준駿>을 낳았다.

 

<목도루穆度婁>를 동궁대부로,

그의 처 <송화松花>가 책성(柵城)에서 딸 <수례守禮>를 낳자,

들어오게 하여 <준>의 유모로 삼았다.

 

우산성(牛山城)〈丸都>을 쌓기 시작하여, 피서지로 삼았다.


 

 

23년 갑술(A.D.134)

 

3월 <흘우紇于>의 손자 <용산龍山>이

환아(桓阿)월도(越都) 2군을 들고 찾아와 항복하였다.

 

<통구桶口>태자를 환아태수로 명하여,

월도에 이르러 <용산>의 딸 흘씨(紇氏)를 거두게 하였다.

 

<흘우紇于>는 백제의 우보를 지냈다.

환아(桓阿)월도(越都)는 백제의 땅인데 <용산龍山>이 고구려에 바친 것이다. 


 

10월 주나(朱那)가 반란하여,

환나(桓那)패자 <설유薛儒>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주나는 호수가 많아서 그런 연유로 또 호국(湖國)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조나(藻那)의 남쪽에 있고, 조나와 서로 혼인하는 사이여서,

조나를 되찾으려 반란한 것이었다.

 

조나는 남자는 많았으나 여자가 적었고, 큰 개가 있어 사슴만 했는데,

능히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다.


 

 

24년 을해(A.D.135)

 

정월 주나(朱那)왕자 <을음乙音>이 와서 항복하여 고추가(古芻加)에 봉하고,

<진真>공주를 시집보냈다.

 

주나의 남은 무리들을 환하(桓河) 낙랑(楽浪)인 부락으로 옮겨,

땅을 나누고 서로 혼인하며 살도록 하였다.


3월 난대(鸞臺)를 고쳐 궁(宮)으로 만들고,

<백白>을 시켜 삼대경(三代鏡)을 벽에 그리게 하였다.

 

현무도하상(玄武渡河相)이라 이름 하였다.


 

 

25년 병자(A.D.136)

 

3월 태보 <우혁羽弈>이 나이 71세로 죽었다.

 

그의 아버지 <우방>은 광명제(光明帝)의 외손으로

오랜 동안 중외대부의 자리에 있었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우혁> 또한 무술로 여러 번 큰 공을 세웠다.

 

<을포乙布>를 태보, <상온尙溫>을 좌보,

<목도루穆度婁>를 우보 겸 우산(牛山)태수 겸 중외대부로 삼았다.


 

 

26년 정축(A.D.137)

 

5월 주나(朱那)의 남은 무리가 낙랑(樂浪)사람들과 함께 패구(浿口)를 습격하였다.

 

<통구>태자가 창을 맞고 산곡(山谷)으로 들어가 죽었다.

 

따르던 신하 <우회于恢>가 장사지내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회>는 황룡왕(黃竜王) <우인>의 후예다.

 

<화직禾直>이 낙랑(楽浪)과 주나(朱那)의 남은 무리를 평정하고 들어와,

좌보로 삼았고, <달가達賈>를 우보로, <상온尙溫>을 창수공(淌水公)으로 하였다.


10월 부여(扶余)가 사슴을 바쳤다.


12월 동도(東都)에 눈이 다섯 자(尺)나 쌓였다.


 

 

 

27년 무인(A.D.138)

 

2월 고(高)황후가 춘추 47세로 죽었다.

 

후는 성덕이 있고 고상하게 처신하였으며, 왕이 공경하고 사랑하였다.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통구桶口>, 둘째는 <만륵萬勒>, 셋째는 <대덕大德>, 넷째는 <막덕莫德>, 다섯째는 <최덕最德>, 여섯째는 <효덕孝德>이고

모두 행실이 어질었다.

 

다섯 공주가 있어,

<진真>, <원元>, <모원慕元>, <양덕陽德>, <모현慕玄>이라 불렀다.

 

후가 <효덕>을 낳고, 병이 극심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이 애통(哀慟)해하며, 모산(茅山)에 장사지냈다.


3월 흘씨(紇氏)가 <우회>의 아들 <우소>를 낳고,

<폐이嬖耳>가 <통구桶口>의 딸 <용보龍宝>를 낳았다.

 

왕이 <백고伯固>를 시켜 가서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백고>는 몰래 흘씨와 상통(相通)하였다.

 

어원(御苑)의 한 길 크기의 큰 호랑이 두 마리가 병들어서 죽었다.

 

숫호랑이 여덟 마리와 암호랑이 두 마리를 낳았다.


 

 

28년 기묘(A.D.139)

 

4월에 개마(盖馬)가 한산(漢山)에서 사냥하면서 북한산(北漢山) 성터를 살펴보았는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성을 쌓는 일을 시작하라 하였다. 

 

6월 서하(西河)태수 <상잠尙岑>이 아우 <상번>과 함께 맥(貊)의 기병을 이끌고

영동도위부(岺東都尉府)의 진보를 약탈하여 돌아왔다.


9월 영동(岺東)태수 <공손현公孫玄>이 개마(盖馬)로 와서 노략질 하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목도루穆度婁>는 서하(西河)를 지키고, <상잠尙岑>은 안평(安平)을 지켰다.


 


29년 경진(A.D.140)

 

3월 상후(尙后)가 딸 <백운白雲>을 낳아,

<을포乙布>의 처 우씨(羽氏)를 유모로 하였다.


4월 <우羽>공주를 <수성遂成>에게 시집보냈다.

 

<목도루穆度婁>를 남부대사자(南部大使者)로 삼았다.


 

 

30년 신사(A.D.141)

 

4월 대방(帶方)의 <장언張彦>이 둔유(屯有)를 침입하니

도성(菟城)태수 <을어乙魚>가 쳐서 죽였고,

낙랑(楽浪)태수 <용준龍俊>이 서안평(西安平)에 쳐들어오니

안평(安平)태수 <상잠尙岑>이 쳐서 깨뜨리고,

신안(新安)거향(居鄕)까지 추격하여 그 들의 처자와 병장기를 빼앗아 돌아왔다.

 

적은 도망하여 유주(幽州)로 들어갔다.

 

좌보 <화직禾直>이 죽어, <상온尙溫>을 좌보, <목도루穆度婁>를 우보로 하였다.


 

9월 신해(辛亥)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후(尙后)가 딸 <청운靑雲>을 낳았다.

 

질양(質陽)에서 자색 노루를 사로잡아, 기르게 하였다.



10월 동해곡(東海谷)태수 <상번尙蕃>이 붉은 색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가 아홉 자이고 신장이 한 장이나 되었다.

 

어원(御苑)에 두어 기르라고 명하였다.


 

 

31년 임오(A.D.142)

 

정월 <달가達賈>를 좌보로 하였다.


3월 <수성遂成>이 질양(質陽)에서 7일 동안 사냥하며 돌아오지 않고

즐기고 노는 것이 도를 넘었다,

 

7월엔 또 기구(箕丘)에서 5일 동안 사냥하고,

왜산(倭山)에서 사냥하며 백성들의 서숙(黍菽, 기장과 콩)을 상하게 하였다.

 

그의 무리들인 관나(貫那)우태 <미유彌儒>, 환나(桓那)우태 <어질菸疾>,

비류(沸流)조의 <양신陽神> 등과 상의하다가,

 

“형황(兄皇, )은 늙어도 죽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겠소?

 

내 나이도 저물어가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소.”라 하였다.

 

모두가 “당장 폐합시다.”라고 하였다.

 

<백고伯固(121-179)>가 말하기를

 

“적자가 있는데 하필 형제간에 전위한단 말입니까?

 

공(公, 수성)은 황제의 지친이며 백관의 수장이니,

마음속엔 충효가 있어야 마땅한데, 어찌 이와 같이 황음함이 있습니까?

 

화복(禍福)은 문(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이 불러들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수성(71-165)>이 말하기를

 

“즐기고 노는 자리에서 놀지는 않고, 무얼 하려느냐?

너는 입을 다물어라.”라고 하였다.


 

9월 서도(西都)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 한 마리가 호랑이의 꼬리를 깨물어 끊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필시 황친(皇親)이 대통(大統)을 끊으려 일을 꾸미고 있음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언짢아하자,

 

<고복장高福章>이 말하기를

 

“선한 일을 하면 재앙도 바뀌어 복이 되고,

선하지 않은 짓을 하면 길한 것도 흉한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나랏일 걱정하시길 집안일처럼 하시고,

백성 아끼시길 자식같이 하시는데, 어찌 근심할 일이 있겠습니까.

 

무릇 임금의 복은 덕행에서 오는 것이지 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 하였다.

 

<고복장>은 <고루>의 증손이다.

 


 

 

32년 계미(A.D.143)

 

3월 태보 <을포乙布>가 죽어, <상온尙溫>을 태보, <달가達賈>를 좌보로 하였다.


 

 

33년 갑신(A.D.144)

 

3월 <고복장高福章>이 서하(西河)를 지켰다.

 

(?)월 송기(松奇)의 딸을 <수성遂成>에게 시집보냈다.


 

 

34년 을유(A.D.145)

 

2월 <상번>을 책성욕살로 하였다.

 

<백면白面>이 선황수도회(仙皇修道繪) 3권을 바쳤다.


 

 

35년 병술(A.D.146)

 

2월 <달가達賈>가 죽어, <목도루穆度婁>를 좌보, <고복장高福章>을 우보로 하였다.

 

<을어乙魚>가 서하(西河)를 지켰다.

 

7월 <수성遂成>과 그 일당 <미유彌儒> 등이 왜산(倭山)에서 폐립을 의논하였다.

 

의로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길

 

“전하(殿下)께서는 효순(孝順)하시어 왕을 섬긴지 오래입니다.

 

지금 나이 드셔 변심한다면 불충하게 되오니,

청컨대 안분(安分)하며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

 

수성이 말하기를

 

“직간(直諫)함이 약(薬)이로다.

 

또한 이와 같이 불가하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10월에 <고복장>이 왕에게 <수성>을 베라고 권하였으나,

 

왕께서 이르기를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일은 옳지 없소.

내가 장차 선위(禅位)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고복장>이 <수성>은 어질지 못하니,

나라를 맡기는 것은 불가하며 재앙을 남겨주게 된다고 하였다.

 

대방(帶方)이 반란하여, <을어乙魚>가 대방태수 <유호劉虎>를 공격하여 목을 베니,

나머지 무리들은 두려워 굴복하였다.


 

12월 왕이 <수성遂成>에게 선위하고,

골천(鶻川) 별궁(別宮)으로 물러났는데, 춘추 79세였다.

 

수성이 난궁(鸞宮)에서 즉위하였다.

 

상후(尙后)를 중궁황후로, 우(羽)공주를 좌궁황후로,

<송기松奇>의 딸 <황룡黃竜>을 우궁황후로 하였다.

 

<송기>를 우보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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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